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직딩 틈나는 대로 떠나라
유상은 지음 / 미르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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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 며칠을 제외하면 휴가가 따로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나마도 내 마음대로 휴가를 낼 수 없기 때문에 여행을 그것도 해외 여행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일을 그만 두지 않는 한 내게 기회는 오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간접경험이라도 하면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보고자 하는 의도가 컸다.

 

지난 6월 일본에 다녀왔다. 정확하게는 도쿄에 다녀온 건데 10년 전에 유학 가서 눌러 앉고는 돌아오지 않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다. 마침 기회가 좋았다. 현충일이 금요일이라서 3박 4일 일정으로 후닥닥 다녀왔다. 녀석은 거기서 공부하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애도 낳고 완전히 정착해서 잘 살고 있다. 출국하기 전 일본 여행과 관련된 책을 두 권 읽었다. 

 

한 권은 말 그대로 완벽한 여행 안내서. 출국하는 법부터 가볼만한 곳과 먹을 만한 곳, 쇼핑할 곳, 숙박 시설 등을 상세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적어 놓았다. 그렇지만 너무 딱딱한 느낌을 줘서 정이 가지 않았다. 또 한 권은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손미나의 <태양의 여행자>였는데 글쓴이의 감상이 주를 이루는 책이라 원하는 여행 정보를 제대로 얻을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 직딩 틈나는 대로 떠나라>는 딱딱한 여행 안내서와 감상 위주의 여행 에세이의 중간쯤을 차지하는 책이라고나 할까. 필요한 정보는 다 있으면서도 아기자기한 자신의 감상이 잘 곁들여진 책이라고 말하면 딱 알맞을 거 같다. 그래서 부담 없이 술술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책은 총 3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여행 준비에 관한 부분과 도쿄, 오사카, 홍콩, 방콕,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여행지에 대한 자세한 소개 그리고 마지막으로 완소 여행지 베스트 7을 선정해서 각각의 여행지에 대한 알짜 정보를 소개하고 있다. 예쁜 사진도 많고 여행 팁도 중간중간 상세하게 소개돼 있어 읽고 보고 느낄 수 있는 여행 책자로 제법 충실한 역할을 하고 있다.

 

도쿄나 홍콩 등은 3박 4일 일정으로도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짧은 일정으로 소화할 수 있는 곳이긴 하지만 사실 제대로 둘러 보려면 시간을 충분히 갖고 가는 게 좋기는 하다. 친구 보러 도쿄에 갔을 때 도쿄 외곽에 있는 하코네 료칸에서 1박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코네까지 가서 1박을 하려면 하루 정도 더 시간이 필요한데 일정을 늘리기 어려웠기 때문에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상대적으로 비행 시간이 긴 유럽쪽은 최소 6박 7일 이상 잡아야 한다. 그리고 너무 힘들지 않으면서도 알차게 돌아보기 위해선 계획을 잘 세워둬야 한다. 이 책은 일정 잡는 데 도움이 많이 되는 거 같다. 어떻게 움직이는 게 더 유리한지 루트를 정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처음 여행하거나 전에 여행을 가서 실패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될 듯하다.

 

이 책에서 소개한 여행지 중 내가 눈여겨 본 곳은 두 곳. 바로 프랑스와 베트남이다. 프랑스만큼 사람을 끌어 당기는 나라도 없다. 작가가 소제목에도 썼듯이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프랑스가 아니면 보낼 수 없을 거 같은 생각이 든다. 언젠가 기회를 만들어서 꼭 가보고 싶다. 그리고 베트남, 내면을 가다듬을 신념이 필요할 때 가보라고 작가가 추천한 곳이다. 베트남의 아픈 역사를 생각해보면 마음을 새롭게 하는 데 그 땅의 공기가 정말이지 큰 도움이 될 것도 같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진짜 여행은 국내 여행이다. 언젠가 자동차로 전국을 접수하는 것이 내 목표다. 서쪽을 시작으로 남쪽을 경유해 동쪽까지 반도를 따라 쭉 돌아보는 것.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시도해보고 싶다. 마음에 맞는 친구가 있다면 함께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돈이나 시간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는 작가의 말이 도전이 된다. 잘 준비해서 도전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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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괴수 무벰베를 찾아라 - 와세다 대학 탐험부 특명 프로젝트
다카노 히데유키 지음, 강병혁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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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무도 가지 않는 곳에 가서,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아무도 모르는 것을 찾아낸다."를 모토로 세계 각지를 탐험한 후 그 모험담을 책으로 써내는 '변경 작가' 다카노 히데유키. 한마디로 줄이면 오지 탐험 작가란 소리다. 그가 써 내는 작품들이 '엔터테인먼트 논픽션'이란 새로운 장르로 분류되며, 이 새로운 장르의 개척자 역시 다카노 자신이라니... 굉장히 신선하다.  

