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獨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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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위(經緯)>

 1. 양국(兩國)의 인식 차이
 2. 독도(獨島)의 역사(歷史) 또는 내력(來歷)에 대한 개요

 1) 한국의 인터넷 참고 자료(사이버 독도와 그 外의 자료들 참조. 단, 그냥 연대순으로 기술함)

 ※ 단, 상기까지 한국의 자료이며, 이하는 일본의 자료와 비교 병기(倂記)함.
그리고 한국의 자료(인터넷 등)은 "한"으로, 사이버 독도의 자료는 "사"로, 일본의 자료는 "일"로 표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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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1877년(明治10年) 3월 29일:「日本海内竹島外一島ヲ版圖外ト定ム」라고 하는 太政官<일본의 율령(律令)제(制)에서의 司法(사법)과 행정 그리고 立法(입법)을 맡았던 최고국가기구를 말함>의 지령(指令)이 내무(內務)성(省)에 전달됨.

 그러나 위의「日本海内竹島外一島ヲ版圖外ト定ム」라는 말을 두고 한국과 일본은 그 해석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함.
그리고 아래는 그에 관계된 내용임.

 <竹島外一島> 일본 측의 주장 계속...

 아무튼, 한국에서는 현재, 메이지(明治)정부가 그 태정관 지령(太政官指令)에 의해서 <竹島外一島>를 일본과 관계없음과 판도(版圖)外라고 했던 것으로 해서, 현재의 독도(獨島)를 한국의 영토라고 인정했던 유력한 근거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러나 또, 대한제국(大韓帝國)에서는 1908년에 고종(高宗)의 명에 의해서 편찬되었던 증보문헌비고(増補文献備考)까지, 울릉도 근방으로 묘사되었던 우산도가 그 마츠시마(松島)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때까지의 대한제국 제작 지도에는 현재의 독도(獨島)와 비정(比定)할 수 있는 섬은 전혀 기입(記入)이 되어있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일본이 시마네(島根) 현에 편입(編入)했던 1905년까지 조선인들이 그곳을 지배했던 사실도 없었다.

 그리고 또, 한국으로 귀화했던 세종대학교의 호사카유우지(保坂祐二)조교수(助敎授)는, 태정유전(太政類典)에 있는 거리의 리(里)를 해리(海里-1해리는 1852미터)로 계산하자, 울릉도와 현재의 독도는 실제거리에 가까웠다고 했고, 그래서 또 당시 일본지도에 기재되었던 것과 달랐던 점 등은, 일본이 왜곡(歪曲)적으로 해석했던 결과였다고 했다. 그리고 또 1905년 시마네 현의 독도(獨島) 편입은,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에 의한 침략의 시작이었던 것으로 위치매길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또, 그 거리들은 쿄우호(享保-일본 연호의 하나로, 1716년부터 1735년까지의 기간을 의미함) 연간(年間)에 작성되었던 오야(大谷) 가(家)의 지도에 기재되었던 것을 그대로 기술했던 것이었으며, 그래서 또 그 해리(海里)란 개념이 아직 없었던 그 전에 쓰였던 것이므로, 그래서 그 해리(海里)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또, 그 문제의 태정관 지령(太政官指令)에 대해서도 잠시 더듬어보고 넘어가면, 아래와 같다.

 太政官( 의 최고 관청. 지금의 내각에 해당)指令 1877年3月20日에 내무성(內務省)이 보낸 통달(通達-国立公文書館所蔵)

 <原文> 明治十年三月廿日. 別紙内務省伺日本海内竹嶋外一嶋地籍編纂之件右ハ元禄五年朝鮮人入嶋以来旧政府該国ト往復之末遂ニ本邦関係無之相聞候段申立候上ハ伺之趣御聞置左之通御指令相成可然哉此段相伺候也. 御指令按. 伺之趣竹島外一嶋之義本邦関係無之義ト可相心得事

 그래서 또 해석을 해보면...

