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느끼다 그리다 - 건축가 임진우의 감성에세이
임진우 지음 / 맥스미디어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건축가 임진우의 <걷다 느끼다 그리다>라는 에세이를 읽었다. 교육채널에도 나온다는 이 건축가를 한 번도 본 적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책을 집어 들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책 속의 그림과, 이 책을 읽으면 왠지 힐링이 될 것만 같은 출판사의 소개- 단지 이 둘뿐이었다. '건축가가 어쩌다 감성 에세이라고 글을 엮어 책을 냈을까?'라는 점도 좀 궁금했다.


   알고 보니 이 책은 글쓴이가 건설 관련 신문에 2년간 매주 연재했던 칼럼을 묶은 것이었다. 프롤로그에서 글쓴이가 밝히길, 일주일마다 마감시간에 맞추어 원고를 써내야 하는 부담감이 컸지만 사물을 보고 느끼는 연습과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훈련들이 스스로를 한층 성장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글쓴이 본인이 '글로 표현하는 훈련들'이라고 직접 말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지만, 확실히 읽는 이를 확 끌어당기는 글솜씨로 보기에는 좀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그림들... 세밀하고 꼼꼼하게 특징을 잘 잡아 그려낸 그 멋진 건물 그림들이란! 내가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던 이유 중 하나를 상기시킬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글쓴이의 펜 수채화는 가히 수준급이다. 괜히 개인전 네 번에 그룹전까지 했을까. 푸른 녹음이 가득한 한양도성길, 나도 자주 가봤던 창신동 골목길, 인왕산이 자리 잡은 서촌 골목길, 사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촉석루 등 국내의 여러 길과 건물들을 그린 그림을 '첫 번째 스케치, 길을 걷다'라는 이름으로 묶어놓았다. 이 첫 번째 챕터에서 가장 멋졌던 그림은 '서촌 골목길'이었다. 통인시장을 비롯해 거대한 인왕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 서촌을 멋들어지게 담아낸 글쓴이의 그림을 보고 있자니 아직 제대로 누벼본 적 없는 이 서촌을 꼭 제대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챕터 '여행을 느끼다'에는 글쓴이가 해외출장이나 여행지를 다니며 스케치한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다. 국가별 스케치 양은 일본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 순으로 많은데, 정작 인상 깊었던 스케치는 우즈베키스탄의 유적지 이찬 칼라였다. 그림 속에서도 이찬 칼라의 독특한 건축 양식은 빛을 발하고 있는데, 호라즘 제국의 전통 건축기법과 이슬람식 건축이 융합되어서 그렇다고 글쓴이 역시 적어놓았다. 독특한 건축물들이 가진 그 선과, 황토색 벽돌의 성곽 중간중간 -이브 생로랑이 사랑했던 마조렐 정원만큼은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 매력적인- 푸른 빛깔의 탑들이 자리 잡고 있어 시선을 무척 끈다. 실제 사진으로 이미 접해본 적 있는 이찬 칼라를 글쓴이의 섬세한 그림으로 다시 만나보니 느낌이 좀 더 이색적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글쓴이의 건축에 관한 견해를 세 번째 챕터를 비롯해 책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데, 아래는 책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이다.


건강한 건축은 친환경적이고 안전하고

사람의 감정과 정서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건축 재료가 건강하기에 독성물질이 안 나오고,

햇볕이 적당히 들고 바람이 잘 통하고

여름에 덥지 않고 겨울에 춥지 않은 건축이다.

사람을 건강하게 지켜주는 건축인 것이다.


본서 192쪽


   사실 위 구절보다 좀 더 감성이 짙게 묻어난 글쓴이의 건축 견해도 많으나, 나는 저 글귀가 뇌리에 박혔다. 무척 기본적인 사실이지만, 정작 현실에선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이 단지 본인은 그 건물에서 살 일이 없다고 값싸고 몸에 안 좋은 자재들로 원룸, 투룸, 아파트를 짓고 있는 현 세태에 적잖이 탄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에 대해서 이렇게 건강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글쓴이 같은 건축가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런 건축가들이 건축에 대해 싸구려 생각을 갖고 있는 클라이언트들에게 끊임없이 경종을 울려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건축가들이 쓴 칼럼이라면 앞으로도 계속 읽어보고픈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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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제주 - SNS에 없는 취향저격 제주여행, 2019~2020 최신 개정판
염관식.옥미혜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두 달 전 얼떨결에 가족들과 제주 여행을 갔었다. 몇 년 전에 갔는지 까마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간만에 가는 제주도였다. 힐링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급작스럽게 실행된, 전혀 계획된 여행이 아니었던지라 제주도에 도착한 직후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 또한 아무 생각 없긴 마찬가지였다. 나흘 내내 렌터카 회사에서 제공받은 '월별 제주도 테마 여행 지도'에 의존해 밥을 먹고, 발길이 닿는 대로 제주도를 돌아다녔다.


