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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
홍대선 지음 / 푸른숲 / 2018년 7월
평점 :
학교 다니던 시절 나는 곧잘 도서관에 앉아 -읽기 힘들고 이해하기도 힘든 지루한- 철학서를 붙들고 있곤 했다. 평생에 걸쳐 나와 함께 하고 있는 그 '불안'이 고개를 다시 들기 시작하고, 밤하늘을 한없이 보는 걸로도 해결이 되지 않을 때면 으레 그래왔듯 철학책을 집어 들었던 것이다.
헌데 철학서를 파고든다고 해서 나의 불안이, 실존에 대한 의문이, 혹은 삶을 계속 영위해야 할 당위성에 대한 답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되려 내가 이미 갖고 있는 염세주의나 허무주의가 짙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철학자들의 사유는 내게 냉정하게 다가오곤 했다. 그럼에도 '부어라, 마셔라, 그럼 잊히리라!'라고 말하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휩쓸리는 것보다 차라리 철학서를 읽고 있는 것이 내게는 더 큰 위안이었다.
최근 일주일 동안 틈틈이 붙잡고 있었던 철학서 <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를 읽었던 이유도 책의 처음과 끝에 실린,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이유에서 나와 비슷한 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저는 제 자신을 치유하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고민과 혼란 속에서 헤매다 보니 어느새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원론적인 질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도망치려 해도 피할 수 없으니 질문에 똑바로 마주 설 수밖에 없겠지요.
저는 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읽고 쓰다 보니 자연스레 집필이 시작되었습니다.
[본서 5~6쪽]
이 책의 표지 제목에서 연한 노란색 글자인 '휘둘리지 않는'을 빼고 파랗고 진한 글자만 읽어 보면 '어떻게 개인이 되는가'라는 제목이 된다. 이 진한 글자들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주체적으로 '개인'이 되어나간 6인의 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단순히 그들의 사상이나 철학만을 나열한 내용이 아닌, 그들이 각자 자신의 삶에서 철학을 건져낸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렇게나 센세이셔널한 철학 명제로 당대의 세상을 발칵 뒤집고,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 위대한 철학자들은 평생을 병약했거나,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생활고에 시달린다든지, 혹은 부모의 그늘 아래서 자신의 철학 연구를 계속 해나가야 하는 시련과 싸우며 성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점차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어갔다. 이 책의 내용을 토대로 한 6인의 철학자들의 삶에 대해 -최대한- 짧게 얘기해 보겠다.
의심하는 어린이이자 늦잠의 황제인 데카르트(1596~1650)는 이 불확실하고도 의심스러운 세계에서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아무리 의심하고 또 의심해도 절대 부정할 수 없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진리를 얻어냈다. '나'를 발견한 것이다. 이 진리를 통해 데카르트는 서양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자 대륙 합리론의 아버지가 되었다.
랍비 꿈나무로 키워지던 머리 좋은 스피노자(1632~1677)는 데카르트의 철학서들을 읽은 뒤 자신의 철학적 진리를 더욱 발전시켰고 그 결과 본인이 나고 자란 유대 사회로부터 파문과 추방까지 당했다. 그는 추방된 후 렌즈 세공 기술로 고되지만 정직한 밥벌이를 하며 자신의 철학적 소신을 끝까지 지켰다. 스피노자는 <신학 정치 논고>에서 '신 즉 자연'이라는, 무신론적 범신론을 제기했고 <에티카>에서는 '시민사회', 즉 자유롭고 이기적인 '개인'을 주장했다. 한마디로 스피노자는 인간에게 욕망을 사랑할 자유와 이기적일 권리를 부여한 최초의 인물인 것이다.
원칙주의자 칸트(1724~1804)는 생활고 속에서 오랜 기간 가정교사와 시간강사, 도서관 사서를 거쳐 철학과 정교수에 이른 후에야 그 유명한 <순수이성비판>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칸트는 스피노자가 확립한 '개인'에 '선의지'를 바탕으로 한 확고한 '도덕성'을 추가했다.
대기만성형 철학자인 헤겔(1770~1831)은 설교사가 되길 원하시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느라 가난한 가정교사 생활을 하며 철학의 길을 버텨내다, 서른이 넘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제대로 철학을 하기 시작했다. 헤겔은 개인과 세계의 근원적 분열을 주장한, 일명 '칸트의 난제'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한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과 -자신의 대학 동기인- 셸링의 객관적 관념론으로부터 힌트를 얻어 절대적 관념론을 주장했다. 정반합의 변증법을 인식의 단계뿐만 아니라 존재에 관한 논리에도 적용시킨 헤겔은 이를 역사에도 적용시키며 '절대정신'과 '세계정신'이란 개념 또한 제기했다. 헤겔은 개인은 각자의 삶을 살지만 역사에 영향을 끼치고 거꾸로 역사에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쇼펜하우어(1788~1860)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늘 아래서 우울하게 성장했다. 가업을 이어받길 원한 아버지의 소원을 저버리는 바람에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자책과, 여러 권의 책을 통해 유럽에서 문학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어머니의 후광 아래 '그늘'에서 말이다. 더구나 시대정신이 인류를 발전으로 이끈다는 헤겔의 희망적인 철학에 열광하고 있던 당대 유럽은 -그들 기준으로- 비관적으로 내비치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쇼펜하우어가 50대가 될 때까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플라톤과 칸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에게 있어 세계는 맹목적인 생존의지와 표상으로서 다가오며, 충족될 수 없는 '의지(=욕망)'로 인해 생은 고통과 비극이라는 거다. 헤겔과 대립되는 철학을 가진 쇼펜하우어는 헤겔을 무척 싫어했으며, 눈을 감을 때까지 염세주의자였다.

