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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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랍어 시간│한강│문학동네│2011.11.10│p194

 

 

강약중강약, 나의 독서는 암묵적으로 4박자의 리듬을 따릅니다. 그 리듬은 텍스트의 무게의 가늠하여 얼거리를 잡는데 한강의 <희랍어시간>은 ‘강’ 중에서도 ‘강강’이랄까. 책장의 한켠에서 켜켜의 먼지를 쌓아올리고서야 내 손에 쥐어집니다. 극세사로 비유되는 그녀의 텍스트는 호흡을 가다듬는 일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가까이 닿아 있습니다. 그것, 우리의 연약한 본질 그 어딘가로 숨결이 닿는 거리에. 여린, 위태로운, 예민한 그들의 이야기가 한 편의 예술영화를 보듯 느릿하여 긴장을 더하는 불안, 브라운관이 아니라 그 장면들 어딘가에 스며 그와 그녀를 관찰하고 깨어난 듯 피곤함이 쉽게 가시지 않을 작정인가 봅니다. 고르고 골랐을 그녀의 텍스트를 마주 하는 일은 감탄과 그 비례하는 버거움,

 

   

p.174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뛰어오른다.

검은 빗방울에 싸인 모국어 문자들.

둥글거나 반듯한 획들, 짧게 머무른 점들.

몸을 구부린 쉼표와 물음표.

  

 

말을 잃어가는 여자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남자의 빛이 맞닿습니다. 침묵과 어둠, 그들이 함께 할 수 없는 무한의 공간 언저리를 손바닥에 어렵게 써내린 글자로 헤아리듯 조심스럽게 가늠해 나갑니다. 침묵을 깨기 위한 희랍어, 어둠에 의연해지기 위한 희랍어는 아무리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해도 결국 죽은 글자에 불과합니다. p. 165 셀 수 없는 혀와 펜들로 수천 년 동안 너덜너덜해진 언어. 그녀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덜너덜하게 만든 언어. 하나의 문장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늙은 심장이 느껴졌다. 누덕누덕 기워진, 바싹 마른, 무표정한 심장. 그럴수록 더 힘껏 단어들을 움켜쥐었다. 한 순간 손아귀가 헐거워졌다. 무딘 파편들이 발등에 떨어졌다. 팽팽하게 맞물려 돌던 톱니바퀴가 멈췄다. 끈덕지게 마모된 한 자리가 살점처럼, 숟가락으로 떠낸 두부처럼 움푹 떨어져나갔다. '잃다'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일, 그 잔악한 통증이 가득 채워진 이야기는 그러나 태연하고 유유(幽幽)하며 부드럽기까지 해서 나는 호흡의 리듬을 몇 번이나 잃어야 했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 열흘의 시간, 이제 그녀의 텍스트에 대한 잔상과 불투명한 유리에 끼워진 듯 한 한장의 유화 - 그림에서는 그녀가 잃은 언어도 그가 잃은 빛도 표현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 를 보는 듯 한 느낌만 어렴풋이 남았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쓰는 일이 나에게 허락되어 있다는 것, 글쓰기가 내 삶을 힘껏 밀고 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는 고작 리뷰를 남기는 일에도 고됨이 턱 밑까지 차오릅니다. 나는 왜 이렇게 부끄러운 일을 나아짐도 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 조금씩 내려놓는 일을 연습해야 할 것 같습니다.

 

 

 

p. 123

 

삶이란 게, 결코 견디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고.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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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동정 없는 세상 - 제6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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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정 없는 세상│박현욱│문학동네│2001.06.18│p.206

 

 

 

촌스러움 그득한 표지, 날을 깊게 세운 제목 때문에 잔뜩 움츠러 긴장하고 제법 그럴듯한 가드자세를 취하고 - 조금이라도 건들라치면 잽싸게 내 뺄 기세로 - 시작한 책은, 하하하하, 오만방자했던 나의 추측을 보란 듯이 무너트리며 어느 한 순간도 위트를 잃지 않고 재미있습니다. 맞아요, 정말 재미가 있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문체며, 거스르지 않는 전개 모두 내가 꼽는 문학의 가치, 즐거움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조몰락거립니다.