   만약 '아무 생각 없이 제주도 돌아다니기'가 여행의 테마라면 우리 가족이 했던 것처럼 하는 게 딱 좋을 것이다. 편한 '힐링 여행'이라는 단어에도 이 편이 좀 더 어울릴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힐링 여행이어도 '아무 생각 없이' 제주도를 돌아다니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인터넷에 제주도에 관한 정보가 넘쳐난다고 한들 그 정보들이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모여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미 도착한 제주도에서 휴대폰을 붙들고 그 정보들을 보고 이리저리 여행 스케줄을 구상하기엔 뭔가 많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무엇보다 다들 '아무 생각이 없었'기에, 딱히 어떤 테마로 스케줄을 잡아야 할 지도 막막했다. 가족들은 여행 말미에 숙소도 좋았고 먹기도 잘 먹었지만 '제주도 여행에 관련된 책 한 권쯤 갖고 있었더라면 좀 더 즐거울 수 있었을 텐데'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는 렌터카에서 준 제주도 여행 지도처럼 한눈에 볼 수 있는 제주도의 핫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한동안 이리저리 찾아보다 2016년부터 매해 개정되며 발간되고 있는 <요즘 제주>라는 제주 여행 서적을 읽어 보게 되었다.


   프롤로그에서부터 제주의 핫한 정보들을 담기 위해 얼마나 고심을 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섬 전체가 핫 플레이스인 제주도는 한 달이 멀다 하고 핫 스폿이 추가된다고 할 정도이니, 지은이들(저자가 두 명이다)이 다음과 같이 말할 만하다.


제작 기간이 길어진 것은 취재를 다 마쳤다 싶을 때

'여긴 꼭 넣어야 해' 하는 곳이 끊임없이 생겼기 때문이다.

핑핑 도는 제주도의 속도를 따라잡는 것조차 숨이 헉헉거릴 정도다.

그게 요즘 제주다.


- 본서 4쪽 -


   지은이들은 '감성에 기대는 에세이 스타일도 진부하고, 온갖 정보 때려 넣은 백과사전 스타일도 따분하다'라며,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여행의 맥을 짚어주는 책, 꼭 필요한 정보만 담되 사진은 시원시원하고 글은 간단명료하게 담고 싶었다고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내가 그 많은 제주도 여행 서적, 국내 여행 서적 중 이 책을 골랐던 건 바로 프롤로그의 저 말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요즘 제주>를 훑어보는 내내 나는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알차다는 느낌과 함께, 요리조리 정리를 깔끔하게 참 잘했다는 인상을 지배적으로 받았다. 지은이들의 바람대로 '똑소리 나는 가이드 역할'을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이 책의 목차 뒤에 수록된 제주도 교통편에 대한 깨알 같은 알짜 정보는 제주도에 갈 때 항공편과 선편 중 어떤 교통편을 어떻게 저렴하게 구하고 제주도 안에서 어떤 교통편을 이용할지에 대한 고민을 어느 정도 해소해준다. 그 뒤에 이어진 PART1에서는 요즘 제주 숙소 트렌드와 본인의 여행 테마에 따른 숙소 고르기 팁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이와 함께 요즘 제주의 별미를 '토종 별미'와 '신흥 별미'로 나누어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PART2는 깔끔 시원한 정리왕일 것 같은 두 지은이의 특기를 십분 발휘한 파트이자 이 책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본 부분이다. 총 PART11까지 나뉘어 있는 이 책에서 분량이 가장 적은 파트임에도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갖고 있는 PART2! 여기엔 취향에 따라 나누어 놓은 22가지 테마 여행과 일행 & 상황에 따라 골라 즐길 수 있는 6가지 코스 여행이 실려 있다.

   22가지 테마 중 내가 끌렸던 세 가지 테마는 '말과 초원 여행', '오름 여행', 그리고 '건축물 여행'이었다. 고르고 보니 자연과 건축물, 이 두 가지 키워드로 내가 하고픈 제주도 여행이 요약된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던' 제주도 여행에 대해 가닥을 잡아가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갔던 제주도 여행에선 이 두 가지 키워드를 충족하지 못해 여행 기간 내내 아쉬웠었는데, 그게 여기서 이런 식으로 다 드러나고 있다. 하하하.

