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를 찾아서
글로리아 포시 지음, 김현주 옮김, 다닐로 데 마르코 외 사진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6월
평점 :
절판



   엘리엇 스미스의 곡이나 시가레츠 애프터 섹스의 감성적인 곡들을 듣고 있을 때면 떠오르는 여러 잡다한 생각 중 '빈센트 반 고흐'가 종종 끼어들기도 하는 건 내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수많은 화가 중 유독 마음이 가는 화가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의 생애를 보면 왠지 모르게 저 두 아티스트의 곡이 찰떡처럼 어울리게 느껴지는 걸 어떡하나. 얼마 전 <반 고흐를 찾아서>를 읽을 때는 아예 BGM으로 엘리엇 스미스의 노래와 시가레츠 애프터 섹스를 계속 켜두었다. 음악과 함께 밤마다 반 고흐의 흔적을 쫓으며, 그가 느꼈을 감정들을 느껴보려 애썼다.


   반 고흐를 사랑하는 두 사진작가, '다닐로 데 마르코'와 '마리오 돈데로'. 이 두 사진작가는 반 고흐가 거쳐온 삶의 자취뿐만 아니라 그가 캔버스로 남겨놓은 그 장면의 실제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고, 이들은 미술사학자 '글로리아 포시'에게 1990년에 책을 만들자며 프로젝트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이 세 사람은 반 고흐가 남긴 820통의 편지와 함께 그가 바라보았던 시선으로 그가 걸어갔던 여정을 되짚어보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반 고흐를 찾아서>는 30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프로젝트이기에, 30년 동안 모은 중간 결과물이라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멋있게 포장된 반 고흐의 이미지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사진을 통해 장소가 인간과 통합하고, 때로는 인간 스스로 장소와 하나가 되려 하는 존재의 흐름, 존재의 기운을 표현하고 해석하려 했다.

- 다닐로 데 마르코, 본서 17쪽


   이들은 서문에 언급되어 있듯 '걸어서, 혹은 기차로, 반 고흐와 똑같은 방법으로' 그의 자취를 더듬는다. 1853년 빈센트가 출생했던 곳인 네덜란드의 준데르트에서 시작해 벨기에, 영국, 프랑스에 있는 여러 도시와 마을로 말이다. 그들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영국, 프랑스, 4개국에서 사회적으로나 자연적으로 서로 다른 환경을 지닌 스무 곳의 도시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주소지를 서른일곱 번' 옮긴 반 고흐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다닌다.



   작품에 나오는 실제 장소를 찍은 다닐로와 마리오의 사진과 반 고흐의 작품을 비교해보는 건 이 책의 큰 재미 중 하나이다. 애초에 내가 이 책을 읽어보기로 한 이유도 이런 형식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사진을 찍을 당시 이미 사라져버린 장소나 출입이 금지된 곳들은 근방의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장소를 포착하는 것으로 대신하거나, 영화의 이미지를 가져와 수록해놓기도 한다. 책 서문에 실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꿈'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한 장면은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 오베르쉬르우아즈)과 무척 유사하게 재현되어 있어 이 장면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몹시 놀라울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순간은, 가령 반 고흐의 [옵베턴(Opwetten)의 물레방아](1884, 뉘넌) 속에 나온 물레방아가 있는 집이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사실처럼,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마냥 백 년도 더 지난 지금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반 고흐의 그림 속 장소들을 책에서 보게 될 때일 것이다.


짙푸른 하늘에 고전적인 진한 코발트블루보다 더 짙푸른 구름이 점점이 떠 있고, 은하수의 순백색보다 더 밝은 구름도 있었어. 푸른 배경의 하늘에는 보석보다 더 빛나고, 파리에서 보는 것보다 더 밝은 초록과 노랑, 하양, 분홍 별들이 반짝였어. 말하자면 오팔이나 에메랄드, 유리, 루비, 사파이어 같은 보석 같았지.

- 1888년 6월 3일-4일,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본서 150~151쪽

나는 지금 별이 빛나는 하늘을 꼭 그리고 싶다. 밤은 더 진한 보라색과 파랑, 초록으로 물들어 낮보다 더 풍부한 색을 나타낸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

- 1888년 9월 9일-14일, 여동생 빌에게 쓴 편지에서, 본서 194쪽

바다처럼 넓은 언덕 뒤에 있는, 섬세한 노란색과 섬세하게 탁한 초록색, 섬세한 보라색의 방대한 밀밭에 온전히 흡수되었다. 파란색과 흰색, 분홍색, 보라색의 섬세한 색조의 하늘 아래 꽃이 핀 감자 줄기들로 푸르게 물든 땅의 한 조각이다.

나는 바로 이런 것을 그릴 만큼, 거의 지나칠 정도로 차분한 상태와 분위기에 놓여 있다.

