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람 전투에서의 나폴레옹>
2. 1809년 오스트리아 전쟁
<바그람 전투>
<바그람 전투>
1. 개요
바그람 전투(영:Battle of Wagram, 불: Bataille de Wagram-1809년 7월 5일~7월 6일)
'나폴레옹전쟁'의 하나이며 '빈' 북동 15킬로에 있는 '도나우 강' 북안(北岸) 마을 <바그람>의 주변지역에서
'황제 나폴레옹1세'가 인솔하던 '프랑스군'과 '칼(카를) 대공'이 인솔하던 '오스트리아군'이 싸운 전쟁이다.
그때 '프랑스군'은 18만 '오스트리아군'은 15만이라고 하는 대군끼리 격돌해서 합계 7만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하지만 결과는 '프랑스군'이 승리했으며 '오스트리아'는 '쇤브룬 화약'을 맺고 '프랑스'에 굴복했다.
2. 배경
1809년 4월 9일 '오스트리아'는 '영국'과 '제5차 대불대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신속하게 반격으로 들어갔고 '에크뮐의 싸움'에서 '칼 대공'이 인솔하던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깨고 수도 '빈'에 입성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도나우 강' 북안으로 퇴각했던 10만의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5월 21일과 22일에 7만의 병사들을 이끌고서 다시 도하작전을 결행함과 동시에 결전에 임했지만, 그러나 그때는 '칼 대공'의 뛰어난 지휘를 당해내지 못하고 패배했다.
그 후, 잠시 소강상태로 들어갔던 양군은 그 사이에 전열을 다시 가다듬었고, 그 결과 '프랑스'는 '우제누'와 '마크드날'이 인솔하던 '이탈리아왕국 군'과 또 '마르몬 군단' '포냐트후스키'가 인솔하던 '폴란드군' 그리고 '바이에른군'이 그곳으로 속속 도착함으로 해서 18만의 대군이 되었으며, 그러자 '오스트리아군'도 그에 맞게 15만의 병력을 확보하고 결전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즈음에 '티롤(독:Tirol. 영:Tyrol-유럽 중앙부에 있으며,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 알프스산맥 동부지역에 있다)'에서 ‘안드레아스 호퍼’가 봉기(蜂起)를 했다. 그리고 또 '네덜란드'의 '와르헤렌 섬'에도 '영국군'이 상륙하는 등, 배후에서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러자 '나폴레옹'으로서는 시간적인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서둘러서 재차 '칼 대공'과의 결전에 들어갔던 것이다.
3. 경과
'나폴레옹'은 <아스페른과 에슬링 싸움>에서 패배한 후, 다시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주도면밀한 계획을 가다듬었다. 그 결과 '로바우 섬'에 집결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7월 4일,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을 일부러 선택해서 도하작전을 결행했고, 그와 동시에 가교를 설치하면서 단번에 대군을 도하시켰다. 그러나 단, 그 와중에 참모장이었던 '베르티에'의 계산착오로, 2개의 군단에 같은 다리를 할당하는 일이 생겨서 일시적인 지연이 생기기도 했다.
아무튼, 그러자 '오스트리아군'은 불의의 습격에 완전히 노출되었고, 이어서 강가를 경계하던 부대는 단번에 무너졌다.
그러자 또 이어서 '프랑스군'은 7월 5일 낮까지 '아스페른'에서부터 '에슬링' 일대까지를 제압했고, 오후에는 18만 대군이 도하를 전부 완료했다. 그리고는 좌익에 '맛세나 군단' 중앙부에 '베르나도트'가 인솔하던 '작센 군단' '우제누 군단' '우디노 군단' 우익에 '다브 군단'을 배치해서, 20킬로에 달하던 반원(半圓)전투대형을 형성했다. 그리고 또 바로 이어서 '요한 대공'이 인솔하던 '오스트리아군' 별동대 12,500명이 참가하기 전에 승부를 결정지으려고 '나폴레옹'은 7월 5일 공격을 시도했지만, 그러나 소규모의 공격에만 머무르고 말았고, 실패했다.
<7월 6일 아침 상황도-흰색이 프랑스군. 최상단 중앙이 바그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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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6일 이른 아침, 전투가 재개되었다. 그러자 처음에는 '오스트리아군'이 먼저 주도권을 잡고 '프랑스군' 우익으로 공격을 걸었다. 그것은 양동작전이었던 것으로, 계속해서 제3군단, 제6군단에 의한 본격적인 공격이 '프랑스군' 좌익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베르나도트'의 '작센 군단'이 후퇴했고, 거기에다 '브데 사단'마저 패주당해서 '프랑스군'의 후방 연락선이 급격하게 위협 당했다. 그러자 또 '프랑스군'에서는 '맛세나 군단'의 일부와 기병이 증원되었고, 거기다 또 '로바우 섬'으로부터 포격까지 퍼부어지자 '오스트리아군'의 공세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편, 우익에서는 '다브 군단'이 그때부터 '오스트리아군'을 역공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의 전술적인 시각은 그 호기를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이어서 그는 '오스트리아군' 전체 중에서 부채(扇)의 손잡이에 해당하던 핵심 중앙부를 향해서 '마크드날 군단'과 '친위대'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마크드날' 지휘하의 8,000병력은 곧 쐐기대형을 편성해서 '오스트리아군'의 중앙부에다 총검돌격으로 찔러 넣었다. 그리고는 이어서 처참한 싸움이 전개되었고, 얼마 후 '오스트리아군'의 중앙부는 돌파되어서 분단되었다.
오후 4시.