 메이지10년인 1887년 3월 20일. 별지(別紙)의 내용에서, 내무(內務)성(省)이 잠시 살펴본 그 <일본해 내의 타케시마(竹島) 외(外) 1도(島) 지적(地籍)편찬(編纂)의 건(件)>, 우(右-오른쪽)는 원록(元綠)5년(1692), 조선인이 그 섬으로 들어온 이래, 구(舊)정부의 당해(當該)국(國)과 왕래를 한 결과, 최종적으로 본방(本邦-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보고가 있었던 건(件)에 대해서 신청을 하였음에, 문의(問議)의 취지(趣旨)를 검토해서, 좌(左)대로 어(御)지령(指令)된 건(件)에 대해서 살펴주시길 바랍니다. 어(御)지령(指令)안(案). 문의(問議)의 건(件), 즉 <竹島外一島>의 건(件)은 우리나라(일본)와는 관계가 없다고 해도 좋다고 생각함.

 太政類典 第二編原文.「日本海内竹島外一島ヲ版圖外ト定ム」(略)「磯竹島一ニ竹島ト称ス隠岐国ノ乾往一百二十里許ニ在リ周回凡十里許山峻嶮ニシテ平地少シ川三條アリ又瀑布アリ・・・(鬱陵島の状況)・・・次ニ一島アリ松島ト呼フ周回三十町許竹島ト同一線路ニアリ隠岐ヲ距ル八十里許樹竹稀ナリ亦魚獣ヲ産ス・・・」

 그래서 또 해석을 해보면...

 일본해(日本海)의 타케시마(竹島)와 他一島를 版図外로 결정함. ()「이소타케시마(磯竹島)를 타케시마(竹島)라고 부른다. 오키(隠岐) 국(國)의 북서(北西) 120里에 있고, 그 둘레(周回)는 대충 10里. 그리고 산은 준험(峻險)하며, 평지(平地)는 적다. 강은 3개가 있으며, 그곳엔 폭포도 있다.(이상, 울릉도의 상황) 그리고 다음으로 그 일도(一島)가 있으며, 그곳은 마츠시마(松島)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곳의 둘레는 약 30정(町) 정도이며, 타케시마(竹島)와 동일로선(同一路線)에 있는 오키(隠岐)로부터는 약 80里에 있다. 그곳에는 나무와 대나무는 드물고, 하지만 물고기와 수(獸-짐승)가 잡힌다...

 ※참고: 위 町은 거리로 60間. 그리고 1間은 약 1.82미터. ∴ 60間은 약 109.2미터 ∴ 30町은 약 3276미터.

 아무튼, 전함(戰艦) 아마기(天城)의 조사(調査) 전(前)의 상황에 관해서, 타케시마고증(竹島考證-考証)을 정리했던 키타자와마사노부(北澤正誠)는「是竹島松島一島両名、或ハ別ニ二島アルノ?紛、紜決セス-<해석> 그 竹島와 松島는 하나의 섬으로 두 개의 이름을 가졌는가, 혹은 또 다르게 두 섬이 있는 것인가 하고 의견들이 분분(紛紛)했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라고 기록했었다.

 <참고> 아래는 키타자와마사노부(北澤正誠)의 竹島考証 원문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元録十二年竹島ノ地朝鮮ノ者ト極リシ後ハ我人民又此覬覦スル者ナカリシニ百余年ノ後石州浜田ノ民八右衛門ナル者アリ 江戸在邸ノ吏ニ説テ其黙許ヲ受ケ竹嶋ニ漁業ヲ名トシ陰ニ皇国産ノ諸品ヲ積去テ外国ニ貿易セルヲ以テ忽チ法憲ニ触レ厳刑ニ処ラル 此ヨリ後又此島ノ事ヲ説ク者無シ 皇政維新ノ後明治十年ノ一月ニ及ヒ島根県士族戸田敬義竹島渡海ノ願書ヲ東京府ニ呈ス 六月ニ及ヒ難聞届旨指令アリ 此ヨリ後復タ竹島ノコトヲ言フ者無シ 其後奥州ノ人武藤一学下総ノ人斉藤七郎兵衛等浦塩斯徳ニ往来シ竹島ノ外別ニ松島ナル者アリト唱ヒ瀬脇寿人ニヨリテ渡海ノ事ヲ請フ 於
是竹島松島一島両名或ハ別ニ二島アルノ説粉粉決セス 遂ニ松島巡島ノ議起ル 甲乙丙丁ノ説ノ如シ 雖然其事中止セリ 明治十三年天城艦ノ松島ニ廻航スルニ及ヒ其地ニ至リ測量シ始テ松島ハ欝陵島ニシテ其他竹島ナル者ハ一個ノ岩石タルニ過キサルヲ知リ事始テ了然タリ 然ルトキハ今日ノ松島ハ即チ元録十二年称スル所ノ竹島ニシテ古来我版図外ノ地タルヤ知ルヘシ

