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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
제임스 힐먼 지음, 주민아 옮김 / 도솔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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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하마스를 공격했다. 지금 가자 지구는 전쟁 중이다. 우리는 TV를 통해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한 소식을 거의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마치 pc 시뮬레이션 게임을 관전하는 것처럼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 돼버린 전쟁. 그럼에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인 나로서는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무심하고 무감각하게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지켜볼 뿐이다.

 

아이나 여자들 그리고 민간인들이 전쟁의 희생자가 돼버린 사연들을 듣거나 책 혹은 영화를 통해 간접 경험을 할 때면 가슴 아프기는 하다. 또 군인들은 무슨 죄가 있어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가. 생각하면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상이 바쁘고 내 주변이 어수선하다는 이유로 곧 잊고 만다. 그들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일도 지속적이지는 못하다.

 

전쟁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으로 얼룩진 인류의 역사. 역사에서 전쟁사를  빼면 남는 게 없을 정도다. 빈번하게 일어난 만큼 전쟁의 원인 또한 무척 다양했다. 종교, 정치, 경제, 패권 다툼은 물론이거니와 여자 하나 때문에 시작된 전쟁도 있었다. 그러나 눈을 씻고 자세히 들여다 보면 결과적으로 전쟁의 원인은 딱 한 가지라는 걸 알 수 있다. 바로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것. 전쟁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는 것. 없는 자는 가지기 위해 전쟁을, 가진 자는 더 갖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그런데 전쟁에서 이긴 나라라고 해서 그 국민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대다수 국민은 전쟁의 피해자이자 희생양일 뿐이다. 몇몇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국민 모두를 부추기고 우롱하고 모든 것이 끝난 시점에서는 뒤로 슬그머니 빠져 버리고 만다. 그런 일들은 비일비재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또 안타깝지만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책에서 심리학자인 저자는 인류가 전쟁을 끔찍하게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실로 '끔찍한' 명제가 아닐 수 없다. 솔직히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말의 희망도 이야기하지 않는 책을 읽으며 가슴 속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뚫린 느낌이 들었다. 때문에 다 읽고 난 후에도 꽤나 오랜동안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고 쓰디쓴 약을 들이킨 것처럼 씁쓸한 표정만 짓고 앉아 있었다.

 

전쟁에 대한 인간의 심리를 신화적, 철학적, 신학적 요인들과 관련지어 규명하고 있는 책의 논리를 완전하게 이해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전쟁은 비-인간적이지만 일반적이고 평범하기 때문에 정상적이다.'란 명제는 일단 그렇다 쳐도 '전쟁은 숭고하다'거나 '종교는 전쟁'이라고 단언하는 명제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수긍하기도 힘들었다. 

"우리의 통찰력은... 왜곡된 탓에 우리가 이미 아는 것만을 보려는 경향이 있으며..." (p.132)

저자 역시 그 스스로가 지적한 대로 같은 우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려운 책 읽느라 고생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끝까지 완독하느라 괴로웠다. 굳이 이 책의 장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전쟁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는 점일 것이다. 꽤나 신선한 이야깃거리이긴 하다. 그리고 전쟁에 대해 다시 한번 숙고할 시간을 갖을 수 있었다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점일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 책에 대한 내 예우의 끝이다. 다시는 이런 끔찍한 책을 만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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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후회남
둥시 지음, 홍순도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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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입이 너무 싼 대가로 삶을 망친 한 남자가 있다. 50여생을 후회할 거리들로 채워간 한 남자의 이름은 쩡광셴이다. 광셴廣賢이란 이름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현명하기는 커녕 누가 봐도 어리석다 싶은 결정들을 하고 만다. 그리고 어리석은 결정의 결과는 언제나 폭풍 후 남은 잔해처럼 너덜너덜 망신창이가 된 자신을 탓하는 일뿐이다.

 

그가 일으킨 주요 사건 몇 가지를 좀 살펴 볼까. 소년 시절 아버지를 고발해 두 차례나 비판 투쟁 대회 대상자로 만들어 버린다. 아버지의 외도를 어머니에게 속살거려 어머니는 집을 나가게 된다. 직장 상사에게 추행당하는 모습을 아들에게 보이게 된 어머니는 결국 자살하게 된다. 또 자기를 좋아하는 괜찮은 여자 아이를 무심히 떠나 보내는가 하면, 동물과 수간한 친구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자살하게 만든다. 자기 자신도 자신의 세 치 혀 때문에 무지막지한 고생을 하게 된다. 강간범으로 누명을 써서 10년간 옥살이를 하게 되고, 자신의 옥바라지를 했던 지고지순한 여자를 놓치고, 가짜 결혼 증명서에 놀아남은 물론 국가에서 돌려준 조상때부터 내려온 큰 창고마저 지키지 못하고 어렵게 살게 된다. 결국 그는 결혼은 커녕 동정도 떼지 못한 채 50여년이란 긴 세월을 흘려 보내고 만다.

