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獨島)

 독도(獨島) 즉, 일본(日本)에서 부르는 이름 타케시마(竹島)는, 우리나라의 동해(東海), 일본(日本)으로서는 일본해(日本海)의 남서부(南西部-일본의 입장에서)에 있는 섬으로, 북위(北緯) 37도(度)15분(分), 동경(東經) 131도(度) 52분(分)에 위치해 있는 섬으로 그들은 보고 있다.(더욱 정확하게는 북위 37도 14분 30초, 동경 131도 52분 0초라고 함)

 참고: 일찍이 일본정부 외무성(外務省)에서는 북위(北緯) 37도(度) 9분(分), 동경(東經) 131도(度) 55분(分)으로 표시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2005년 7월에 마이니치(每日) 신문에 의해서 그 오류가 지적되었고, 그리하여 바르게 정정(訂正)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일본의 주소(住所)는 시마네(島根) 현(縣) 오키(隱岐) 군(郡) 오키(隱岐)의 시마쵸우(島町) 타케시마(竹島) 국유(國有=官有) 무번지(無番地)라고 하며, 1905년(明治38年) 1월 28일에 일본정부는 그 독도(獨島)를 자신들의 영토로 할 것을(隱岐 所管) 각의(閣議=內閣會議) 결정(決定)했다.

 그러자 1952년(昭和27年) 1월 18일,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그 독도(獨島)를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선언(宣言)했으며(일본의 입장에서는 일방적), 그와 동시에 근해(近海)를 포함했던 <이승만 라인>을 설정했다.

 그리하여 그 후, 1965년(昭和40年) 6월 22일에 있었던 <한일기본조약(韓日基本條約)> 체결(締結) 시까지 한국은 일본인들이 그 <라인>을 넘었다는 이유로, 일본어선 328척(隻)을 나포했으며, 더불어서 일본인 44명이 살상(殺傷) 당했고, 3929명이 억류(抑留)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 해상보안청순시선(海上保安廳巡視船)에 총격을 가했던 사건은 15건에 달했다고 하며, 그로인해서 또 16척(隻)의 배가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금도 한국(韓國)은 무력으로 그 섬을 점유(占有)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日本)과의 사이에서 영토문제가 발생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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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하는, 일본의 주장임

 독도(獨島)는 일본 영(日本領) 오키(隱岐)와는 약 157km, 그리고 한국의 울릉도(鬱陵島)에서는 약 87km의 거리에 있다.

 
참고: 일본 외무성(外務省)의 팸플릿(pamphlet) <다케시마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의 포인트(竹島 竹島問題を理解するための10のポイント-2008年2月 發行)>에서는 오키(隱岐)와 독도(獨島)와의 거리를 약 157km, 그리고 울릉도(鬱陵島)와는 약 92km라고 기재(記載)했는데, 그것은 오키(隱岐)와의 거리에서는 양도(兩島)에서 제일로 가까운 곳을, 그리고 울릉도(鬱陵島)에서는 중심(島中心) 사이의 거리를 취했던 결과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곳에는 동도(東島=女島)와 서도(西島=男島)라고 불리는 두 개의 섬이 있으며, 그 주변에 총계(總計) 37개의 암초(巖礁)가 있고, 그 총면적은 약 0.23㎢로, (일본의 입장에서) 동경(東京)에 있는 히비야(日比谷) 공원의 1.4배정도이다.


<女島(左)와 男島(右)>

 

  아무튼 또, 1954년 7월에 한국의 내무부(內務部)와 일본이 맺었던 평화조약에서, 한국정부에 의한 독도(獨島)영유권의 요구가 각하(却下)되었음에도 (상세한 것은 아래의 러스크 書簡 참조), 그 후에 한국 측은 그 독도(獨島)에 주유(駐留)부대를 상륙시켰고, 그 후로 지금까지 점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또 그 때문에, 현재까지도 일본정부의 시정권(施政權)은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참고: 러스크 서간(書簡) 계속...