   '6가지 코스' 여행 중 가장 핫한 스폿으로만 짜인 '2박 3일 커플 여행'보다 '2박 3일 나 홀로 버스 여행'에 왠지 내가 더 끌리는 건, 지금 내 옆자리가 허전하기 때문은 절대 아니다(진짜다). 나 홀로 버스 여행 코스는 커플 여행이더라도 둘 다 운전을 못한다든가, 버스 여행에 로망이 있는 커플들이라면 도전해볼 만한 코스라고 느껴졌다. 렌터카보다는 확실히 이동하는 시간이 더 길긴 하지만, 이렇게 버스를 이용해 3일 동안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것도 나름 괜찮아 보인다. 물론 쾌적한 버스 여행을 위해 캐리어보단 배낭이 더 필수겠지만 말이다. 그 외 '뒹굴고 만들고 즐기는 2박 3일 가족 여행', '바람돌이 되어 제주 한 바퀴 2박 3일 스쿠터 일주 여행' 등등이 소개돼 있다. 일행과 상황에 따라 나누어 짜놓은 이 6가지 코스는 다소 빡빡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 본인의 상황에 따라 덜어내는 센스를 발휘하면 좋을 듯하다.



   PART3부터 PART8에는 제주도를 제주시 중심권/동부권/서부권, 서귀포시 중심권/동부권/서부권 이렇게 6개로 쪼개어 권역별로 세분화된 제주의 정보를 소개하고 있다. 각 권역을 소개할 때마다 가장 먼저 그 지역의 버킷리스트 10개를 추려내어 '이거 안 해보면 넌 여기 안 와본 거나 마찬가지야'라고 느낄만한 것들을 추천하고 있고, 그와 더불어 해당 권역마다 지도 또한 수록해놓았다. 그 후 권역별로 가 볼 만한 명소와 먹어볼 만한 맛집, 카페, 숍, 숙소들이 세세하게 나와있다. 이러한 핫 스폿들이 -이 책 전체를 통틀어- 무려 377곳에 달한다!


   PART9는 제주 주변에 있는 섬들인 우도, 마라도, 가파도, 비양도에 대해 소개되어 있다. PART10에는 한라산이, PART11에서는 총 26개의 코스로 이루어진 제주 올레길 중 저자가 직접 걸어본 후 추천하는 7개의 올레길이 나와 있다. 이 올레길 중 바람이 많이 부는 바닷길로 유명한 '20코스'를 걷기 위해 내 마음은 이미 제주도에 가 있는 듯하다. 추천 올레길 중 바다 색깔이 가장 예뻐 보였던 이 코스에 내 마음을 홀딱 빼앗겼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다시 제주도로 가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다. 더구나 얼마 전 갔던 제주도 여행에서 나름 맛집만 골라 먹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어쩜 이럴 수가. 이 책과 겹치는 곳이 딱 한 군데밖에 없다. 딱 한 군데! 맛있는 우동을 먹으며 '세상에서 가장 뷰가 좋은 우동집'일 거라고 내가 가족들에게 명명했던, 바로 '수우동' 말이다. (여담이지만 이 책에 나와 있는 사진 속 비양도가 보이는 자리에서 먹었다! 꺅!)

   이것만 보아도 제주도는 더 이상 일주일 안에 다 볼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듯하다. 지난 제주도 여행에서도 그랬고 이 책을 다 보고 난 후 또 여행 때처럼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생각이 있는데, 그건 바로 제주도는 여행만이 아니라 한 번은 꼭 살아보고 싶은 꿈의 공간이라는 거다. 물론 그 엄청난 물가와 집값, 온라인에서 뭘 주문하든 도서 산간 배송비가 부과된다는 단점에 익숙해질 수 있다면 말이다.


   지난번 제주 여행 내내 옆구리에 끼고 있었던, 렌터카 회사에서 제공해준 제주 명소 지도는 얼마나 수시로 열었다 폈다 했는지 여행 마지막 날에는 가장자리가 다 찢어져 있었다. 모바일 지도보다는 특대 사이즈 지도가 여행을 더욱 맛깔스럽게 만들어준다는 생각이 확실히 든다. 이 책 제일 앞에 선물처럼 끼워져 있는 '베스트 100' 제주 전도를 들고 제주도를 누비고 다닐 나를 상상하니 벌써 배가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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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 보태니컬 아트 세트 (본책 + 컬러링북) - 전2권 기초 보태니컬 아트
송은영 지음 / EJONG(이종문화사) / 2019년 4월
평점 :
품절



   요사이 마음에 여유가 조금 생겼는지, 간만에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호기롭게 펼쳐든 '기초 보태니컬 아트 세트'. 보태니컬 아트 기법서와 컬러링북으로 구성된 세트였다.


   '보태니컬 아트(Botanical Art)'.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이와 비슷한 장르를 어릴 때부터 접해왔다. 백과사전 속의 그 정밀하고도 생생한 식물 그림들이 기억나는가? 식물학적으로 정밀하고 정확하게 그려진 그 그림들을 일컬어 '보태니컬 일러스트레이션(Botanical illustration)'이라고 하는데, 이에 기초하여 예술적 감성을 더해 시작된 장르를 '보태니컬 아트'라고 한다.



