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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로 보는 서양미술 - 르네상스부터 동시대 미술까지 ㅣ 디테일로 보는 미술
수지 호지 지음, 김송인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1년 2월
평점 :
내 오른쪽 어깨 너머에서 불현듯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 "음? 이 경외감이 느껴지는 그림은...? 얼마 전엔 현대미술이더니, 지금은 서양미술? 요즘 미술에 푹 빠져 지내시는군?"
그렇다. 이번엔 서양미술이다. <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에서 현대미술에 관해 친절히 안내해주었던 미술사학자 수지 호지의 또 다른 저서 <디테일로 보는 서양미술>을 보며 눈 호강을 또 실컷 했다.
이번 책에서는 14세기부터 21세기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탄생한 서양미술 중 100점의 다양한 예술 작품을 연대순으로 모아놨다. 시대순으로 크게 '1500년 이전/16세기/17세기/18세기/19세기/1900년 이후'로 나뉜다. 책을 계속 넘겨나가면 템페라에서 유화 물감으로 그림 재료가 바뀌어 가는 배경 속에서, 혹은 종교개혁이나 전쟁, 사회혁명, 산업혁명과 같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예술가들이 어떻게 반응하며 화풍이 어떤 식으로 변화되어 가는지 그 과정이 바로 눈 앞에 펼쳐진다.
책의 구성은 <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과 같은 방식이다. 한 작품당 네 페이지씩,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기법과 의도, 목적 등을 분석한다. 먼저 큼지막하게 수록된 메인 작품과 함께 작가의 생애 및 작품에 관련된 역사적 배경과 탄생 배경, 그리고 작품에 관한 대략적인 해설과 특징을 기술한다. 그 후 다음 두 페이지에는 작품을 구획해 여러 개로 확대하여 번호를 붙인 뒤 번호 순서대로 작품에 대해 상세하게 고찰해본다. 또한 메인 작품과 관련 있는 사건이나 작품을 같이 소개하기도 하며, 르네상스, 매너리즘,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등 시대별로 등장한 화풍에 관한 사실들 또한 다루고 있다.

<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과 마찬가지로 저자가 짚어주지 않았으면 모르고 넘어갔을 부분을 마주칠 때마다 저자의 내공과 식견에 감탄하곤 했다. 가령 로히르 판 데르 웨이덴의 회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1435~38년경)의 트레이서리(가장자리에 있는 장식)에 아주아주 작은 석궁을 그려놓은 걸 저자가 아니었다면 내 어찌 알았을까? 스스로 발견하기엔 꽤 힘든 디테일이다. 참고로 웨이덴은 벨기에의 뢰번 석궁 길드에서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석궁을 표현했다고 한다. 또한 소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1533)이란 작품에서도 찾기 힘든 디테일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숨겨진 십자가상이다. 나란히 선 두 대사 뒤에 있는 초록색 커튼 뒤로 반쯤 가려져 있는 희생의 십자가상이 그림 오른쪽 상단 귀퉁이에 그려져 있다. 세밀하고 사실적인 묘사와 하단의 왜곡된 해골 그림에 마음을 쏙 빼앗긴 바람에 그림 한구석에 그런 숨겨진 상징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자가 설명하길 이는 두 대사의 삶에 그리스도가 현존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거란다.
이외에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1498~99) 서명 사건 이후, 여전히 예술가가 작품에 서명하는 일이 흔치 않았던 1523년경에 티치아노는 본인의 작품에 서명을 넣음으로써 예술가의 명성을 높이고자 노력한 초기 예술가 중 한 명이란 사실 또한 흥미로웠다. 그리고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1510~11)에서 라파엘로가 그랬던 것처럼 작품 여기저기 숨어서 작품 밖을 응시하고 있는 화가들의 자화상을 찾는 재미 역시 쏠쏠했다. 이러한 사실들 또한 저자가 아니었으면 혼자서는 절대 몰랐을 정보였을 터.

