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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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개발만이 인간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길이라면,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게 믿고 있다면 인류의 미래는 밝을 수 없다. 과학의 눈부신 업적과 발전이 인간에게 편리한 생활만을 안겨준 것일까. 과학으로도 어쩔 수 없는 전지구적인 기상 재앙에 맥없이 당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 결코 먼 미래의 일, SF영화에서나 그럴 듯하게 써먹을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안타깝지만 현재진행형이다. 문명이라고 일컬어지며 과학의 눈부신 척도를 얼마나 실생활에서 가까이 누리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삶의 질과 수준을 논하는 '문명'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나라는 식량을 포기하고 과학을 택했다. 땅이 좁고 수출할 것은 기술밖에 없다는 판단하에.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가 개발에 뛰어들고 미래의 성장동력으로 공업에 뛰어든다면 가까운 미래에 전세계적인 식량문제가 닥치지나 않을까. 농사 짓는 땅이 부족해지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먹거리도 부족해질 것이다. 이렇게 풍요롭고 먹거리가 넘치던 곳에 기상재앙 뿐만아니라 식량재앙까지 몰아닥친다면 인류는 현명하게 해결책을 고민할 수 있을까. 과학만이 전부일까. 농업에 끼친 과학의 영향을 생각해 보라면, 어째서 인류는 GMO상품을 두손 모아 반기지 않는지부터 설명해 주길 바란다.

인간이 진화하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진 못하지만 그들의 삶의 모습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 불과 1년전의 사진이 촌스러워지고 현재의 모습이 나름 세련된 모습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깔끔한 모습을 비가 오지 않아 쓸 물이 없어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시간이 올지 모른다. 우리나라도 심각한 가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이제 말로만 듣던 지구온난화의 영향이 우리의 실생활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이다. 현명한 인간들은 과학을 기술의 발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위험한 수준에 까지 지구를 위협하고 자연을 짓밟으며 기고만장해졌는지 객관적인 수치를 측정하는데 이용했다. 그결과 우리는 향후 인류가 어느정도까지 버틸 수 있는지 불안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보고서들과 마주할 수 있다. 인류의 일이지 내 개인의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이거야 말로 넌센스다. 누군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산다는 거 자체를 어색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지금 당장 먹고 살기도 바쁘다고 읍소한다. 뭐. 앞으로 가까운 미래에는 그런 걱정을 시간 단위, 아니 분단위로 하게 될지도 모르니 하던 생각 쭉 하시면 된다. 늘 하시던 생각들이니 어색해 하실 일은 없겠지.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냉소적인 반전으로 마무리를 하는 단편들이 주를 이룬다. 순수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현실적으로는 그럴 수 없는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 그럼에도 희망의 끈을 놓치 못하는 순수애의 동경들. 하지만 동정적이다. 결국 인간의 절망에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건 같은 인간이다. 인간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고 현명하게 이끌 수 있다. 인류의 절망적인 현실을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혹은 외면하는 인간들이 대다수지만 분명 희망은 있다. 때로는 인간에 대한 의지를 비웃고 소름 끼칠 정도로 기만하는 인간들도 있지만 결국 서로를 바라보며 의지하고 머리를 맞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 아닐까. 거울 앞에 선 기분이다. 순수함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 어떤 인위적인 요소도 이해하지 못하며 불결해 하는 모습과 절망에 넉다운 되어버린 젊은이들의 오해와 고통스런 죽음을 그린 이야기들을 만나보며 얼굴이 화끈 거릴 정도로 부끄러웠고 절망스러웠고 안타까웠다. 휴양지다 뭐다 해서 '무인도'도 줄어가는 마당에 그 누구도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서로에게 고통을 주기보다 희망의 근거가 되자고 하면 무척 공허한 외침일까. 허망하고 거창하고 무엇보다 망상처럼 여겨지니 씁쓸할 뿐이다.   