   식물학적인 정확성과 미학적인 감성을 가진 식물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우는 게 목표라는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고등학교 시절의 그 일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술 시간에 자유 주제로 볼펜화 그리기 수업을 했었는데 나는 잡지 속의 금발머리 꼬마 아이 전신을 볼펜화로 그려냈었다. 난이도가 꽤 높은 편이었지만 그대로 보고 그리는 건 자신 있었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아이를 선택했고, 큰 어려움 없이 완성했다(엄밀히 말하자면 기말고사가 겹쳐서 95% 정도 완성했지만 A+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보태니컬 아티스트 미쉘(송은영) 작가가 만든 이 '기초 보태니컬 아트'로 그때의 쾌감을 느끼며 스트레스를 풀어보려고 했었던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그대로 보고 그리는 건' 늘 자신 있었으니까.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내가 미술 수업 중 가장 자신 있었던 건 바로 정밀화였으니까.


   그런데 그게 과거형이 되어버렸을 줄이야. (흑흑)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 후 풀어보겠다.



   이 책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뉘어 있다. 파트 1에는 보태니컬 아트의 정의와 유래, 색연필화에 쓰이는 재료들과 기초 기법, 그리고 색연필화를 위한 5단계가 소개되어 있다. 파트 1에서는 이 '색연필화를 위한 5단계'가 핵심이라 볼 수 있는데, 실전 그리기인 파트 2와 파트 3의 모든 식물들이 바로 이 5단계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파트 2에서는 꽃의 구조를 먼저 알아본 뒤 꽃 그리기가 시작되는데, 다양한 색상의 18가지 꽃을 스케치하는 법과 색연필로 채색하는 방법이 나와있다. 파트 3에서는 잎의 구조를 알아본 후 작약, 장미, 백목련 등 앞서 파트 2에 나왔던 꽃들 중 몇몇 꽃들의 잎을 스케치하고 채색하는 방법이 나와 있다.

   이 책의 핵심인 '색연필화를 위한 5단계'를 간단히 줄이면 다음과 같다. 1단계 'Texture'에서는 식물의 질감을 파악하고 표현한다. 2단계 'Tone Value'에서는 질감에 따른 빛과 어둠에 대해 이해하여 명암도를 표현한다. 3단계 'Mood'에서는 식물 본연의 색을 표현한다. 4단계 'Shade & Contrast'에서는 음영 표현으로 전체적인 어우러짐을 정리하고 명암대비를 통해 식물의 입체감을 표현한다. 5단계 'Detail'에서는 그림을 그리며 놓친 부분은 없는지 구조적 특징, 질감, 명암, 입체감 표현, 아웃라인 정리 등 전체적으로 그림을 꼼꼼하게 살펴보며 확인하며 수정해서 마무리한다.


   영국 SBA(The Society of Botanical Artists)의 한국인 최초이자 -여전히- 유일한 멤버라는 송은영 작가의 기법 설명은 참 간결했다. 음, 너무 간결해서 조금 더 상세해도 되지 않았나 싶을 만큼. 어쨌든 눈으로 이 책을 한 번 완독했을 때만 해도 나는 마치 밥 아저씨가 된 것 마냥 모든 게 그럭저럭 해볼 만하다고 느꼈다.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해볼 만할 거라고 말이다.


   자, 아래는 나의 '칼라(Calla palustris)'의 현재 상황이다.



   이게 7일 동안 틈틈이 그린 거라고 말한다면, 과연 믿기겠는가? 나도 믿기지 않는다! '그대로 그리는 건' 꽤 자신 있었던 내가, 어쩌다 그대로 보고 그리는 것조차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는지... 틈틈이 그리는 내내 어쩜 이렇게 못 따라 그릴 수가 있는지, 나 스스로가 너무 실망스러웠다. 예전의 내 모습에서 멀어진 것 같아 속상한 마음에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내 칼라의 불염포의 무늬는 전혀 살아있질 않다. 작가는 명암까지만 넣어도 칼라가 살아날뛰는데 나는 명암을 제대로 다 넣기도 전에 저렇게 그냥 그저 그런 일러스트가 되어버린다. 정말 참담하다. 손이 완전히 굳어버린 걸까? 아니면 일주일이라는 시간 안에 다 그려보려고 욕심을 부린 탓에 그런 것일까?


