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인식론의 계보
도미니크 르쿠르 / 새길아카데미 / 1996년 3월
평점 :
절판


새길 출판사에는 현대 프랑스 철학과 (후기)구조주의에 대한 서적들이 많이 출판되어 나오는데, 이 책 역시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특히, 바슐라르-캉키옘-푸코로 이어지는 프랑스 인식론에 대해 연구를 한 이 책은 우리에게 뒤늦게 소개된 감도 없지 않다. 예컨데, 바슐라르는 우리나라에 그의 詩學 분야만 소개되었지, 과학사에 대해서는 거의 소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바슐라르의 위대함은 詩學보다 오히려 '인식론적 단절'로 대변되는 과학사 분야의 연구업적에 있다. 프랑스의 학문적 전통과 대학의 커리큘럼이 그렇게 짜여있듯이, 프랑스의 학자들은 학제적인 연구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위의 세 사람 모두, 과학사 이외에 각각의 전문분야를 가지고 있었다.

인식론이란 엄밀히 말해서, 과학들에 대한 철학이다. 또한 이들의 인식론은 현대 과학의 인식론적 성과에 기초해 철학을 비판하고 성찰한다. 이러한 비판은 철학을 내재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외재적으로 그 정체를 검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검토는 오늘날의 과학의 위상을 고려해 볼 때, 철학의 영역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과학이라는 분과학문을 낳았던 철학이 이제, 과학에 의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검증받는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학문의 분절은 그 시대성에 따라 유연하게 재정의되어야 한다. 마치,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고대철학에 접근할 수 없다고 하는 것처럼, 현대철학을 알기 위해서는 현대과학의 주요한 인식론적 성과들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분석이 있다면 종합이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사실, 철학은 스스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여야만 메타적 비판의 학문으로서 기능할 수 있고, 예전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다. 철학은 이제 의미없는 학문이 아니다. 과학을 비롯한 많은 분과학문들의 영역이 넓어져 철학이 그것들에 대해 전부 꼼꼼히 검토하는 작업과 내재화하는 작업을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학문이 서로 이질적으로 연구되기는 하지만, 그 성과에 대한 통합이 필요한데, 철학이 이제 그런 기능을 수행하기엔 과포화 상태에 놓여버린 것이다.

그러나, 과학사를 공부하는 이 인식론자들은 그런 작업을 묵묵히 수행하려 한다. 과학적 성과들을 과학의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같이 검토하고 의미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좋은 태도이다. 학문의 분절과 경계는 우리들이 스스로 그 필요에 의해 설정하는 것이지, 그렇게 경계지워진 영역에서 그 학문만을 공부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그것은 학문의 경직과 지지부진한 도태를 낳는다. 고인 물이 썩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사는 대단히 흥미로운 분야이다. 이 책을 통해 프랑스 인식론자들의 성과를 조금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이 배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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