- 1890년 7월 10일-14일, 어머니와 여동생 빌에게 쓴 편지에서, 본서 219쪽


   이 책에는 하염없이 걸으며 자연을 관찰하길 좋아했던 반 고흐가 자연을 그림의 중요한 소재로 삼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노란색을 비롯한 색채에 집착해가는 과정이나 개성 있는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가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가 두 사진작가의 감성적인 사진에 잘 버무려져 있다. 글로리아 포시의 해설과 다닐로와 마리오의 사진, 그리고 곳곳에 실린 빈센트의 편지들을 읽어가는 동안 남은 책장의 양이 한 장 한 장 점점 줄어드는 게 아까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한 장씩 줄어들수록 그의 안타까운 결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에 책장을 빨리 넘기는 게 쉽지 않았고, 페이지를 넘기는 손에 전해지는 그 무게가 더욱더 무겁게 느껴졌다. 


   반 고흐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점이나, 내가 무척 좋아하는 그의 자화상을 -여덟 작품 정도- 만나볼 수 있는 점도 좋았다. 그리고 그의 자취를 쫓아가되, 그가 가졌던 정신병이나 죽음의 과정에 대한 논란 같은 지나치게 내밀한 그의 사생활에 대해선 언급을 되도록 줄이고 그의 작품과 그의 영감의 원천에 포커스를 맞춰 탐구했다는 점 역시 마음에 들었다.

   또한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1889, 생레미드프로방스)에 그려져 있는 소용돌이 치는 밤하늘을 두고 환영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대다수의 미술사학자들과는 다른 견해를 가진 글로리아 포시의 확신에 깊이 동감하기도 했다. 글로리아 포시의 설명에 의하면 이 인상적인 소용돌이는 환영이 아닌 그 당시 발견되었던 소용돌이 은하 M51을 빈센트가 참고해 그렸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 견해는 신선하게 다가옴과 동시에 설득력이 꽤 있어 보인다.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회복 중이라는 사실이 당황스러운 가운데 '무엇을 위해 회복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제 감히 낫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 1889년 1월 28일, 아를에서 테오에게 쓴 편지 중에서, 본서 185쪽

글쎄, 나는 내 일에 목숨을 걸었는데 이제 그래야 할 이유의 절반이 사라졌다.

- 사망한 반 고흐의 옷 주머니 속에 있던 쪽지, 본서 203쪽


   다 읽은 <반 고흐를 찾아서>를 덮은 후, 나는 생각에 잠겨 창밖을 바라보며 한동안 있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소나기로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멋진 광경이다. 그런데 평생 비를 좋아해 온 나처럼 반 고흐 역시 비에 대해 동생 테오와 친구들에게 자주 얘기했다는 사실이 불현듯 내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그가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하늘'과 '비'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건, 어떤 이유였을까? '이제 그래야 할 이유의 절반이 사라진' 원인이란 건 대체 뭐였을까?


   반 고흐는 짙어가는 우울함과 자신을 점점 조여오는 정신병과 고통스럽게 싸우면서도 '자연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결국 그 싸움에서 지긴 했지만, 그가 남기고 간 2천 점이 넘는 작품들은 그 치열했던 싸움의 결과물로써 우리에겐 큰 선물이 되었다.

   반 고흐의 흔적을 찾아 떠난 세 사람과 함께 나는 반 고흐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느끼며 살아갔는지, 그리고 그가 머물렀던 공간과 그림 작업을 했던 장소에서 그가 느꼈을지도 모를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30년이나 진행된 이 프로젝트가 여전히 ing인 것처럼, 나 역시도 이걸로 End가 아닌 And가 되어 그의 자취를 계속해서 쫓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난 내 예술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싶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길 바란다.

마음이 깊은 사람이구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구나.

- 빈센트 반 고흐, 영화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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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껏 갓 구운 식빵
김채영 지음 / 아티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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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에 기운이 없을 때는 입맛도 없다. 삶에의 의지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선, 마치 미식가라도 된 것처럼 맛있는 음식을 억지로라도 찾아 나서야 한다. 울적할 때 찾게 되는 음식 중 가장 쉽게 손이 가는 건 역시 빵이다. 그중 식빵은 다양한 레시피로 먹을 수 있어서 내가 무척 좋아하는 빵 종류이다.

   근래 번민이 많았던 나는 빵집에서 사 온 빵과 함께 나다움을 찾는 여정을 계속하던 중에 문득, 한 번도 구워본 적 없는 '식빵을 구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집에 있는 가스 오븐은 너무 낡은 탓에 쓸 수가 없어서, 이번에야말로 에어프라이어를 정말 장만해볼까 하는 생각이 또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기존의 올스텐 에어프라이어 제품들이 얼마나 진화했는지 다시 뒤적거려 보면서, 맛있어 보이는 앙버터 식빵이 표지로 있는 <정성껏 갓 구운 식빵>을 탐독했다. 오븐형 에어프라이어로 멋지게 식빵을 완성할 내 모습을 꿈꾸면서.



