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계 안에서의 마음
김재권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9년 8월
평점 :
품절


'물리계 안에서의 마음'을 통해 내가 심리철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소 물리주의(minimal physicalism)를 구성하는 심물 수반, 반데카르트적 원리, 심물 의존은 따라서, 나에게 있어서는 (유기체적) 기능주의에로 전회를 꾀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리고, 이것은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속성(attribute)'의 지위 문제에로 나아간다. 속성은 물론 자기원인으로서의 실체와, 그 본질로서 존재, 그리고 내재성의 개념을 필함하고 있는 것이다.

*infallible, incorrigible, self-intimating는 브렌타노의 지향적 내재(intentional inexistence)와 함께 주체의 특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성이 곧 주체의 이성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이것은 종종 간과된다. 이성을 크게 확장하여, 감각정보의 인출과 저장, 변형을 아울르는 인지(cognitive)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주체로서의 특권이 어떻게 지금의 서술을 서술하는 또다른 이성에게 가능하게 제시되고 있는지를 말해야 한다. 아울러, 이 둘을 토대하고 있는 언어적 지평까지도. 문제는 작동되고 있는 기능적 메커니즘 단위를 어떻게 그대로 보여주는 가이다. 그것을 이해가능한 형태로 번역하는 것이 지금까지는 행해지지 않았다.

*심신동일론의 강점은 심적사건과 두뇌과정 사이의 상관관계를 이를테면 자기원인적 동일성으로 설명하려 했다는데 있다. 여기서 기능주의로 넘어가, 유기체론과 생태론의 창발 개념을 수용하면, Double Aspect Theory로서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연계 가능하다.

*라이프니츠의 법칙 '[동일자의 식별 불가능성] X와 Y가 동일하다면, X와 Y는 모든 속성들을 공유한다. (즉, 임의의 속성 P에 대해서 X와 Y가 모두 그것을 가지든지 그것을 결여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는 필연적으로 '[식별 불가능자의 동일성] X와 Y가 모든 속성을 공유한다면, X와 Y는 동일하다.'를 요청한다. 여기서 속성은 가능한 속성이어야 한다.

*마음이 semantic engine이고 컴퓨터는 syntatic engine이라고 할 때, 후자가 전자로 이행하는 과정은 유기체에서 assimilation과 accomodation, 그리고 potentia의 조응으로서 conatus나 voluntas 등이 있겠다. 이것은 하나의 후성적 진행과정이라 볼 수 있다. 인과성은 근접한 것에 반응하여 공진화의 구조로 구성된다. 데이빗슨의 '자비의 원리(the principle of charity)'의 한 예로서 심적인 것의 본질로서 합리성과 정합성의 요구는 '인지적 조화'의 개념으로 압축된다. 이것은 예컨데 폴리아나(pollyana) 효과처럼 닫힌 체계가 타자나 지평과 매개적으로 닮아있음을 보여준다.

드러나 있는 것만이 아니라, 구조가 그 구조를 재생성할 수 있는 닮은 구조를 창발시킨다. 사고한다는 것은 구성되고 조건화된 서술자이다. 이것은 자기 대상화[객관화] 할 수 있는가? 서술자, 사유자, 판단자로서의 이성은 어떻게 자백해질 수 있는가? 지금의 심리철학에서 '나'는 '너'와 별반 구별되지 않았다. 그 '나'의 속성들은 엄격하게 논리적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단지 경험적 예시가 특권적으로 부가되었던 것일 뿐이다. 철학에서의 대상으로서의 이성은 서술하는, 사유하는 이성과 관계되어야 한다. 관찰자여서는 안된다. 이성은 이미 제한된 합리성을 가지는 것인데, 그것을 이성이 이성화시켜서는 안된다. 여기서는 마땅히 인지라는 개념이 필요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