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를 찾아서
글로리아 포시 지음, 김현주 옮김, 다닐로 데 마르코 외 사진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6월
평점 :
절판



   엘리엇 스미스의 곡이나 시가레츠 애프터 섹스의 감성적인 곡들을 듣고 있을 때면 떠오르는 여러 잡다한 생각 중 '빈센트 반 고흐'가 종종 끼어들기도 하는 건 내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수많은 화가 중 유독 마음이 가는 화가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의 생애를 보면 왠지 모르게 저 두 아티스트의 곡이 찰떡처럼 어울리게 느껴지는 걸 어떡하나. 얼마 전 <반 고흐를 찾아서>를 읽을 때는 아예 BGM으로 엘리엇 스미스의 노래와 시가레츠 애프터 섹스를 계속 켜두었다. 음악과 함께 밤마다 반 고흐의 흔적을 쫓으며, 그가 느꼈을 감정들을 느껴보려 애썼다.


   반 고흐를 사랑하는 두 사진작가, '다닐로 데 마르코'와 '마리오 돈데로'. 이 두 사진작가는 반 고흐가 거쳐온 삶의 자취뿐만 아니라 그가 캔버스로 남겨놓은 그 장면의 실제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고, 이들은 미술사학자 '글로리아 포시'에게 1990년에 책을 만들자며 프로젝트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이 세 사람은 반 고흐가 남긴 820통의 편지와 함께 그가 바라보았던 시선으로 그가 걸어갔던 여정을 되짚어보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반 고흐를 찾아서>는 30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프로젝트이기에, 30년 동안 모은 중간 결과물이라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멋있게 포장된 반 고흐의 이미지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사진을 통해 장소가 인간과 통합하고, 때로는 인간 스스로 장소와 하나가 되려 하는 존재의 흐름, 존재의 기운을 표현하고 해석하려 했다.

- 다닐로 데 마르코, 본서 17쪽


   이들은 서문에 언급되어 있듯 '걸어서, 혹은 기차로, 반 고흐와 똑같은 방법으로' 그의 자취를 더듬는다. 1853년 빈센트가 출생했던 곳인 네덜란드의 준데르트에서 시작해 벨기에, 영국, 프랑스에 있는 여러 도시와 마을로 말이다. 그들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영국, 프랑스, 4개국에서 사회적으로나 자연적으로 서로 다른 환경을 지닌 스무 곳의 도시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주소지를 서른일곱 번' 옮긴 반 고흐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다닌다.



   작품에 나오는 실제 장소를 찍은 다닐로와 마리오의 사진과 반 고흐의 작품을 비교해보는 건 이 책의 큰 재미 중 하나이다. 애초에 내가 이 책을 읽어보기로 한 이유도 이런 형식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사진을 찍을 당시 이미 사라져버린 장소나 출입이 금지된 곳들은 근방의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장소를 포착하는 것으로 대신하거나, 영화의 이미지를 가져와 수록해놓기도 한다. 책 서문에 실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꿈'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한 장면은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 오베르쉬르우아즈)과 무척 유사하게 재현되어 있어 이 장면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몹시 놀라울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순간은, 가령 반 고흐의 [옵베턴(Opwetten)의 물레방아](1884, 뉘넌) 속에 나온 물레방아가 있는 집이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사실처럼,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마냥 백 년도 더 지난 지금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반 고흐의 그림 속 장소들을 책에서 보게 될 때일 것이다.


짙푸른 하늘에 고전적인 진한 코발트블루보다 더 짙푸른 구름이 점점이 떠 있고, 은하수의 순백색보다 더 밝은 구름도 있었어. 푸른 배경의 하늘에는 보석보다 더 빛나고, 파리에서 보는 것보다 더 밝은 초록과 노랑, 하양, 분홍 별들이 반짝였어. 말하자면 오팔이나 에메랄드, 유리, 루비, 사파이어 같은 보석 같았지.

- 1888년 6월 3일-4일,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본서 150~151쪽

나는 지금 별이 빛나는 하늘을 꼭 그리고 싶다. 밤은 더 진한 보라색과 파랑, 초록으로 물들어 낮보다 더 풍부한 색을 나타낸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

- 1888년 9월 9일-14일, 여동생 빌에게 쓴 편지에서, 본서 194쪽

바다처럼 넓은 언덕 뒤에 있는, 섬세한 노란색과 섬세하게 탁한 초록색, 섬세한 보라색의 방대한 밀밭에 온전히 흡수되었다. 파란색과 흰색, 분홍색, 보라색의 섬세한 색조의 하늘 아래 꽃이 핀 감자 줄기들로 푸르게 물든 땅의 한 조각이다.

