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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랜덤하우스 히가시노 게이고 문학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상처는 기억이다.(이 말은 예전에 안 모 교수님께 수업시간에 들은 말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잊었지만 그 말은 오래도록 내 기억에 자리하고 있다. 너무나 맞는 말인 것 같아서...) 나이를 먹으면 때로 희미해지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깊이 자욱 남긴 '그 일'을 쉽게 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죽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려고 그에게 상처를 남기기도 할까...? (<의천도룡기> 중 조민) 상처와 기억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 날을, 그 일을 떠올리면 떠올릴 수록 상처는 욱씬거리고 마음의 화증은 심해져만 간다.
살인범 츠요시의 편지. 우발적인 범행이었지만 결코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해 버린 그는 끊임없이 편지를 쓴다. 그에게 편지는 단순히 소식을 전하는 통신 수단이나 세상과 연결되는 매개체가 아니었다. 그의 편지쓰기는 매번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떠올리며 자신의 상처를 후벼파고 다시 짖이기는 행위나 다름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결코 생생하게 잊지 않겠다는... 자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그리고 세상에 남겨진 츠요시의 동생 나오키. 그는 '살인범의 동생'이란 씻을 수 없는 멍에를 지고 살아가야 한다. 내가 살해한 것도 아닌데, 왜 나에게 세상은 이렇게 불공평하냐고 화를 내고 괴로워하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은, 그의 형이 살인범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그는... 그 사실을 받아 들이려고 한다.
이 책에 정답은 없다. 내 마음에도 정답은 없다. 안타까운 두 형제의 삶에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마구 났지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때도 그랬지만, 결국 내가 피해자의 가족이나 친지, 친구가 되면 지금처럼 그들을 위해서 울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난했든, 세상이 그들을 버렸든 간에 절대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치거나 죽게한 그들을 동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편지나 쓰면서 자신들의 행복한 시간 따위를 보내는 걸 감히 허락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츠요시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모진 세월을 겪어야만 하는 나오키는? 본인의 죄는 아니라지만, 안타깝게도 역시 이 소설속에서처럼 그렇게 살아야 하겠지? 나오키도 역시 자신의 딸 미키에게 상처 입힌 가해자의 부모가 왔을 때 그, 그리고 그들을 용서하지 못했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자신의 일이 되었을 때는 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우리는 흔히 타인에게 인사치레로, 혹은 에둘러 말하기로 대충 위로하거나 잘하라고 응원한다. 그렇지만 정작 그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그처럼 만만한 일도 아닐 뿐더러 오히려 그런 말들이 그들을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래서 히라노 사장의 직설적인 말-자네가 겪고 있는 고난까지도 자네 형이 저지른 죄에 대한 형벌-에 나오키는 더 감동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솔직하고 정곡을 찌르고 있으니까...
가슴이 답답하다. 이런 무거운 주제를, 담백한 문체로 편안하게 풀어낸 작가가, 한편으론 얄밉다. 자신도 찾지 못한 화두를 나에게 던져놓다니... 아니, 그는 벌써 찾은 것인가? 결국 나오키가 노래를 하러 갔으니...?
그런 걸 보면, 결국에는 이런 생각도 든다.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기억조차 희미해져가며 살아가는 어떤 죄 지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 좋겠다고... 적어도 그가 그 기억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는 괴롭지 않을 테니... 범죄는, 저지른 자에게도, 관계된 살아 남은 모든 자들에게 아픔을 남긴다...
오늘 밤, 모든 상처받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 부디 그들이 망각으로써 마음의 짐을 벗어놓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