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 보태니컬 아트 세트 (본책 + 컬러링북) - 전2권 기초 보태니컬 아트
송은영 지음 / EJONG(이종문화사) / 2019년 4월
평점 :
품절



   요사이 마음에 여유가 조금 생겼는지, 간만에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호기롭게 펼쳐든 '기초 보태니컬 아트 세트'. 보태니컬 아트 기법서와 컬러링북으로 구성된 세트였다.


   '보태니컬 아트(Botanical Art)'.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이와 비슷한 장르를 어릴 때부터 접해왔다. 백과사전 속의 그 정밀하고도 생생한 식물 그림들이 기억나는가? 식물학적으로 정밀하고 정확하게 그려진 그 그림들을 일컬어 '보태니컬 일러스트레이션(Botanical illustration)'이라고 하는데, 이에 기초하여 예술적 감성을 더해 시작된 장르를 '보태니컬 아트'라고 한다.



   식물학적인 정확성과 미학적인 감성을 가진 식물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우는 게 목표라는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고등학교 시절의 그 일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술 시간에 자유 주제로 볼펜화 그리기 수업을 했었는데 나는 잡지 속의 금발머리 꼬마 아이 전신을 볼펜화로 그려냈었다. 난이도가 꽤 높은 편이었지만 그대로 보고 그리는 건 자신 있었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아이를 선택했고, 큰 어려움 없이 완성했다(엄밀히 말하자면 기말고사가 겹쳐서 95% 정도 완성했지만 A+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보태니컬 아티스트 미쉘(송은영) 작가가 만든 이 '기초 보태니컬 아트'로 그때의 쾌감을 느끼며 스트레스를 풀어보려고 했었던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그대로 보고 그리는 건' 늘 자신 있었으니까.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내가 미술 수업 중 가장 자신 있었던 건 바로 정밀화였으니까.


   그런데 그게 과거형이 되어버렸을 줄이야. (흑흑)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 후 풀어보겠다.



   이 책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뉘어 있다. 파트 1에는 보태니컬 아트의 정의와 유래, 색연필화에 쓰이는 재료들과 기초 기법, 그리고 색연필화를 위한 5단계가 소개되어 있다. 파트 1에서는 이 '색연필화를 위한 5단계'가 핵심이라 볼 수 있는데, 실전 그리기인 파트 2와 파트 3의 모든 식물들이 바로 이 5단계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파트 2에서는 꽃의 구조를 먼저 알아본 뒤 꽃 그리기가 시작되는데, 다양한 색상의 18가지 꽃을 스케치하는 법과 색연필로 채색하는 방법이 나와있다. 파트 3에서는 잎의 구조를 알아본 후 작약, 장미, 백목련 등 앞서 파트 2에 나왔던 꽃들 중 몇몇 꽃들의 잎을 스케치하고 채색하는 방법이 나와 있다.

   이 책의 핵심인 '색연필화를 위한 5단계'를 간단히 줄이면 다음과 같다. 1단계 'Texture'에서는 식물의 질감을 파악하고 표현한다. 2단계 'Tone Value'에서는 질감에 따른 빛과 어둠에 대해 이해하여 명암도를 표현한다. 3단계 'Mood'에서는 식물 본연의 색을 표현한다. 4단계 'Shade & Contrast'에서는 음영 표현으로 전체적인 어우러짐을 정리하고 명암대비를 통해 식물의 입체감을 표현한다. 5단계 'Detail'에서는 그림을 그리며 놓친 부분은 없는지 구조적 특징, 질감, 명암, 입체감 표현, 아웃라인 정리 등 전체적으로 그림을 꼼꼼하게 살펴보며 확인하며 수정해서 마무리한다.


   영국 SBA(The Society of Botanical Artists)의 한국인 최초이자 -여전히- 유일한 멤버라는 송은영 작가의 기법 설명은 참 간결했다. 음, 너무 간결해서 조금 더 상세해도 되지 않았나 싶을 만큼. 어쨌든 눈으로 이 책을 한 번 완독했을 때만 해도 나는 마치 밥 아저씨가 된 것 마냥 모든 게 그럭저럭 해볼 만하다고 느꼈다.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해볼 만할 거라고 말이다.


