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54년/ 오초칠국(呉楚七國)의 난(亂) 발발(勃發)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은, 중국 전한(前漢) 기원전 154년에, 오왕(吳王) 외에, 칠국(七國)의 제후왕(諸侯王)들이 일으켰던 반란이었으며, 유 씨(劉氏) 가문의 내란(內亂)이었다.

 <경위(經緯)>

 그 결과,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기원전 154년에 영토삭감 명령을 받았던 것을 계기로 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어서 초(楚)와 조(趙) 등, 6왕(王)이 동조했으며, 그리하여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이 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반란측은 <유 씨(劉氏)의 화목(和睦)을 어지럽히는 간신 조착(晁錯)을 토벌한다!>라는 명목을 내걸었다. 그리고 또 오(吳)는 남쪽의 남월(南越) 군사도 빌려서 총원 70만이란 대군을 가지게 되었고, 그에 또 조(趙)는 북쪽의 흉노(匈奴)와 결탁해서 그 난(亂)을 대규모로 몰아갔다.

 
※ 남월(南越)은, 기원전 203년부터 기원전 111년에 걸쳐서 5代 93年 동안 존재했던 나라였으며, 현재 중국의 남부에서 베트남 북부(嶺南地方)까지에 이르는 곳에서 자립했던 왕국이었다. 南粤로도 표기하기도 한다.

 



 ※조착(晁錯-?부터 기원전 154년)은, 전한(前漢)의 정치가였고, 제후왕(諸侯王)들의 세력을 감(減)하는 정책을 진행시켰지만, 결국 제후왕(諸侯王)들의 반발로 인해서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 일어났으며, 그 자신은 또 그 반란을 진압한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름의 원래 표기는 조착(鼂錯)이지만, 그러나 약자인 조착(晁錯)으로 표기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서도 이하 조착(晁錯)으로 표기함.

 문제기(文帝期)

 영천군(潁川郡)에서 태어났던 그는, 젊은 시절 장회(張恢)란 사람에게서 형명학(刑名學=法家)을 배웠다. 그리고 또 문제(文帝)의 명을 받아서 진(秦)나라 때,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인해서 쓸모 없게 되어있던 상서(尙書=書經)를 당시, 90여세의 복생(伏生)이란 사람에게 따로 파견되어가서 배웠다. 그 후, 그는 문제(文帝)의 신임을 얻어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흉노(匈奴)의 대책 등 많은 입안(立案)을 했다. 그리고 또 그와 동시에 태자 유계(劉啓)의 교육도 맡았다. 그 시기, 그의 정책으로서 유명했던 것이 바로 <납속수작제도(納粟受爵制度)>였다. 그것은 또 당시, 상업이 활발해져서 빈부의 차이가 격렬해지자 농민들의 몰락이 현저(顯著)하게 되었는데, 그리고 또 그 원인의 하나가 바로 전납(錢納)이었으므로, 그래서 농민들은 세금을 낼 때가 되면 자신들이 길렀던 곡물들을 모두 시장에 내다 팔아서 전(錢=)으로 바꿔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상인들의 횡포로 인해서 그들은 많은 피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 그가 제안했던 것이 바로 그 <납속수작제도(納粟受爵制度)>란 것이었으며, 그것은 또 곡물을 일정(一定) 이상(以上) 납입한 사람에게는 작위(爵位)를 내린다는 제도였다. 그러자 또 그 작위(爵位)를 얻고 싶어 하던 상인들은 이번에는 그 곡물을 확보하기 위해서 농민들에게 고가(高價)로 구매하게 되었고, 그것으로 농민들은 전(前)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득을 보게 되어서 날로 형편이 나아져갔던 것이다.

 경제기(景帝期)

 그 후, 경제(景帝)가 즉위하자 그는 더욱 깊은 신임을 받아서 내사(內史=首都長官)가 되었다. 그런데 그때, 그에 대한 경제(景帝)의 신뢰가 너무도 두꺼워서, 경제(景帝)는 당시 최고 직(最高職)이었던 승상(丞相) 신도가(申屠嘉)와는 별 의논도 없었고, 오히려 조착(晁錯)의 이야기라면 무조건
받아들였을 정도였다. 그러자 그에 화가 났던 신도가(申屠嘉)는 어떻게든 그를 제거하려고 마음을 먹고는 그 구실(口實)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신도가(申屠嘉)가 찾아냈던 것은, 그리고 당시 조착(晁錯)은 관공서(官公署)의 남쪽 벽을 뚫어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유방(劉邦)의 아버지 유태공(劉太公) 묘(廟)의 담(垣)이었다. 그래서 신도가(申屠嘉)는 그것이 불경죄(不敬罪)에 해당한다고 생각해서 경제(景帝)에게 그것을 상주(上奏)해서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조착(晁錯)이 이미 그 정보를 사전에 알아내고는 자신이 먼저 경제(景帝)에게로 달려가서 그 사정을 이야기하고는 <그것이 불경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보증문서를 경제(景帝)로부터 받아두었다. 그러자 조착(晁錯)을 제거하는데 실패했던 신도가(申屠嘉)는 <먼저 저 어린놈을 죽인 다음에 주상(奏上)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하고 한탄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가장 큰 정적을 제거했던 조착(晁錯)은 그 이후에도 경제(景帝)에게 더욱 신뢰를 받아서 마침내 어사대부(御史大夫=副丞相=어사의 장관 또는 副丞相의 지위)가 되었다. 그러자 그는 더욱 오만해져서 많은 적들을 만들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그 정적들 중에는 제(齊)와 오(吳)의 승상(丞相)을 지내고 있었던 <원앙(袁盎)>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조착(晁錯)을 너무도 싫어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두 사람은 같이 앉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자 조착(晁錯)은 자신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자 그를 탄핵해서 평민으로 만들어버렸다.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

 전한(前漢)은 당시, 군국제(郡國制-앞에서 소개되었음)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문제(文帝)가 정치를 아주 잘해서 국력이 증대되었고, 그리하여 제후국들도 많은 혜택을 입게 되어 그때부터는 점차로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문제(文帝) 때, 이미 그것은 문제시 되었고, 그래서 또 <가의(賈誼)>가 그것을 지적하면서 <미리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상주까지 올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문제(文帝)는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그것을 그냥 덮어두어버렸다.