 

 


 ※ David Dean Rusk(1909년 2월 9일-1994년 12월 20일)는 미국의 관료(官僚)였으며, 케네디와 존슨(Johnson) 정권에서 국무장관(1961년-1969년)을 지냈던 사람이었고, 그 재임기간은 Cordell Hull(1871년 10월 2일-1955년 7월23일) 다음으로 역대(歷代) 2위로 길었다.

 러스크 서간(書簡)은 <일본과의 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역시, 상세한 것은 생략함>을 기초(起草)했을 때, 당시의 대한민국정부와 미국정부 간에 일본의 영토와 한국정부가 전후(戰後)에 향수(享受)할 이익(利益)에 관한 교섭이 이루어졌었고, 그 최종적인 결정을 당시의 미(美) 국무(國務)차관보(次官補)였던 위 '러스크'가 한국정부에 1951년 8월 10일 통달(通達)했던 문서(文書)를 말한다. 그리고 현재, 일본과 한국의 독도(獨島)문제에 있어서, 그것은 일본 측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사료(史料)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일본 측의 입장에서)



<草案이며, 문제의 Takeshima란 글씨가 보인다>

 <요지(要旨)>

 당시, 한국정부가 미국 측에 요구했던 것은 크게 다음과 같은 3가지였다고 한다.

 1. 독도(獨島)와 파랑도(波浪島)를 일본의 포기영토에 포함시키고, 그것을 일본과의 평화조약에 의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1945년 8월 9일(일본에 의한 포츠담선언 受諾) 시점에서 포기하게 해줄 것.
  

 


 파랑도(波浪島)

 포츠담선언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므로 설명을 생략하며, 파랑도(波浪島)는 현재 일본 측에서는 가공(架空)의 섬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 아래의 이어도(離於島)로 보고 있는 섬이다. 그리고 또 그 이어도(離於島)는 파랑도(波浪島) 혹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쑤옌자오(중국어: 蘇岩礁)라고 불리고 있는 암초이며, 그리고 또 서구권에서는 소코트라암초(영어: Socotra Rock)라고 부르고 있고, 또 그 암초는 32°07′22.63″N 125°10′56.81″E/32.1229528°N 125.1824472°E/32.1229528;125.1824472에 위치해 있으며, 마라도에서 남서쪽으로 152킬로미터 떨어진 동중국해(東中國海)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퉁타오에서는 245킬로미터, 일본 나가사키 현 고토 시에 있는 도리시마 섬에서는 276킬로미터 해상에 위치한다. 그리고 또 그 암초는 바다의 평균 해수면에서 4.6미터 잠겨 있기 때문에, 파도가 칠 때만 종종 모습이 드러낸다고 하는데, 아무튼 또 그 섬은 <러스크 서간(書簡)>에 기재되었었고, 그것은 또 <샌프란시스코강화회>의 개최 당시, 한국의 주미(駐美)대사였던 양유찬(梁裕燦=1897년-1975년 10월 20일. 의사, 외교관)이 외교문서로서, 1951년에 미국정부에 제출했었던 <美國草案=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대한 <한국 측 의견서>로, 일본이 포기하는 섬의 하나로 그 섬을 기재했던 것이 그 연유가 되었다.
 


<미국초안(美國草案=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대한 한국 측 의견서>


<딘 애치슨>

 
 그러자 또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1893년 4월 11일-1971년 10월 12일. 미국의 변호사, 정치가, 트루만 정권 하에서 국무장관을 역임)에게 독도(獨島)와 함께 그 섬의 위치와 면적 등을 문의했던 바, 그러자 그는 <(파랑도는) 대체적으로 울릉도 가까이에 있는 소도(小島)>라고 답변을 했고(이하는 일본 측의 주장) 그러자 또 그 후에 한국정부에 의한 수색(搜索)이 있었지만, 그러나 현재까지도 그 섬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현재까지도 그 섬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있으며, 그리하여 또 현재는 동(東)지나해의 소암초(蘇巖礁)가 그 섬이라고 말하고 있는 상황이다.