본서의 마지막 철학자인 니체(1844~1900)는 대학생 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난 후 철학에 본격적으로 입문했다. 당시 유럽 문헌학의 미래로 불리며 전도유망했던 그가 말이다. 아버지라는 존재의 부재와 사투하던 니체는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뇌혈관 지병이 있었고, 두통과 안통으로 평생 고통을 당하다 못해 결국 정신질환까지 발병해 요절했다. 니체의 철학서는 문학적이면서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망치를 들고 모든 전통적인 가치를 깨부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서양 문명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파괴하고자 했고, 소크라테스로 상징되는 서구 정신 사상이 이원론적 프레임에 갇혀 있는 동안 놓친 진실, 즉 '인간성 회복'의 복원을 주창했다. 니체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입각한 도덕관념도 허구라며 부정했고 '해석으로서의 도덕'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또한 니체는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라는 욕망에 의해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그 세계에 신이 설 자리 따윈 없다고 보았다. 신도 도덕도 잃은 인간에게 남은 건 바로 '나 자신'이며, 인간 개인에게 주어진 과제는 '위버멘쉬', 바로 '초인'이 되는 것이다.
휴우, 최대한 짧게 늘어놓는다고 노력한 게 이만큼이다. 뭐 어쩔 수 없다. 철학은 언어가 주가 되는 학문이니까. 거기다 나 역시 사람인지라, 읽으면서 더욱 매료되었던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길게 적을 수밖에 없었다(하하핫).
오래전 여러 번 만났었던 -하지만 거의 잊어가고 있었던- 6명의 철학자들을 이 책을 통해 다시 만나면서 나는 새삼 깨달았다. 휘둘리지 않는 개인은, 삶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철학에서부터 기반한다는 걸 말이다.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내 생각'을 가지기란 위 6명의 철학자만 보아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 것 같다. 스피노자는 유대 사회에서 파문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자신의 신념을 지켜냈고, 쇼펜하우어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자신의 철학을 누가 뭐라 하든 포기하지 않고 평생 지켜나갔다.
이 위대한 철학자들 또한 삶이 부여하는 시험에 시시때때로 흔들렸으나 그들은 계속해서 투쟁하며 본인의 사유와 철학을 다듬어나갔다. 그리고 그 사유들은 그들 스스로의 정신적 뿌리가 되고, 인류의 정신적 뿌리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비난이 더러 쏟아지기도 했으나, 이 철학자들은 망설임 없이 사람들의 몰이해와 무시, 고독이 가득한 삶 속으로 멈추지 않고 걸어들어갔다. 스피노자가 그랬던 것처럼, '내 생각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의심스러운 이 세계에서 우리는 불완전한 모습으로 각기 다른 불완전한 삶을 살아간다. 그중 어떤 이들은 과거의 잘못을 계속 답습하며 자기 기만에 빠진 채 살아가는 것도 모자라 본인의 잘못된 세계관을 남에게 피력하거나 강요하며 살아가는데, 의외로 이런 인간들이 주변에 너무 많다(멀리서 찾을 일 없이 내 형제 중 한 명도 무척이나 그런 편이다). 이런 인간들에 둘러싸여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기란 자존감이 바람 앞의 촛불 마냥 몹시 유약한 이들에겐 엄청난 숙제이자 삶을 관통하는 고민이 된다.
이런 불완전한 '나'가 도대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으려면, 그리고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려면 위에 한 번 언급했다시피 '내 생각'이 필요하다. 내 생각을 가지려면 의지,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언급했던 '의지'와 비슷하면서도 좀 다른 의미의 의지 또한 필요하다.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로 매일매일 발전하는 '나'라는 개인은 곧 헤겔이 말한 '빌둥 Bildung'에 해당할 것이다.
비극과도 같은 이 최악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불완전한 개인일지라도, 개개인은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갈 의무가 있다고 나는 본다. 그 의무를 위해 나처럼 이렇게 철학서를 읽든, 매일 밤 '부어라, 마셔라!'든, 그건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삶 속에 주어진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흔들리지 않는 철학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스피노자는 삶 자체를 향유하라고 한다.
지금 즐겁다면 만족하고, 불편하면 다른 걸 하면 된다.
철학을 하는 목적도 어디까지나 삶을 위해서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사는 법을 연습하는 것이다.
[본서 136쪽]
내 삶을 위한 철학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이렇게 재미있는 책도 만났다. 철학서의 문체가 편안한 구어체처럼 느껴지긴 처음이다. 저자의 필력이 매력적이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읽었다. 그의 팟캐스트를 들어본 적이 없지만 한 번 들어보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철학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