   <정성껏 갓 구운 식빵>의 저자 김채영이 프롤로그에서 말하길 국내에 출간된 식빵 전문 책자는 안 그래도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 대부분이 백과사전식으로 다루거나 설명의 중간 과정을 성의 없이 잘라내었으며, 외국 번역서 속의 재료는 구하기 어렵거나 틀 사이즈 자체가 달라 우리 실정과는 맞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식빵을 우리 현실에 맞게 베이킹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이 책을 만들었음을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은 크게 6가지 챕터로 나뉜다. 첫 번째 챕터에서는 식빵의 기초 부분으로써 '기본 재료', '기본 도구', '식빵 틀의 종류', '식빵 공정 순서', '세 가지 식빵 성형법'이 나와 있다. 그리고 2~5 챕터에서는 '기본 식빵 만들기', '트렌디한 식빵 만들기', '건강 식빵 만들기', '다양한 제법을 이용한 식빵 만들기'가 소개되어 있고, 마지막 챕터에서는 식빵을 맛있게 먹는 방법으로써 '핸드메이드 잼과 스프레드'를 만드는 법과 '맛있는 샌드위치 레시피'가 수록되어 있다.



   "물, 강력분, 설탕, 소금, 이스트, 달걀, 버터... 이 간단한 재료들이 기막히게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로 나를 그렇게도 끌어당긴단 말이지." 책에 소개된 기본 재료를 훑어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와 동시에 과거의 나는 이렇게 간단한 재료로 얼마나 많은 망작을 구워내었던가, 생각해보았다. 한 달 전 -오븐을 쓸 수가 없어서- 압력솥으로 막걸리 빵을 맛있게 만들어보겠다며 덤볐지만, 이번에도 나는 실패했다. 실패 요인은 '발효'였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식빵 공정 순서를 찬찬히 훑어보면 알겠지만 빵 만드는 시간은 발효하는 과정이 다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 속에서 소개하고 있는 1차 발효와 중간 발효, 2차 발효를 유심히 볼 수밖에 없는 것 또한 그 이유다.

   또한 빵을 만들 때는 아무 물이나 쓰는 게 아니라 약산성인 아경수(120~180ppm)를 쓴다는 점, 그리고 발효기가 없는 가정에서는 그 대용으로 스티로폼 박스나 리빙 박스를 이용하는 게 좋다는 정보 역시 유용하게 느껴졌다.


   책 속에 소개된 다양한 식빵 만드는 법에 푹 빠져 열심히 읽고 있다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어느 페이지를 펼쳐보아도 식빵 만드는 법을 마치 처음 알려주듯 한결같이 세심하게 모든 식빵 만들기를 지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다른 제빵 책 같은 경우 첫 번째 빵에서 알려준 제빵의 기본 팁이나 포인트는 다음 빵부터는 그냥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 책은 첫 번째 식빵인 우유 식빵부터 마지막 식빵인 검은깨 식빵에 이르기까지 식빵 만들기에서 단계별로 필요한 기본 포인트를 아무리 반복되는 내용일지라도 -필요하다면- 계속 알려준다. 1차 발효 완료 후의 '손가락 테스트' 하는 법이라든지, 팬닝 단계에서 필요한 포인트 등과 같은 것들을 말이다. 이렇게 꼼꼼하게 책을 만들어준 덕분에 실제 제빵 시에 첫 번째 식빵 만드는 페이지로 계속 넘겨보며 만들지 않아도 되어서 무척 편할 듯하다.



   이 책과 함께 얼른 만들어 보고 싶은 식빵은 '데니쉬 식빵'과 '코코넛 식빵', 그리고 '꿀 식빵'이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풍미와 식감을 가진 데니쉬 식빵은 3가닥으로 꼬아서 만드는 '트위스트' 정형법 때문에 과정이 그리 순탄할 것 같진 않지만, 너무나 좋아하는 식빵이기에 내 손으로 처음 완성한 데니쉬 식빵을 두 손에 들게 된다면 -완성도를 떠나서- 무조건 가슴이 벅찰 것만 같다(크흑). 그리고 꿀 식빵은 물, 밀가루, 효모를 섞어 액체 상태로 만든 '앞선 반죽'을 사용해 만드는 '풀리쉬'라는 제법을 이용해 만드는 식빵인데, 폴란드에서 유래한 이 방식이 특이해서 그 식감이 과연 어떨지 몹시 흥미가 간다.


   직접 만든 가볍고 보들보들한 식감의 코코넛 식빵을, 책 속에서 알려준 블루베리 크림치즈를 곁들여서 한 입 딱 베어 문다면... 크아, 얼마나 맛있을지!

   물론 이상적으로 그려본 위의 상상과 직접 만들어본 식빵은 꽤 다를지 모르겠지만, 그 간극을 메우는 건 나의 몫일 터. 앞으로 수많은 망작을 더 만들게 될지라도 그로부터 삶에 대한 의지를 적립 받을 내 모습을 그려보면 왠지 마음이 다소 편안해진다.