 

이 소설에는 문화대혁명이란 거대한 역사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광셴이 10년 옥살이를 하는 동안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그가 옥살이를 해야 했던 원인이 된 일이 10년이 지난 후 그가 출소한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돼 버렸다. 어찌 보면 굉장히 억울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혼란스러운 시대 흐름 속에서 어떤 게 옳은 결정인지 천성이 무르고 착한 그로서는 판단하기 힘든 일들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모습에 우리 자신의 모습이 겹쳐진다고 하면 너무 큰 비약일까.

 

내용만 보면 굉장히 무겁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소설은 굉장히 가볍다. 무겁게 흐를 수도 있는 내용을 작가 나름대로 해학적으로 그려냈다. 그런데 그 익살스러움이 배를 잡고 웃게 만들 정도의 익살은 아니라는 느낌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별로 웃지 못했다. 그저 주인공의 행태가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했을 뿐이다. 후회할 인생을 살지 않아야지,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지, 정도의 교훈을 얻었을 뿐이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식물인간이 돼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마지막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그의 어리석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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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시네 - 르 클레지오, 영화를 꿈꾸다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이수원 옮김 / 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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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르 클레지오'라는 작가가 노벨상을 타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그의 작품을 만나볼 생각은 하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발라시네>가 영화 에세이라는 점도 내 구미를 당겼기 때문에 이 책을 작가와의 첫 작품으로 정했다. ('발라시네'는 우리 말로 영화 산책이란 뜻이다.)

 

어릴 적 주말마다 TV에서 방영되던 영화들을 참 좋아했다. 물론 돈 내고 극장 구경 갈 형편이 안 되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따뜻한 아랫목 이불 속에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보았던 영화는 드라마나 쇼 프로와는 또 다른 재미를 내게 선사해 주었다. 주로 늦은 시간에 방영되기 때문에 영화 보고 난 다음 날 아침이면 일어나는 데 곤욕을 치르기 일쑤였다. 간혹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잠들어 버려서 결말을 보지 못했을 때의 아쉬움이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좀 커서는 영화관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작가처럼 용돈 아껴가며 영화를 보러 다닐 정도로 광적이진 않았다. 요즘도 간혹 기분 전환 삼아 영화를 보는데 주로 우리 영화를 돈 주고 보고 외화의 경우 잘 보러가지 않는 편이다. 케이블 TV에서 해줄 때까지 기다리며 고통없이 인내하곤 한다.

 

요런 단편적이면서 보편적인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나 같은 사람에 비해 이 작가의 어린 시절은 조금은 특별했다. 영사기와 필름 조각들을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 영화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의 할머니가 간이 영화관을 그 분 집에 만들어 놓으셨고 그것은 고스란히 작가의 장난감이 된 것이다. 또 영화일을 하시던 할머니의 먼 사촌쯤 되는 여자 편집기사가 있었다는 데, 그녀를 회상하는 부분에서 작가가 그 분을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는지(그 당시 영화일을 하는 여자가 흔치 않았기에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그녀를 언급한 페이지에서 유독 애틋함이 많이 묻어나는 느낌이었데 아마도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그가 책에서 언급한 대다수의 영화를 나는 접해보지 못했다. 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즘은 구해서 보기가 어려운 작품들일 듯하다. 아무튼 어떤 영화에 대한 디테일한 분석이 영화에 대해 잘 아는 다른 사람들에겐 어떻게 다가올 지 모르겠으나 이 분야에 비교적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조금 어려운 감이 없지 않다. 작가가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내가 따라가는 데는 좀 무리가 있었다. 내 경험상 소설보다는 산문을 더 어렵게 쓰는 작가들이 간혹 있는데 르 클레지오가 그런 부류인지도 모르겠다. 유려한 글은 분명 맞는데 쉽게 와 닿지 않아 참 많이 아쉬웠다. 일본 영화를 소개한 페이지에서 그나마 눈을 반짝이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상상의 스크린을 뒤덮는 동양적인 그 무언가를 느끼기에 충분했으니까. 일본 소설이나 만화를 다만 얼마만이라도 읽어보았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공감한 게 아닐가 싶다. 