그렇다면 '엔터테인먼트 논픽션'이란 장르는 어떤 장르인가? 간단히 말하면 80%의 실제 경험과 20%의 작가적 상상력이 들어가는 소설 아닌 소설이라 정의할 수 있겠다. 어찌 보면 에세이에 가까운 글 같기도 하다. 실제로 한 포탈 사이트에서는 이 책의 장르를 여행 에세이로 분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이 책의 장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면 만사 오케이!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책과 조우했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표지가 정말 무벰베스럽다. 그리고 이야기는 더욱 무벰베스럽다. 여기서 나는 '무벰베스럽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런데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무척이나 난감할 것이다. 왜냐면 이 책을 읽은 사람만이 내가 왜 무벰베스럽다고 말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공감을 표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하면 그 느낌은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래서 이 책을 읽은 사람만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그런 느낌, 그 느낌을 나는 무벰베스럽다고 표현한 것 뿐이다. 어휘력이 딸려서 더는 설명을 못하겠다. 아무튼 그렇다. 

앗, 그러고 보니 성격 급한 몇몇 사람들은 또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결론이 뭐야? 그 괴수를 찾았다는 거야, 못 찾았다는 거야?" 
그러나 그 역시 대답할 수 없는 성질의 질문이다. 다만 나는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궁금하다면 꼭 한번 읽어 보세요."
독특한 소재의, 특별한 작품임은 물론이고 읽는 내내 즐거운 데다 얻는 게 너무도 많은 책이기 때문이다.  

탐험대원 중에 다무라 오사무라는 사람이 있었다. 다무라는 콩고에 머무르는 내내 말라리아에 잠식 당해 아무 것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던 사람이다. 그가 돌아와서 한 인터뷰 중 인상 깊었던 대목이 있다. 

"절대적인 것이 있다면 일이나 꿈 같은 게 아니라 인간관계에 있고, 그 핵심에 있는 것이 가족이다." 

그는 말라리아 때문에 텔레호에 머무르는 동안 한번도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 거창한 목표를 위해 다들 제 할 일로 바쁜 중에 그를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 시간에 밥을 챙겨서 가져다 주고 때 맞춰 약만 먹인다고 그를 신경쓰는 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프고 괴로운 상황에 놓이면 사람의 온기가 더욱 그리워지는 법이다. 그러나 그는 고독 속에 버려졌다. 어쩌면 다무라는 몸을 움직이기 힘든 고통보다 외로움을 견디기가 더 힘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오랜동안 아파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꿈이나 일보다 더 중요한 건 '관계'에 있다는 다무라의 말이 참 아프게 다가왔다. 혹시 나도 주변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리더였던 다카노도 이 부분에 대해 많이 미안해 하는 듯하다. 다무라의 일로 그는 좀 더 성숙한 리더가 됐을 것이다.  