 ☆ 가의(賈誼-기원전 200년부터 기원전 168년)는, 중국 전한(前漢) 文帝 때의 학자였으며, 정치가였다. 그리고 문제(文帝)를 섬기면서 유학과 오행설에 기초했던 새로운 제도의 시행을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저서에 <좌씨전훈고(左氏傳訓詁)>와 <신서> 그리고 <복조부(鵩鳥賦)> 등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 경제(景帝)는 이제 그때가 왔다고 생각해서 그 대책에 나섰다. 그리고 당시, 제후왕(諸侯王)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졌던 자는 오왕(吳王)이었는데, 그러나 그 오왕(吳王)과는 일종의 악연(惡緣)으로, 경제(景帝)는 이미 그의 아들을 죽였던 것으로 해서도 서로 사이가 그리 좋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런 배경 등으로 해서 조착(晁錯)도 단번에 손을 쓰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는 우선적으로 초(楚)와 조(趙) 등의 영지들부터 차례로 손을 썼고, 이어서 오(吳)를 점차 죄어갔
다. 그러자 또 다른 제후왕(諸侯王)들의 반감도 늘어갔는데, 그런데 그런 와중에 오(吳)에도 영지를 삭감하겠다는 통보가 도달하자 오왕(吳王)은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불명예(不名譽)스런 죽음

 그러자 반란군은 그 즉시 <간신 조착(晁錯)을 제거해서 조정(朝廷)을 바로 세우겠다!>라는 기치를 걸고 거병했다. 그리고 또 그때, 원앙(袁盎)은 직접 경제(景帝)와 단 둘이 만나서는 <반란군을 억제할 방책(方策)이 자신에게 있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경제(景帝)가 그 방법에 대해서 묻자 원앙(袁盎)이 또 이렇게 말을 했다. <그 방법은 조착(晁錯)을 죽이는 것뿐입니다. 조착(晁錯)만 죽으면 반란군은 명분이 없어지게 되니 자연적으로 물러날 것입니다> 그러자 잠시 망설였던 경제(景帝)는 별 다른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또 당시, 중국에서는 <형불상대부(刑不上大夫)>란 말이 통용되고 있었는데(禮記), 그래서 당시에는 사대부 계급의 사람들에게는 형벌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또 물론, 그것이 무제한적으로 인정되었던 것은 아니었고, 어쨌든 그 누군가가 어떤 형(刑)에 상당(相當)하는 죄를 범했을 경우, 그러면 일단 <관공서로 출두하시오!>라는 연락이 먼저 그 사람에게로 가게 되고, 그러면 또 그 명령을 받은 사람은 스스로 알아서 자진(自盡=自殺)한다고 하는 것이 그 시대의 통례였던 것이다. 그래서 또 사대부들은 형장에서 살해당하는 불명예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지만, 그러나 그때 조착(晁錯)에게는 그것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장안(長安)의 중위(中尉)였던 <진가(陣嘉)>란 자에게 속아서 시장(市場)에 나갔다가 그 자리에서 요참(腰斬-허리를 잘라서 죽이는 벌)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 그의 일족들도 모두 몰살되었지만, 아무튼 또 덧붙여서, 그는 그 처형이 있기 수개월 전에. 자신의 부친에게서 많은 충고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그때, 그는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不如此,天子不尊,宗廟不安> 그래서 또 풀이를 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가 만약에 그 일(諸侯王들의 세력을 줄이는 일=減領)을 하지 않으면, 황제(皇帝)는 존경을 받지 못하며, 더불어서 종묘(宗廟) 또한 보장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자 또 그의 부친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劉氏安矣,而晁氏危矣、吾去公归矣> 그리고 그 해석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유 씨(劉氏)는 안전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조 씨(晁氏)는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먼저 가려 하니, 너는 뒤에 남아서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해라!>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둔 독(毒)을 마시고 자살했다고 한다.(遂飮藥死)

 



 아무튼, 그러자 또 제(齊)에서는 교서(膠西), 교동(膠東), 치천(菑川), 제남(濟南) 등, 당시 분할되어 있었던 대부분의 나라들이 참가했지만, 그러나 제북왕(濟北王) 유지(劉志)는 성벽을 복구한다는 핑계로 참가하지 않았고, 거기다 또 옛날의 제도림(임)치(齊都臨淄=山東省 淄博市)에 있었던 제효왕(齊孝王) 유장려(劉將閭)도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그 때문에 교서왕(膠西王) 등은 그들을 공격했지만, 하지만 그 임치(臨淄)를 제압하지 못해서 그곳에서 발이 묶여버렸다. 그러자 또 하는 수 없이 오(吳)와 초(楚) 군만이 장안(長安)으로 진군해서 들어갔는데, 하지만 또 그때, 앞에서 설명한대로 오군(吳軍)은 14세부터 62세까지의 남자들을 전부 징병한 때문으로, 그 수에서는 정부군에 비해서 월등히 많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오합지졸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군사의 질은 상당히 낮았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는 했어도 오(吳) 본국에서부터 지원해 왔던 막대한 부(富)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때, 경제(景帝)로서는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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