행복과 절망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후부터, 그 의미와 실체 또한 추상적이기 이를 데 없지만 절실하게 행복과 마주하기 위해서 절망을 피하기 위해서 그 이기심을 아주 기민하게 이용하는 인간이다. 타인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22세기형 아포리즘도 있지 않은가. 임무를 다하고 생의 마지막 순간, 누을 자리로 돌아오는 새들의 최후가 비참해 보이지 않고 아름답게 보인다. 마지막을 함께한 동료들과 파도에 쓸려나가 넓은 바다 위를 부유하다 하늘을 비상하는 새들의 먹이가 되고 물고기들의 일용할 양식이 되는 저들의 특별한 최후가 전혀 끔찍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인간 역시 새들처럼 세상의 끝에 찾아가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면서 조금씩 그 끝에 다다르는 '운명'이라면 행복할 수 있을까. 지치고 절망적인 불행한 삶이었다 해도 그 마지막은 모두가 같은 모습이라면. 

대단히 냉소적이고 희망보다는 절망과 마주하는 인간들로 가득한 불행한 이야기들이지만 로맹 가리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희망을 말한다. 진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들을 비웃거나 손가락질 하는 것이 아니라 자애로운 어른의 회초리처럼 느껴진다.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 순수함을 욕망하지만 기만하기 쉬운 나약한 인간에 대한 연민들이 담겨 있다. 과학 발전을 혜택이라 여기며 점점 비극으로 다가가는 인류의 운명을 어찌하면 좋을까. 문명의 달콤함에 길들여져 버리고 타인에 대한 배신과 이기심이 주는 당장의 배부름을 환희라 여기며 부도덕에 물들어가는 인간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그래도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인간이 가진 사랑과 동물적인 본능이 아닌 이성적인 본능에 의한 현명한 지혜다. 자연이 뿜어내는 한숨과 인간에게 가하는 스케일 큰 투정(환경재앙)을 읽어내는 영민함이다. 결국 희망은 바로 당신, 우리 모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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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어 2009-03-09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과거에 관심없고 (자신의)미래만 바라보는 인간이 현재와 같은 상황에 닥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제가 아는 인간은 기존에 그래왔던 것처럼 어떤 변화에도 적응해버리는 그런 존재일거라 생각하니 큰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만. ㅋ

마빈 2009-03-11 00:36   좋아요 0 | URL
현명하게 잘 적응했으면 좋겠네요^^;;
 
경관의 피 - 상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1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경관의 피>에 나오는 안조 세이지, 안조 다미오, 안조 가즈야로 이어 내려오는 삼대의 역사와 그 '피'의 특별함을 보며 나 역시 나에게 흐르는 '피'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어느 누구에게나 그에게 흐르는 '피'의 역사가 있다. 사연 없는 집안 없다지만 나에게도 집안에 내려오는 슬픈 기억이 있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그의 세대에서 해결되지 않은 일들은 자식세대인 우리에게 숙제로 넘어와 있다. 나의 사적인 공간만은 아닌 이곳에 그 썰을 풀어놓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역자의 후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아버지들의 역사는 그 자체가 미스터리다. 세상에서 가장 조심스럽게 풀어야 할 미스터리.