   자, 식빵을 만들 완벽한 책은 찾았다. 이제 제대로 된 올스텐 에어프라이어만 나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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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1~2 세트 - 전2권 사람 3부작
d몬 지음 / 푸른숲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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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데이빗'은 '이메리카'라는 나라의 '버니어'시 외딴 산골에 있는 농장에서 돼지로 태어났다. 그런데 데이빗에겐 다른 돼지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지능'. 높은 수준의 지능과 말을 할 수 있는 발성 기관을 가진 채 태어난 특별한 돼지였던 것이다.

   이 돼지농장에 사는 꼬마 소년 '조지'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이빗을 아빠로부터 생일 선물로 받고 직접 '데이빗'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렇게 조지 가족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게 된 데이빗은 어느 순간부터 말을 하기 시작하고, 자신을 사람으로 여긴다. 조지 가족은 이에 대해 놀라워함과 동시에 근심을 가지게 된다. 특히 조지의 아빠 '제임스'는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조지와 데이빗을 지켜본다. 농장에서 작은 해프닝을 겪으며 아빠는 어린 조지에게 데이빗의 정체를 그 어디에도 발설해선 안 된다고 다시 한번 더 단단히 이르기도 한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조지와 데이빗은 집이 위치한 버니어의 깊은 산골에 틀어박혀 무료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의 지루한 삶을 받아들이려는 데이빗과는 다르게 조지는 이 시골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 그러던 와중 조지는 버니어를 방문한 유명 서커스단인 '이카루스 서커스단'이 세계 최대의 도시 '빅요크'에 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고, 기회다 싶었던 조지는 데이빗을 설득해 서커스단에 합류해 빅요크로 떠나게 된다.

   빅요크에서 서커스 공연을 하며 유명해진 데이빗은 TV에 출연하고 광고도 찍는 등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조지는 데이빗의 매니저로 일하며 돈과 명성에 흠뻑 취해 바쁘게 지낸다. 한편 데이빗이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자 '돼지는 사람이 아니다(Pig is not person)'라는 구호 아래 모인 반 데이빗 단체인 'PIP' 시위대의 운동이 거세진다.

   서커스 공연의 마지막 날, 데이빗은 인권운동가 '캐서린'이 객석에서 던진 질문에 동요하게 되고, 자신이 왜 빅요크로 오기로 결심했는지를 다시금 떠올린다. 그러면서 조지와 데이빗은 갈등을 빚게 되고, 캐서린이 이끄는 인권단체인 '스피릿'에 합류하며 이메리카의 정치인들의 권모술수에 휘말리게 되는데... 데이빗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위에 요약해놓은 이야기는 만화 <데이빗 1~2 세트>의 줄거리다. <데이빗>은 작가 d몬이 네이버 웹툰에 연재한 웹툰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작품이다. 현재 웹툰을 잘 안 보는 나는 이 만화를 단행본으로 처음 만났다. '사람은 무엇으로 정의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되었다는 책의 도입부가 내 흥미를 끌었고, 읽어보니 꽤 재미있는 만화였다. 책 속에서 일련의 힘든 사건을 겪으면서도 데이빗은 자신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언젠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람으로 인정해줄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험난한 길을 헤쳐나가며 데이빗은 자신이 걷는 길을 통해 점점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고민하고 정의를 내린다.


   사람과 똑같이 사고하고 말하는 돼지를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을지 자문해보라. 나는 <데이빗>을 읽은 후 이 질문에 대해 며칠을 생각해보았지만, 쉽사리 답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릇의 모습이 아무리 달라져도 그릇 속에 담긴 물의 본질은 그대로일 거란 가치관을 지닌 채 살아오긴 했지만, 데이빗과 같은 돼지가 정말 눈앞에 있다면 내가 그 돼지를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을지는... 그런 상황이 진짜로 되어봐야 나도 내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않은 상황에 대해선 절대 속단하면 안 되고, 그렇기에 만화 속에서 데이빗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데이빗을 반대하는 사람들 양쪽의 입장 중 어느 쪽이 더 나쁘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느껴진다.



분명, 모든 사람이 데이빗 씨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건 아니죠.

그렇기에 우리가 데이빗 씨를 돕는 겁니다.

사람과 같이 사고할 수 있고 감정을 느낄 수 있는데

단지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인권을 박탈해 버리는

그 야만성에 맞서면서요.


- 1권, 193쪽 -


   책을 읽는 동안 데이빗은 왜 꼭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하는지, 답답하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 구석도 좀 있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다음과 같은 생각과 물음들이 떠올랐다.