나는 바로 이런 것을 그릴 만큼, 거의 지나칠 정도로 차분한 상태와 분위기에 놓여 있다.

- 1890년 7월 10일-14일, 어머니와 여동생 빌에게 쓴 편지에서, 본서 219쪽


   이 책에는 하염없이 걸으며 자연을 관찰하길 좋아했던 반 고흐가 자연을 그림의 중요한 소재로 삼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노란색을 비롯한 색채에 집착해가는 과정이나 개성 있는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가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가 두 사진작가의 감성적인 사진에 잘 버무려져 있다. 글로리아 포시의 해설과 다닐로와 마리오의 사진, 그리고 곳곳에 실린 빈센트의 편지들을 읽어가는 동안 남은 책장의 양이 한 장 한 장 점점 줄어드는 게 아까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한 장씩 줄어들수록 그의 안타까운 결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에 책장을 빨리 넘기는 게 쉽지 않았고, 페이지를 넘기는 손에 전해지는 그 무게가 더욱더 무겁게 느껴졌다. 


   반 고흐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점이나, 내가 무척 좋아하는 그의 자화상을 -여덟 작품 정도- 만나볼 수 있는 점도 좋았다. 그리고 그의 자취를 쫓아가되, 그가 가졌던 정신병이나 죽음의 과정에 대한 논란 같은 지나치게 내밀한 그의 사생활에 대해선 언급을 되도록 줄이고 그의 작품과 그의 영감의 원천에 포커스를 맞춰 탐구했다는 점 역시 마음에 들었다.

   또한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1889, 생레미드프로방스)에 그려져 있는 소용돌이 치는 밤하늘을 두고 환영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대다수의 미술사학자들과는 다른 견해를 가진 글로리아 포시의 확신에 깊이 동감하기도 했다. 글로리아 포시의 설명에 의하면 이 인상적인 소용돌이는 환영이 아닌 그 당시 발견되었던 소용돌이 은하 M51을 빈센트가 참고해 그렸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 견해는 신선하게 다가옴과 동시에 설득력이 꽤 있어 보인다.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회복 중이라는 사실이 당황스러운 가운데 '무엇을 위해 회복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제 감히 낫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 1889년 1월 28일, 아를에서 테오에게 쓴 편지 중에서, 본서 185쪽

글쎄, 나는 내 일에 목숨을 걸었는데 이제 그래야 할 이유의 절반이 사라졌다.

- 사망한 반 고흐의 옷 주머니 속에 있던 쪽지, 본서 203쪽


   다 읽은 <반 고흐를 찾아서>를 덮은 후, 나는 생각에 잠겨 창밖을 바라보며 한동안 있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소나기로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멋진 광경이다. 그런데 평생 비를 좋아해 온 나처럼 반 고흐 역시 비에 대해 동생 테오와 친구들에게 자주 얘기했다는 사실이 불현듯 내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그가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하늘'과 '비'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건, 어떤 이유였을까? '이제 그래야 할 이유의 절반이 사라진' 원인이란 건 대체 뭐였을까?


   반 고흐는 짙어가는 우울함과 자신을 점점 조여오는 정신병과 고통스럽게 싸우면서도 '자연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결국 그 싸움에서 지긴 했지만, 그가 남기고 간 2천 점이 넘는 작품들은 그 치열했던 싸움의 결과물로써 우리에겐 큰 선물이 되었다.

   반 고흐의 흔적을 찾아 떠난 세 사람과 함께 나는 반 고흐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느끼며 살아갔는지, 그리고 그가 머물렀던 공간과 그림 작업을 했던 장소에서 그가 느꼈을지도 모를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30년이나 진행된 이 프로젝트가 여전히 ing인 것처럼, 나 역시도 이걸로 End가 아닌 And가 되어 그의 자취를 계속해서 쫓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난 내 예술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싶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길 바란다.

마음이 깊은 사람이구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구나.

- 빈센트 반 고흐, 영화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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