 2. 재한(在韓) 일본의 자산(資産)을 한국정부 및 미군정청(美軍政廳)에 이관(移管)할 것.
 3. 맥아더라인의 계속(繼續)을 일본과의 평화조약에 포함시켜줄 것.

  

 
 맥아더라인(the MacArthur line)
 

 맥아더라인(the MacArthur line)이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본을 점령, 통치했던 연합국군최고사령관총사령부(GHQ)의 문서(文書) SCAPIN(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Instruction Note)第1033호 <일본의 어업(漁業) 및 포경업(捕鯨業)에 인가(認可)된 구역(區域)에 관한 각서(覺書)>에 의해서 결정되었던 일본어업의 활동가능영역을 말함.
 


<맥아더와 히로히토-1945년 9월 27일.

이 사진을 보고 일본국민들은 자신들이 신으로 믿고 있었던 천황의 초라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개요(槪要)>

 맥아더라인은, 당시 일본을 점령, 통치하고 있었던 GHQ의 더글러스맥아더(Douglas MacArthur) 최고사령관(最高司令官)의 이름으로 발표되었고, SCAPIN에 의해서 결정되었기 때문에, 그 명칭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었으며, 그때 한반도의 남부(南部-남한)를 군정통치하고 있었던 미군(美軍)군정(軍政)은 그 라인을 무원칙(無原則)하게 그었을 뿐(arbitrary line), 확고한 근거에 의해서 정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일본은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 선은 GHQ에 의한 통치(統治)상의 편의(便宜)에 의한 것이었을 뿐, 최종적인 조치(措置)도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이승만라인>이 설정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래는 그 선(線)의 변천에 대한 내력의 소개이다.
 

 


<참고도>

 1) 1945年:맥아더라인 以前

 1945年(昭和20年)

 8月15日 - 종전(終戰)
 9月2日 - GHQ의 지시가 내려지지 않는 한, 어선을 포함한 선박 일체의 이동을 금지함.
 9月14日 - 목조선(木造船)만은 일본의 연안 12海里 이내에서의 조업을 허가함.

 2) 제1차 허가(第一次許可)

 1945年 9月27日 - 일본의 어획(漁獲)수역(水域)을 지정함.

 北緯45度 東經145度에서부터 北緯45度30分 東經145度, 하보마이(歯舞)諸島를 避해서 東經150度, 北緯26度 東經150度, 北緯26度 東經123度, 北緯32度 東經125度, 쓰시마(対馬)를 경유해서 北緯40度 東經135度, 北緯45度 東經140度을 잇는 선내(線內)로 정함.

 3) 1945年:오가사하라(小笠原) 포경허가(捕鯨許可)

 1945年 11月30日 - 小笠原諸島 주변에서의 포경을 허가함.
 1946年 3月22日 - 일본정부의 행정구역을 쓰시마(対馬)와 타네가시마(種子島) 그리고 이즈제도(伊豆諸島)까지로 한정함<난세이제도(南西諸島)와 小笠原諸島의 분리(分離)>

 4) 1949年 제2차 허가

 1949年 9月21日 - 일본의 어획역(漁獲域)을 동(東)으로 확장함.

 北緯40度 東經165度, 北緯40度 東經180度, 北緯24度 東經180度, 北緯24度 東經165度의 선내(線內).

 5) 1950年 제3차 허가

 1950年 5月12日 - 일본의 어획수역을 남(南)으로 확대함.

 北緯24度 東經123度, 적도(赤道)의 東經135度, 赤道의 東經180度, 北緯24度 東經180度를 잇는 선내(線內).