   만화 속에서 데이빗은 지능이 꽤 높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한 데이빗은 어렸을 때 이미 제임스에 의해 자신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들으며 어미가 누구인지도 보았고, 그런 정보를 습득하며 자신의 모습이 인간과 몹시 다르다는 걸 인지할 수 있는 지능과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그럼에도 마치 '자연스럽게'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흐르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만화는 은연중에 지능은 인간만 가질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전제를 해놓고 이야기를 만든 건 아닐까? (그리고 정해진 서사를 위해 그런 제한된 가치관을 꼭 고수할 수밖에 없었을까?) 데이빗은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는 지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돼지들과 다르게 자신은 지능이 있어서 생각도 하고 말도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어볼 생각은 대체 왜 처음부터 해볼 수 없었던 걸까? 더구나 1권 말미에서 캐서린이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는데도 데이빗은 계속해서 사람으로만 인정받으려고 고집 피우고 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에 나오는 인조인간 데이빗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확실한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엄마의 사랑을 되찾으려는 것. 만화 속 데이빗 또한 이야기 중간부터 캐서린의 사랑을 갈구하게 되긴 하지만 그건 이야기 중간부터 생긴 흐름이라 이를 데이빗이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 근원적인 이유라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한마디로, 데이빗이 왜 꼭 '사람'으로만 인정받으려 하는 건지 그 근원적 동기가 약해 보인다.

   나는 이런저런 질문 끝에 이 만화의 이야기 설정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려두었다. 데이빗은 사고할 수 있는 '지능'을 갖고 있으면서 그와 동시에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어리석은 '욕망'까지 있기 때문에 자신을 사람으로 여길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라고. 돼지로 태어났지만 높은 수준의 사고와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거듭나는 게 아니라 교만과 자기기만을 서슴없이 행하는 욕망덩어리인 일개 '사람'처럼 되길 원하기만 하는 한계를 보여준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만화 속 대사에서 언급하고 있듯 지능이 높은 존재를 사람으로 볼 수 있다면, 그럼 지적장애인은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분명 읽히기는 술술 읽히는데, 담고 있는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은 만화이다. 특히 말미의 '멱따개'라는 도축업자와 데이빗의 대화는 내 마음속에 커다란 돌덩이 하나를 쿵 던져주었다. 사람은, 대체, 무엇으로 정의해야 하는가에 대해.

   읽은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책 마지막의 '데이빗' 이름이 적힌 장면이 머릿속에 콕 하고 박혀 계속 맴돌고 있다. 2권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 있는 '데이빗'은 1권 첫 번째 페이지의 '사람은 무엇으로 정의하는가'라는 물음과 같은 함의를 가지고 있는, 울림이 큰 대명사처럼 이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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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빌딩 건축 실전 교과서 - 건축회사에 기죽지 않는 건물주를 위한 계약·설계·기초·골조·설비·마감 일정별 실전 건축 가이드 지적생활자를 위한 교과서 시리즈
김주창 지음 / 보누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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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따금 '언젠가는 나도 집을 지어서 살겠지'라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부모님이 그러하셨듯 말이다. 나는 아파트나 다세대 주택이 싫다. 층간소음 신경 안 쓰며 한밤중에도 트레드밀 위에서 뛸 수 있는 단독주택이 좋다. 하지만 곧 이런 생각들이 같이 떠오른다. 부모님 도움 없이, 지을 땅을 살 돈은? 건축할 비용은? 현실적인 문제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면 단독주택을 지어서 살겠다는 소망은 요원해지고 만다.

   하지만 몇 년 전 도심에 지어진 협소주택을 접하고 난 뒤 희망이 다시 생겼다. 예산을 모으는 게 먼저이긴 하나 일단 꼬마주택이나 꼬마빌딩 짓기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알고 싶었던 차에 보누스에서 나온 <꼬마빌딩 건축 실전 교과서>를 읽어보았다. 예전에 <산속생활 교과서>로 접해본 출판사여서 책 완성도에 대해 어느 정도 믿음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건물을 짓는다는 것이 건축주 입장에서는 인생의 큰 모험이고 전환점인 반면, 시공사는 반복되는 직업적 업무일 뿐이다. 건축주는 그동안 꿈꿔왔던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가족이나 지인들과 함께 살아갈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지만, 시공사는 늘 작업했던 관행대로 단순·간단·명료하게 건축주의 요구를 맞추면서 회사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 본서 23~24쪽 - 


건축주는 지불한 공사비만큼 가치 있는 건물을 짓고 싶어 한다. 시공사는 견적 공사비보다 최대한 저렴하게 지어 이윤을 창출하려고 한다.


- 본서 83쪽 -


   이 책은 크게 3장으로 나뉘어 있고, 각 장의 끝부분마다 '현장 일지'라는 코너를 배치해 사진과 함께 실제 건축 과정을 보여준다. 1장 '건축 준비'에서는 건축가와 시공사를 만나 계약하기 전 '어떤 건물을,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지을 것인가'에 대해 건축주가 미리 생각해보게끔 한다. 내가 원하는 건물의 그림을 그려보고, 여러 부동산을 만나 사전 조사를 하고, 건축비 예산을 미리 추정해보는 등 건축을 하기 전 고려하고 생각해볼 일들을 정리해놓았다. 1장에서 저자는 공자의 말에 빗대어 건축주와 시공사의 동상이몽을 잘 표현하고 있다.

