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엔젤 - 스탈린의 비밀노트,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2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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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역사학회 모임에 참석차 러시아에 온 역사학자 플루크 켈소에게 초로의 노인이 찾아온다. 그는 스탈린이 죽었을 당시를 회상하며 스탈린이 남긴 검은색 노트에 대한 얘기를 꺼낸다. 학자적인 호기심 때문에 노트에 끌린 켈소는 노인이 남겨준 힌트를 단서로 노트를 찾기 위해 나서고 마침내 스탈린의 검은색 노트를 찾아낸다. 그리고 노트가 암시한 내용의 진실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아크엔젤로 향한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은 그루지야에서 가난한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젊은날 마르크스 주의를 받아들인 스탈린은 볼셰비키혁명에 가담하고 레닌이 죽은 후 후계자의 자리를 이어받아 1953년 뇌출혈로 사망하기 전까지 구소련의 최고 통수권자였다. 스탈린은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그에게 여자는 성욕과 종족번식의 수단에 불과했으며 권력을 손에 쥔 후에는 가까운 친인척과 측근들을 무차별적으로 처형했다고 한다. 실제로 스탈린은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신봉했다고 하는데 소설 <아크엔젤>에서도 스탈린이 유전적으로 우수형질을 얻기 위해 상상 그 이상의 시도도 했음을 언급한다. 스탈린 지배아래 수백만명의 러시아인들이 무고하게 죽었다.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그릇된 군국주의를 믿었던 독일과 소련, 일본의 지배자 아래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희생됐다. 당시의 피의 역사는 생각만해도 소름끼치고 끔찍하다.

80년대 후반 냉전을 상징했던 동유럽국가들의 공산정권은 붕괴되고 구소련의 고르바초프는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를 선언하고 90년대 초 냉전은 종식된다. 그후로 서구자본주의를 받아들인 러시아는 자본주의를 정착시키는 과도기적인 문제점을 겪는다. <아크엔젤>의 배경은 그런 과도기가 한창 진행중이었을 무렵의 러시아다. 몇몇 극우주의 단체들이 암암리에 활동중이며 그중에는 스탈린의 시대로의 회귀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스탈린의 노트의 존재는 과거의 유물이 아닌 현재를 바꿀 수 있는 열쇠인 셈이다. 냉전을 겪는 동안 미국과 나란히 경쟁할 수 있었지만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후에는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러시아다. 물론 지금의 러시아는 책이 쓰여졌던 당시와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말이다. (현재는 풍부한 에너지자원을 바탕으로 에너지강국으로서 국제사회 특히 유럽연합에 직접적인 굵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스탈린의 노트'가 상징하는 건 스탈린만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민주주의는 실종되고 수뇌부의 고삐풀린 권력의 횡포와 힘없는 인민들의 무고한 희생이 반복되는 피의 역사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다. 과거 2차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며 역사는 우리에게 값진 유산을 남겨주었다. 그것은 과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무엇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최소한 인간으로서 지켜야하는 도리는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다.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인물은 앞으로 다시는 등장해서는 안될 인물들이다. 그들로인해 우리는 숭고하지만 안타까운 희생을 치뤘다. 제2, 제3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등장은 그래서 용납할 수 없고 간과할 수 없는 신의 장난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독재자의 지배하에 있었던 시대를 그리워한다. 누구시대가 좋았었지라는 한탄 섞인 노인의 한숨을 듣다보면 그렇게 당했는데 그 사람의 시대가 그리도 그리울까하는 의문만 남는다. 남의 나라든 우리나라든 역사의 퇴물로 진즉에 퇴장해야했을 사람들이 여전히 얼굴을 내밀고 나보다도 훨씬 오래살 것 같은 아우라를 풍기며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이 내는 목소리는 사회 원로의 목소리가 아닌 여전히 권력의 마약같은 맛을 그리워하며 입맛을 다시는 퇴물의 꼴뵈기 싫은 발악이다. 사탕맛을 알아버린 사람에게 과거의 설탕물의 맛을 달콤하게 회상한다고 그 얘기가 진지하게 먹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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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로부터의 꿈 - 버락 오바마 자서전
버락 H. 오바마 지음, 이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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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요일 미국은 슈퍼화요일 경선 결과로 부산한 하루를 보냈다. 현재 박빙의 경선을 치르고 있는 민주당은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의 엎치락뒤치락 하는 결과로 맥케인 쪽으로 기울어진 공화당과는 다르게 누가 대선 후보가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흑인들을 포함한 미국 유색인종과 여러 셀러브러티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버락 오바마와 백인들과 여성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은 둘 중 경선에서 이기는 후보가 아마도 정권교체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의 탄생이냐,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냐를 놓고 박빙의 대결을 벌이고 있어서 전 세계에 이슈가 되고 있기도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우리나라의 대외정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마무지하게 크기에 그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은 케냐출신 흑인유학생 아버지와 캔자스 출신의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오바마의 자서전이다. 그는 2004년 연방 상원의원으로 당선됐을 때 이 책의 개정판을 냈다. 초판은 그가 하버드 로스쿨 학술지의 흑인 최초로 편집장이 되었을 때 나왔다고 한다. 총 3부로 구성돼 있는 책은 1부 하와이와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어린 시절, 2부 조직가로 활동했던 시카고에서의 일화들, 3부 자신의 뿌리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케냐에서의 이야기로 나눠져 있다.