<경관의 피>는 할아버지에서 그 자식 세대로 이어지는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런 배경을 이루는 진실을 알아가며 삼대는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른 인생을 살아간다. 억울하게 죽은 할아버지 세이지의 죽음은 자식인 다미오로 오면서 사건을 풀 수 있는 단서들을 모아가고 여기서 풀지 못했던 진실은 다시 자식이자 손자인 가즈야에게 이어진다. 가즈야를 통해 삼대에게 내려왔던 응어리와 진실이 풀리지만 과거의 일이 영향을 받는 건 아니다. 다만 진실을 알게 된 가즈야의 앞으로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철학이 조금 바뀔 뿐이다. 일방적으로 그 영향 아래 놓이는 것이 자식인 가즈야의 삶인 것이다. 아버지 세대가 보여준 삶의 교훈과 큰 틀의 철학. 그말처럼 "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속일 수 없는 "피"를 물려받는 것이다. 나와 끈끈하게 연결 된 과거의 인물이 있다는 사실에 안정감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자식 세대는 아버지 세대의 과오 또한 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자식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결혼에 대한 생각도 구체적으로 해본 적이 없고 더군다나 부모가 된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말해서 그 끝이 너무 분명한 돈이나, 자식 세대에게는 짐이 될지도 모를 명예나 명성보다는 어떤 식으로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물려주고 싶다. 미래의 나와 나의 가족들을 위해 현재의 안개 속 삶도 견뎌보는 것이다. 그 끝은 어떨지 그 과정은 기나긴 터널같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살아가는 삶의 거의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정말 나에게 소중하고 소중하지 않았던 것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가장 의미있는 것들을 꼽아 그 정수만 남겨주고 싶다. "이랬더니 이렇더라. 그러니 너는 이렇게 살아라" 라는 일방적인 방향제시(명령)보다 "이랬더니 이렇더라. 나머지는 너의 몫이다."라고 현명한 '틈'을 보여주는 것이 일방적인 것 보다는 나아보인다. 부모는 자식에게 무엇을 물려줄지 고민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어떤 것을 배움으로 삼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이상적인 것 같다. 가보가 꼭 금전적인 가치를 매길 물건이라야만 되는 건 아니니. 신념과 그 부모세대가 갖고 살았던 삶의 철학이 담겨 있지 않은 것이라면 그 가보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한 곳은 인간의 마음이다. 그 안에 담긴 것들은 좀처럼 잃어버릴 수 없다. 자식 세대들이 절대 잃어버릴 수 없는, 그들의 마음의 보관함에 담겨 그들의 인생에서 태풍이 몰아치는 고난의 시간, 그들에게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그런 철학을 물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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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3-04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빈님의 포부 잘 들었습니다~^^

마빈 2009-03-04 22:49   좋아요 0 | URL
에휴~ 포부라고 할 것까지야^^a 부끄럽사와요+_+

주니어 2009-03-04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잘 들었습니다~^^

마빈 2009-03-04 22:49   좋아요 0 | URL
^-^ 땡큐 베리 망치 ㅋㅋ
 
가장 검은 새 - 누가 메리 로저스를 죽였을까?
조엘 로즈 지음, 김이선 옮김 / 비채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여기 한 남자의 인생을 잠시 돌아보자. 그는 스스로를 천재라고 여겼으며 작품에 대한 욕심도 많았고 질투심도 남달랐다. 수많은 문인들이 그의 날카로운 펜촉 끝에서 일희일비했으며 그를 손가락질 하며 깎아내렸다. 하지만 고매하신 이 작가 선생님은 그러면 그럴수록 굴하지 않고 펜촉을 더 뻣뻣하게 잡고 본연에 충실했다. 사랑에도 작품에도 그는 열정이 넘쳤으며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오늘 날에도 많은 독자들에게 활자가 주는 근사한 매력을 선사해 주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또예프스키도 피해갈 수 없었던 '돈'과 '가난'은 미국의 젊고 열정이 넘치는 젊은 작가의 발목을 잡았다. 늘 가난에 시달렸으며 남루한 코트 하나 걸치며 살 수 밖에 없는, 거기에다 알코올과 진한 사랑에 빠진 탓에 쇠골이 삐쩍말라 남다른 속도로 약골이 되어가는 안타까운 시인이었다. 그의 죽음 또한 요절이었다. 그는 어린 부인의 죽음에 버금가는 짧은 생을 살았다.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그의 남루한 행색에도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모르그가의 살인><검은 고양이><붉은 죽음의 가면>등을 쓴 "에드거 앨런 포"였기 때문이다. 