   2장 '건축가와 시공사에 대응하는 법'에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건축을 하기 위해 건축가를 만나 설계를 하고 시공사를 선정해 계약하는 단계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설계까지 시공사에 맡기지 말고, 반드시 나와 잘 맞는 건축가를 선정해 설계비를 아끼지 말고 야무지게 설계를 하라고 조언한다. 또한 시공사 선정을 건축가에게 맡기는 대신 공내역서를 바탕으로 하여 입찰 방식으로 선정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귀띔한다.

   3장 '건축주가 꼭 알아야 할 실전 꼬마빌딩 시공'에서는 철거공사부터 시작해 터파기와 기초공사, 골조공사, 수도와 배관공사, 전기공사, 단열공사, 방수공사, 창호공사, 외부 마감공사, 내부 마감공사,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준공 허가 신청에 이르기까지 꼬마빌딩 건축 공정을 세세하게 담아놓았다.



   2장에서 설계를 할 때 꼼꼼하고 세세하게 담은 설계와 특약으로 시공사와의 분쟁을 미리미리 예방하라고 그렇게 강조한 이유를, 3장을 읽는 내내 심하게 체감했다. 되도록 저렴하게 지어 마진을 최대한 남길 수 있는 만큼 남기려는 시공사의 관행은 공사가 진행되는 내내 계속되어 부실 공사의 위험을 가득 안고 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중간중간 공정을 생략하거나 작업을 단순화해서 진행하는 시공사의 천태만상을 책으로 지켜보며, 건물을 짓지도 않았는데 벌써 10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았다. 시공사는 시공비를 아끼기 위해 지내력 검사를 토대로 한 구조 검토를 마음대로 해석해버리거나, 배관공사가 끝난 후 수도관만 테스트하고 하수관 테스트는 건너뛰는 일이 다반사다.

   외부 마감공사에서의 천태만상은 더하다. 벽돌 조적 작업을 할 때 세월이 흐르면 반드시 문제를 야기할 철물 타이로 벽돌을 결속하는 태만을 보이고, 인방 작업(창틀 위에 벽돌을 쌓을 때 벽돌을 받쳐줄 L형 앵글을 벽체에 부착하는 일)을 할 때 L형 앵글을 창틀 길이만큼 촘촘히 배열해 시공하지 않고 자재비를 아끼기 위해 드문드문 작업한다. 제대로 하는 시공사를 찾기 힘들 정도로 부실시공이 만연한 스터코 외부마감 시공과 견적서와 다른 두께로 작업해버리곤 하는 징크 외부마감 시공 부분을 읽을 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석재 마감 시공 시 튼튼한 핀 작업 대신 지진이나 불에 약한 강력 접착제만 사용하면서도 하청 업체와 시공사는 번거로운 핀 작업을 왜 해야 하냐고 큰소리치며 되려 당당하다.

   대체 얼마나 멋대로면, 기초공사와 더불어 아주 중요한 공사인 골조공사 때 콘크리트 타설 후 급하게 탈형해서 자재를 빠르게 재사용하려고 하는 게 관행일 정도다. 이렇게 되면 콘크리트 양생이 부실해질 가능성이 높다. 시공사는 이러한 기초 중의 기초공사에서조차 시공비를 아끼기 위해 기본적인 룰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해버리곤 한다. 오죽하면 저자는 '실전 TIP'에 거푸집의 탈형 시기까지 설계 도면에 명시를 해놓으라고 조언하고 있다.



   시공사와 현장 작업자의 부실시공을 겨우 몇 개 위에 나열했을 뿐인데도 지친다. 책 속에 나온 건축의 모든 단계에서 조심해야 할 부실시공은 -일반 주택이든 꼬마빌딩이든- 자기 건물을 지으려는 모든 건축주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필수 지식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는 끊임없이 강조한다. 철근 보는 법과 도면 보는 법 등과 같은 기본적인 건축 지식을 공부하고, 기본적이고 당연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시공 방법을 설계 도면에 미리 기재해 시공사와의 분쟁을 최소화하고, 건축주가 시공 과정을 가능한 한 꼼꼼히 챙겨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니 건축주가 철저히 관리 감독할 수밖에 없다."(240쪽)라고.