 <맥아더라인 폐지과정>

 1) 1951年

 7月19日 - 한국이 미국에게 일본과의 평화조약에서 맥아더라인의 계속을 요구함.
 8月10日 - 미국이 러스크 서간으로 한국에 회답했으며, 그 내용은 평화조약의 발효 후에는 맥아더라인의 효력이 상실됨을 전함.
 9月8日 - 일본과의 평화조약 서명이 이루어짐(조약의 발효는 1952年4月28日부터).

 2) 1952年

 1月18日 - 한국이 일방적인 이승만라인을 설정함.
 4月25日 - 맥아더라인 폐지됨.


 

 


 

 하지만 미국정부는 그 서간(書簡) 중에 <재한(在韓)일본자본>에 관해서는 미군정청(美軍政廳)의 처리를 인정하는 기술(記述)의 수정을 인정하였으나, 독도(獨島)의 요구와 맥아더라인의 계속(繼續)에 대한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또 특히, 그 독도(獨島)에 관해서는 <1905년 이후 일본의 관할(島根県의 管轄)하에 있었고, 한국의 영토권주장은 과거의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취지의 회답을 냈던바 있었다. 그리고 아래는 그 내용임
 "As regards the islands of Dokdo, otherwise known as Takeshima or Liancourt Rocks never treated as part of Korea and, since about 1905, has been under the jurisdiction of the Oki Islands Branch Office of Shimane Prefecture of Japan. The Island does not appear ever before to have been claimed by Korea."
 (러스크 書簡 2페이지 目2行目-7行目)

 그리고 또, 시대(時代) 배경과 양(兩) 정부 간의 교섭에 관해서도 말을 해보면 아래와 같다.

 1949년 12월 29일-연합국이 초안(草案-Draft Treaty of Peace with Japan)을 작성. 그 중에 독도(獨島)를 일본의 영토에 포함시킨다는 취지의 논의가 있었음(정확한 것은 아니므로, 있었던 것으로 봄-ChapterII Territorial Clauses, Article 3)

 ※그리고 이하의 초안(草案)은 일본의 영토를 규정하는 방식에서, 일본이 포기하는 영토를 규정하는 방식으로 변경.

 1950년 6월 25일-한국전쟁 발발(勃發)

 1951년 7월 19일 외교문서(外交文書)
 1) 초안(草案)에 대해서 양유찬(梁裕燦) 한국주미대사에 의한 미국정부에 요망서(要望書)가 제출됨.



<양유찬의 요망서>


  2) 한국은 그 요망서의 내용에 상기 요지(要旨)의 기술(記述) 3가지를 요구했으며, 그때의 미국 대사와의 회담에서는 <그러한 섬들이 한일병합(韓日倂合) 전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영토였다면, 한국의 영토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라는 취지의 답변을 받았다.

 1951년 8월 2일(外交文書)-다시 한 번 한국대사에 의해서 요망서가 미국정부에 제시(提示)되었다.

 1951년 8월 10일(外交文書)-당시의 미국국무차관보 러스크에 의해서 당해(當該) 서간(書簡)이 미국정부의 최종적인 회답이라면서 한국정부에 제시되었다.

 1951년 9월 8일-일본과의 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조인(調印)되었다.

 1952년 1월 18일-한국 측에서 이승만(李承晩)라인을 선언함.


 

 이승만 라인

 

 

 이승만라인은 1952년(昭和27年) 1월 18일에, 한국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李承晩)의 해양주권선언(海洋主權宣言)에 기초해서 한국정부가 일방적으로 설정했던 <군사경계선(軍事境界線)>이었다고 일본은 주장한다. 그리고 그 <군사경계선>은 당시, 한일(韓日)교섭을 진행하고 있었던 일본의 오오히라마사요시<大平正芳=1910年(明治43年)3月12日-1980年(昭和55年)6月12日. 일본의 대장(大藏)관료(官僚)였으며, 정치가였고, 위계(位階)는 정이위(正二位) 훈등(勳等)은 대훈위(大勳位)> 외상(外相)이 쓴 자신의 글 <나의 이력서> 중에 표현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그것을 평화선(平和線)이라고 선언했다. 