만만치 않은 두께를 자랑하는 자서전이지만 재밌게 읽히는 책이다. 오바마의 인생 여정도 흥미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책은 유려한 문체로 써있다. 대필이 아니라면 글 쓰기에도 능한 오바마의 면목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반쪽 흑인으로서 백인의 어머니와 외가 가족들 밑에서 자라면서 혼자 가슴앓이하면서 보냈던 정체성의 혼란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읽었다. 자라면서 느꼈던 흑인에게 보여지는 무조건적인 편견과 경계 때문에 힘들어하며 가족들에게 스치듯이 들었던 송곳처럼 아픈 말들도 모두 마음에 담아두었던 감수성 예민한 십대 시절을 특유의 매끄러운 문장으로 묘사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잠깐 하다가 조직가로 활동하기로 결심하고 시카고에서 보낸 그의 활동기는 마음만 앞설 뿐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하나하나 요령을 깨우쳐가는 오바마를 만나볼 수 있다. 주변의 많은 선배 조직가와 지역 주민들의 조언으로 믿음직스러운 동료로 거듭나는 오바마를 통해 세상에는 호락호락한 일은 없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우여곡절과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오바마는 무엇이 최선인지 깨우쳐가는 중이었다. 흑인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어려움이 근본적으로 어디서 시작되는지 사회적인 장애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하나하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한다.

케냐에서 그는 어린시절 헤어지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가족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에 할애한다. 그의 내면에서 아버지라는 사람은 어떤 존재로 변화하는지, 단 한번 만나봤던 아버지를 어린시절 영웅으로 그리면서 컸지만 케냐에서 그가 알게 된 아버지의 진실은 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실망으로 다가오게 된다. 하지만 케냐의 형제들과 많은 사촌들을 만나보면서 자신이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케냐에서 보내는 동안 그는 자신의 뿌리의 소중함과 흑인들의 고향 아프리카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책은 에필로그 식으로 아내와의 결혼식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보여주고 끝을 맺는다. 그 후로 오바마는 변호사로 시카고 로스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1996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으로 정치인생을 시작한다. 2004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이 되고 그리고 지금 우리가 TV에서 보여지는 그 모습으로 살고 있다. 현재 미국의 핫이슈 중심에 서있는 사람이 돼서 우리와 만나고 있다.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은 오늘날 그가 있기까지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던 세 편의 묵직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에게 배울 점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과거를 곱씹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최선을 발견했다는 것.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알았던 포용력과 이해력을 갖고 있었다. 경선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미국의 많은 유색인종과 흑인들에게 든든한 우상으로 남아주길 바란다. 그가 경험하고 이해했던 묵직한 인생경험을 통해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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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이 그린 라 퐁텐 우화
장 드 라 퐁텐 지음, 최인경 옮김, 마르크 샤갈 그림 / 지엔씨미디어(GNCmedia)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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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샤갈이 라 퐁텐 우화의 삽화를 그렸을 때에는 여러 우려의 목소리가 있어나 보다. 러시아에서 건너 온 화가, 그에게 보내는 잘난 프랑스 미술계의 불편한 시선과 함께 샤갈의 삽화는 다른 화가들의 삽화로 이미 수차례 출판된 라 퐁텐 우화의 여러 버전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 누가 중심인지 제목을 보시라. 바로 그 유명한 샤갈이다. 한마디로 사람의 출세를 한눈에 보여주는 제목이 아닌가. 지금은 샤갈이 그렸기 때문에 특별한 우화집으로 소개되는 것이다. 이런 걸 전세역전이라고 부르는 걸까.