 어쨌든 결국, 그 아마기(天城)의 조사 이전에는 <제설(諸說)이 운결(紜決)-그러나 또 다른 해석으로, 諸說紜, 決セス로 보는 견해도 있음>하지 않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하여 1880년, 아마기(天城)의 조사결과 <마츠시마(松島)Dagelet(다쥬레-1787년에 프랑스 군함학교의 Lepaute Dagelet교수에 의해 발견되었기 때문에 울릉도는 Dagelet이라고 명명되었다고 함)島>가 조선의 울릉도로 알려져 있으며, 타케시마(竹島)는 그 울릉도의 북동(北東)부(部)에 존재하는 죽서(竹嶼-Boussole Rock)라고 보고가 되었다. 그러자 또 키타자와마사노부(北澤正誠)는 그 타케시마(竹島)라고도, 마츠시마(竹島)라고도 불리고 있던 섬이 조선의 울릉도라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의 내무(內務)성(省)과 외무성(外務省)의 견해가 반영된 것이었다.<下略. 나머지는 차후, 기회가 있으면 다시 소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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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1881년. 척민정책. 일본 어민의 울릉도 출어에 엄중 항의.

 ※ 1) 고종18년. 울릉도 개척령 반포(척민정책). 일본 어민의 울릉도 근해 출어에 대한 일본정부에게 엄중 항의. 2) 이때부터 독도의 명칭이 나타났다. 울릉도 개척령을 발표하여 척민정책을 취하였다. 일본 어민의 울릉도 침입에 관해 조선정부가 일본정부에 엄중 항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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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1882년. 공도정책의 철회.

 ※ 칙령41호. 이규원은 1882년에 울릉도를 검찰하고 그 결과를 국왕에게 복명함. 그 요지는, 그곳의 개척이 가능하다는 것과 현재(당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140명이었다고 하며, 그 중에서 전라도 사람들이 82%였다고 함). 그러자 조선정부에서는 울릉도의 개척을 결정하였고, 곧 그 준비에 착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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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1883년. 4월. 각 도로부터 모집한 16호 54명을 울릉도에 입거(入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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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1895년. 1월. 약 200년간 계속되어온 수토제도를 폐지.

 ※ 수토(搜討)는 수탐(搜探)으로 표현할 수 있으며, 그 뜻은 또 무엇을 알아내거나 찾기 위하여 조사하거나 엿보는 것을 말하므로, 그 제도 또는 정책(政策)은, 그냥 두고 지켜보는 것으로 해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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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1898년. 5월(광무 2년). 울릉도에 도감을 두도록 지방관제를 개칭.

 (사) 1898년(4231,戊戌) 대한제국 광무2년.『高宗實錄』 권37,『官報』제962호 光武 2年5月30日. 5월 30일 칙령 제12호(5월 26일)로 울릉도감(鬱陵島監) 설치를 반포함. 島監은 本土 人으로 임명하고, 판임관(判任官) 대우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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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1899년(4232,己亥) 대한제국 광무3년.『高宗實錄』권39,『官報』제1448호 光武 3年12月19日. 12월 19일, 일본인의 도벌과 횡포가 계속되므로, 내부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의 주청으로 울릉도(鬱陵島)에 시찰위원(視察委員)을 파견하기로 함. 시찰위원에는 우용정(禹用鼎)이 임명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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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1900년 10월 15일. 칙령 제41호 공포.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하고, 군청의 관할구역에 석도(독도)를 포함시킴.