 

책의 후반부에 우리 감독 세 분과의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그 부분에 주로 관심이 가는 것도 결국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경관이 아름다운 어떤 지방을 기차로 통과하는데 기차에서 내내 졸다가 종착역쯤에서 잠이 깬 기분이랄까. 창 밖 풍광이 정말 끝내줬는데 넌 자더라, 하고 누군가 핀잔을 주더라도 할 말은 없다. 다음에 다시 지나갈 기회를 만들어 볼 밖에.

 

르 클레지오와의 첫 만남이 그리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잠시나마 영화에 대한 나만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만족해야 할 거 같다. 작가의 첫 소설과는 새로운 기분으로 만나게 되길 바라며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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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범의 파워 클래식 1 -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고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던 신 클래식 강의
조윤범 지음 / 살림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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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차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좋은 음악이 나오거나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 귀에 착 감기는 멋진 음악이 나오면 '좋구나!' 하는 생각은 누구나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항상 그 다음이 문제다. 좋은 곡이네 싶긴 해도 이 곡이 누가 지은 곡이고 부른 사람이 누군지에 대한 궁금증을 음악을 듣는 동안은 갖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 곡을 굳이 애써서 찾는다거나 하진 않는다. 특별히 좋아하는 가수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명 박순희들처럼 특정 가수의 앨범이 발매될 때마다 소장하는 일도 거의 해보지 않은 거 같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음악 CD가 거의 없다. 클래식도 마찬가지다. 듣는 동안은 큰 감흥을 받지만 그 뒤로는 그냥 잊고 말게 된다.

 

최근 즐겨 보는 드라마를 통해 클래식에 대한 관심이 조금 커졌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그 이름도 유명한 베토벤에게 관심이 생겼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거 같다. 고전 음악가 중 왜 베토벤을 최고로 치는지 알고 싶어졌다. 일단은 음악사를 전체적으로 훑으면서 베토벤이란 음악가가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얼마만한가를 아는 게 먼저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과 조우하게 됐다.

 

표지를 보는 순간 저자가 심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팍 온다. 나는 한번도 접해 보지 못했지만 예당아트 TV 프로그램에서 클래식 강의를 한다는 저자는 '콰르텟엑스'라는 현악4중주 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음악가다. 저자 소개글을 읽으면서 저자가 글도 쓰고 영화나 역사, 철학에 조예가 깊다고 하길래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이 양반이 애니와 록음악은 물론이고 게임에까지 열광하는 대중 문화 아이콘이란다. 괴짜처럼 보이는 그의 외모와 그의 이력이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솜씨가 보통은 넘는다. 물론 그러니까 책을 낼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보통 전체적인 맥을 짚어가며 이야기하는 게 참 어려운 법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국사는 못했어도 세계사는 잘했다. 이유는 세계사 선생님이 굉장한 이야기꾼이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흐름을 딱딱 짚어주는 것은 물론이고, 간간이 재미있는 이야기까지 맛깔스럽게 해주셔서 지루한 줄 모르고 수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내 고교시절 세계사 점수는 거의 항상 만점이었다. 그에 비하면 국사 수업은 지루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잘 알 거라 믿는다. 아무튼 저자는 고등학교 시절 세계사를 재미있게 가르치던 은사님의 수업과 비슷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연대 순으로 대음악가들을 차례로 소개하는데, 음악가의 삶과 그의 음악이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음악적 특성은 뭔지, 누구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누구에게 영향을 줬는지까지 언급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미 잘 알려져 있는 훌륭한 음악은 물론이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음악 중 아쉽게도 잘 연주되지 않거나 묻혀 있는 음악들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일련 번호로 돼 있는 곡들에 저자 나름의 제목을 붙여서 소개하는 점은 무척 재미있고 독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번호가 아닌 제목을 붙였기 때문에 그 곡과 더 친근해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또 저자 자신이 현악4중주단에서 바이올린 파트를 맡고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현악4중주 곡에 대한 편파적인 애정(?)이 살짝씩 엿보이는 데 물론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줄 만하다.

 

곡에 대한 깔끔한 해설과 재미있는 에피소드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을 소개하면서 진행되는 그의 강의를 듣다 보면(책을 읽는다는 느낌보다 강의를 듣는구나 하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드는 이유는 아마도 중간중간 음악을 들으며 그의 해석을 다시 음미했기 때문일 게다.) 너무도 당연하게 그 곡이 들어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곡을 찾아서 들어가며 책을 읽다 보니 진도가 잘 안 나갔다. 이 책 한 권을 읽는데 거의 보름 이상이 걸렸다. 중간중간 관심 가는 음악만 들었는데도 보름이 걸렸으니 그 많은 음악을 다 들으며 책을 봤으면 한 달 이상 걸렸을 지도 모른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림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건 저자의 클래식 대중화에 대한 열망이 이 한 권의 책에 잘 녹아 있었기 때문이리라.

