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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후회남
둥시 지음, 홍순도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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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입이 너무 싼 대가로 삶을 망친 한 남자가 있다. 50여생을 후회할 거리들로 채워간 한 남자의 이름은 쩡광셴이다. 광셴廣賢이란 이름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현명하기는 커녕 누가 봐도 어리석다 싶은 결정들을 하고 만다. 그리고 어리석은 결정의 결과는 언제나 폭풍 후 남은 잔해처럼 너덜너덜 망신창이가 된 자신을 탓하는 일뿐이다.

 

그가 일으킨 주요 사건 몇 가지를 좀 살펴 볼까. 소년 시절 아버지를 고발해 두 차례나 비판 투쟁 대회 대상자로 만들어 버린다. 아버지의 외도를 어머니에게 속살거려 어머니는 집을 나가게 된다. 직장 상사에게 추행당하는 모습을 아들에게 보이게 된 어머니는 결국 자살하게 된다. 또 자기를 좋아하는 괜찮은 여자 아이를 무심히 떠나 보내는가 하면, 동물과 수간한 친구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자살하게 만든다. 자기 자신도 자신의 세 치 혀 때문에 무지막지한 고생을 하게 된다. 강간범으로 누명을 써서 10년간 옥살이를 하게 되고, 자신의 옥바라지를 했던 지고지순한 여자를 놓치고, 가짜 결혼 증명서에 놀아남은 물론 국가에서 돌려준 조상때부터 내려온 큰 창고마저 지키지 못하고 어렵게 살게 된다. 결국 그는 결혼은 커녕 동정도 떼지 못한 채 50여년이란 긴 세월을 흘려 보내고 만다.

 

이 소설에는 문화대혁명이란 거대한 역사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광셴이 10년 옥살이를 하는 동안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그가 옥살이를 해야 했던 원인이 된 일이 10년이 지난 후 그가 출소한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돼 버렸다. 어찌 보면 굉장히 억울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혼란스러운 시대 흐름 속에서 어떤 게 옳은 결정인지 천성이 무르고 착한 그로서는 판단하기 힘든 일들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모습에 우리 자신의 모습이 겹쳐진다고 하면 너무 큰 비약일까.

 