사실 대학생의 신분으로 괴수 찾으러 콩고까지 날아간 것만도 대단한 일이다. 준비하는 과정을 보면 정말이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나는 죽었다 깨나도 못할 거 같은 일들을 척척 해낸다. 예상 못한 난감한 상황들이 생길 때마다 침착하게 대처하는 모습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참가했던 대원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우리네 인생 자체가 모험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험, 탐험 이야기에 그토록 열광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릴 적 좋아했던 책들 중엔 <빨강머리 앤>이나 <작은아씨들> 같은 아기자기한 소녀 스타일의 책들도 있었지만 그와는 반대되는 소년적이며 모험심을 불러 일으키는 책들도 많았다. <15소년 표류기>나 <80일간의 세계 일주>, <로빈슨 크루소>, <보물섬> 같은 작품들 말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그 책들이 자주 생각났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탐험가라고. 인생이라고 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는 탐험가라고. 그러니 때로는 잘못해서 표류는 하게 되더라도 최소한 좌초되지 않을 만큼 튼튼한 배를 만들어야겠다고 말이다.  

정말 즐겁고 알찬 시간이었다. 이런 류의 책을 또 만나고 싶다. 지금 세상에는 이런 책이 필요하다는 미미여사의 추천사에 깊이 공감하며 후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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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던라이츠
호시노 미치오 글.사진,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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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알래스카가 주는 감동은 비단 그곳이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진짜 자연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호시노 미치오는 이 책을 통해 광활한 알래스카 땅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알래스카 환경 운동가 셀리아와 지니, 핵 실험을 위한 채리엇 프로젝트를 중단시켰던 빌 프루이트, 현대화되어 가는 알래스카에서 전통적인 삶을 고집하는 백인 가족 캔트너 일가, 알카트라즈에서 인디언 투쟁을 주도할 정도로 백인을 증오했으나 이를 뛰어넘고 백인 여성과 결혼한 알 스티븐스 그리고 뛰어난 고래 사냥꾼으로 포인트 호프 마을의 미래를 주도할 에이모스까지...  

특히 채리엇 프로젝트를 중단시켰던 빌 프루이트의 결단과 용기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거 같다. 결국 알래스카에서 추방당한 그는 더이상 미국 내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캐나다로 이주해야만 했다. 양심을 지킨 대가로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그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깊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했을까.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던라이츠는 원래 북극광인 오로라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책에 오로라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나는 왜 제목이 <노던라이츠>일까 궁금했는데, 역자 역시 같은 의문을 품었던 거 같다. 역자는 곧 노던라이츠는 호시노가 만난 모든 알래스카인들이란 결론을 내린다. 나 역시 역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알래스카를 비추는 진정한 빛은 '그 땅을 지키며 살아가는 인간'이란 호시노 미치오의 생각은 그가 알래스카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말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알래스카를 사랑하는 저자의 마음이 이 한 권의 책에 녹아 있는 듯하다.  

저자가 만났던 노던라이츠들을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만이 아니라 비록 흑백이지만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어 더욱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모두 순박하면서도 건강한 얼굴을 하고 있다. 여러가지 일들로 큰 상처를 받았지만 그 상처를 건강한 에너지로 바꿀 줄 아는 지혜로운 눈빛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겨울철 가장 추운 날은 영하 70도까지 떨어지는 알래스카. 코 끝이 맵도록 추운 겨울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날씨다. 어릴 적 영하 10도까지 내려가는 추운 겨울, 공기조차 얼어붙은 거리를 종종거리며 뛰어다니던 기억이 아련하다. 나는 늘 그런 겨울을 기다린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했던 그 겨울은 이제 더이상 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겨울이 더 이상 춥지 않기 때문이다. 눈이라도 내린 날이면 추운 줄 모르고 눈사람을 만들고 눈 싸움을 하고 눈을 맛보던 그 기억들이 아픈 기억으로만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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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과 무생물 사이
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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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지인이 생물학에 관한 교양도서를 선물해줬다. 과학 분야에 대한 책도 천천히 하나씩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던 터라 기대감에 차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초반부까지는 그럭저럭 잘 나가고 있었는데 중반부부터는 도저히 머리 속에 책이 들어오질 않는다. 그리고 점차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결국 책을 덮고 말았다. 안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이 분야의 다른 책을 읽어볼 생각을 하게 된 건 '쉽게 씌여진 책'이라는 소개 문구 덕분이다. 정말 쉬울까, 내가 읽을 수 있을 만큼? 전에는 실패했지만 이번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뭐,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으나 결국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이 책을 선택하게 됐다.
 