   시공사는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조금이라도 더 수익을 내려고 한다. 자재를 바꿔치기하고, 비싼 숙련공 대신 미숙련공을 기용하는 걸 서슴지 않는다. 하청 업체는 시간이 곧 돈이라 빨리빨리 작업하고 넘기려 한다. 사소한 거니까 괜찮을 거라며 안일함으로 작업하는 작업자들의 안전 불감증은 흔하게 발생한다. 이런 미숙하고 섬세하지 못한 작업은 부실시공으로 이어지고, 몇 년 안에 건축주가 모두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문제가 된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건축의 민낯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어릴 때 지은 우리 집도 부실시공의 결정체였던 터라 건축한 지 1년 만에 내부 벽에 금이 갔을 정도였는데, 이때부터 이미 건축가나 시공사들이 대충 어떨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언젠가 내가 겪을 수도 있을 일이라는 생각이 드니 한 문장, 한 단어도 놓치기 싫어 메모하고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되뇌어 암기하며 읽느라 책을 다 읽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내 집, 내 건물을 지으려면 건축가와 시공사를 전적으로 믿는 건축주가 되지 말고, 저자 말대로 건축가와 시공사에 기죽지 않는 건축주가 되어야 한다. "평당 건축비가 얼마죠?"라고 묻는 바보 같은 건축주가 되고 싶지 않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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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로 보는 서양미술 - 르네상스부터 동시대 미술까지 디테일로 보는 미술
수지 호지 지음, 김송인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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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오른쪽 어깨 너머에서 불현듯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 "음? 이 경외감이 느껴지는 그림은...? 얼마 전엔 현대미술이더니, 지금은 서양미술? 요즘 미술에 푹 빠져 지내시는군?"

   그렇다. 이번엔 서양미술이다. <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에서 현대미술에 관해 친절히 안내해주었던 미술사학자 수지 호지의 또 다른 저서 <디테일로 보는 서양미술>을 보며 눈 호강을 또 실컷 했다.


   이번 책에서는 14세기부터 21세기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탄생한 서양미술 중 100점의 다양한 예술 작품을 연대순으로 모아놨다. 시대순으로 크게 '1500년 이전/16세기/17세기/18세기/19세기/1900년 이후'로 나뉜다. 책을 계속 넘겨나가면 템페라에서 유화 물감으로 그림 재료가 바뀌어 가는 배경 속에서, 혹은 종교개혁이나 전쟁, 사회혁명, 산업혁명과 같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예술가들이 어떻게 반응하며 화풍이 어떤 식으로 변화되어 가는지 그 과정이 바로 눈 앞에 펼쳐진다.

   책의 구성은 <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과 같은 방식이다. 한 작품당 네 페이지씩,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기법과 의도, 목적 등을 분석한다. 먼저 큼지막하게 수록된 메인 작품과 함께 작가의 생애 및 작품에 관련된 역사적 배경과 탄생 배경, 그리고 작품에 관한 대략적인 해설과 특징을 기술한다. 그 후 다음 두 페이지에는 작품을 구획해 여러 개로 확대하여 번호를 붙인 뒤 번호 순서대로 작품에 대해 상세하게 고찰해본다. 또한 메인 작품과 관련 있는 사건이나 작품을 같이 소개하기도 하며, 르네상스, 매너리즘,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등 시대별로 등장한 화풍에 관한 사실들 또한 다루고 있다.



   <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과 마찬가지로 저자가 짚어주지 않았으면 모르고 넘어갔을 부분을 마주칠 때마다 저자의 내공과 식견에 감탄하곤 했다. 가령 로히르 판 데르 웨이덴의 회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1435~38년경)의 트레이서리(가장자리에 있는 장식)에 아주아주 작은 석궁을 그려놓은 걸 저자가 아니었다면 내 어찌 알았을까? 스스로 발견하기엔 꽤 힘든 디테일이다. 참고로 웨이덴은 벨기에의 뢰번 석궁 길드에서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석궁을 표현했다고 한다. 또한 소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1533)이란 작품에서도 찾기 힘든 디테일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숨겨진 십자가상이다. 나란히 선 두 대사 뒤에 있는 초록색 커튼 뒤로 반쯤 가려져 있는 희생의 십자가상이 그림 오른쪽 상단 귀퉁이에 그려져 있다. 세밀하고 사실적인 묘사와 하단의 왜곡된 해골 그림에 마음을 쏙 빼앗긴 바람에 그림 한구석에 그런 숨겨진 상징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자가 설명하길 이는 두 대사의 삶에 그리스도가 현존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거란다.

   이외에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1498~99) 서명 사건 이후, 여전히 예술가가 작품에 서명하는 일이 흔치 않았던 1523년경에 티치아노는 본인의 작품에 서명을 넣음으로써 예술가의 명성을 높이고자 노력한 초기 예술가 중 한 명이란 사실 또한 흥미로웠다. 그리고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1510~11)에서 라파엘로가 그랬던 것처럼 작품 여기저기 숨어서 작품 밖을 응시하고 있는 화가들의 자화상을 찾는 재미 역시 쏠쏠했다. 이러한 사실들 또한 저자가 아니었으면 혼자서는 절대 몰랐을 정보였을 터.