내용만 보면 굉장히 무겁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소설은 굉장히 가볍다. 무겁게 흐를 수도 있는 내용을 작가 나름대로 해학적으로 그려냈다. 그런데 그 익살스러움이 배를 잡고 웃게 만들 정도의 익살은 아니라는 느낌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별로 웃지 못했다. 그저 주인공의 행태가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했을 뿐이다. 후회할 인생을 살지 않아야지,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지, 정도의 교훈을 얻었을 뿐이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식물인간이 돼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마지막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그의 어리석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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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 서울 브라보 대한민국 - 20세기 한국을 읽는 25가지 풍속 키워드
손성진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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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시각적 자극에 아주 민감한 모양이다. 작년쯤 돌이 갓 지난 어린 조카가 컴퓨터로 실행되는 만화 동영상에 빠져서 한동안 헤어나오질 못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여달라고 조르는 것은 물론이고 한번 보기 시작하면 한 시간 이상 꼼짝 않고 눈을 못 떼며 볼 정도였다. 결국 적절하게 조치를 취해서 컴퓨터 중독을 고치긴 했지만 그런 일이 다시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어 동생 부부는 늘 신경을 쓰고 있다. 요즘 아이들이 '컴퓨터' 라고 하는 문명의 이기에 빠져 있다면, 옛날 아이들은 바보 상자라 불리는 tv에 쉽게 빠져 들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tv가 없었다. 하루 세 끼 밥 먹기도 어려웠던 시절, tv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물건이었다. 동네에 tv가 있는 집이 몇 안 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한 7살쯤 되었을라나. 어느 날, 저녁을 먹은 후 어린 내가 화장실에 갔다 온다고 하면서 슬그머니 집 밖으로 나가더란다. 그 때만 해도 으레 화장실 하면 몇 개 가구가 함께 사용하는 옥외 공동 화장실뿐이었다. 밥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난 지 한참이 지나도 화장실 간다고 나간 내가 돌아오지 않자 모친은 이내 나를 찾으러 나서셨다. 내 평소 활동 반경을 잘 알고 계시던 모친은 곧바로 평소에 내가 마실 잘 다니던 집으로 가셨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 식사 중인 남의 집에 가서 그 집 식구들과 같이 tv를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실 수 있었다. 내 또래의 그 집 아들이 자기 집에 tv 보러 오는 나를 달가워 안 해서 얻어맞고 울며 쫓겨 온 지 채 하루도 못 돼 벌어진 일이다. tv에 대한 나의 열정이 얼마만 했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결국 모친께서는 얼마 후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tv를 한 대 놓으셨다. 대한전선에서 나온, 다리와 미닫이가 달린 전형적인 구식 tv였다. 처음 tv가 우리 집에 온 '역사적인 그 날' 미닫이를 열었다 닫았다, tv를 켰다 껐다 그리고 몇 개 되지도 않는 채널을 이리 저리 돌려가며 엄청 좋아했던 기억은 난다. 또 이런 적도 있었다. 어느 날 자다가 가위에 눌려 괴로워하다가 간신히 깨어났는데, 깨나 보니 내가 tv 다리 밑에서 팔, 다리를 버둥거리고 있지 뭔가. tv만 보면 바보 된다는 말이 있는데, 내가 여러 면에서 모자라는 건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줄기차게 보아 온 tv탓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은 tv보다는 책에 빠져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럭키 서울 브라보 대한민국>은 바로 우리네(30대 이상)의 향수 어린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사람 사는 냄새가 물신 풍기는 무척 재미있는 책이다. 물론 연령과 상관없이 예전 어른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달고나, 쫀쫀이, 눈깔사탕, 아이스케키 등 달콤한 먹거리에 대한 소개를 시작으로 놀이터 대신 골목길에서 했던  다양한 놀이들, 소풍, 수학 여행, 운동회 때 벌어진 웃지 못할 정경 등 저자의 향수 어린 글들을 읽다 보면, 어느새 무성 영화나 흑백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내가 경험했거나 봐왔던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도 재미있었지만 그 외 다른 여러 분야에 대한 이야기들도 꽤나 흥미로웠다. 특히 1970, 80년대는 이런 저런 이유들 때문에 금지곡이 된 노래들이 많았는데, 그 면면을 살펴 보면 정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밖에 안 나오는 이유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라는 노래에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라는 부분이 있는데 그러면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는 거냐, 행복의 나라가 북한이냐며 금지시켰다. <거짓말이야>는 불신감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배호의 <0시의 이별>은 0시부터 통금인데 그 때 이별하면 어떡하느냐는 이유로, 심수종의 <순자의 가을>은 대통령 부인의 이름을 썼다는 이유로 금지시켰다.(p.162, 163} 우습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책을 읽어 가면서 참 많은 것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 시절의 낭만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고단했던 그 시절의 삶이 오히려 더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건 아마도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유행이 지났다고 해서 몇 번 입지도 않은 옷을 쉽게 버리고 새로 사는 요즘 아이들에게 겉옷은 물론이고 속옷까지 꿰매서 입던 그 시절 이야기가 낭만적이기는 커녕 구질구질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 때가 있어서 지금이 있다는 사실까지는 부인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얼마 전 대학 때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게 됐다. 결혼해서 서울 근교 소도시에 살고 있는 그 친구와는 꽤나 오랫동안 연락이 두절됐었다. 그런데도 통화를 시작하자 마자 봇물 터지듯이 할 말이 생기고 스스럼없이 삶을 나누게 되었다. 사회 생활하면서 만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격의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까. 어린 시절, 학창 시절 그리고 순수했던 그 시절들이 그리워진다.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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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 사랑하기
빌헬름 게나찌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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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를 사랑하는 한 남자가 있다. 젊은 것도 아니고(50대의 중년이다.), 능력이 있는 것 역시 아니고(평생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다.), 특별하게 잘 생겨서 그런 것은 더욱 아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_- 외모에 대한 이야기는 안 나온다.) 다만 조금 지적인 사람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강연을 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인간의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무기로 하는 종말 강연이기 때문에 사기꾼과 별다름 없다. 물론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강연을 듣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다지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다.-_-)

 