 


<이승만-다음 기회에 소개함>


<오오히라>

 

 <브리태니커 인용 내용>

 한일 양국의 평화 유지를 근본 취지로 삼고 있다고 하여 평화선 또는 리 라인'(Rhee Line)이라고도 한다. 한반도에 인접한 해붕(海棚) 및 해양의 광물과 수자원을 보호·이용하기 위하여 한국이 주권을 보지(保持)·행사한다고 선언된 이 수역은 해안으로부터 평균 96㎞(약 53해리)에 이른다. 이에 따라 이 수역 내에서의 수산업과 어업은 한국정부의 관할·감독하에 놓이게 되었다. 아울러 이 선은 일종의 방위수역의 성격도 겸하는 것이었다. 이 선을 선언하게 된 배경으로는 한일간의 어업 격차가 큰 실정에서 일본과의 어업분쟁을 예방하고 어업 및 대륙붕 자원을 보호하는 것이 시급했으며, 세계 각국의 영해 확장 및 인접 해양의 주권적 전관화 추세 속에서 기존 맥아더 라인의 철폐에 적극 대처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선은 일본을 비롯해 미국·영국·타이완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되어오다가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에 의해 철폐, '어업에 관한 수역'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아래는 일본의 주장이다.

 당시, 해양자원의 보호를 위해서, 한국 부근의 공해(公海)에서의 어업을, 한국국적 이외의 어선은 조업을 금지했던 것이었다. 그러자 그 후, 그것을 위반했던 어선들(주로 일본어선들)은 한국 측에 의해서 임검(臨檢), 나포(拿捕), 접수(接收)되었으며, 심지어는 총격에 의한 사망자까지
발생했다.<다이이치다이호우마루(第一大邦丸) 사건 등>

 ※ 제일대방환사건(第一大邦丸事件)은 1952년 2월 4일에 공해상<제주도 앞바다 약 20마일쯤의 농림어구 제284 어구(農林漁區第284漁區)라고 생각되었던 해역>에서 조업 중이었던 후쿠오카(福岡) 어선 <第一大邦丸(57톤)> 및 <第二大邦丸(57톤)>이 한국의 어선 <제1창운(昌運) 호(號-약 55톤)> 및 <第二昌運 호(號-약 55톤)>를 이용했던 한국해군에 의해서 총격, 나포되었고, 그러자 그 과정에서 第一大邦丸의 어로장(漁撈場)이었던 세토시게지로우(瀬戸重次郎-34세)가 피탄(被彈), 사망했던 사건이었다.(下略)

 그러자 일본 측은 <국제법상의 관례(慣例)를 무시했던 조치>였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또 그 후에도 그 라인은 1965년의 <한일어업협정>의 성립에 의해서 폐지될 때까지, 일본인 억류자 3929명, 나포된 어선 수 328척, 사상자 44명을 내면서 13년간 존속했고, 그 억류자들은 또, 6첩(疊-다다미 여섯 장)정도의 방에 약 30명 정도가 떠밀어 넣어졌으며, 그로서 그들은 아주 열악한 상황에서 억류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그 기간도 수년간에 달했었다.

 그러자 또 일본정부에서는 그 <이승만라인>의 문제해결에 즈음에서 한국정부의 요구에 응했고, 그리하여 일본정부에서는 그 일본인 억류자들의 반환과 교환을 위해서 당시, 상습적인 범죄자 또는 중대(重大)범죄를 저지르고 일본에서 수감 중이던 재일(在日)한국인들과 조선인(朝鮮人)들 472명을 수용소에서 방면(放免)해서 재류(在留)특별허가를 내주었다. 그러자 또 한국정부에서는 당시, 일본정부가 적발했던 한국인 밀입국자들의 강제송환을 거부했던 것과 함께, 일본 국내에 풀어줄 것을 요구했었다.(중복되는 부분이 많으므로 하략함)

 

<나포된 일본인들>

  

 1952년 4월 28일-일본과의 평화조약이 발효됨

 1952년 11월 27일-주한(駐韓) 미국대사관이 <독도(獨島)의 지위(地位)에 관하여 미국의 이해(理解)는 러스크 서간(書簡)의 내용과 같음>이라는 재차(再次)의 통첩(通牒)을 한국의 외교부(外務部) 앞으로 보냄.