르네상스부터 컨템포러리 미술까지 아우르고 있는 책의 특성상, 신화적 주제와 역사적 주제의 작품뿐만 아니라 종교적 주제가 짙은 작품이 많이 실려있는 편이다. 나는 종교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희한하게도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미술 작품에는 그다지 거부감이 없다. 종교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거장이 만든 예술작품을 쳐다보고 있을 때마다 느껴지는, 왠지 모를 성스러운 고양감이 마음속에 가득 차오르는 그 순간이 싫지 않기 때문이다.
'1900년 이후' 챕터는 앞서 <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을 읽어봤다고 그런가, 처음 만난 작가가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친숙한 작가가 더 많았다. 현대미술 편에서 메인 작품으로 수록되었던 작품이 이따금 이 책의 메인 작품과 관련된 작품으로 조그맣게 등장하기도 해서, 반가움과 함께 무척 재미있게 읽은 챕터다. 하지만 방금 위에 말했다시피 이 책을 읽으며 성스러운 고양감이나 장엄함에 압도되는 것에 중독된 나는 현대적인 주제보다는 신화적 주제나 종교적 주제, 역사적 주제에 더 이끌렸고, 그래서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시간이 나면 이 세 주제를 가진 그림 위주로 다시 찾아보곤 했다.

이 책에 실린 작품 중 직접 가서 얼른 보고 싶을 정도로 나에게 고양감을 안겨준 작품을 딱 한 편만 꼽아야 한다면... 놀랍게도 히에로니무스 보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존 에버렛 밀레이 등 내가 전부터 좋아해 왔던 작가의 작품들이 아니다(그렇다, 무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1508~12)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1503~19년경)를 이겼다!).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낼 때마다 가장 먼저 보곤 하는 작품, 그건 바로 '성 삼위일체, 마리아와 사도 요한 그리고 두 명의 봉헌자'(1425~26년경)이다. 프레스코화인 '성 삼위일체'는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최초의 거장 마사초(Masaccio)의 마스터피스다. 마사초는 회화에서 직선 원근법을 최초로 사용한 예술가 중 한 명인데, 이 작품은 정확하게 구조화된 일점투시법으로 그려졌다. 또한 그리스도를 상징적인 모습이 아닌 사실적으로 표현했으며, 하나님을 신비한 존재가 아닌 인간으로 묘사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 그림이 공개되었을 때 구경꾼들은 실물과 똑같아 보이는 이 작품을 보고 마사초가 성당 벽에 구멍을 뚫고 그 너머에 또 다른 예배당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약 600년이 흐른 현재의 내가 <성 삼위일체>를 직접 본다면 그 웅장함에 첫 공개 당시의 구경꾼들보다 더 홀렸으면 홀렸지 덜 하진 않을 듯. 정확한 원근감과 사실적인 디테일로 실물과 다름없이 완성한 이 프레스코화에 압도당하여 한참 동안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서 있을 것만 같다.

<성 삼위일체> 그림 하단 부분에는 해골이 누워 있고, 이런 묘비명이 적혀 있다. '나도 한때는 지금의 당신과 같았고, 당신도 지금의 나처럼 될 것이다.' 메멘토 모리를 뜻하는 이 말과 함께 담담히 누워 있는 해골을 보았을 때, 영화 [The Dig](2021)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디스 : 우리는 죽어요. 결국에는 죽고 부패하죠. 계속 살아갈 수 없어요.
브라운 : 제 생각은 다른데요.
인간이 최초의 손자국을 동굴 벽에 남긴 순간부터
우린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언가의 일부가 됐어요.
그러니 정말로 죽는 게 아니죠.
-영화 'The Dig'에서-
덧없이 흐르는 인생을 살다 보면 가끔 내 존재의 허무함에 가슴이 먹먹하고 정신이 아득해지곤 한다.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또한 죽음을 기억하라며 속삭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영화 'The Dig'에서 위에 인용한 저 장면을 보았을 때, 유한한 내 존재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미술서를 찾아보곤 하는 게 어쩌면 저런 이유였을 것 같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거장들이 남긴 예술작품은 곧 인류를 대변하고, 그렇기에 나 또한 명작에 연결되어 있는 존재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묘한 소속감에, 이 책을 읽는 동안 자주 가슴 벅참을 느꼈고 감동도 받았다.
작품 속에 화가가 넣은 의도나 비밀, 그리고 어떠한 과정을 통해 작품이 잉태되고 세상 속에 나왔는지에 대한 것들 등,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이야깃거리는 파도 파도 재미있는 법이다. 맨땅에 헤딩하듯 그냥 그림을 감상하는 것보다 여러 방면으로 분석한 정보와 함께 작품을 보니 확실히 보는 눈이 확 넓어짐을 느낀다. 책의 서문에 나온 말마따나 '반복해서 보고 또 보고 싶은 책'이고, 실제로 지금 그러고 있다. 현대미술 편과 이 서양미술 편으로 내킬 때마다 책장에서 꺼내 명작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어서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