공평하지 못한 신은 그에게 또 하나의 시련을 준다. 그에게 곤궁과 알코올 중독, 그리고 메리를 살해한 살인용의자라는 의혹을 심어준다. 어떤 영화 제목처럼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많았다. 메리는 아름다웠으며 발랄했고 온동네 사내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담배가게 아가씨였다. 그녀, 메리의 죽음은 수많은 메리빠들을 절망에 빠지게 했으며 타블로이드는 그녀의 실종에 이은 끔찍한 살인사건에 관한 도발적인 기사들로 대중을 달궜다. 그중에는 달필인 미국의 유명작가들도 끼어있었는데 "에드거 A. 포"도 그녀의 죽음을 특별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메리의 이야기를 단편소설로 연작한다. 하지만 소설의 내용엔 사건을 수사한 노수사관 제이콥 헤리스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 섞여 있어 정보의 출처와 함께 그를 용의자로 의심한다.

이 책은 미스터리와 역사팩션이 섞여 있다. 별다섯개를 주고 싶어도 미스터리 부분이 많이 아쉬워서 1개를 빼야한다고 여겨질만큼 조금 부족한 부분도 있다. 우선 마지막에 밝혀지는 사건의 진실에서 쉽게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조엘 로즈의 담백하고 세련된 문체는 마지막의 클라이막스 부분에서는 빛이 조금 바랜다. 내가 느낀 이 책의 부족한 점은 이것 뿐이다. 이 책에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고 조엘 로즈는 연극의 지문을 보는 것 마냥 세심한 글을 썼다. 지문 하나하나가 바로 대본으로 옮겨도 될 정도로 꼼꼼하다. 문장도 단문이지만 읽히는 맛이 남달랐다. 끝까지 정신차리고 쓴 글 같다.

요즘도 자본의 부패와 권력과의 밀착은 심각하다. 포가 살았던 19세기 중반의 뉴욕처럼. 뉴스의 내용을 조금 알아듣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아마 그 책들은 현실이 그렇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보내는 희망과 바람인지도 모르겠다. 남보다 목소리가 커야 하고 잘못을 대놓고 인정하면 안되며 함부로 사람의 집단, 대중을 믿어서도 안 된다. 언론도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언론이 보여주는 서로 제 살 깎아먹는 식의 상대에 대한 비판과 왜곡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외면하게 만든다. 정치권과 언론의 커넥션도 밀월을 넘어 대놓고 보살펴주는 식이다.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어느 누구를 공정하다고 말하겠는가. 

포도 생계를 위해 글을 썼다. 때론 검은 돈도 받았다. 생계와 아내의 병치료를 위해 그의 영혼, 아니 작품을 가지고 치사한 장사치들과 흥정했다. 그의 자존심을 사람들은 벌레 밟듯 깔아뭉갰다. 하지만 그에게도 대중과 평단의 따스한 치마폭 안에서 인기를 누리던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 넋을 잃었고 평단은 그를 극찬했다. 대중에게 차가운 몰매도 맞아보고 대중의 뜨거운 사랑도 받아본 극과 극의 인생을 살다 간 남자. 최후에는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에드거 앨런 포. 그는 우리가 단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걸 갖고 있었다. 사랑이 많았지만 집착도 심했다.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 하며 비웃었지만 그 자신도 똑같은 행동을 했다. 저돌적이나 때론 우유부단했다. 자신감도 넘쳤지만 오만했다. 재능이 많았지만 불행했다. 하지만 가난과 싸우며 정당한 대가를 받을 거란 믿음으로 시를 지었다.

