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과 무생물 사이
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 전 지인이 생물학에 관한 교양도서를 선물해줬다. 과학 분야에 대한 책도 천천히 하나씩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던 터라 기대감에 차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초반부까지는 그럭저럭 잘 나가고 있었는데 중반부부터는 도저히 머리 속에 책이 들어오질 않는다. 그리고 점차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결국 책을 덮고 말았다. 안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이 분야의 다른 책을 읽어볼 생각을 하게 된 건 '쉽게 씌여진 책'이라는 소개 문구 덕분이다. 정말 쉬울까, 내가 읽을 수 있을 만큼? 전에는 실패했지만 이번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뭐,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으나 결국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이 책을 선택하게 됐다.
 

쉽게 씌여진 생물학 분야 도서라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다. 이 책은 단순히 생물학에 관한 학술적인 보고 형식의 글이 아니다. 수필이나 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문학적인 느낌을 주는 책이다. 특히 비유가 정말 끝내 준다. 그 중 모래성 비유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결코 잊을 수 없을 거 같다. 대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바닷가 모래성이 형태는 유지하되 성을 이루고 있는 모래는 바다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운 모래들로 대체되듯이 분자학적으로 볼 때 우리 몸도 머리카락이나 손, 발톱뿐 아니라 내부의 장기나 뼈 그리고 치아에서조차 분해와 합성을 하면서 놀라운 속도로 내용물(분자)을 바꾸고 있다. 외관상 쌓아두고 있는 척하면서 원자는 생명체 내부를 흐르며 빠져나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분자 차원에서 볼 때는 1년 전에 만났던 그 사람은 1년 후의 그 사람과 다르다. 과거 그의 일부였던 원자나 분자는 다 빠져나가고 새로운 분자가 그 자리를 메우고 존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비단 이 뿐만이 아니다. 시간을 '다시 펼 수 없는 종이접기'에 비유한 부분도 탄성을 내지르게 한다. 본문을 잠시 옮겨보겠다.

"시간 축의 한 점에서 만들어져야 할 조각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그 결과 형태의 상보성이 성립되지 않으면 색종이는 그곳에서 접히기를 원치 않고 살짝 비껴간 지점에 자리를 잡고 다음 형태로 만들어지려 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잡힌 평형 상태가 된다. 만약 어떤 지점에서 형태의 상보성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접혀버린 색종이가 있다면 잘못 접혀 비뚤어진 선은 결국 전체의 형태까지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다. (중략) 생물에는 시간이 있다. 그 내부에는 항상 불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이 있고 그 흐름에 따라 접히고 한 번 접히면 다시는 펼칠 수 없는 존재가 생물이다. 생명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은 기계가 아니라는 저자의 정의 역시 가슴 속을 따뜻하게 만드는 멋진 비유였다. 어떤 특정한 유전자를 제거(녹아웃)한 녹아웃 마우스를 탄생시킨 후 실험을 했다. 없어서는 안 되는 유전자였으나 녹아웃 마우스는 생물학적으로 아무 문제없는 보통의 쥐로 자라고 있다. 문제가 발생해야 마땅한데 쥐는 정상이다. 불완전한 분자를 가진 쥐는 태어나서 곧 죽음을 맞이했으나 녹아웃된 쥐는 동적 평형에 의해 구조적 결함을 메워가며 생명을 유지한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 실험이었다. 기계는 부품이 하나라도 빠진 상태에서는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생명은 다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 나비와 도마뱀을 통해 경험했던 생명의 신비를 이야기한다. 집 근처에서 도마뱀 알을 발견하고 부화를 기다리던 소년 신이치는 어느 날 부화되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살짝 안을 들여다 보기로 결심한다. 바늘과 핀셋으로 조그만 구멍을 만들어 살아있는지만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곧 그 속에 잠들어 있는 도마뱀 새끼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번 외부의 공기에 닿아버린 도마뱀 새끼는 이내 서서히 썩어들었고 형태가 녹아내려 버렸다. 이 기억이 아직도 그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생명이라는 이름의 동적 평형은 시간 축을 일방통행하고 있으면 역주행이 불가능한 완성된 시스템이기 때문에 인위적인 개입은 동적 평형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힌다. 결국 생명을 기계적으로 조작할 수 없다는 말로 저자는 책을 끝맺고 있다. 
 

저명한 과학자지만 생명의 경이 앞에 고개 숙일 줄 아는 겸손함을 엿볼 수 있어서 마음이 푸근해졌다. 결국 이 책을 통해 생명이란 두 가지 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기 복제가 가능하다는 것과 동적 평형 상태에 있는 흐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두 가지 조건 모두 인위성을 띄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든 이들이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과학에 문외한인 나같은 사람도 읽을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게 책을 써준 저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전에 포기했던 책을 다시 시도해 봐야겠다. 아마 전처럼 쉽게 접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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