'요한 대공'의 '별동대'가 그 전장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승패는 이미 결정나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은 그때 40,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는 무너지기 바로 일보직전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때 '프랑스군'도 사상자 32,500명, 포로 7,000명이라는 숫자를 냈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그 전투의 참혹했음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4. 영향
아무튼, 7월 10일 '오스트리아'는 정전을 신청했고, 이어서 12일에는 정전협정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또 같은 날 '프랑스군'에서는 전공에 의해서 '마크드날'과 '우디노' 그리고 '마르몬'이 원수로 승진했다.
그리고 또 '베르티에'에게는(비록 실책은 범했지만) '바그람 大공작'이 수여(授與)되었다.
그리고 또 한참 지난 10월 14일에 '오스트리아'는 '쇤브룬 화약'을 맺고 '프랑스'에 굴복했다.
그리고 또, 그 광대했던 영토를 '프랑스'와 '바이에른'에게 할양해야 했으며
거기다 거액의 배상금까지 부과 받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1809년 '오스트리아'의 '나폴레옹'에 대한 도전은 실패로 끝이 났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서 '나폴레옹의 제국'은 그 <最 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 '바그람'의 경험으로 '오스트리아군'은 舊來의 '용병 군'으로부터 탈피했다. 그것은 또 '아우스트리트'의 굴욕적이었던 패배이후 '오스트리아'는 계속된 군제개혁과 함께, 혁명으로 인해서 다시 태어났던 '프랑스군'들처럼, 그때서야 비로소 <국민>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것은 또 개인적인 명예나 이익 때문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려는 <국민군>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냈던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이 후에 '라이프치히'에서의 빛나는 승리를 차지하기까지에는
그로부터도 또 수년의 세월이 더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5. 전후처리
10월 14일 '쇤브룬의 화약'이 체결되어서 '오스트리아'는 광대한 영토를 할양 당했다.
거기다 1810년에는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아 루이자가 '프랑스'의 황후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즈음의 '나폴레옹'의 패권은 '네덜란드'와 '함부르크' 그리고 '로마' 등을 병합한 '프랑스 제국' 외에도, 통치권하의 '이탈리아왕국'과 형 '죠제프'가 왕위에 앉아있던 '스페인' 그리고 남동생 '제롬'이 통치하던 '베스트파렌 왕국' 그리고 또 의동생 '뮤라'가 왕위에 앉아있던 '나폴리' 그리고 또 동맹국이었던 '스위스연방'과 '라인동맹' '바르샤바공국'에까지 이르고 있어서, 그래서 그때야말로 가히 <나폴레옹의 最 절정기>였다고 평가할 수가 있는 것이다.
** 마크드날(Etienne Jacques Joseph Alexandre Macdonald) 1765년 11월 17일~1840년 9월 25일
영어로는 ‘맥도날드’ 라고 쓰인 것이 많다.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수단(Sudan-아프리카 북동부에 있는 민주공화국-수도는 하르툼)의 스코틀랜드系 家系에서 태어났다.
찰스(Charles Edward Sturt-1720년 12월 31일~1788년 1월 31일)소참왕(小僭王-어린왕위후계자-우리나라로 치면 世子정도. 또는 왕자-설명은 생략함)과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로 피해 왔던
'자코바이트(Jacobite-1688년 영국에서 일어났던 명예혁명의 반 혁명세력을 통칭함)'의 후예였다.
<찰스>
<1746년-Battle of Culloden-좌측이 자코바이트>
** 우디노(Nicolas Charles Oudinot) 1767년 4월 25일~1847년 9월 13일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르지오公爵.
1808년 7월 2일 제국백작. 에슬링 및 바그람 전쟁의 功으로 1809년 7월 12일에 제국 원수로 승진.
제국민전쟁에서는 베를린공략을 맡았지만, 그로스베른 싸움에서 패배해서 실패했다.
복고왕정 때는 근위대소장, 1823년의 스페인전쟁에서는 제1군단 사령관으로 참전했다.
** 쇤브룬의 화약(불:Paix de Schonbrunn) 1809년 10월 14일
'나폴레옹전쟁' 중에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쇤브룬 궁전'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강화조약. '쇤브룬 강화조약(불:Trait de Schonbrunn)'이라고도 불린다.
<개요>
'이베리아반도 전쟁'에서 '나폴레옹1세'의 고전(苦戰)을 확인했던 '오스트리아'는
1809년 4월 9일 '영국'과 '제5차 대불대동맹'을 결성하고 '바이에른'을 침공했다.
그리고 그것은 1805년의 '프레스부르크 화약'으로 잃었던 영토를 탈환할 목적에서였지만
그러나 상황은 정 반대로 되어서 '나폴레옹'에게 수도 '빈'을 점령당했으며
거기다 7월 5일부터 6일에 걸쳐서 치러졌던 '바그람 전쟁'에서도 패배해서
결국 7월 12일에 정전이 성립되었다.
그 10월 14일에 체결되었던 강화조약은 '오스트리아'에게는 아주 굴욕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또 그 내용을 잠시 들여다보면
'프랑스'에는 '트리에스티'와 '달마치어'를
그리고 '바이에른 왕국'에는 '찰스부르크'와 '티롤'을
그리고 또 '바르샤바 공국'에는 '북부 가리치아'와 '루브린'을 할양 했다.
그리고 또 '러시아 제국'에 대해서는 '오스트리아'와 싸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부 가리치아'를 할양해야 했다.
그로써 '오스트리아'는 전인구의 6분의 1에 상당하는 400만 명의 인구마저 잃게 되었다.
게다가 또, 육군의 총병력은 15만 명으로 제한되었으며, 8,500만 프랑의 배상금까지 부과 받았다,
그리고 또 '죠제프'를 '스페인국왕'으로 승인했던 것과 동시에
'대륙봉쇄령'의 준수 또한 확약당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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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대불대동맹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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