주인공이 사랑하는 두 여자의 이야기를 해 보자. 둘 중 한 명은 그의 아내일 것이고 다른 한 명과는 불륜의 관계일 거라는 상상은 말라. 그 남자는 결혼했다가 한 번 실패한 사람이다. 이혼 후 만난(잔드라의 경우 결혼 전부터 알던 사이지만) 두 여자와 줄다리기 사랑을 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두 여자는 그 남자가 양다리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다. 한 명은 유디트라는 예술 감각이 뛰어나고 지적인 동년배 여자다. 그와 대화가 통하고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것이 그녀의 장점이지만 다소 신경질적이고 가정적이지 못한 것은 흠이다. 또 다른 한 명은 그보다 연하인 잔드라. 가정적이면서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따뜻하고 편안한 여자다. 하지만 그와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준은 못되는데다 그녀가 취미 삼아 그리는 그림을 그는 아주아주 형편없어 한다. (물론 티를 내지는 않지만)

 

두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양편 부모를 똑같이 사랑하는 것과 같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주장하던 이 남자. (모 개그 프로에서 우스꽝스런 얼굴의 두 남자가 목이 터져라 부르짖던 짧은 문장이 생각난다.-_-) 이제 그는 선택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점점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다. 게다가 병을 앓고 있다. 성기능도 저하되고 있다. 모든 것이 우울한 상황이다. 게다가 그의 주위에는 이상한 사람들(대다수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직업과 인생 편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잔뜩 있는데 그들의 행동양식과 사고는 그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 뿐이다.

 

그는 과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유디트일까, 잔드라일까?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나는 흠뻑 빠졌다. 이 책은 줄거리라고 할 건 그다지 없다.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사랑하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만 나올 뿐이다. 이 책을 영화로 만든다면 정말 지루할 것이다. 대사도 별로 없고 특별한 사건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문드문 블랙 코미디를 보는 거 같은 착각에 빠져 실소를 하기도 했다. 아무튼 두 여자를 사랑하는 주인공이 소소하고 일상적인 상황에 대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잔잔하게 전해주는 독백체에 가까운 책이다.
그래서 나는 남의 일기를 훔쳐 읽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것만큼 재미있는 게 어디 있을까? 게다가 문체가 매우 독특하다. 대화체의 문장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생각과 묘사와 대화가 두루뭉수리하게 엉겨 있기 때문에, 숨 쉴 틈 없이 주인공을 통해 전달되는 작가의 생각에 마구 몰입하게 만드는 힘을 느낄 수 있다.

 

삶은 아름답지도 안정적이지도 않다. 묘하게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세상은 온통 혼란스러움으로 가득차 있다. 이 남자가 욕심이 많고 파렴치한 사람이라서 두 여자를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이 남자가 오히려 종말을 향해 가는 인류의 가치관에 대한 혼동과 종말에 대해 두려워하는 모두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는 예상치 못한 때에 종말을 맞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할 만한 사람은 잔드라 말고는 이 책에 나오지 않는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고들 종종 표현하는 데 여기 나오는 인물들이 대체로 그렇다. 그들이 관심을 갖고 몰두하는 일은 터무니없을 정도다.

 

괴로운 마음으로 책을 덮어야 했다. 그렇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둘러 쓰고는 '제대로' 문명 사회를 꼬집고 있다. 현대 독일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개인적으로 좋은 경험이었다. 이 작가, 내 블랙리스트에 완전히 올라 섰다.

 

* 인상 깊었던 부분 

내가 맞서 싸워야 할 인간이 한 명 있다. 그건 바로 나다.

 

이 순간 바지는 이상하게 설렁설렁/얼기설기/뒤죽박죽 이어져 온 내 인생 편력을 얘기하기 시작한다. 잠시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상한다. 내 인생이 아주 흥미롭게 느껴지더니, 그것도 잠시일 뿐, 갑자기 지루해지는 것이다.

 

두 여자를 동시에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적극 권장할 만한 일이다.(중략)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이다.(그리고 정상으로 만들어준다.) 왜 어떤 경우에는 이중의 사랑이 가능하다고 하면서, 왜 다른 경우에는 이런 사랑을 금지해야 한다는 것인지 실로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 삼의 여자가 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종업원과 어떻게 해볼까 하는 생각을 벌써 세 번씩이나 하고 있다.