<1 페이지-그리고 아래는 3 페이지까지의 내용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 바랍니다>

 NA - Mr. McClurkin

 NA - Mrs. Dunning


 Possible Methods of Resolving Liancourt Rocks Dispute Between Japan and the Republic of Korea.


 During the past six months the question of whether Japan or the Republic of Korea has sovereignty over the Liancourt Rocks has been raised on three separate occasions. According to the Japanese version, in the latest incident on July 12, 1953, a Japanese vessel was patrolling the waters adjacent to the Liancourt Rocks when it was fired upon by Korean shore-based small arms and machine guns. The Japanese Foreign Office verbally protested the incident to the ROK Mission in Tokyo on July 13, demanding the immediate withdrawal of Koreans from the Rocks. on July 14 Foreign Minister Okazaki at a Cabinet meeting stated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intends to explore every possibility of settling the dispute amicably by direct negotiation with the Republic of Korea. However, Okazaki also stated that it was conceivable that the question might later be submitted to the United States or the United Kingdom for mediation. Some Japanese newspapers have also indicated that as alternatives the question might be submitted either to the Hague Tribunal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or to the United Nations; Jiji Shimpo has taken the somewhat extreme view of suggesting that the Japanese Coastal Security Force be despatched to the Rock.

With regard to the question of who has sovereignty over the Liancourt Rock (which are also known in Japanese as Takeshima, and in Korean as Dokdo), it may be of interest to recall that the United States position, contained in a note to the Republic of Korea's Ambassador date August 10, 1951 reads in part:

"....As regards the island of Dokdo, otherwise known as Takeshima or Liancourt Rocks, this normally uninhabited rock formation was according to our information never treated as part of Korea and, since about 1905, has been under the jurisdiction of the Oki Islands Branch Office of Shimane Prefecture of Japan. The island does not appear ever before to have been claimed by Korea......"
 

 (This position has never been formally communicated to the Japanese Government but might well come to light were this dispute ever submitted to mediation, conciliation, arbitration or judicial settlement.)

Since sending the August 10, 1951 note to the ROK Government,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has sent only one additional communication on the subject. This was done in response to the ROK protest of the alleged bombing of Dokdo Island by a United States military plane. The United States note of December 4, 1952 states:

 "The Embassy has taken note of the statement contained in the Ministry's Note that 'Dokdo Island (Liancourt Rocks) .....is a part of the territory of the Republic of Korea.' The United States Government's understanding of the territorial status of this island was stated in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Dean Rusk’s note to the Korean Ambassador in Washington dated August 10,1951."

At the same time this note was sent it was hoped that this more reiteration of our previously expressed views would withdraw us from the dispute and might discourage the Republic of Korea from "intruding a gratuitous issue in the already difficult Japan-Korean negotiations." Apparently our efforts to date have not had the desired effect.

 Should the present efforts of the Japanese Government to solve the dispute on an amicable basio by direct negotiation with the Republic of Korea fail, there are several courses of action open to the Japanese Government.

 a) Request for United States Mediation - In the event the Japanese Government were to request the United States to act as mediator, not only would the concurrence of the ROK have to be obtained, but the United States would be placed in the embarrassing position (notwithstanding the facts in the case) of seeming to choose between Japan or Korea. As usual, the role of the mediator is not a happy one. In view of this and of United states requirements and obligations to both these countries, it is believed preferable for the United States to extricate itself from the dispute to the greatest extent possible.