   어쩌면 똑같은 색상의 색연필이 없었다는 사실로 시작부터 좀 삐거덕거렸는지도 모른다. 파버카스텔 색연필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내가 가진 36가지 색 중 이 책에 있는 파버카스텔 색연필과 같은 색상은 단 하나도 없었다. 블랙마저 이 책은 199번 색이고 내 건 399번 색이다. 무슨 차이가 있는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번호가 다르다. 책 속 칼라(Calla palustris)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불염포의 무늬와 명암, 줄기의 명암을 송은영 작가는 크롬 그린 오페크(174번) 색연필로 그렸지만 나는 이와 유사한 색상이 없어서 그냥 블랙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


   첫째 날에는 되든 안 되는 열심히 그렸다. 간만에 그리는 정밀화에 무척 흥분해 아드레날린이 과잉인 상태였는지, 내가 뭘 그리고 있든 어쨌든 재밌었으니까. 그런데 둘째 날부터 이성을 찾은 나는 내가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그날부터 며칠 동안은 매일 칼라의 맥을 3~4개 그리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렇게 열심히 조금씩 그려나갔던 칼라를 5일째 되던 날 내 완벽주의 레이더가 '...이건 아무리 봐도 전혀 똑같지 않잖아!!'라며 결국 다 지워버렸다. 잦은 지우개질 탓에 종이 질이 좀 안 좋아졌지만 그래도 아직 포기하긴 싫었다. 나는 다시 칼라의 질감을 그리고, 명암을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렇게 또 엉망이다.


   아무 생각 없이 색만 채워 넣는 컬러링이나 내 마음대로 그리는 일러스트를 그릴 거였다면 내가 이 책을 왜 선택했겠는가. 이 책의 목적은 '식물학적으로 정확성을 가지되 미학적인 감성으로 표현하는데 초점을 둔' 보태니컬 아트 그리기이다. '완성에만 의의를 둔다'라는 생각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그렸다면 그것은 보태니컬 아트가 될 수 없다. 네버.



   나의 보태니컬 아트 -단기간- 도전은 완벽한 실패다. 이 글의 제목을 '나의 보태니컬 아트 실패기'라고 수정해도 될 정도다. 저렇게 미완성인 그림을 찍어서 올린 것조차 부끄러워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하지만 어떡하겠나. 이게 지금 내 현실이다. 한 걸음이라도 발전하려면 일단 실패부터 인정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호기롭게 도전했다가 멘붕만 안겨준 보태니컬 아트. 일단 내 멘탈부터 바로잡고 다시 찬찬히 시간을 들여 도전해봐야겠다. 송은영 작가는 이 식물들을 완성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 각 식물별로 작가가 할애한 시간이라도 적어줬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초보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도전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장르라는 걸 '소요 시간'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스트레스 풀려다가 스트레스를 더 받아 멘탈이 나가버릴 정도로 어렵긴 하지만, 매력적인 장르임은 분명해 보인다. 정확한 묘사를 한 아름다운 식물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호강하고 마음은 즐거워지니까 말이다. 보태니컬 아트나 보태니컬 일러스트레이션을 업으로 삼은 모든 분들이 참 위대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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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미래 연구소 - 전 세계 ‘너드’들이 열광한 과학 블로거의 대담한 미래 예측
잭 와이너스미스 & 켈리 와이너스미스 지음, 곽영직 옮김 / 시공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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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를 예측해본다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10년 후 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이를 그려보는 일은 대체적으로 현재의 상황이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는 변수가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 낙관적으로 그려보게 되곤 한다.

   미래의 내 모습뿐만 아니라 미래의 '세상'을 예측해보는 것 역시 어렸을 때부터 빈번히 해왔던 일이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강요에 의해 했었던 미래 세상 예측하기는 지금까지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 내가 20년 후로 예측한 미래의 기술 중 두어 개가 떠오르는데, '3시간 후 녹아 사라지는 일회용 우산(줄여서 '3시간 우산')'과 '수중 도시'였다. 그 후 여태까지 내가 살아오며 지켜온 바에 따르면 '3시간 우산'은 아직도 만들어지지 않아 일반 일회용 우산으로 인한 쓰레기가 환경오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또한 인류는 수중 도시와 같은 쓸데 없는 일에 돈을 쓸 확률이 거의 없고, 앞으로도 지상에 큰 재앙이 생기거나 돈이 남아돌지 않는 이상은 수중 도시 따위에 세금을 쓸 일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대신 현재 인류는 우주 식민지 건설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 읽은 <이상한 미래 연구소>는 '수중 도시'와 같은 쓸 데 없는 상상이 아니라 현재의 과학 기술을 기반으로 한 미래 예측 과학서이다. 책의 저자가 두 명인데, 이들은 부부다. 책 속에 적혀 있는 사실을 토대로 이 부부를 소개해보자면, 아내인 켈리 와이너스미스는 생명공학부 교수인데 숙주의 행동을 조종하는 기생충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헐, 정말 흥미진진한 연구이다!). 또한 자연과학 분야 톱 20위 안에 드는 팟캐스트의 공동 진행자이기도 하단다. 남편 잭 와이너스미스는 '토요일 아침에는 시리얼로 아침식사를(Saturday Morning Breakfast Cereal, 줄여서 SMBC)'라는 웹 코믹 블로그를 운영하며 과학부터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을 재밌는 농담으로 버무려 만화를 그리는 만화 작가이다. 지금까지 내가 써온 글들을 읽어온 분이라면 저자에 대해 이렇게 자세한 소개를 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는 걸 알 거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본 분이라면 이 두 명의 저자는 이렇게 상세한 소개를 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라는 걸 공감할 것이다(!).


