<浮島丸-特設巡洋艦>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은,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경에 발생했던 사건이었고, 전쟁이 끝나고, 일본에서 귀국(歸國)을 하던 우리 동포들을 태우고 부산(釜山)으로 향하던 도중에 발생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설(說)이 분분하며, 일본정부도 그에 대한 해명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 진실과 멀어져 있는 것이 또 바로 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또, 그 중에는 본인처럼, 그런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거나 또는 그런 사건이 있었던가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2012년 8월 24일), 그 사건이 발생했던 날을 맞이해서, 다시 그 사건의 대강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하니, 지금도 그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르고 계시는 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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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사건(事件)은, 일본(日本)의 패망(敗亡) 직후였던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경에, 마이즈루(舞鶴)항구, 교토 부(京都府) 마이즈루시(舞鶴市) 사바카(佐波賀) 앞바다 약 300m 지점에서, 일본해군특설운송함(日本海軍特設運送艦) 우키시마마루(浮島丸-4,730톤, 乗員 255名)가, 3,725명의 한국인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태운 채로, 갑자기 원인불명상태로 침몰했던 사건이었다.
참고: 그에 대해서 일본 측의 주장은, 미군(美軍)이 부설(敷設)했던 2천 파운드(pound-lb)의 음향식기계수뢰(音響式機械水雷-舞鶴鎮守府 舞鶴防備隊報告)에 촉뢰(觸雷)해서 배가 침몰했고, 그때 사망했던 사람은 승원(乘員) 25명(戰死취급)과 편승(便乘)자 524명이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많았던 사람이 승선(乘船)했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래서 그에 대한 것은 후술함.
<靑森縣>
그리고 그 배는 아오모리현(靑森縣)의 오오미나토항(大湊港)에서 부산(釜山)으로 가던 중에, 마이즈루(舞鶴)에 기항(寄港)하던 중에 발생했다. 그래서 침몰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설(說)들이 난무했다지만, 그러나 또 폭침(爆枕)의 원인은 상기(上記)의 건과 동일하다고 일본정부와 미국 측이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단, 당시 일본은 종전(終戰) 직후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그래서 모든 자료들이 정확하지 않았던 점이 많았으므로, 그래서 또, 그 배에 승선(乘船)했던 사람들의 숫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을 가능성도 있으며, 공식기록에서의 피해자들의 씨명(氏名)과 사망자의 숫자 등에서도 다소 착오가 있을 가능이 높다.
<舞鶴 위치도-적색 부분>
아무튼, 1945년에 미군(美軍)은 일본의 전쟁수행능력을 상실시킬 목적으로, 기뢰(機雷)에 의한 해상봉쇄(海上封鎖), 즉 기아작전(飢餓作戰)에 들어갔다. 그래서 그때 사용되었던 기뢰(機雷)는 약 1만1천 기(基) 정도로 알려져 있으며, 주로 대형폭격기였던 B-29에 의해서 부설(敷設)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사용된 기뢰(機雷) 중에는, 배(船)의 자기(磁氣)반응과 기관(機關)의 음향(音響) 그리고 수압(水壓)의 변화 등, 여러 가지의 반응에 동작하는 기뢰(機雷)들이 혼용(混用)되었고, 거기다 소해(掃海-기뢰를 제거하는 것)를 곤란하게 할 목적으로, 일회(一回)에 반응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여러 번의 반응 후에 기폭(起爆)하는 기뢰(機雷)도 사용되었다.
그러자 일본군(日本軍)도 그런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소해(掃海)작전을 펼쳤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래서 또 그 때문에 670척(隻) 이상의 함선(艦船)들이 침몰했던 등, 해상교통이 마비되었으며, 그래서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것은 약 6600기(基)나 바다 속에 남아있었을 정도였다. 그런데다 또 당시, 마이즈루항(舞鶴港)은 일본의 굴지(屈指)의 군항(軍港)이었기 때문에, 미군(美軍)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공격목표가 되었고, 그래서 또 그곳에는 자기(磁氣)기뢰와 음향(音響)기뢰가 더 많이 부설(敷設)되어 있었다.
<舞鶴港 2007년>
그리고 또, 그 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종전(終戰) 직후에 <조선(朝鮮)사람들의 본국 이송(移送)과 함께, 가능하면 발송(發送) 준비 때에, 식량을 실을 수 있게... >라고 했던 극비(極秘)명령을 해군성(海軍省)으로부터 받았던, 수(數) 척(隻)의 수송선(輸送船)들 중 하나였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해군(海軍) 관계자의 말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신빙성은 부족하다.
그리고 또 그때, 그러니까 그 배의 출항(出港) 바로 직전에 <조선인(朝鮮人)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편승(便乘)>에 대한 문의가 오오미나토경비부(大湊警備府)로부터 있었다는데, 그러자 해군성운수본부(海軍省運輸本部)는 그것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하사관(下士官)의 일부가 그 명령에 불복했고, 그러자 또 오오미나토경비부(大湊警備府)가 강경하게 명령을 내렸던 결과, 우키시마루(浮島丸)는 3,725명(거기에 便乘者들 추가)을 태우고 8월 22일 오후 10시경에 오오미나토항(大湊港)을 출발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기뢰(機雷)와 잠수정(潛水艇)을 경계하면서 항해를 시작했는데, 그것은 또 그때가 바로 정전(停戰) 후였지만, 그날 오후 4시 20분경에 홋카이도(北海道) 앞바다에서 정체불명의 잠수정(潛水艇)에 의해서 부녀자(婦女子) 등을 태웠던 함선(艦船) 3척(隻)이 공격을 받아서 침몰했기 때문이었고(三船殉難事件-설명은 생략함), 그래서 우키시마루(浮島丸)는 그때, 일본(日本) 본토(本土)의 연안부(沿岸部)를 바짝 붙어서 부산(釜山)으로 출발하기 시작했다.
<舞鶴灣>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