 

(여행을 떠나는 유디트를 배웅하면서) 마음 속에서 연민의 감정이 생긴다. 이 감정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것이지, 아니면 나 자신을 향한 것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연민을 자기연민과 명쾌하게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 두 연민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도 연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중대한 사랑의 과오를 피하기 위해 나는 윤리를 위반하는 사소한 행위들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인다. 내가 이런 생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다. 이로써 나는 불안에 떨면서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랑의 생존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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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하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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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하권 합해서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이다. 5일 동안 아무 것도 못하고 이것만 붙잡고 있었다. (사실은 상권 보다가 머리도 식힐 겸 영화 본 기념 겸 플라이, 대디, 플라이를 읽었지만.-_-) 일단 분량이 방대하기도 하고 내용이 너무나 복잡 미묘하기도 하고 처음 보는 용어들이 간혹 툭툭 튀어 나와 당황케도 해서 다 읽는데 시일이 조금 걸렸다. 그러나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엄청난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5일간 완전히 이 책의 향기에 취해 버리고 말았다.

 

이 책은 14세기 중세 교회를 배경으로 쓰여진 책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중세에 대한 지식이란 중, 고등학교 다닐 때 배웠던 세계사와 몇 편의 영화와 몇 권의 만화를 통해 배운 조악한 것들뿐이다. 그러니 형편없는 단편적인 지식(없느니만 못한)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성경을 몇 번 완독했던 경험은 이 책을 읽는 데 꽤 큰 도움이 되기는 했다. 특히나 작품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부분은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이다. 혹 이 책을 읽을 계획을 가지고 있거나 지금 읽고 있다면 요한계시록(책에는 요한의 묵시록이라 기록되어 있다.)을 두, 세번쯤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살펴 보자.
이탈리아의 멜크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조사를 맡게 된 윌리엄 수도사와 그의 조수 아드소가 문제의 수도원에서 겪은 7일간의 모험담이 이 책의 주요 골격이다. 아델모를 시작으로 문서 사자실의 필사사였던 수도사들과 수련사들이 하나, 둘 살인을 당하게 되는데 그들이 죽은 모습이 요한 계시록의 재앙에 관한 예언 부분과 묘하게 일치하고 있다. 윌리엄은 수사 담당 수도사다운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하여 문제의 살인 사건과 수도원의 자랑인 장서관 사이의 어떤 연관성을 알아내게 되고 미궁 속같던 사건의 전모는 하나, 둘 밝혀진다. 그러나 마지막에 뒤통수를 아프도록 때리는 반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 묘미란 실로 대단하다.

 

이 책을 단순한 추리물로만 볼 수는 없다.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아내는 추리의 과정이 주를 차지하기는 하지만 에코의 박학다식함이 유감없이 발휘된 책이기도 하다. 철학과 신학, 역사와 미학에 이르기까지 그가 풀어낸 방대한 지식의 양에 나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고 개인적으로 오래도록 사유할 시간을 갖기도 했다. 또한 에코가 세상을 보는 눈의 깊이에 나는 여러 차례 탄복했는데 특히 하권 중반 부분에 나오는 세속적 권력에 대해 펴 놓은 논리 부분이 정말 인상 깊었다.

 

인간은 유한하다. 잠깐 피었다 지는 꽃에 불과하다. 책을 읽으며 지적 허영심(허영을 부릴 만한 지식을 소유하지는 못했지만)이 얼마나 큰 위험의 소치가 될 수 있는 지 깨달았다. 또한 자신의 신념에 대한 무조건적인 확고함도 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 속에 펼쳐 수놓은 신의 섭리를 인간이 다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역사를 더듬어 보면 더욱 인간의 어리석음이 눈에 두드러진다.

 

