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 zebra 9
우르슐라 팔루신스카 지음, 이지원 옮김 / 비룡소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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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촌은 신문을 보고 있어요.

   이모는 맛있는 감자를 곁들인 저녁을 준비한다고 하는군요.

   에밀리아는 에우제벡을 돌보고 있는 중이에요.

   에우제벡은 정원일을 열심히 돕고 있네요.

   카롤은 해변에서 경치를 즐기는 중이고요.

   바다 위에 있는 이웃집 아저씨는 수영을 배울 거래요.

   이웃집 아주머니는 시장에 간다는군요.

   우체부 아저씨는 우편물을 나르는 중이래요.

   목수 아저씨는 지붕을 고치고 있고요.

   숲속의 스카우트 대원들은 불침번을 서는 중이군요.


   위에 나열한 나이도 성별도 다른 이 사람들은 모두 한창 무언가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말이죠, 각기 다른 일들을 하고 있는 이들의 공통된 특징이 딱 하나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건 바로, 모두들 하늘을 향해 누워 있다는 것! 편안히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서, 실은 다들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중이었던가 봐요. 그림책 <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에서 하늘을 향해 누워 있는 이 사람들이 각자 무얼 보고 있는 중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삼촌의 얼굴엔 신문 속 활자와 함께 따스한 오후 햇살이 비치고 있네요. 나무 그늘 아래에 누워 있는 이모의 눈 속에는 곧고 큰 나무가 시원하게 뻗어 있을 거예요. 뙤약볕 아래 얼굴만 모자로 가린 채 태닝 중인 에밀리아의 얼굴엔 태양이 그려준 모자의 점박이 무늬가 한가득일 테고요. 들판에 누워 있는 어린 에우제벡의 눈은 손에 감긴 신기한 거미줄을 좇고 있느라 정신없어 보여요. 해변에 누워 왼쪽 다리를 주욱 뻗고 있는 카롤의 눈 속엔 멋진 태양과 자신의 거대한 발이 함께일 거고요. 바다 위 고무튜브 위에 누워있는 이웃집 아저씨의 눈 안엔 비행기가 남긴 하얀 꼬리와 함께 파아란 하늘의 여유로운 풍경이 자리 잡고 있네요. 시장에 가기 전 민들레를 발견하고 들판에 누운 이웃집 아주머니의 눈 속엔 하늘에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군요. 해먹에 누운 채 손으로 만든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고 있는 우체부 아저씨의 눈은 하늘의 어떤 모습을 하나하나 포착할지 궁금해지네요. 골조 아래 누워 있는 목수 아저씨가 보는 하늘은 기하학적으로 보여 몬드리안의 추상적인 그림이 생각나요.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하늘을 향해 누워 불침번을 서고 있는 두 스카우트 대원들의 눈 안엔, 타닥타닥 타는 모닥불의 불씨와 하얀 연기가 같이 춤을 추며 어우러져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에 몽환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군요.





   모두들 자리 잡고 누워 여유로움을 마음껏 만끽하고 있는데요. '나'라는 여자아이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렇게 누워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다닙니다. 마치 동네 반장처럼 말이죠. 여자아이는 돌아다니기 무척 귀찮았어도 아마 작가의 의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작가가 시키는 대로 동네를 살피러 다닐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하하하). 여자아이는 돌고 돌아 다시 삼촌과 이모에게로 돌아와요. 그리고 자신 또한 하늘 향해 눕는답니다. 여자아이는 어떤 하늘을 보고 있을까요?


   그림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CG를 사용한 것 같은 감각적이면서도 간결한 느낌이 가장 큰데요.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 여기저기 종이를 찢은 듯한 거친 느낌으로 마무리된 곳이 많이 보입니다. 이를 보아 짐작해보건대 CG와 수작업을 함께 곁들인 듯하군요. 페이지마다 검정과 흰색 외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색상으로만 꾸몄는데, 그 단순함이 굵고 큼직큼직한 그림체를 더욱 강렬하게 와닿게 합니다. 두 번, 세 번, 보면 볼수록 절제된 색감과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게 딱 필요한 만큼만 자리 잡은 텍스트가 이 그림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무척 잘 표현하고 있다고 느껴져요.





   하늘을 향해 누워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무척 편안해 보이지 않나요? 그래서 저도 그저께 해 질 녘 집 앞 공원에 갔다가 간만에 정자의 벤치 위에 누워봤어요. 여름의 해는 저녁 7~8시 전후로 무척 늦게, 그리고 무척 뜨겁게 지지만, 엊그제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뒤부터 하늘이 계속 흐리기만 해서 해 질 녘인데도 세상이 그리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이런 한가로움을 느껴본 게 너무나 까마득했던지라, 찌푸린 하늘의 차가운 표정조차 좋아 보였어요. 시원한 바람을 들이키니 여기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네? 뭐라고요? 그림책 속 사람들이나 저나 모두 한가해 보여 부럽다고요? 뭘 부러워하고만 있어요! 부러워하고 있는 지금 바로 그 자리에서 눕기만 하면 되잖아요. 야외라서 좀 그렇다고요? 방이라서 천장밖에 안 보일 거라고요?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자, 지금 당장 눈을 감고 그대로 누워 보세요. 자리를 잡았으면 이제 눈을 떠도 좋아요. 당신이 누운 하늘엔 지금, 어떤 풍경이 보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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