쉽게 씌여진 생물학 분야 도서라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다. 이 책은 단순히 생물학에 관한 학술적인 보고 형식의 글이 아니다. 수필이나 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문학적인 느낌을 주는 책이다. 특히 비유가 정말 끝내 준다. 그 중 모래성 비유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결코 잊을 수 없을 거 같다. 대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바닷가 모래성이 형태는 유지하되 성을 이루고 있는 모래는 바다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운 모래들로 대체되듯이 분자학적으로 볼 때 우리 몸도 머리카락이나 손, 발톱뿐 아니라 내부의 장기나 뼈 그리고 치아에서조차 분해와 합성을 하면서 놀라운 속도로 내용물(분자)을 바꾸고 있다. 외관상 쌓아두고 있는 척하면서 원자는 생명체 내부를 흐르며 빠져나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분자 차원에서 볼 때는 1년 전에 만났던 그 사람은 1년 후의 그 사람과 다르다. 과거 그의 일부였던 원자나 분자는 다 빠져나가고 새로운 분자가 그 자리를 메우고 존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비단 이 뿐만이 아니다. 시간을 '다시 펼 수 없는 종이접기'에 비유한 부분도 탄성을 내지르게 한다. 본문을 잠시 옮겨보겠다.

"시간 축의 한 점에서 만들어져야 할 조각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그 결과 형태의 상보성이 성립되지 않으면 색종이는 그곳에서 접히기를 원치 않고 살짝 비껴간 지점에 자리를 잡고 다음 형태로 만들어지려 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잡힌 평형 상태가 된다. 만약 어떤 지점에서 형태의 상보성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접혀버린 색종이가 있다면 잘못 접혀 비뚤어진 선은 결국 전체의 형태까지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다. (중략) 생물에는 시간이 있다. 그 내부에는 항상 불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이 있고 그 흐름에 따라 접히고 한 번 접히면 다시는 펼칠 수 없는 존재가 생물이다. 생명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은 기계가 아니라는 저자의 정의 역시 가슴 속을 따뜻하게 만드는 멋진 비유였다. 어떤 특정한 유전자를 제거(녹아웃)한 녹아웃 마우스를 탄생시킨 후 실험을 했다. 없어서는 안 되는 유전자였으나 녹아웃 마우스는 생물학적으로 아무 문제없는 보통의 쥐로 자라고 있다. 문제가 발생해야 마땅한데 쥐는 정상이다. 불완전한 분자를 가진 쥐는 태어나서 곧 죽음을 맞이했으나 녹아웃된 쥐는 동적 평형에 의해 구조적 결함을 메워가며 생명을 유지한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 실험이었다. 기계는 부품이 하나라도 빠진 상태에서는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생명은 다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 나비와 도마뱀을 통해 경험했던 생명의 신비를 이야기한다. 집 근처에서 도마뱀 알을 발견하고 부화를 기다리던 소년 신이치는 어느 날 부화되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살짝 안을 들여다 보기로 결심한다. 바늘과 핀셋으로 조그만 구멍을 만들어 살아있는지만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곧 그 속에 잠들어 있는 도마뱀 새끼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번 외부의 공기에 닿아버린 도마뱀 새끼는 이내 서서히 썩어들었고 형태가 녹아내려 버렸다. 이 기억이 아직도 그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생명이라는 이름의 동적 평형은 시간 축을 일방통행하고 있으면 역주행이 불가능한 완성된 시스템이기 때문에 인위적인 개입은 동적 평형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힌다. 결국 생명을 기계적으로 조작할 수 없다는 말로 저자는 책을 끝맺고 있다. 
 