원색적인 색체로 샤갈 그림 특유의 색감을 만나볼 수 있다. 라 퐁텐의 우화에 샤갈의 삽화까지 곁들여 책을 볼 수 있다면 일석이조의 감상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가 곁들여진 그림은 사실 이야기가 먼저 다가오기 때문에 그림을 읽기가 쉽지가 않다. 이야기의 틀을 벗어나서 그림을 해석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읽으면서 고정적인 이미지가 그려져서 아무리 샤갈의 그림이라지만 샤갈이 라 퐁텐의 우화를 어떤 식으로 해석했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샤갈의 그림을 보다보면 그는 색깔의 틀을 과감하게 뛰어넘는 것 같다. 우리가 흔히 고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미지들의 색깔을 샤갈은 자기만의 해석으로 다른 색으로 표현한다. 그의 그림에서 의외의 색깔 표현을 통해 표현된 부분을 찾아보는 건 아주 쉬운 발견에 속할 것이다. 색깔의 경계로 윤곽을 흐릿하게 표현한 그의 그림은 그래서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느낌까지 연출한다. 흐릿흐릿한 잔형으로 남겨진 그림의 진짜 이미지를 추측해보는 것도 그림을 재밌게 감상하는 방법일 것이다.

라 퐁텐은 프랑스의 동화작가이자 우화작가이다. 그는 세계 곳곳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자신만의 해석을 덧붙여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했다. 이야기는 친숙하고 낯익은 우화에 짧은 아포리즘적인 메시지를 전해준다. 단순하지만 명쾌한 인간에 대한 풍자가 담겨 있다. 욕심을 부리면 벌을 받는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부터 꾀를 부리면 나중에는 그 이상으로 힘든 일을 겪을 것이라는 경고까지 어리석은 인간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부차적인 문제들을 짧은 이야기에 압축해서 보여준다.

짧은 분량으로 이야기도 쉽게 읽히는 만큼 단순히 텍스트를 읽고 그림을 슬쩍 보는 정도에 그친다면 이 책을 아깝게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틀에 갖혀 그림을 이해하는데 어떤 제약이 주어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인데 처음에는 이야기에 곁들여진 삽화로 보고 책을 다시 한번 읽을 때는 이번에는 샤갈의 삽화만을 자유롭게 해석하며 샤갈이 그림에 담은 샤갈만의 해석을 추측해 보는 것도 즐거운 독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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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거짓말
기무라 유이치 지음, 임희선 옮김 / 지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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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망받는 시나리오 작가가 갈대같은 마음을 누리지 못하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훌쩍 떠난다. 억눌려 있던 일에서 좀더 자유로울 수 있도록. 그러다가 작은 소도시에서 바텐더로 안착한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겠다는 혼자만의 다짐을 뒤로 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인연들과 알게 된다. 상처받은 영혼인 남자는 밝고 성격 좋고 얼굴도 반반한 이웃집 라멘가게 딸과 알게 되고 둘은 러브러브하는 사이가 된다.

