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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킹
짐 오타비아니 지음, 릴랜드 마이릭 그림, 최지원 옮김, 오정근 감수 / 더숲 / 2020년 5월
평점 :
매일 밤, 하늘을 올려다보며 궁금증을 품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저 별들은 다 어떻게 생겨났을까?', '저 별들은 영원히 저렇게 반짝일까?', '우주의 시작은 어땠을까?'. 아이는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밤하늘을 쳐다볼 때마다 가슴이 벅참을 느꼈어요. 이런 습관은 십 대가 되어서도 지속되었고, 학교에 다니게 된 아이는 자연스레 천문학과에 관심이 생겼어요. 밤하늘을 바라보며 우주에 대해 공부를 하고 싶었던 아이는 열심히 공부했고, 결국...... 천문학과와는 머나먼 학과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수학과 물리의 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아흑).
누구 얘기냐고요? 네, 바로 제 얘기입니다. 저는 뛰어난 천체물리학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이 걸었던 그 길 언저리쯤이라도 걷는다는 건 꿈도 못 꿉니다(아오, 물리! 수학!!). 하지만 천체물리학자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그의 전기를 담은 그래픽 노블 <호킹>과 같은 책을 읽으며 그런 삶은 어떤 삶인지 향기라도 맡아볼 수 있는 걸 큰 위안으로 삼는군요.
며칠 전 두 번째 완독을 끝낸 그래픽 노블 <호킹>은 텍스트 위주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전기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여러모로 매력적인 전기였습니다. 만화적 연출로 표현했을 때 더욱 도드라지게 느껴질 수 있는 서사나 감정선이 돋보였다고나 할까요?

1942년 1월 8일, 그러니까 갈릴레오가 죽고 300년이 되던 날 영국에서 태어난 스티븐 호킹은 수학과 물리학을 좋아했어요. 호킹은 1959년 17세의 나이에 옥스퍼드 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고, 1962년부터는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시아마(Dennis Sciama) 교수와 함께 우주론과 일반상대성이론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21살의 나이에 '근위축성측색경화증', 즉 루게릭병을 진단받음과 동시에 2년 남짓 살 수 있을 거라는 시한부 선고까지 듣게 되는데요. 다행히 병의 증세는 서서히 진행되었고, 그 덕분에 호킹은 이론물리학자로서 우주론에 기반한 천체물리학에 관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호킹은 서서히 악화하는 병과 힘겹게 싸우며 2018년 3월 14일(아인슈타인이 태어난 날)에 눈을 감을 때까지 55년 동안 천체물리학계에 엄청난 혁신과 업적을 남겼는데요. 대부분 블랙홀, 빅뱅과 같은 우주론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중 몇 가지만 꼽아보면 다음과 같아요.
먼저 호킹은 영국의 수학자이자 이론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즈(Roger Penrose)의 특이점 정리를 우주 전체에 적용해 '특이점과 시공간의 기하학'이란 논문으로 애덤스 상을 받게 됩니다. 이 논문은 쉽게 말해 '빅뱅 이론'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겁니다. 이 논문 다음으로 유명한 게 바로 '호킹 복사' 이론인데, 호킹이 자신의 기존 주장을 전면 철회하며 발표한 이론으로도 알려져 있죠. 당시 학계에는 블랙홀은 강한 중력 때문에 빛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다고 보는 게 정설이었는데요. 호킹은 일반상대성이론에 양자역학을 결합해 진행한 연구 끝에 블랙홀이 복사에너지를 방출한다는 걸 수학적으로 입증했습니다. 그야말로 놀라운 이론이었죠. 이외에도 미국의 천체물리학자 짐 하틀(James Hartle)과 함께 '무경계 제안'을 발표한 것 또한 유명한데요. 이에 대해 책에서 짧게 언급된 내용과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쉽게 설명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진땀;). '무경계 제안'이란 우주는 초기에 허수 시간이 존재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방향을 구분할 수가 없어 그 시작과 끝 역시 알 수 없고, 우주는 어떠한 원인이나 이유를 붙일 필요 없이 그냥 존재해왔다는 가설인데요. 이 때문에 특이점을 상정할 필요도 없죠. 허수 시간이기 때문에 빅뱅처럼 딱히 시작(=특이점)이 필요 없으니까요. 이처럼 우주가 특이점 같은 한 점에서 탄생한 것도 아니고 한 점으로 사라질 것도 아닌 다만 '존재'할 뿐이라면, 우주 속에 있는 모든 물질은 무경계 상태로 있는 게 가능하죠. 마치 둥근 구 형태처럼 말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우주'와 관련된 인물이다 보니, 생애와 업적 소개가 다소 길어졌네요. 지루했나요? 하하하. 이 그래픽 노블 <호킹>에서는 천체물리학에 대한 역사가 호킹의 생애 못지않게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는 게 특색인데요. 마치 천체물리학에 대한 입문 서적을 읽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 점이 저는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그의 생애뿐만 아니라 천체물리학의 역사까지 정리해주며 저를 그 열띤 연구 현장 속으로 자연스레 초대해주었으니까요.

글 초반에 언급했듯 만화로 표현했을 때 더욱 와닿는 서사나 감정선이 몹시 괜찮았는데요. 두 번의 결혼 그리고 이혼과 관련된 사생활은 함축적인 만화적 구성으로 세련되게 표현한 부분이 참 좋았어요. 아마 그림 없이 텍스트로만 이렇게 표현하려고 했다면 그다지 잘 와닿지 않았을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호킹의 말풍선에 이따금 하나씩 보이던 '기울어진 회색 글자'가 그가 1985년 기관지 절개 수술을 하고 음성합성기 '이퀄라이저'를 이용해 기계음으로 말을 하게 되기 직전까지 그 빈도가 점점 높아지는데요. 알고 보니 루게릭병으로 인해 어눌해져 가는 말투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 단어들을 회색 글자로 표현한 게 아니겠어요? 얼마나 기발하다고 느꼈는지, 이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무릎을 '탁' 칠 정도로 감탄했지 뭐예요.
<호킹>을 두 번 읽어보며 확실히 느낀 건데, 방금 말한 디테일한 점들을 포함해 전체 서사적인 면으로 보나 만화적인 연출 면으로 보나 참으로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는 인상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많은 시간을 공들여 말입니다. 하지만 잘 만든 이 책에 단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크기'인데요. 책 크기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이론들을 설명할 때 배경으로 나오는 다이어그램 속 글자들이 한국어로 다 번역되어 있긴 하지만 글자 크기가 워낙 작아서 잘 알아볼 수 없는 경우가 더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년 봄 역사상 처음 사진으로 찍힌 블랙홀을 보게 되었을 때, 그 모습을 보고 한참을 감탄하는 와중에 문득 호킹이 떠오르더군요. 그가 살아있었다면 이 사진을 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을지 궁금해서, 그날 밤하늘을 보며 이렇게 말했어요. "Can You hear me? 블랙홀의 실제 모습이 찍혔어요!"
아시는 분은 이미 아시겠지만 'Can You hear me?'는 그가 강의를 시작할 때마다 기계음으로 처음 했던 말입니다. 사후세계를 믿지 않았던 호킹이지만, 아마 어디에선가 양자적 상태로 존재하며 제 목소리를 들었을 거라 믿고 싶어요. 밤하늘에 타오르는 별빛처럼 찬란하고 치열했던 그의 전기를 감성적으로 읽어보고픈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