 

클래식은 지루한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대중 가요는 새로운 곡들이 쏟아져도 누군가 듣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클래식은 그렇지 못하다. 이제 적어도 나만큼은 클래식에 대한 생각을 바꿀 때가 된 듯하다. 클래식을 소재로 한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청력을 잃은 여주인공에게 괴팍한 남주인공이 스메타나의 현악4중주 1번 <나의 생애로부터>가 담긴 CD를 던져주는 장면을 보고는 괜히 혼자 뿌듯해 하고(좀 안다고)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중 피아노 배틀 장면을 보면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클래식이 지루한 음악이 아니라는 반증이 될 것이다.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클래식도 대중과 친숙해 질 수 있는 음악이라는 걸 지금 나 자신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내일 베토벤의 음반을 하나 주문해야겠다. 그나저나 베토벤이 클래식 음악사에서 왜 그토록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음악가인지 혹시 아는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답을 알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베토벤의 음악을 포함해 클래식 음악 전부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지불식간에 생길 거라고 감히 예언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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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인격의 심리학 -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놀라운 여행
리타 카터 지음, 김명남 옮김 / 교양인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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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인격이란 말을 듣자마자 내 머리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영화 <프라이멀 피어>였다. 에드워드 노튼의 놀라운 연기력과 마지막 반전 장면이 인상 깊은 영화였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다. (노튼의 비교적 젊은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은 영화의 부차적인 매력 요소로 꼽을 수 있다.) 다중 인격의 심리학이란 책의 제목과 함께 '생생한 사례, 과학적이며 인문학적인 연구가 담긴 책'이라는 소개 문구를 보고 내가 기대한 건 아마도 <프라이멀 피어>의 로이(애런)와 같은 실제적인 사례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내가 예상한 수준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 다윗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사도 바울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닮고 싶어하는 성경 속 인물 중 하나로 위대한 설교자요, 뛰어난 전도자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 삼아 열심히 뛰었던, '작은 예수'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그런 그도 "내가 원하는 바 선善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惡은 행하는도다(로마서 7장 19절)" 라며 탄식한다. 그에겐 오직 선인(신의 뜻을 행하는 자)과 악인(신의 뜻을 거스르는 자)이라는 두 인격밖에 없었는지 몰라도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두 가지 이상의 인격을 소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벌써 나부터도 그렇다. 집에서 딸노릇할 때와 친구들과 함께 할 때 그리고 직장 생활할 때의 내가 서로 다르다. 남들에게 카멜레온 혹은 사이코란 소릴 들을 정도로 극과 극을 오가는 건 아니지만 분명 각각 다른 점이 있다.

 

이 책은 바로 평범한 나 같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인식하고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나를 만들어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는 실제적인 지침이 담긴 심리학 책이다. 저자는 1부에서 다중 인격에 대한 몇 가지 설문을 통해 해리성 정체 장애를 가진 사람은 이 책을 그만 접으라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성격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이 책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하지만 저자의 기준에서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실제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나는 2부로 넘어갈 수 있었다. 1부에서 일반론을 펼쳤다면 2부에서는 다중 인격 사용법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직접 고안한 인격 바퀴(DISC)를 통해 각 개인이 어느 정도의 다중성을 가지고 있는지 진단하게 하고 그 각각의 인격과 대화하며 자신을 콘트롤하고 좀 더 나은 자아를 위해 노력할 점을 제시하고 있다. 기존의 MBTI  성격 유형과 비슷한 점도 있지만 특별히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안의 여러 인격들이 서로 대화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일 것이다. 

 

책에 제시된 대로 다중 인격 사용법을 따라가는 동안 저자가 이 책 한 권을 대중에게 선보이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했을지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갔다. 그만큼 꼼꼼하게 세부적인 사항까지 점검할 수 있도록 만든 책이다. 하지만 한 개인을 어떤 정형화된 틀 안에 두고 일반화한다는 건 어쩌면 매우 위험한 발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크게 유쾌하지는 않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 자신을 면밀히 들여다볼 기회를 준 점은 고맙지만 이 책이 아니더라도 나는 늘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에 관심을 두고 살기 때문에 이 책이 매우 특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이 책이 좋지 않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참고할 정도는 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말이다. 한번쯤은 자신을 점검하는 데 이 책을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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