저명한 과학자지만 생명의 경이 앞에 고개 숙일 줄 아는 겸손함을 엿볼 수 있어서 마음이 푸근해졌다. 결국 이 책을 통해 생명이란 두 가지 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기 복제가 가능하다는 것과 동적 평형 상태에 있는 흐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두 가지 조건 모두 인위성을 띄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든 이들이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과학에 문외한인 나같은 사람도 읽을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게 책을 써준 저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전에 포기했던 책을 다시 시도해 봐야겠다. 아마 전처럼 쉽게 접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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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의 계절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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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속에만 존재할 법한 세상을 마치 눈으로 보는 듯이 생생하게 그려내기란 참 어렵다. 우리 몸의 일부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느낌마저 들게 만들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러나 이 작가가 그려내는 이계는 참으로 매혹적이다. 게다가 터무니없게도 향수마저 느끼게 한다.

 

쓰네카와 고타로는 그의 처녀작 <야시>를 통해 처음 만났다. 중편 <야시>와 <바람의 그림자> 두 편이 <야시>라는 제목을 가진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세상에 나왔다. 일본 호러소설 대상을 수상했고 나오키상 후보에까지 오를 정도면 완성도에 대해선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당연히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나 역시 <바람의 그림자>를 읽으면서 기시감을 느낄 만큼 그 책에 깊이 빠져 들었었다. 그래서 그의 첫 장편인 <천둥의 계절>이 나왔다는 소식에 나는 그 누구보다도 기뻤고 곧바로 이 책을 내 곁으로 가져왔다.

 

쓰네카와 고타로가 만들어낸 또다른 이계인 '온'. 그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4계절이 존재한다면 온에는 하나의 계절이 더 존재한다. 바로 '천둥의 계절.' 천둥의 계절은 신의 계절이다. 그리고 심판의 계절이다. 천둥의 계절이면 어김없이 한, 두 명의 사람들이 신의 심판을 받고 마을에서 사라져 버린다. 아무도 모르게.

 

어딘가 모르게 남달라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겐야는 천둥의 계절에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누나를 잃고 만다. 누나를 잃던 날 겐야는 자기 몸에 무언가 다른 존재가 찾아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은 바로 정령인 바람 와이와이. 어느 날 우연히 마을에서 일어난 의문의 사건들의 실상을 알게 된 겐야는 바람 와이와이의 인도로 낯선 세계로 들어가게 되고 모험은 시작된다.

 

이 책은 전편인 <야시>와 마찬가지로 호러보다는 판타지에 더 가깝다. <나니아 연대기>나 <반지의 제왕>을 통해 맛본 서양적인 판타지도 꽤나 매력적이었지만 동양적인 색채를 물씬 풍기는 이 책도 나름 아기자기한 맛에 정이 듬뿍 간다. 도롱이를 입고 귀신 흉내를 낸다거나 동자귀신이 병자의 눈에 보인다던가 하는 부분에서는 전설의 고향이 떠올라서 친근감마저 느껴졌다. 물론 뭔가에 씌인다는 설정은 개인적인 성향상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소설은 겐야와 아카네를 중심으로 시점이 바뀌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서로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던 이야기들이 어느 순간 서로 접점을 찾게 되고, 책을 읽어 내려가다가 떠올랐던 의문점들은 실타래 풀리듯 하나씩 풀려 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작가는 겐야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은 말로 이야기를 끝맺고 있다.

 

그렇다. 시간은 흘러서 사라진다.

전에 나를 덮쳤던 커다란 파도는 나를 물가로 번쩍 밀어 올리고 나의 소년 시절을 앗아서는 끝없는 대양으로 데려갔다. ... 저쪽에서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올 것이고, 그 파도는 나를 다시 새로운 바다로 데려갈 것이다.

그 옛날 누나의 말처럼 마침내 새로운 계절이 찾아올 것이다.  - p.373

 

책을 덮으며 인생이 우리를 어느 계절로 몰고 갈 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는 그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수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거부하기도 하면서 날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또 성장하고 있다. 내 인생에서 천둥의 계절은 언제였을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바로 지금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새로운 계절을 기대하며 짧은 천둥의 계절을 지혜롭게 마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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