 

열아홉, 막 수능을 치른 준호의 목표는 좋은 대학도 희망찬 미래도 아닌 여자친구와 '한번' 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동정(童貞)을 떼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준호의 가족은 헤어 디자인 연구소를 운영하는 유일한 경제 생활자 엄마와 명문대 법대 출신이지만 한 번도 취직경험이 없는 완전한 백수 삼촌뿐입니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탈선, 십대의 뜨거운 반항이나 사회적 편견으로부터의 냉대 혹은 경제적인 곤란 등은 가볍게 훅(hook). 마치 어른이 되기 위한 관문인 양 동정 떼기에만 몰입하는 준호의 시선을 빠른 템포로 흔쾌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 사이 동정(同情)없는 세상에 닿습니다.

 

 

p.142

 

십년 동안은 우선 네가 무얼 하고 싶은지 찾아보는데 써 봐. 그런 것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 또 너랑 할 수 있는 일이기도해.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것에 관심이 있다는 것과도 비슷해 .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쓸데없는 일인데 그런 쓸데없는 공부가 인문학이고 그런 걸 공부하는 데가 대학이야.”

 

 

오매불망하던 목표를 이루었을 때 몰려왔던 허무 앞에서 준호는 당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행위 자체가 줄 수 있는 위안은 턱없이 부족함을 깨달았을 때, 그는 동정 없는 세상에 조심스럽게 한 발을 들입니다. p. 153 뭐든지 하고 싶었던 그때에 해야 되는 거야. 시간이 지나면 왜 하고 싶었는지 잊어버리게 되거든. 나한테 미대는 그래. 이제 와서 가면 뭐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처럼 강렬하게 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 말이지. 뭔가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왜 하고 싶었는지에 대해서조차 잊어버리게 되거든. 자꾸 그러다보면 결국에는 하고 싶은 것이 없어져버려. 우물이라는 것은 퍼내면 퍼낼수록 새로운 물이 나오지만 퍼내지 않다보면 결국 물이 마르게 도잖니. 그런 것처럼 욕구라는 것도 채워주면 채워줄수록 새로운 욕구가 샘솟지만 포기하다 보면 나중에는 어떤 욕구도 생기지 않게 되어버리는 거야. 그러니 너도 쉽지야 않겠지만 하고 싶은 것을 자꾸 만들어서 해라.

 

내가 스무살이 되었을 때 나에게 미용학원을 권하는 엄마가 있었다면, 만화방을 하는 삼촌이 있었다면 내 삶은 지금과 제법 달라져 있겠지 하며 피식 웃음을 쏟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엄마, 나의 삼촌으로의 원망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제멋대로 성장 중인 나의 청춘의 날들로의 응원쯤으로, 그게 무엇이든 의미 없는 것들 때문에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당위로 - 설령 당신의 기준에 한껏 부족하더라도 - 나는 가득 부풀어 오릅니다. 과연 이 동정없는 세상에서 진짜 어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몇이나 될런지 되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같은 질문을 끄적입니다. 그리고 잠시, 어른이 되고 싶어 안달하던 나의 꼬마시절을 어설피 추억하며 준호에서 ch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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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제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손보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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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 제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손보미 외│2012.04.23│p.315

 

 

 

‘젊은’이라는 단어가 좋아서 읽기 시작한 수상집의 세 번째 이야기. 낯익어 반가운 혹은 만나고 싶었던, 그리고 낯설어 더욱 반가운 그들의 활자로 각자의 오묘한 매력을 함뿍 담은 작품들에서 ‘ 아, 즐거운 책읽기여! ’ 라는 자못 근원적인 얻음으로부터 나는 내가 책을 읽어야만하는 당위를 더하니 가끔 이렇게 완벽한 순간도 있구나. (무릎, 탁!) 어딘지 부러 숙성시킨 듯 떫은 과일 같아서, 펄펄 끓어오르지도 꽁꽁 얼어붙지도 못한 미지근한 그 단편으로의 단호했던 외면은 봄날의 눈처럼 사르륵 녹아내립니다. 더욱이 여유롭지 않은 시간들에 한 호흡으로 읽어낼 수 있어서 어찌나 좋은지.