 b) Submission to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s - Notwithstanding the fact that neither Japan nor the Republic of Korea is a member of the United Nations. both may be parties in a case before the ICJ provided that both agree to comply with the conditions laid down by the Security Council. At present these conditions are that both states would deposit with the Rogistrar of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a declaration accepting the Court's jurisdiction in accordance with the UN Charter and the Statute and Rules of the Court, undertaking to a amply in good faith with the Court's decision and accepting the obligations of a Member of the United Nations under Article 94 of the Charter.The difficulty with this plan would seem to be whether Japan could obtain the concurrence of the Republic of Korea to join with Japan in presenting the dispute to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ce and if this were done, whother the ROK would abide by decision of the ICJ if it were negative.
 (c Submission to the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or Security Council - Japan would have the right unilaterally to bring the Liancourt Rocks dispute to the United Nations under Article 35 section 2 of the United Nations Chrter, which states:

 "A state which is not a Member of the United Nations may bring to the attention of the Security Council or of the General Assembly any dispute, to which it is a party if it accepts in advance, for the purposes of the dispute, the obligations of pacific settlement provided in the present Chapter.",

if it were willing to state, as required by Article 33 of the UN Charter, that the Liancourt Rocks dispute was one "likely to endanger the maintenance of international peace and security." It is indeterminable at this time whether Japan would be willing to go that far. It is also unlikely that the United States and/or the other Members of the anti-Soviet blic in the United Nations would want to add this grist to the Soviet propaganda mill.

 Recommendation

 1. NA/J recommends that the Department of State take no action at this time inasmuch as Foreign Minister Okazaki has has stated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will try to settle the dispute with the ROK Government by direct negotiation.

 2. However, if the Japanese Government requests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to act as a mediator in this dispute, NA/.J recommends that: a) the United States should refuse; b) the United States should suggest that the matter might appropriately be referred to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The United States could inform the Japanese Government that this procedure might be preferable to submitting it to the United Nations for the reasons stated above.

 3. If the Japanese Government requests the legal opinion of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on this question, NA/J recommends that the United States should make available to the Japanese Government the United States position on the Liancourt Rocks as stated in the Rusk note of August 10, 1951.

 Concurrences

 NA/K conc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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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8월 15일

 1. 한국전쟁을 지휘했던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1892년 3월 19일~1992년 9월 23일. 미국의 군인. 제2차 세계대전 및 한국전쟁 중 미국육군사령관을 지냈다)가 당시, 제34대 미국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너무 유명하므로, 소개는 생략함)의 특명(特命)대사(大使)로서 일본과 대만 그리고 한국과 필리핀을 방문해서, 기밀문서(機密文書)로 반 프리트 특명보고서(report of Van Fleet mission to the Far East)를 작성했다.
 


<밴 플리트>


 ※ 그리고 또 아래는 그 내용의 일부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 바랍니다.

 III. Korean Problems With Other Asian Nations. A. Japan.
 1. Fisheries.
 The posi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Government has been to insist on the recognition of the so-called "Peace Line."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has consistently taken the position that the unilateral proclamation of sovereignty over the seas is illegal and that the fisheries dispute between Japan and Korea should be settled on the basis of a fisheries conservation agreement that would protect the interests of both countries.

 4. Ownership of Dokto Island.
 When the Treaty of Peace with Japan was being drafted, the Republic of Korea asserted its claims to Dokto but the United States concluded that they remained under Japanese sovereignty and the Island was not included among the Islands that Japan released from its ownership under the Peace Treaty. The Republic of Korea has been confidentially informed of the United States position regarding the islands but our position has not been made public. Though the United States considers that the islands are Japanese territory, we have declined to interfere in the dispute. Our position has been that the dispute might properly be referred to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and this suggestion has been informally conveyed to the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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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고 또 다음은 세계일보의 관련 기사임

 미국, 한국전직후 "독도는 일본땅" 일방결론



 | 기사입력 2006-03-27 07:53 | 최종수정 2006-03-27 07:53

 

 