<가장 검은 새>에는 현실이 반영된 작은 사회가 보인다. 가쉽거리를 찾아다니는 하이에나 같은 언론, 기만하기 쉽지만 변덕도 그에 못지 않은 대중, 검은 돈을 뿌리는 부패한 자본, 서슴없이 그 돈을 받는 정치권, 가는 곳마다 이야기를 만드는 셀러브리티, 대놓고 범죄자의 편에 서는 공권력, 그리고 그 속에서 터져나오는 이성적인 목소리들. 조엘 로즈는 이렇듯 현실의 이야기가 투영된 내용을 작품 속에 버무렸다. 요즘에는 연예계이지만 그 시절엔 문학계 혹은 예술계에 뜨고 지는 별이 많았으며 그들의 가쉽과 스캔들은 대중과 언론을 먹여 살렸다. 그중에는 출세주의적인 사람들도 많았고 생계를 위해 더욱 절실하게 작품과 성공에 매달린 포같은 작가들도 있었다. 그를 괴롭혔던 현실적인 어려움들은 그가 펜을 잡을 때만이 그를 놓아줬나보다. 작품 안에서만 자유롭게 날아다닌 검은새, 갈가마귀, 에드거 앨런 포. 그를 부르면 그는 꿈꾸는 악마의 눈을 하고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대답. 네버모어(Nevermore)라고 대답할 것 같다. <가장 검은 새>를 읽는 시간은 에드거 앨런 포를 읽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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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어 2009-03-02 0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짧고 강렬한 것이었죠. 지금은 먼지가 수북히 쌓인 문학전집 가운데 어셔가의 몰락이 있었는데 어렸을 때(아마도 초딩때?) 무서워서 그 부분만 잘라내 버렸던 기억이 나네요. 그나마 마음 편히 봤던 건 도둑맞은 편지정도? -_-a

마빈 2009-03-03 01:22   좋아요 0 | URL
저도 사실 포하면 뒤팡밖에 아는 게 없어요.
하지만 굉장히 뛰어난 작가임은 보증할 수 있을 듯^^;
포의 작품은 앞으로 틈틈히 만나보고 싶어요^^

비로그인 2009-03-02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ver with thee I wish to roam -
Dearest my life is thine.
Give me a cottage for my home
And a rich old cypress vine,
Removed from the world with its sin and care
And the tattling of many tongues.
Love alone shall guide us when we are there -
Love shall heal my weakened lungs;
And Oh, the tranquil hours we'll spend,
Never wishing that others may see!
Perfect ease we'll enjoy, without thinking to lend
Ourselves to the world and its glee -
Ever peaceful and blissful we'll be

Poe의 부인이었던 Virginia가 죽기 1년전 발렌타인데이에 남편에게 보낸 시입니다.
두운을 잘 살펴보세요~^^

마빈 2009-03-03 01:23   좋아요 0 | URL
부창부수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죠? ㅋㅋ
서로 많이많이 사랑하는 애틋한 부부였네요.^^
그렇죠! 사랑만이 그녀의 병약한 폐를 치료할 수 있겠죠.
아~ 너무너무 안타까운 사랑...
 
어둠 속의 덱스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 17
제프 린제이 지음, 김효설 옮김 / 비채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덱스터는 이제 더이상 예전의 어설픈 덱스터가 아니다. 그는 더욱 뻔뻔해졌으며 더욱 유머러스해졌으며 더욱 두꺼운 인간의 가면을 썼다. 덱스터의 정체가 드러날 것이라는 우려는 이제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검은 승객이 잠시 떠나 있어도 덱스터는 더 이상 동요하지 않는다. 어미가 자식의 품을 떠났어도 그 자식은 이제 어미의 빈자리에 당황하지 않는다. 빈자리에 대한 공백은 잠시 느끼지만 오히려 냉정할 정도로 자신을 날카롭게 돌아보는 자기응시를 보여준다. 내면의 방황에 골똘하기에는 덱스터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은 공허할지라도 이제 확실한 덱스터의 편이 생겼기 때문이다.

