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제목은 ‘영화’이다. 언뜻 들으면 이상하게 느껴진다. '영화'의따옴표.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로는 영화 하나 뿐이어서 혼동이 인다. 이 한 단어 안에 최소한 크게 본다면 두 가지의 상태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시네마로서의 영화와 또 다른 것은 필름들을 지시하는 단어로서의 영화다. 즉, 여기 이 제목이 요구하는 대상은 필름들이 아니라 시네마이다.
필름들은 무수하다. 여전히, 당연히, 어쩔 수 없이 쏟아지고 있다. 산업적 크기로 보아 영화는 아주 거대하다. 그 거대함이 자연스럽게 다양하고도 새로운 영화들(필름들)을 요구하고 있다. 그만큼 생산되어야 하는 것은 필연이다. 때문에 필름들의 생산에 관해서 고민할 필요는 없다. 백년 전에 비해 생산량이나, 상품이 유통되는 영역이나 유통의 장은 너무나 넓어졌다. 다시 말해, 필름은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히치코크의 영화는 아직도 미국이나 프랑스나 극장에서 틀어지고 여전히 향수어린 관객들과 현재 이십대의 관객들과 영화의 재미에 빠지고픈 관객들을 끌어모은다. 단지 잘 만들어서? 미국의 어떤 할아버지는 그럴 것이다. 존 포드의 서부극을 보면서 어린 시절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용맹담을 기초로 손자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것이다. 저게 미국이고, 저게 너희 증조 할아버지가 개척한 세계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고.
이들 영화들도 모두 오락영화이다. 그렇다면 다른 영화들보다 더 잘만들었으니까 그럴까? 아니다. 시네마가 하는 일을 잘 감당하고 있어서 그러하다. 인간의 삶을 투영하고 그것이 지닌 가벼운 재미거나 깊고 심오한 면이거나간에 그것을 기록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기능에 충실해서이다. 그게 시네마의 기능이고, 이었다. 이 책이 고민하는 영화란 바로 그 시네마이다. 시네마가 이러한 일을 했기에 사람들은 그것에 관해서 떠들고 시네마의 자식인 개개의 필름들의 가치를 매겼으며 즐기고 신나했다. 언제나 시네마는 삶에 빛을 프로젝트해서 그것을 빛나게 만드는 기능을 해왔다는 말이다. 그게 일반적인 상업영화들이다. 예술 영화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기쯤 되서부터 시네마는 어쩐지 이제 제 기능을 다하지 않는 듯하다. 아드레날린에만 목적을 지니고 있고, 한 터럭이라도 삶을 슬쩍 환기시키는 일은 사라졌다. 잘 만들어진 상품이기는 하지만 <매트릭스>가 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보는데만 빠져들도록 만든다. 그 영화가 담고 있다는 세계에 대한 해석은 사실 영화를 보면서 온데 간데 없어진다. 그것은 나중에 첨언된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수와 영웅과 기독교와 설화들을 뒤범벅해서 재미있게 만든 서사에 지나지 않는다.
보고 소비되는 것, 필름들은 더 많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변질되었다. 소비되기 위해, 팔리기 위해 존재한다. 모든 물건이 그렇지 않은가고 물을 수 있지만 경제의 기본원칙도 생각해보지 않은 말이다. 모든 상품은 단지 팔리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많이 사용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많이 사용될 수 있을 만한 기능을 지니고 있으니 잘 팔리는 것이고. 오늘날의 영화에겐 무언가 빠져있다. 많이, 오래도록 사용되는 가치는 잃어버렸다. 그것이 우리 삶을 투영하고 있고, 웃기게 만들어서 재밌어서 보는 것도 아니고, 감칠 맛나는 액션으로 우리 삶의 부조화, 정의를 교정하는 것이어서 보는 것도 아니고, 당대의 모습을 진솔하게 담고 있어서 보는 것도 아니다. 다만, 볼만해서, 두 시간동안 시간의 흐름을 잊을 수 있어서 보게 되는 상품, 그런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거창한 이론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몇몇 영화들에 대한 헌사를 던지는 평론의 모음집도 아니다. 아주 단촐해보이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빨리 주파할 수 있는 두께를 지닌 쉬운 책이다. 그저 생각의 길이 수월수월하게 쓰여있는. 하지만 이 책은 사실 수많은 함의를 담고 있는 의외로 묵직한 책이다. 물론, 독해는 쉽다. 알아듣기쉬운 언어로 쓰여있으며, 살짝 생각을 해보면 납득이 가는 언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 단순한 언어들은 하나같이 줄기차게 지난 백년동안 시네마가 무엇이었는지, 왜 필름들이 시네마로서 기능해야 하는지를 써놓고 있다. 상품들은 역사가 없다. 소비품목에 무슨 역사가 있을까. 시간의 적체물이라는 의미 이외에는……
예컨대, 우리는 tv라는 형태를 기억할 뿐, 이십년전의 tv프로그램에 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프로그램은 그저 시간을 통과한 풍경 이미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tv의 역사란 프로그램의 역사가 아니라 시청자와 대화해온 방식으로서의 tv의 역사이다. 하지만 지난 세기에 영화의 역사는 필름들, 영화들의 역사였다. 그럴 수있었던 이유는 시네마라는 필름을 생산하는 방법으로서의 영화가 엄연히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이 말이다. 영화(필름)는 이야기를 던진다.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담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흥미있을 수도 있고, 아주 심오한 내면을 건드리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나 상관없다. 다 좋다. 다만, 여하간에 그것은 우리에 대해 말을 한다. 우리가 사는 방식과, 우리가 웃는 방식, 우는 방식 등등. 시네마는 우리에게 우리가 어떤 종족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필름들이 우리의 기억을 만들고 우리의 반성을 형성하고 우리를 즐겁게 하고 우리를 애석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채우는 것이다. 삶의 일부 시간을 잊게하거나 소비하게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래서 필름들, 프로그램들로서의 필름들이 뇌리에 남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시네마란 무엇이며, 그것을 본다는 행위와 그것에 대해 말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이 책은 바로 그런 물음에 대한 해답을 명쾌하게 제공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성찰의 시간이 왔다. 우리가 어떤 영화들을 남길 것인지, 영화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해보아야 할지. 늘 떠들어온 것 같지만 투박하고 두터운 이론서, 이해하기 힘든 평론집, 까다로운 심오함을 지닌 어떤 영화들의 범주에 머물러 왔다. 이 책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기초적으로 영화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나 전공의 심연에 푹 빠져있는 이론적으로 사실상 모호한 전공자들에게나 다 두루 필요한 책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래, 영화는 이런거였지 하고 무릅을 치게 만들고 생각해보게 만드는 짧은, 쉬운, 맛나는 전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