 (사) 1900년(4233,庚子) 대한제국 광무4년.『鬱島記』5월 31일, 울릉도시찰위원 우용정과 부산 주재 일본영사관보 적총정보(釜山駐在日本領事館補 赤塚正補) 등, 한ㆍ일 양국의 조사단이 울릉도에 도착하여, 6월 5일까지 일본인의 비행과 재목 도벌 및 세금징수 여부에 대해서 조사하고, 島內의 實情과 島勢를 파악함. 6월 15일, 우용정이 돌아와 보고서(『鬱島記』)를 제출하고, 일본인의 조속한 철수와 울릉도 官制의 개편을 건의함. 10월 27일 칙령 제41호(10월 25일)를 반포하여 울릉도(鬱陵島)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바꿈으로써, 강원도의 27번째 郡으로 지방관제(地方官制)에 편입됨. 칙령에 의하면,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台霞洞)으로 하고, 울도 군수(鬱島郡守)의 관할구역은 鬱陵 全島와 竹島(댓섬), 石島(독도)로 함.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였으므로, 현임도감 배계주(裵季周)가 초대군수가 되었으며, 울릉군을 南面과 北面으로 나눔에 따라, 독도는 울릉군 남면에 속하게 됨. *참고문헌 禹用鼎의 『鬱島記』 『高宗實錄』 권40, 『官報』 제1716호 光武 4年 10月 27日.

 (일) 1900년(明治33年)10월 25일: 대한제국(大韓帝国) 칙령(勅令)41호로, 울릉도를 강원도의 군(郡)으로 승격(昇格)함. 동시에 석도(石島-한국에서는 석도를 독도로 해석하고 있었다)도 한국 영(領)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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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1903년. 심홍택이 울릉도 2대 군수로 취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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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1904년 8월. 한일협정서 성립.

 (사) 1904년(4237,甲辰) 대한제국 광무8년.『官報』號外 光武8年3月8日. 2월 10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2월 23일 제1차 韓日議定書 강제조인. 이로써 일본은 러일전쟁을 위해 한국영토를 임의로 점령, 사용할 수 있게 됨. 6월 1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함대가 남하하여 조선해협 동수도(朝鮮海峽 東水道 현재의 對馬해협)에서 일본육군 수송선 2척을 격침.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 강제조인. 일본이 대한제국의 정부 내에 재정과 외교고문을 설치함. 9월 2일, 러시아함대의 감시를 위해 울릉도에 설치한 망루가 업무를 개시함. 9월 24일, 독도에 망루설치가 가능한지 조사하기 위해서 일본군함 니이타카(新高)가 울릉도를 출발. 新高 號는 독도에 대해 “리앙꼬루도岩은 韓人은 이를 獨島라고 書하고 本邦 漁夫들은 리앙꼬島라고 호칭”하며, 망루설치가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작성함. 9월 29일, 일본 어민 나카이요우자부로우(中井養三郞)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하고, 자신에게 빌려 달라”는 문서를 외무성 내무성 농상무성에 제출함. 11월 20일 독도가 한일 간을 연결하는 해저전선의 중계지로 電信所 설치에 적합한지를 조사하기 위해서 일본군함 쓰시마(對馬)가 독도에 도착함. *참고문헌 『官報』 號外 光武 8年 3月 8日『極秘明治三十七八年海戰史』『軍艦新高戰時日誌』『島根縣誌』(1923)『隱岐島誌』(1933), 『軍艦對馬戰時日誌』

 (일) 1904년(明治37年) 2월 6일:러일전쟁 발발(勃發).

 ※ 참고: 러일전쟁에 대해서는 본 내용과 크게 관계가 없고, 이미 다 알려진 이야기이므로, 백과사전의 내용을 인용함.