<끔찍하게 헌신적인 덱스터>에서 얼떨결에 리타와 약혼을 한 덱스터는 3편인 <어둠 속의 덱스터>에서 본격적인 결혼 준비에 한창이다. 하지만 인륜지대사를 앞둔 덱스터지만 그에게 결혼은 그렇게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반문하지 말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덱스터다. 덱스터는 우리가 특별하게 여기는 것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명한 양아버지 해리 덕분에 스스로를 통제하는 훈련을 받은 지능적인 사이코패스다. 그리고 그의 참을 수 없는 살인본능을 해리는 인간쓰레기를 처리하는 밤의 사냥으로 가르쳤다. 그는 오직 흉악범만 사냥한다. 일거양득인 셈이다. 선량한 인간들의 주변에 맴돌며 무차별적인 악을 행하는 인간들을 덱스터는 사냥한다. 밤의 청소부를 자처하는, 국가의 녹을 받는 공무원신분으로는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마이애미에 봉사(?)하는 중이다.

덱스터는 특히 내면의 목소리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는데 이번에 <어둠 속의 덱스터>에서는 덱스터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검은 승객이 자취를 감춘다. 우리의 예상대로 덱스터는 검은 승객이 없이는 앙꼬없는 찐빵이요, 오뎅 안 들어간 떡볶이요, 꽃게 안 들어간 오뎅국물이다. 속이 텅 비어버린 듯한 덱스터, 누구보다 덱스터를 잘 이해해 준 덱스터 내면의 검은 존재의 실종에 혼란을 느끼지만 철저하게 객관적인 시각으로 검은 승객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자취를 감춰버린 검은 승객 덕분에 덱스터는 한단계 더 성숙해질 수 있었다. 일상생활의 전부를 검은 승객에 많은 부분 의지해 왔다면 이제 새로 생긴 진짜 가족의 의미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세상에 오직 혼자뿐이라고 여겨왔던 덱스터는 더 이상 혼자의 몸이 아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고 아이들의 아빠로서 해리가 그에게 주었던 가르침을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뿌듯한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빈껍데기 같았던 덱스터가 이제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없었던 인간들의 관계에 얽매인 끈끈한 삶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덱스터 시리즈는 사실 드라마도 마찬가지지만 시리즈를 통해 점점 변해가는 덱스터라는 캐릭터의 입체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다. 그와 주변에 닥친 사건들은 시리즈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 시리즈는 캐릭터 덱스터가 전부라고 봐도 된다. 덱스터가 새롭게 알아가는 다양한 인간군상과 함께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그들에게 일어나는 인간적인 성숙과 내면의 성장을 비춰주는 게 포인트인 것이다. 평범한 인간들에게 본모습을 들키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본능을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는 덱스터를 통해 인간의 이기적인 시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능청스런 덱스터가 보내는 인간들에 대한 비아냥과 조롱이 담겨 있다. 철저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인간들을 바라보는 덱스터다. 인간과 똑같은 살덩어리를 갖었지만 그 내면은 보통의 인간과 다르다고 말하는 특별한 '인간' 덱스터의 이야기를 조금 들어보자. 이번에는 인간들에게 어떤 특이점을 발견했으며 그게 왜 그토록 우습고 이해 안 되는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을 왜 닮아가려 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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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어 2009-02-27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테님 서재에서 종종 구경할 수 있었지만 마빈님도 이곳에 둥지를 트고 계셨군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저도 이곳에 아지트를 만들어 볼라구요. 물론 개인블로그도 계속 꾸미곤 있지만 커뮤니티를 위해 따로 살림을 차려 볼렵니다. 중복적인 블로깅이 될지 모르겠지만....-_-a
암튼 반갑습니다.

마빈 2009-03-01 00:12   좋아요 0 | URL
앗! 주니어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저도 광군님 블로그에서 보고 무척 반가웠었는데^^;; 기억해주시는군요 ㅋㅋ
알라딘에서 새 살림 시작하시는군요 ㅋㅋ 종종 놀러가겠습니다.^^ 반가워요!
 