뻔한 내용인데 설렘은 살아있다. 가볍게 보면 가볍고 뻔한 것을 고깝게 보면 얼마든지 낮잡아 평할 수 있는 내용이다. 아주 원론적인 얘기를 해보자면 소설에는 발단,전개,절정,위기,결말 이라는 구성단계가 있다. 이 책의 내용은 그런 구성을 나누는데 하등의 어려움이 없는 아주 전형적이고 형식이 뚜렷한 연애소설이다. 여기 나오는 주인공 나오키는 10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드라마 작가라고 한다.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갈등을 한다. 나는 여기서 낯익은 장면이 오버랩 된다.

집안의 압력과 분위기에 이끌려 마지못해 아버지 회사에 출근하는 재벌집 아들내미가 있다.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걔네들말이다. 그런류의 남자가 정체를 숨기고 허름하고 궁색한 술집에 바텐더로 자리 잡는다. 거기서 그의 눈 앞에 나타난 이웃 라멘가게 딸내미. 밝고 씩씩하고 꾸밈이 없지만 일단 한번 꾸며주시면 미인소리는 듣는 여자다. 여기서 뭐 또 오버랩 되는 거 없나? 그렇다. 순정만화나 저런 재벌집 아들내미들이 드라마에서 알게 되고 바로 이 여자야!라고 느낄 그런 여자다. 어디선가 이런 대사가 들린다. "널 만나고 모든 게 달라졌어." "날 이렇게 당황하게 만든 건 네가 처음이야." "너만이 날 평범하게 봐주는구나." 그리고 이렇게 연인들이 달콤한 사랑을 속삭일 때쯤 갈등 요소들이 득시글거리기 시작한다. 끝내주는 외모의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이 등장해서 촌스러운 저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겠지. "내 남자에게서 떨어져." "주제를 알아야지." "OO씨는 그냥 너를 갖고 노는 거야. 그냥 잠깐 즐기는 거라고." 그리고 이어지는 여자의 오해. 그리고 이제는 이 여자분이 방황해주실 차례다. 남자는 여기서 여자가 오해하고 마음에 상처받았음을 몰라야 한다. 왜? 뒤늦게 깨닫고 아파해야 하는 장면이 있어야 하거든. 여자를 찾아다니는 남자. 그리고 극적으로 화해하고 끈끈한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두 남녀. "이제 아무데도 못가~" "다시는 너를 떠나지 않을거야."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는 두 남녀. 잠깐 검은색 화면이 짧게 이어지더니 에필로그 화면이 나온다. 사랑의 결실을 맺는 연인들의 행복한 미소, 그들 뒤에는 이제 밝은 미래만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보여주며 극은 끝이 난다. 이어서 엔딩 자막이 올라간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렇게 뻔한 사랑 얘기에 많은 사람들이 두손을 들고 "No!"라고 외친다. 이젠 됐다는 분위기다. 딴 얘기 뭐 없냐는 분위기다. 수채화같은 사랑 얘기. 해피엔딩을 위한 들러리에 불과한 악역같은 조연들은 이젠 사절이란다. 이렇게 개성없는 시나리오는 그만 쓰란다. 그런데 여기 그런 이야기가 문을 두드린다. 난 좀 다를 것 같은데 하면서. 그래? 한번 읽어볼까? 뭐야~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아니야 이번엔 다를 거야. 좀더 지켜보자고. 결국, 역시나, 어쩐지, 그럼 그렇지였군. 설레이고 감동적이긴 한데 개성은 없어. 솔직히, 영화 시놉시스처럼 간단하게 줄일 수 있는 이야기잖아. 그래도 연인들이 해피엔딩이라니, 머리 복잡하고 가끔 연애소설이 읽고 싶을 때 추천해 줄만은 한 것 같다.

흔하디 흔한 순정연애소설의 공식을 배신하지 못하는 아주 모범적인 소설이다. 여타 많은 그런 소설들 중에 이번 소설은 '시나리오 작가와 귀여운 라면집 아가씨 버전'이라는 부제를 달아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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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 1 비룡소 걸작선 49
랄프 이자우 지음, 유혜자 옮김 / 비룡소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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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남매인 제시카와 올리버가 사는 집에 어느 날 경찰들이 찾아온다. 박물관 경비원으로 일하는 아이들의 아버지가 전시되어 있던 황동상을 훔쳐 간 용의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남매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상하게 생각한 남매는 아버지가 일했던 박물관에 잠입하고 그곳에서 크바시나왕국에 대해 알게 된다. 올리버는 누나 제시카의 도움으로 박물관에 있는 이스타르문을 통해 잃어버린 기억들이 가는 그 곳으로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데..