 배경: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국을 독점하려던 일본의 계획은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에 의해 일시적으로 저지되었다. 일본은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민비를 학살했으나, 반일 의병투쟁을 야기함으로써 더욱 수세에 몰렸다. 또한 1896년 2월 친러파에 의해 아관파천이 단행되고, 친러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일본이 여전히 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청일전쟁 후 조선의 대외무역에서 일본은 수입의 60~70%, 수출의 80%를 차지함으로써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권(利權)면에서도 열강에 분할되는 이권을 최혜국대우 조항에 의해 획득하거나 위협함으로써 확보해 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조선에 대한 경제적 지위를 확실하게 굳히면서 이를 군사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대(對) 러시아 전쟁을 상정한 군비확장에 주력했다.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받은 전쟁배상금 3억 6,000만 엔 중 2억 2,000만 엔을 군비확장에 사용하고, 1896~1903년 예산세출의 평균 5할을 군비로 충당했다. 그러나 일본은 독자적인 힘으로 러시아와 싸워 승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아시아에 대한 영국·미국의 이권을 지키는 헌병 역할을 스스로 떠맡고 나섰다. 이로써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외교적·군사적 지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러일전쟁의 막대한 전비 17억 엔 중에서 8억 엔을 영국과 미국에서의 외채모집으로 보충했다. 그리고 또한 러시아도 삼국간섭 후 1896년 러청은행을 설립하고, 북만주를 횡단하여 치타와 블라디보스토크를 단거리로 잇는 동청철도(東淸鐵道)의 부설권을 획득했다. 또 1898년 뤼순[旅順]·다롄[大連]을 조차하고 여기에 대규모 해군 근거지를 계획했으며, 조선에 대해서도 1897년 재정고문 알렉세예프와 군사고문을 파견하고, 1898년에는 한러은행 등을 설립했다. 그러나 한국 내에서 일어난 이권반대운동과 영·일 양국의 방해로, 알렉세예프는 취임하지 못하고 곧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한러은행도 폐쇄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조선으로부터 일보 후퇴하여 만주에 침략의 발판을 굳혔다. 1900년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제국주의 열강과 공동 출병한 러시아군은 만주를 점령, 조선을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삼으려 했다. 일본은 1902년 1월 영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대응했으며, 러시아도 양보의 태도를 보여 4월 만주철병을 내용으로 하는 만주환부조약(滿州還付條約)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의해 1902년 10월 제1차 철병을 단행했으나, 이후 러시아의 적극적인 대만주정책으로의 선회로 1903년 4월로 예정된 제2차 철병을 거부하는 대신에 오히려 만주에 군대를 증파했다. 이후 러시아는 봉황성·안동성 일대를 그 지배하에 두고 뤼순을 요새화했으며, 같은 해 7월 동청철도를 완성했다. 또 8월 아무르 지역과 관동지역을 동아시아 총독구로 하는 이른바 동아시아 총독부의 설립을 발표했으며, 1903년 4월 압록강 하류 용암포를 점령하고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조차를 요구했다. 이에 일본은 만한교환(滿韓交換)의 원칙으로 수차례 교섭을 시도했으나, 더이상 협상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결의했다. 일본은 1904년 2월 4일 대(對)러 교섭 단절과 아울러 개전을 결정했다. 2월 8일 뤼순항을 기습 공격하여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파괴하고, 9일 인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다음 10일 선전포고를 했다.

 과정: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정부는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하고 열국에게 통고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2월 9일 서울에 진주했다. 2월 23일 일본은 공수동맹의 성격을 띤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하고, 병력과 군수품의 수송을 위해 경부·경의 철도 건설을 서둘렀으며, 4월 1일에는 한국의 통신사업을 강점했다. 5월 18일 대한제국정부로 하여금 러시아와 체결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부여했던 모든 이권의 폐기 혹은 취소를 공포하게 했다. 일본군은 5월초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九連城)과 봉황성을 함락시킨 다음 랴오양[遼陽]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8월 28일부터 일본군 13만여 명과 러시아군 22만 명 간에 대격전이 벌어졌으나, 9월 4일 일본군은 펑톈[奉天]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여세를 몰아 1905년 1월초 뤼순항을 함락시키자, 러시아군은 대세를 만회하고자 발틱 함대를 파견했으나, 5월 27일 대한해협에서 일본해군과의 격전에서 참패를 당함으로써 전세를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제1차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여 전쟁을 더이상 지속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권고를 수락하여 일본과 포츠머드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의의: 러일전쟁은 동아시아에서 식민지분할을 위한 열강간의 세력각축의 결과였으며, 이는 한국 및 만주를 둘러싼 양제국주의 국가의 무력충돌에 그치지 않고 일본의 배후에는 영국·미국의 자본이, 러시아의 배경에는 프랑스의 자본이 각각 지원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계기로 한국은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 내지 묵인하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일-1904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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