   그렇다. 이해하기 어려운 과학 기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라면 지루하고 따분해서 기피해버릴만한 내용으로 가득한 이 미래 예측 과학서는, 담고 있는 주제의 분위기와는 상반되게 위트 넘치고 재미있는 농담으로 가득한 책이다. 한마디로 -이따금 어려우면서도- 무척 재미있는 과학서라는 거다.





   저자들은 여러 전문 과학 서적과 논문을 탐독하며 지금 핫하게 떠오르고 있는 분야 10가지를 골랐다. '저렴한 우주여행', '소행성 광산', '핵융합 발전', '프로그램 가능한 물질', '로봇 건축', '증강 현실', '합성 생명체', '정밀의학', '바이오 프린팅',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이렇게 열 가지로 말이다. 이 분야들 중 대다수는 뉴스나 미국 드라마, 혹은 다른 과학서로부터 접해 와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주제들이었고, 그래서 이해하기도 쉬웠다. 하지만 '소행성 광산'이나 '프로그램 가능한 물질', '로봇 건축'은 내 상상 속에서나 접했지 현실에서 이런 분야에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애니메이션 '빅 히어로'에서 주인공이 개발한 로봇으로 나왔던 '마이크로봇'이 현실에서도 연구되고 있었다니, 이게 정말 현실이냐고! 뭐, 지금 '프로그램 가능한 물질' 분야의 기술 수준은 고작 자동으로 종이를 접는 게 다여서 아쉽긴 하지만, 이 분야가 활발히 연구 중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내 가슴은 충분히 두근거린다. 히로('빅 히어로'의 주인공)의 마이크로봇이 가진 능력을 당장 현실로 도입할 수 있다면 '프로그램 가능한 물질'의 모듈 로봇 분야와 '로봇 건축'의 건축용 로봇 무리 분야는 엄청나게 발전하게 될 텐데(그럼 저자들은 자신들이 선별한 과학 기술 분야가 눈부시게 발전되고 있다고 기뻐할 텐데! 하하하).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관심이 생긴 분야는 바로 '로봇 건축'이다. 그렇다. 집, 집, 그놈의 집. 무주택자들에게 있어 자신의 집을 가지게 된다는 건 정말 꿈만 같은 일이다. 더구나 나처럼 단독주택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가진 아파트 혐오는 이런 열망을 더욱 뜨겁게 달군다. 허나 현재 집을 지으려면 땅값도 그렇지만 건축비용이 만만치가 않다. 건축은 사람의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건축 비용보다 40%, 혹은 훨씬 더 저렴한 비용에다가 완성하기까지 24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면 어떻겠는가? 로봇 건축 분야가 이대로 계속 발전이 되면 멀지 않은 미래에 그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건축은 내가 죽을 때까지 기계의 힘을 빌린 인간들의 전유물로 남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이 책은 내 생각이 얼마나 꽉 막혀있었는지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현재 로봇 건축 분야에서 대두되고 있는 기술들을 이 책에선 크게 '로봇 건축 노동자'와 '거대한 3D 프린터', '로봇 무리' 이렇게 나누어 파고들고 있다. 이 세 가지 기술 중 가장 실용적인 수준으로 발전되어 있다고 느껴진 건 바로 '거대한 3D 프린터'다. 이미 현실의 여러 분야에서 쓸모 있게 활용되고 있는 3D 프린터는 저자 잭 와이너스미스의 '2027년 로봇들의 반란' 농담만큼이나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한다(내가 제대로 카운팅 한 게 맞다면 '핵융합 발전'에서 처음 등장한 '2027년 로봇들의 반란' 개그 드립은 '프로그램 가능한 물질'에서, '증강현실'에서, '정밀의학'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그중 베흐록 코시네비스 박사가 고안한 -거대한 3D 프린터와 로봇 팔을 이용해 집을 짓는- '컨투어 크래프팅'이란 기술과 스티븐 키팅 박사가 만든 '로봇 주택 건축 트럭'은 상당 수준 완성된 기술들이다. 우스운 건, 이들이 당장 상용화되기 어려운 이유가 기술의 한계가 아닌 법률의 한계 때문이란 거다. 미국 같은 경우 집을 지을 때 기초, 벽, 배관 등등 각 단계마다 사람을 보내 검사를 하는데, 하루 동안 집을 지을 수 있게 된다면 이 검사들이 원활히 이루어지기 힘들게 된다. 획기적인 로봇 건축 방법에 맞게 건축 허가 측정 시스템 또한 적절하게 변화된다면 머지않아 로봇 건축으로 지은 집들이 매물로 많이 올라오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로봇 건축 다음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주제는 위에서 이미 짧게 언급했던 '프로그램 가능한 물질'과 열한 번째 챕터인 '결론'이다. '더 먼 미래에 등장할 기술들, 또는 잃어버린 장들의 공동묘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열한 번째 챕터는 저자들이 이 책을 구상하며 안락사시킬 수밖에 없었던 주제들, 즉 공동묘지에 들어간 주제들을 잠시 꺼내와 햇볕을 쬐도록 기회를 준 장이다. 안타깝지만 구글 드라이브 폴더라는 무덤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주제들은 총 4가지로, '우주 태양광 발전소', '첨단 보장구', '상온 전도체', '양자 컴퓨터'가 그것이다. 각각의 기술들이 매력적인 주제이긴 하지만 책의 메인 챕터로 넣을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글을 끝맺고 나면 해당 기술이 적힌 묘비 그림이 위트 있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게 무척 재미있어 실소를 자아낸다(나 진짜 너드인가 봐... 이 그림들이 그렇게나 웃기다니!).