 

 

 

 

손보미, 「폭우」 _ 너무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우연하거나 혹은 필연적으로 얽혀 폭우처럼 쏟아져 내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무 달라 어느 한 점 겹쳐질 것 같지 않아서 꼬꾸라지듯 수직으로 떨어져서야 닿은 두 여자의 삶, 위태로운 폭우 속의 정적처럼 고요해서 불안한 오해 어쩌면 진실이 결국은 한점에 이릅니다. 대상수상작이라기에 잔뜩 기대가 부풀어 올라 만난 손보미의 「폭우」는 조금 시시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득 그리고 이렇게 시간을 보태어 기록을 남기려니 그 시시함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거죠. 어떠한 대답도 거부한 채 끝나버린 이야기의 짙은 단상의 여유 끝이 오래도록 묻어납니다.

 

 

김미월, 「프라자호텔」 _ 매년 호텔로 여름 휴가를 떠나는 부부의 모습을 조용히 쫓아갑니다. 그리고 ‘호텔’ 때문에 기억하게 되는 남편의 첫사랑, 그 서투르고 조바심 났던 시간을 더듬어 조근조근 이야기 합니다. 부부의 모습이 연분홍빛 - 왜 사랑이라고 하면 새빨아간 붉은빛을 떠올리잖아요. 하지만 그 붉음은 다소 부담스럽기도 한데 부부의 모습에서 팔팔 끓는 뜨거움이 아니라 적당히 식어 몸을 담그기에 좋은, 따뜻한 분홍빛 - 이라면 남편의 기억 속 첫사랑의 그녀는 푸름, 연녹색의 싱그러움이 파릇파릇합니다. 건조한 듯 제법 무심하게 읽히는 활자에서는 햇빛을 가득 담아 바짝 마른 빨래가 전해주는 기분 좋은 마름이 그득하니, 그리고 웃음 짓게 하는 반전에서 그녀의 이름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합니다. p. 82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누군가의 내면을 상상한다는 것은 얼마나 막막한 일인가.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작가노트 중에서)

 

 

황정은, 「양산 펴기」 _ 내겐 견고한 믿음을 얹은 고유명사가 된 그녀의 이름입니다. 지구본을 살까, 장어를 먹을까에서 비롯된 연인의 사소한 다툼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p. 93 그뒤로 더는 말 나누지 않고 밤엔 등을 돌리고 누웠다. 그게 전부였으니 다퉜다기보다는 다쳤다고 해야 하나. 감정이랄까 자존심이랄까 어딘가 손쓰기 어려운 심층적인 부분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그녀의 해학을 한소끔 더해서 뜨거운 여름날 뙤약볕처럼 흔들림 없이 견고하다가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당황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뜨거움을 토해내는 하늘이 마치 우리의 젊음을 보는 것 같아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부디 젊은 연인의 여름이 맛있는 장어를 먹고 힘을 내어 방수가 완벽한 자외선 차단 로베르따 디 까메르노 양산을 쓰고 건강하기를.

 

 

정소현, 「너를 닮은 사람」 _ 억지로 끼워 맞춘 퍼즐처럼 숨통이 콱 막히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니기를 바랐던 반전은 작가의 의도를 고스란히 내어주니 ‘서스펜스’라고 하기엔 영화의 예고편을 보고 흥미가 생겨 관람한 영화가 예고편이 전부였던 허탈감이 엄습해오는 기분입니다.

 

 

김성중, 「국경시장」 _ 젊은작가상을 세 번 모두 수상한 그녀의 이야기는 <서른 Thirty>라는 작품집에서 먼저 만났습니다. 기억을 팔아 물건을 사는 ‘국경시장’이라는 발상은 다시 읽어도 참 재미있습니다. 트리플 수상이 증명해주듯 그녀의 이야기는 씨실과 날실이 잘 직조되어 재미있고 그들의 이야기지만 또 내 이야기가 되어 잠잠하던 나의 내면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킵니다. p. 217 서로에게 타인이기 때문에 비밀을 나누는 것이 가능했다.  스무살로 돌아가고 싶다는 스무살에 만난 친구와의 통화를 다독입니다. 나의 스무살도 싱그라움은 웅크린 채 아쉬움 투성이지요. 이제 20대 초반의 젊음을 마주하면 그 좋은 '때'가 망연히 부럽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좋은 '때'는 지금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당신은 어떤 기억을 팔고 싶은가요?