   자, 아래는 나의 '칼라(Calla palustris)'의 현재 상황이다.



   이게 7일 동안 틈틈이 그린 거라고 말한다면, 과연 믿기겠는가? 나도 믿기지 않는다! '그대로 그리는 건' 꽤 자신 있었던 내가, 어쩌다 그대로 보고 그리는 것조차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는지... 틈틈이 그리는 내내 어쩜 이렇게 못 따라 그릴 수가 있는지, 나 스스로가 너무 실망스러웠다. 예전의 내 모습에서 멀어진 것 같아 속상한 마음에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내 칼라의 불염포의 무늬는 전혀 살아있질 않다. 작가는 명암까지만 넣어도 칼라가 살아날뛰는데 나는 명암을 제대로 다 넣기도 전에 저렇게 그냥 그저 그런 일러스트가 되어버린다. 정말 참담하다. 손이 완전히 굳어버린 걸까? 아니면 일주일이라는 시간 안에 다 그려보려고 욕심을 부린 탓에 그런 것일까?


   어쩌면 똑같은 색상의 색연필이 없었다는 사실로 시작부터 좀 삐거덕거렸는지도 모른다. 파버카스텔 색연필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내가 가진 36가지 색 중 이 책에 있는 파버카스텔 색연필과 같은 색상은 단 하나도 없었다. 블랙마저 이 책은 199번 색이고 내 건 399번 색이다. 무슨 차이가 있는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번호가 다르다. 책 속 칼라(Calla palustris)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불염포의 무늬와 명암, 줄기의 명암을 송은영 작가는 크롬 그린 오페크(174번) 색연필로 그렸지만 나는 이와 유사한 색상이 없어서 그냥 블랙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


   첫째 날에는 되든 안 되는 열심히 그렸다. 간만에 그리는 정밀화에 무척 흥분해 아드레날린이 과잉인 상태였는지, 내가 뭘 그리고 있든 어쨌든 재밌었으니까. 그런데 둘째 날부터 이성을 찾은 나는 내가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그날부터 며칠 동안은 매일 칼라의 맥을 3~4개 그리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렇게 열심히 조금씩 그려나갔던 칼라를 5일째 되던 날 내 완벽주의 레이더가 '...이건 아무리 봐도 전혀 똑같지 않잖아!!'라며 결국 다 지워버렸다. 잦은 지우개질 탓에 종이 질이 좀 안 좋아졌지만 그래도 아직 포기하긴 싫었다. 나는 다시 칼라의 질감을 그리고, 명암을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렇게 또 엉망이다.


   아무 생각 없이 색만 채워 넣는 컬러링이나 내 마음대로 그리는 일러스트를 그릴 거였다면 내가 이 책을 왜 선택했겠는가. 이 책의 목적은 '식물학적으로 정확성을 가지되 미학적인 감성으로 표현하는데 초점을 둔' 보태니컬 아트 그리기이다. '완성에만 의의를 둔다'라는 생각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그렸다면 그것은 보태니컬 아트가 될 수 없다. 네버.



   나의 보태니컬 아트 -단기간- 도전은 완벽한 실패다. 이 글의 제목을 '나의 보태니컬 아트 실패기'라고 수정해도 될 정도다. 저렇게 미완성인 그림을 찍어서 올린 것조차 부끄러워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하지만 어떡하겠나. 이게 지금 내 현실이다. 한 걸음이라도 발전하려면 일단 실패부터 인정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호기롭게 도전했다가 멘붕만 안겨준 보태니컬 아트. 일단 내 멘탈부터 바로잡고 다시 찬찬히 시간을 들여 도전해봐야겠다. 송은영 작가는 이 식물들을 완성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 각 식물별로 작가가 할애한 시간이라도 적어줬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초보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도전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장르라는 걸 '소요 시간'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스트레스 풀려다가 스트레스를 더 받아 멘탈이 나가버릴 정도로 어렵긴 하지만, 매력적인 장르임은 분명해 보인다. 정확한 묘사를 한 아름다운 식물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호강하고 마음은 즐거워지니까 말이다. 보태니컬 아트나 보태니컬 일러스트레이션을 업으로 삼은 모든 분들이 참 위대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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