   영 달라 보이는 분야라도 의외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과학 기술 분야가 많듯이, 이 책의 내용들 또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부분들이 많다. 이는 과학 분야라는 특수성과 더불어 저자들의 유머와 말솜씨로부터 기인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핵융합을 '사교성 없는 덕후 커플의 데이트'에 비유할 줄 아는 저자의 내공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프로그램 가능한 물질' 편에서 스파게티 글자 농담(138쪽)을 일회성으로 끝내지 않고 뒤에 재언급(149쪽) 해서 웃음을 유발하는 식의 위트 있는 전개가 책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다(내가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면 직접 읽어보며 같이 웃어보시길). 저자들의 엉뚱하면서도 유쾌한 문체가 딱 내 스타일이어서 너무 재미있다.


   예전에 읽은 <위험한 과학책>과 이 <이상한 미래 연구소>를 비교해 본다면, 둘 다 재미있긴 한데 이 책은 <위험한 과학책>에 비하면 이미지가 풍부하지 않다는 게 좀 단점이다. 가령 로봇 건축에서 3D 프린터를 사용해서 만든 음식물의 설명을 예로 들어 보자. 젤리 안에 3차원 그림을 그려 넣는 방법을 설명하며 '정육면체나 나선 등의 귀여운 도형이었다'라는 텍스트에서 끝내지 말고 이미지를 곁들였다면 책의 볼륨이 얼마나 더 풍부해졌을까? 209쪽에서 "그의 웹 페이지를 방문해보면 3D 프린터로 만든 재치 있는 초콜릿뿐만 아니라 옥수수빵으로 만든 문어까지 볼 수 있다."라고 -또!- 텍스트만 나열할 게 아니라 그 문어 사진을 직접 삽입했으면 책에 대한 흥미도가 더욱 상승했을지도 모른다. 저작권 때문에 실제 사진을 삽입하기가 어려웠다면, <위험한 과학책>처럼 일러스트로 친절하게 곁들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안 그래도 어렵고 지루한 과학 서적을 이미지를 적게 넣어 완성하다니,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재미가 있다니! 역시 두 저자의 유머와 말발의 승리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인종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자신의 연구에 대한 답을 찾아 헤매고 있을 광경이 머릿속에 문득 그려졌다. 미래에 실제로 상용화될지 안 될지 그 여부도 불투명한 많은 과학 기술 분야들이 지금 이 시각에도 다양한 문제들을 헤쳐나가며 진보하고 있다. 저자들이 말했듯 단지 지금 당장 핵융합 발전을 할 수 없고, 주말에 금성으로 여행을 갈 수 없다는 이유로 이런 새로운 기술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이 참 많다. 하지만 과학 기술은 우리로부터 절대 멀어질 수 없는, 아주 현실적인 분야다. 32기가바이트 저장소가 지금처럼 휴대하기 편하게 된 지 불과 얼마 되었는지 한 번 생각해보라.


   놀랍고도 새로운 기술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는데 매일 SNS에나 시간을 낭비하며 아무 관심을 가지지 않을 텐가? 그런 인간들이 득실한 지구라면 저자 잭 와이너스미스의 우려대로 '2027년 로봇들의 반란'에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 것이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어쩌면- 실현될 가능성이 많은 과학 기술들이 가득한 이 책을, 과학 기술에 무관심한 당신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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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 zebra 9
우르슐라 팔루신스카 지음, 이지원 옮김 / 비룡소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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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촌은 신문을 보고 있어요.

   이모는 맛있는 감자를 곁들인 저녁을 준비한다고 하는군요.

   에밀리아는 에우제벡을 돌보고 있는 중이에요.

   에우제벡은 정원일을 열심히 돕고 있네요.

   카롤은 해변에서 경치를 즐기는 중이고요.

   바다 위에 있는 이웃집 아저씨는 수영을 배울 거래요.