 일본과 평화협정 체결때…본지,54년'밴 플리트 특명보고서'입수 
 "미국, 한·일 논쟁개입 피해야"…국제사법재판소 회부 권고


 한국전쟁 직후 일본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미국이 독도가 일본땅이라며 일방적으로 결론을 내린 사실이 드러났다. 이 같은 내용은 세계일보가 미 버지니아군사학교 내 마셜도서관에서 찾아낸 ‘밴 플리트 특명보고서’(사진)에서 26일 밝혀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과 일본이 평화협정 초안을 만들 때 한국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미국은 독도의 통치권은 일본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일본이 소유권을 포기하는 섬들 중에 독도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비록 미국이 이 섬을 일본 영토라 생각하고 있지만 논란에 개입되는 것을 피해 왔다”며 “미국은 이 논쟁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회부되는 게 적절하고 이같은 입장을 한국 정부에 비공식적으로 전달했다”고 기록했다.

 [보고서 내용은]

 이 보고서는 한국전쟁 때 주한미군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밴 플리트가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특사로 한국 일본 대만 필리핀 등을 방문한 뒤 작성한 것으로, 30여년간 특급기밀로 분류돼 있었다.

 미국이 뚜렷한 근거없이 독도의 일본 소유권을 인정해 주고 일본 논리대로 ICJ 회부를 통한 독도 문제 해결책을 내부 입장으로 정리하고 있어 전후 처리의 공정성에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이와 함께 우리 정부가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는 ‘맥아더 라인’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1952년 미일 평화협정(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맥아더 라인을 포함시켜 독도 부근에서의 일본 어선 조업을 영구히 막으려 했지만 이러한 조치는 미국이 지지하는 국제법의 원칙에 어긋나 한국 정부의 요구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맥아더 라인은 한반도 주변 공해상의 적 침투를 차단하기 위해 설정된 것으로, 미일 협정이 체결되면서 폐지됐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 라인’으로 고쳐 조업선으로 유지했다. 미국은 한국 정부에 조업선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통보했으며, 국제법 위반이라고 항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고서는 이러한 사실을 일본이 모르고 있으며, 한국 정부 관계자 극히 일부만 알고 있고 공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밴 플리트는 또 ‘사전보고서’에서 한반도 통일 또는 중국 공산당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선제공격이나 무력행위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게 미국 정책이라고 기록했다.

 이와 함께 최대한 이른 시기에 한반도 내 미군이 재배치돼야 하며, 궁극적으로 모든 미군이 한국과 일본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게 미 국가안보회의(NSC) 정책이라고 덧붙였다.

 밴 플리트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 4월 주한미군사령관으로 부임해 1953년 1월 퇴직했다. 한국전에서 공군장교였던 아들을 잃은 밴 플리트는 육군사관학교를 재건하는 등 한국군을 정예화하는 데 힘을 쏟아 ‘한국군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1954년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 동창이자 당시 대통령인 아이젠하워 특명에 따라 한국 등을 둘러보고 같은 해 9월 30일 방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는 극동지역 주요 국가의 군사 동향과 정치·외교적 현안을 다루고 있으며, 특히 한국과 관련, 육·해·공군의 전투요원과 무기체제 등을 상세하게 파악했다. 보고서는 1986년 1월부터 6월에 걸쳐 기밀해제됐으나 공간적 이유 때문에 주목받지 못했다.

 

렉싱턴(미국 버지니아)=한용걸 특파원 icykar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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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일본과의 평화조약 후, 동(同) 조약에 관한 미국정부의 공식견해로, 다음과 같은 점이 확인되었다.

  1) 일방적인 영해선언(이승만 라인)은 위법(違法)하다.
  2) 미국정부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의해서 독도(獨島)는 일본의 영토라고 결론을 내렸다.
  3) 그 영토문제는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서 해결하길 희망한다.

 1954년 9월 25일-일본이 한국에 국제사법재판소에의 위탁(委託)을 제안(提案)함.

  

 1954년 10월 28일-한국이 일본의 제안을 거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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