이 책은 크바시나 왕국의 존재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과 선택받지 못한 잊혀진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잊혀진다는 건 퍽 자존심이 상할 일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신화적인 존재, 사람들이 사용하다 잃어버린 물건들, 역사 속 숨은 조연들이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곳. 그곳에서 올리버는 아버지를 찾아 모험하는 동안 왕국의 선량한 기억들의 도움을 받아 난관을 극복해 나간다. 절대로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건망증과는 별개로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맞춰지지 않는 퍼즐들, 바로 그런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이 가는 왕국이 있다는 건 신기한 설정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수많은 인간의 단편적인 꿈들이 생명을 얻어 숨쉬는 크바시나 왕국같은 곳이 정말 있을까. 인간에게서 기억을 빼앗아간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얼마나 끔찍한 일이 될 수 있을까. 기억 안에는 추억도, 과거의 소중했던 인연도 함께 간직돼 있는데 그것을 잃어버리고 다시 찾을 수 없다면 인간에게는 희망, 기쁨, 설렘, 슬픔, 아픔, 아니 감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겠지. 꿈을 먹고 사는 인간 아닌가.  

이 책은 기억과 함께 역사의 이야기도 하고 있다. 고고학적인 미스터리라는 건 사실, 기억될 역사만을 선택해서 기록한 인간이 만들어 낸 숙제다. 누군가가 그 역사를 기록하고 확실히 전해졌다면 오늘날 인류에게 수수께끼로 남은 많은 역사적 미스터리는 그 수가 지금보다는 훨씬 적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라는 건 선택된 이야기들로 구성돼 있는 잘난 역사들의 집합체다. 역사가들의 주관적인 가치로 선택된 과거의 어떤 일부분만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은 반대로 선택받지 못했던 나머지의 과거에 대해 얘기하는 책이다. 크바시나 왕국의 생명체들은 현실세계에서 선택받지 못하고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가게 되는 최후의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거기에는 역사적 인물들과 함께 했지만 역사의 어떤 페이지에도 실리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크바시나와 현실세계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는 곳이 고대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라는 것도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과거가 잠들어 있는 곳, 과거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곳, 바로 그런 박물관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이해한다면 판타지 소설의 옷을 입고 있는 이 책이 담고 있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끄집어 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술술 읽히는 판타지 이야기다. 고대 바빌론이 나오고 고고학적으로 구미가 당기는 여러 신화적인 소재들이 수수께끼를 연결하는 열쇠의 역할을 한다. 주인공 남매가 주변의 도움을 얻어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모습은 이런 동화적인 이야기를 통해 꿈을 키우고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판타지 소설의 큰 장점이 아닐까. 판타지 소설은 자칫 상상력과 허구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소설이 갖춰야 할 서사적인 내러티브가 헐겁게 느껴질 수가 있는데 다행히도 랄프 이자우의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은 탄탄하고 재밌는 내용 전개를 보여준다.

과거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건 앞으로 또 다른 비극을 낳게 될 씨앗을 품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인간 역사라는 건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는 어떤 패턴에 감겨 있는 것 같다. 소설 속에서처럼 '안네의 일기'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시간낭비에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것을 우리는 가까운 어떤 나라를 통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도 그렇게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당당한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후손들에게 우리는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피해국가라는 의식을 심어주면서도 정작 눈으로 보여줄 수 있는 많은 증거들을 우리 손으로 없애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어떤 건물들은 과거의 치욕스러웠던 약소국의 흔적이라고 철거되고 방치되고 있다. 그중에는 기억하고 곱씹어야 할 역사의 산물로 바라볼 수 있는 가치를 지닌 것들도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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