   이웃집 아주머니는 시장에 간다는군요.

   우체부 아저씨는 우편물을 나르는 중이래요.

   목수 아저씨는 지붕을 고치고 있고요.

   숲속의 스카우트 대원들은 불침번을 서는 중이군요.


   위에 나열한 나이도 성별도 다른 이 사람들은 모두 한창 무언가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말이죠, 각기 다른 일들을 하고 있는 이들의 공통된 특징이 딱 하나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건 바로, 모두들 하늘을 향해 누워 있다는 것! 편안히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서, 실은 다들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중이었던가 봐요. 그림책 <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에서 하늘을 향해 누워 있는 이 사람들이 각자 무얼 보고 있는 중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삼촌의 얼굴엔 신문 속 활자와 함께 따스한 오후 햇살이 비치고 있네요. 나무 그늘 아래에 누워 있는 이모의 눈 속에는 곧고 큰 나무가 시원하게 뻗어 있을 거예요. 뙤약볕 아래 얼굴만 모자로 가린 채 태닝 중인 에밀리아의 얼굴엔 태양이 그려준 모자의 점박이 무늬가 한가득일 테고요. 들판에 누워 있는 어린 에우제벡의 눈은 손에 감긴 신기한 거미줄을 좇고 있느라 정신없어 보여요. 해변에 누워 왼쪽 다리를 주욱 뻗고 있는 카롤의 눈 속엔 멋진 태양과 자신의 거대한 발이 함께일 거고요. 바다 위 고무튜브 위에 누워있는 이웃집 아저씨의 눈 안엔 비행기가 남긴 하얀 꼬리와 함께 파아란 하늘의 여유로운 풍경이 자리 잡고 있네요. 시장에 가기 전 민들레를 발견하고 들판에 누운 이웃집 아주머니의 눈 속엔 하늘에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군요. 해먹에 누운 채 손으로 만든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고 있는 우체부 아저씨의 눈은 하늘의 어떤 모습을 하나하나 포착할지 궁금해지네요. 골조 아래 누워 있는 목수 아저씨가 보는 하늘은 기하학적으로 보여 몬드리안의 추상적인 그림이 생각나요.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하늘을 향해 누워 불침번을 서고 있는 두 스카우트 대원들의 눈 안엔, 타닥타닥 타는 모닥불의 불씨와 하얀 연기가 같이 춤을 추며 어우러져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에 몽환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군요.





   모두들 자리 잡고 누워 여유로움을 마음껏 만끽하고 있는데요. '나'라는 여자아이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렇게 누워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다닙니다. 마치 동네 반장처럼 말이죠. 여자아이는 돌아다니기 무척 귀찮았어도 아마 작가의 의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작가가 시키는 대로 동네를 살피러 다닐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하하하). 여자아이는 돌고 돌아 다시 삼촌과 이모에게로 돌아와요. 그리고 자신 또한 하늘 향해 눕는답니다. 여자아이는 어떤 하늘을 보고 있을까요?


   그림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CG를 사용한 것 같은 감각적이면서도 간결한 느낌이 가장 큰데요.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 여기저기 종이를 찢은 듯한 거친 느낌으로 마무리된 곳이 많이 보입니다. 이를 보아 짐작해보건대 CG와 수작업을 함께 곁들인 듯하군요. 페이지마다 검정과 흰색 외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색상으로만 꾸몄는데, 그 단순함이 굵고 큼직큼직한 그림체를 더욱 강렬하게 와닿게 합니다. 두 번, 세 번, 보면 볼수록 절제된 색감과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게 딱 필요한 만큼만 자리 잡은 텍스트가 이 그림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무척 잘 표현하고 있다고 느껴져요.





   하늘을 향해 누워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무척 편안해 보이지 않나요? 그래서 저도 그저께 해 질 녘 집 앞 공원에 갔다가 간만에 정자의 벤치 위에 누워봤어요. 여름의 해는 저녁 7~8시 전후로 무척 늦게, 그리고 무척 뜨겁게 지지만, 엊그제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뒤부터 하늘이 계속 흐리기만 해서 해 질 녘인데도 세상이 그리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이런 한가로움을 느껴본 게 너무나 까마득했던지라, 찌푸린 하늘의 차가운 표정조차 좋아 보였어요. 시원한 바람을 들이키니 여기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네? 뭐라고요? 그림책 속 사람들이나 저나 모두 한가해 보여 부럽다고요? 뭘 부러워하고만 있어요! 부러워하고 있는 지금 바로 그 자리에서 눕기만 하면 되잖아요. 야외라서 좀 그렇다고요? 방이라서 천장밖에 안 보일 거라고요?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자, 지금 당장 눈을 감고 그대로 누워 보세요. 자리를 잡았으면 이제 눈을 떠도 좋아요. 당신이 누운 하늘엔 지금, 어떤 풍경이 보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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