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재작년 내가 한없는 애정을 듬뿍 주었던 완소드라마가 있었다. 드라마의 완성도와 정성에 비해서는 시청률에서는 지독히도 운이 없었던 드라마. 다시 봐도 여전히 사랑스럽고 달콤하지만 너무너무 슬퍼서 유난히 자주 눈물짓게 했던 드라마. K본부에서 방송됐던 <경성스캔들>이라는 드라마를 기억하시는지. 1930년대 식민지 시대의 경성에서 살았던 시대의 젊은이들이 꿈꿨던 혁명과 연애를 다뤘던 인상적인 드라마였다. 드라마의 마지막 방송에서 기억에 남았던 시청자에게 남기는 끝인사. "먼저 가신 분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소중한 이 땅에서 마음껏 연애하고, 마음껏 행복하십시오." 이 자막을 보고 마음이 참 아렸었다. 불운했던 식민지 시대를 살아갔던 젊은이들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때론 유쾌하게 때론 진중하게 그렸던 센스있는 드라마였는데. 그 드라마에서 청춘은 언제나 봄, 하지만 조국은 아직도 겨울이라고 했던가. 

일제의 가혹한 수탈과 폭압통치 속에서 참 질기게도 신념을 이어나가며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을 외쳤던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 시절, 일제가 뭉개버리지 못해서 안달이었던 조선의 젊은이들이 품었던 신념은 두가지가 있었다. 국체부정(독립)과 사유재산부정(사회주의), 1920년대 소련 '레닌'의 사회주의 지원정책의 후원 아래 이 땅의 젊은이들은 독립의 한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모색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지금의 꼴수구들이 페인트로 붉은 색깔을 덕지덕지 칠하지 못해 안달인 그 지겨운 색깔논쟁의 연장선에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실제로 근현대사에서 가중 비중있게 다루는 것이 1920년대 '사회주의'와 '신간회'의 활동이다. 1920년대, 만주를 비롯한 국외에서는 독립군들은 '전투'를 벌였고 국내에서는 이렇듯 이념에 대한 갈등과 통합이 모색되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통합의 정점에 서있었던 것이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연대 단체인 '신간회'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통합도 오래가지 못했다. 신간회 내부의 분파간 갈등과 소련의 코민테른의 지시 아래 1930년대 신간회는 와해된다. 

1930년대 시대의 틀을 나누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것이 1931년 터진 만주사변이다. 이때부터 일본은 중국본토를 손에 넣겠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야무지게 식민지를 넓혀갔던 일본이 본격적인 전쟁의 광기에 빠지기 일보직전의 일이다. 간도를 비롯한 만주땅에서는 산발적인 항일연군들의 독립활동이 있었다. 친일파 지주의 집을 습격하거나 인근 평안도지역까지 넘어와 일제의 관공서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들의 주요 활동지였던 간도의 위치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면 오른쪽이 북간도고 왼쪽이 서간도로 나뉜다. (간도라는 영토는 북한과 통일 후 우리가 중국으로부터 다시 찾아와야 할 여러 이권 중에 하나에 속한다.)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는 1930년대 간도를 배경으로 한, 시대의 모순 속에서 살아간 젊은이들을 다룬 뜨거운 이야기다. 아니 이건 사실 이야기라기 보다는 외침에 가까운 읍소다. 불행했던 식민지 조선이 타국에서 낳은 청년들의 기막힌 삶과 채 피지도 못하고 꺾였던 수많은 젊은 꽃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에 가까운 소설이다. 간도라는 땅이 어떤 땅인가. 민족의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일제의 총칼에 쓰러져 갔던 곳이고 독립군과의 전투에서 지고 돌아온 일본군의 분풀이로 힘없는 조선의 동포들이 잔인하게 학살됐던 슬픈 비명이 깃든 곳이다. 조국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던 그 시절, 변방의 척박한 황무지에 배고픔과 내일을 위한 희망을 품고 이 땅을 떠난 수많은 조선인들의 절박했던 삶의 아픔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곳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났지만 엘리트 교육을 받은 김해연은 간도에서 연인 이정희를 만난 뒤, 그리고 그녀의 비극에 가까운 죽음을 겪으며 자신의 때 묻지 않은 곱디고운 여린 '손'을 저주한다. 처음엔 기계적으로 혁명에 뛰어들지만 그 안에서 이념의 갈등과 식민지 젊은이들의 의미없는 희생과 마주하면서 점점 강인하고 억센 '손'을 갖게 된다. 그토록 저주했던 그 손으로 상대에게 총을 겨누고 스스로가 경계라고 규정했던 살인까지 저지른다. 시대의 비극과 함께 김해연은 성장한다. 그리고 그가 어제까지 살았던 삶과는 전혀 다른 오늘을 살게 된다. 동지의 손에 죽어가는 또다른 동지들의 억울한 죽음을 목도하며 시대의 비극을 체감한다. 조선의 독립이 아닌 중국의 독립을 위해 투신해야했던 시대가 그들에게 안겨준 모순덩어리의 질곡진 삶. 그리고 그곳에서 쓰러져 간 수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는 소설이다.