인간의 존재 가치는 무엇인가? 허울뿐인 육신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육신이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것은 무얼까? 이 책의 제목과 어떤 연관성이 있지는 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작가 가네시로 가즈키의 책에 보면 '기초란 필요없는 부분을 버리고 필요한 부분만 남기는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나는 에코가 기존의 질서를 다 무너뜨려 전소시키고 새로운 기초를 세우고자 하는 열망을 이 책을 통해 표출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잠시 해보았다. 너무 허무맹랑한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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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 스내처 - 이색작가총서 1
잭 피니 지음, 강수백 옮김 / 너머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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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잭 피니의 '바디 스내처'는 책 나눔으로 받은 책이다. 책과 함께 떠나는 여행란에 이 책이 올라왔기에 읽어 보고 싶다고 요청했는데 나늬님께서 선뜻 보내주셨다. SF 공포물이라고 하면 장르상 맞을 거 같다. 1950년대에 쓰여진 이 책은 1978년에 영화로 제작되었고 1993년에는 리메이크 되었다. 책이 오자마자 읽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가 X-파일의 멀더와 스컬리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리고 곧 남녀 주인공을 멀더와 스컬리로 생각하며 읽어 버렸다. 어쩌면 그래서 더 흥미진진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원래 공포물을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공포를 그다지 즐길 줄은 모르는 사람이다. 호러물이나 공포물을 볼 때 저 상황은 나와 하등의 관계가 없음은 물론 픽션이라고 스스로 암시를 하는 모양이다.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어떡해'를 연발하며 두려움에 떨 때 나는 그 사람의 귀에 대고 살짝 속삭여 준다. "이건 그냥 영화일 뿐이야."라고.-_- 진정한 공포물 매니아들은 완전 몰입해서 오싹하는 공포를 맛볼 줄 안다고 하는데 나는 매니아는 절대 못 될 위인이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공포물들에는 그다지 공포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적인 공포를 주는 영화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내가 지금까지 봤던(그다지 많이 본 건 아니지만) 공포 영화 중 최고의 작품은 바로 '알 포인트'다. 유령이나 귀신이 나타나는 것보다 더 두려웠던 건 바로 옆에 있는 이 사람이 내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닐 거라는 심리에서 오는 공포, 바로 그것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는 3일 동안 수면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_- 그리고 배우 감우성을 더 좋아하게 됐다. 아무튼 나와 친숙한 사람이 내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설정, 그것이 무척이나 낯설고 두려웠다. 이 책이 바로 그러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0대 후반의 일반 개업의이자 이혼남인 마일즈(멀더)는 어느 날 고교 동창인 베키(스컬리)의 방문을 받게 된다. 그리고 베키로부터 그녀의 사촌 윌마를 만나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유인즉 윌마가 그녀를 길러 준 삼촌 내외가 진짜 그녀의 삼촌과 숙모가 아니라는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사는 조용하고 아담한 시골, 밀 밸리에서는 윌마와 같은 증상을 겪는 사람들이 속속 나타나게 된다. 집단적인 히스테리 현상으로 치부하던 마일즈는 그의 친구 잭을 통해 이 기이한 현상의 실체를 알게 되고 그들은 공포에 사로잡히기 시작한다.(줄거리는 여기까지...^^)

 

남아 있는 페이지 수가 채 10페이지도 안 되는 상황까지도 끝을 알 수 없게 스토리를 전개시키는 구성력은 참 놀라웠다. 하지만 마무리 부분은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어떻게 생각하면 약간은 어이가 없기도 한 결말이다(스포일러 자제하기 힘들지만 참는다.-_-).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일즈가 짧은 며칠 동안 벌어진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동안 표현됐던 심리 묘사는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여서 나는 같이 숨을 헐떡이며 손에 땀을 쥘 수밖에 없었다. 마일즈와 베키의 운명은, 밀 밸리의 운명과 인류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 끊임없이 감정 이입이 되는 상황들이 연출되는 데 그 때마다 내 생각을 한 발 앞서가는 작가의 상상력에 나는 손을 들고 말았다.

 

"전시에 행해진 연설의 일부가 문득 뇌리에 떠올랐다. 우리는 들과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산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한 국민을 상대로 행해진 연설이었지만, 이것은 인류 전체에도 해당되는 영원한 진실이다. 광대한 우주 그 어디에도 우리를 패퇴시킬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정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말이다. 인간의 생존 욕망은,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열의는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강하고 질기다.

 

"가짜에게는 감정이 없어. 강렬하고 인간적인 감정 대신 기억과 감정의 흉내만이 존재했던 거야. 그것을 제외하면 아이라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행동했던 거지."

 

"당신에게 기쁨이라든지 두려움이나 희망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당신을 이루고 있는 그 더러운 잿빛 물질과 똑같은 잿빛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거야."

 

"그건 그리 나쁘지 않아. 야망이나 희망, 그런 것들이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얼까, 생각해 보았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SF물을 읽은 거 같아 흐뭇했다.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된 작가의 다른 책들이 어떨까 궁금해하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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