   르네상스부터 컨템포러리 미술까지 아우르고 있는 책의 특성상, 신화적 주제와 역사적 주제의 작품뿐만 아니라 종교적 주제가 짙은 작품이 많이 실려있는 편이다. 나는 종교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희한하게도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미술 작품에는 그다지 거부감이 없다. 종교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거장이 만든 예술작품을 쳐다보고 있을 때마다 느껴지는, 왠지 모를 성스러운 고양감이 마음속에 가득 차오르는 그 순간이 싫지 않기 때문이다.


   '1900년 이후' 챕터는 앞서 <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을 읽어봤다고 그런가, 처음 만난 작가가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친숙한 작가가 더 많았다. 현대미술 편에서 메인 작품으로 수록되었던 작품이 이따금 이 책의 메인 작품과 관련된 작품으로 조그맣게 등장하기도 해서, 반가움과 함께 무척 재미있게 읽은 챕터다. 하지만 방금 위에 말했다시피 이 책을 읽으며 성스러운 고양감이나 장엄함에 압도되는 것에 중독된 나는 현대적인 주제보다는 신화적 주제나 종교적 주제, 역사적 주제에 더 이끌렸고, 그래서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시간이 나면 이 세 주제를 가진 그림 위주로 다시 찾아보곤 했다.



   이 책에 실린 작품 중 직접 가서 얼른 보고 싶을 정도로 나에게 고양감을 안겨준 작품을 딱 한 편만 꼽아야 한다면... 놀랍게도 히에로니무스 보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존 에버렛 밀레이 등 내가 전부터 좋아해 왔던 작가의 작품들이 아니다(그렇다, 무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1508~12)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1503~19년경)를 이겼다!).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낼 때마다 가장 먼저 보곤 하는 작품, 그건 바로 '성 삼위일체, 마리아와 사도 요한 그리고 두 명의 봉헌자'(1425~26년경)이다. 프레스코화인 '성 삼위일체'는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최초의 거장 마사초(Masaccio)의 마스터피스다. 마사초는 회화에서 직선 원근법을 최초로 사용한 예술가 중 한 명인데, 이 작품은 정확하게 구조화된 일점투시법으로 그려졌다. 또한 그리스도를 상징적인 모습이 아닌 사실적으로 표현했으며, 하나님을 신비한 존재가 아닌 인간으로 묘사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 그림이 공개되었을 때 구경꾼들은 실물과 똑같아 보이는 이 작품을 보고 마사초가 성당 벽에 구멍을 뚫고 그 너머에 또 다른 예배당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약 600년이 흐른 현재의 내가 <성 삼위일체>를 직접 본다면 그 웅장함에 첫 공개 당시의 구경꾼들보다 더 홀렸으면 홀렸지 덜 하진 않을 듯. 정확한 원근감과 사실적인 디테일로 실물과 다름없이 완성한 이 프레스코화에 압도당하여 한참 동안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서 있을 것만 같다.



   <성 삼위일체> 그림 하단 부분에는 해골이 누워 있고, 이런 묘비명이 적혀 있다. '나도 한때는 지금의 당신과 같았고, 당신도 지금의 나처럼 될 것이다.' 메멘토 모리를 뜻하는 이 말과 함께 담담히 누워 있는 해골을 보았을 때, 영화 [The Dig](2021)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디스 : 우리는 죽어요. 결국에는 죽고 부패하죠. 계속 살아갈 수 없어요.

브라운 : 제 생각은 다른데요.

인간이 최초의 손자국을 동굴 벽에 남긴 순간부터

우린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언가의 일부가 됐어요.

그러니 정말로 죽는 게 아니죠.


-영화 'The Dig'에서-


   덧없이 흐르는 인생을 살다 보면 가끔 내 존재의 허무함에 가슴이 먹먹하고 정신이 아득해지곤 한다.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또한 죽음을 기억하라며 속삭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영화 'The Dig'에서 위에 인용한 저 장면을 보았을 때, 유한한 내 존재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미술서를 찾아보곤 하는 게 어쩌면 저런 이유였을 것 같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거장들이 남긴 예술작품은 곧 인류를 대변하고, 그렇기에 나 또한 명작에 연결되어 있는 존재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묘한 소속감에, 이 책을 읽는 동안 자주 가슴 벅참을 느꼈고 감동도 받았다.


   작품 속에 화가가 넣은 의도나 비밀, 그리고 어떠한 과정을 통해 작품이 잉태되고 세상 속에 나왔는지에 대한 것들 등,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이야깃거리는 파도 파도 재미있는 법이다. 맨땅에 헤딩하듯 그냥 그림을 감상하는 것보다 여러 방면으로 분석한 정보와 함께 작품을 보니 확실히 보는 눈이 확 넓어짐을 느낀다. 책의 서문에 나온 말마따나 '반복해서 보고 또 보고 싶은 책'이고, 실제로 지금 그러고 있다. 현대미술 편과 이 서양미술 편으로 내킬 때마다 책장에서 꺼내 명작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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