불과 1년여 전에 이 나라에서는 참 아이러니한 사건이 일어났다. 조국 티벳의 독립을 호소하던 티벳의 젊은이들이 똑같이 식민지의 아픔을 겪었던 이 나라에서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들뜬 중국 유학생들에게 죽도록 얻어맞은 일이 있었다. 당시 이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던 이땅의 국민들과 경찰들이 있었다. 모순 아닌가? 이 나라처럼 과거로부터 전혀 배우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한때 시대의 약자였던 시절을 망각하고, 타지에서, 국경의 바깥 쪽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쓰러져 간 수많은 젊은이들의 영혼을 간직한 이 나라에서 저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과거 간도 땅에서 독립을 외치다 일제의 총칼에 쓰러져간 그 시절, 그 사람들과 저들이 무엇이 다른가? 타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외롭게 호소했던 저 티벳의 젊은이들이 말이다.

2009년의 대한민국,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곳, 그리고 나의 국적은 일본이 아닌 대한민국. 우리가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이 사실들은 실은 당연한 게 아니다. 우리는 저 시절 치열하게 살다간, 스스로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잃어버리고 시대에 몸을 맡긴, 운명 따위는, 개인의 영달 따위는 꿈꾸지 않았던, 나라 없이 태어나 나라 없이 잠들었던 수많은 청춘들의 희생 위에 새겨진 투쟁의 결과이다. 하지만 저 시절 뿌리 깊게 반목된 갈등은 여전히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다. 그 갈등의 연속으로 이 땅은 둘로 갈라졌으며, 나라가 분단된 뒤에는 민주주의와 독재정치가 충돌했다. 수많은 혁명과 민중의 희생 뒤에 민주주의가 간신히 자리잡았다고 하는 지금 이 시대의 우리는 당파 간의 갈등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갈등, 진보와 보수의 갈등, 이 좁은 땅 덩어리 안에서 오늘도 우리는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분노하며 충돌을 반복하고 있다. 아주 단순한 사실 하나를 잊고 살면서. 내가 상대에게 겨눈 그 손가락, 하지만 그 손가락 중 4개가 실은 나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망각하면서. 

그렇다고 해서 마음 속에 꿈을 간직하고 싸웠던 저 시대의 젊음들이 허황된 꿈을 좇았다거나 젊었을 적의 치기를 간직하고 의미없는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혁명가 '체 게바라'는 말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고.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고.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실은 과거 저들이 꿈꾸었던 그 불가능한 '꿈'이었을지 모른다. 저들이 뜨겁게 피우려 했던, 그래서 가장 짙은 어둠의 외로웠던 '밤'을 견디게 해주었던 가슴 속에 품었던 '열망'이었을지 모른다. 저들이 그토록 부르고 싶어했던 '밤의 노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너무 쉽게 그 사실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건 아닌지. 시대의 모순 속에서 조국을 위해 기꺼이 피를 흘렸던, 식민지 시대의 타국에서 아스라하게 져버린 수많은 청춘들이 목숨과 신념, 사랑과 맞바꾼 불가능해 보이지만 언젠가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던 달콤한 '꿈'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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