 

 

이영훈, 「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 _ 문제는 ‘똥’입니다. 결코 가볍지 않았던 이야기들의 마지막에 ‘이거 뭐야?’라며 키득키득 웃으며 읽어내린 이야기입니다. (아, 편집자의 센스겠지요?)  지난 해 통영에 다녀오는 길에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복통, 휴가철 도로는 변비처럼 꽉 막혀있는데 숨쉬는 것조차 위태로왔던 그날이 생각나서 나는 또 다시 아랫배가 움찔합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경험했을 복통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열광하는 것들의 실체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합니다.

 

 

나와 함께 삼십대를 보내고 있는 젊은작가들의 이야기가 지난해보다 더욱 풍성해졌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나기위해 위시를 늘려야하구요, 그 또한 너무 감사합니다.  7명의 젊은 작가들이 우리에게 건넨 선물 이제 당신께 건넵니다. 풀어볼래요?

 

 

 

 

 

p. 196

 

철드는 게 나쁘거나 대단한 게 아니예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무게를 온전히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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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지성 시인선 397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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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앞에 없는 사람│심보선│문학과지성사│2011.08.09│p.150

 

 

 

진은영의 발문을 읽으며 나는 적잖이 주눅이 듭니다.

 

 

사람들은 작품 속에는 작가가 몰래 숨겨둔 금화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작가일수록 많은 금화를 깊숙이 숨겨두고, 현명한 독자일수록 그것을 많이 찾아낸다는 것이다.

   - 발문. 진은영

 

 

나는 왜 책을 읽는가, 나의 독서는 이대로 괜찮은가를 반문하며 아주 잠시 실의에 빠집니다. 읽어냄이 다른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나는 진은영의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을 주문했습니다. 시집을 읽기 시작한 건 그와 이별 후입니다. 그가 내게 남긴 (고마운) 습관 하나. 목 디스크가 심해지면서 어깨 통증 또한 더해지니 상대적으로 가벼운 시집을 가방에 넣기 시작했는데 사실 내게 가벼운 시집이란 한 권도 없었습니다. <눈 앞에 없는 사람> 또한 박음질을 하듯이 몇 번이나 같은 자리를 맴돌아야 했습니다.

 

‘없는’ 그러니까 부재에 관한 심보선의 이야기는 “기쁨과 슬픔 사이의 빈 공간에/딱 들어맞는 단어 하나”를 만들겠노라는 그의 선언처럼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나이가 채워지며 이별 앞에 내 모습이 참 많이도 변했음을 느낍니다. 눈물을 씨앗 채 삼킨 듯 오열했던 젊은 날들의 이별이 덤덤히 밥을 삼키고, 여전히 커피를 마시는 지금의 이별보다 더 슬펐을까요. 사랑이 실망이라는 이름을 달고 미움을 채웠던 어린 날의 이별이 이해의 끄덕거림으로 안쓰러운 마음을 도닥이는 지금의 이별보다 짧았던 것은 굶주림도, 달갑지 않음도 모두 눈물이라는 도구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갓난아이와 닮아 있기 때문이겠지요. 나는 이제 울지 않는 눈물을 배웠습니다.

 

 

  이 별의 일

 

너와의 이별은 도무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

그다음에 이별하자.

어디쯤 왔는가, 멸망이여.

 

 

  '나'라는 말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

.

.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는 음각일 때가 더 좋습니다.

사라질 운명을 감수하고 쓰인 그 말을

 

 

  이상하게 말하기

 

내 그림자가 조금씩 흐려지는 것을 바라본다

내 그림자가 네 그림자보다 더 진했었지

라고 말한다면 서글프겠지

 

 

  음력

 

내가 아주 슬펐을 때

나는 발아래서 잿빛 자갈을 발견했었지.

그것은 음력으로

인간의 아물지 않은 흉터이고

그때 그대의 사랑스러운 이름은

지상에서 이미 반쯤 지워진 채

화석 같은 인광으로 푸르게 빛나고 있었던 거야.

 

 

  변신의 시간

 

아무 꺼리낌 없이 인생은 시작됐다

어린 나뭇가지들이

계절과 계절 사이에서 죽어갈 때

 

 

  그라나다

 

발에는 헐거운 바람을 신고

등에는 단단한 태도를 걸치고

여행을 떠난다

 

 

  체념

 

새벽녘 공기의 성긴 그물 아래에서 깨어나면

지난밤 꿈이 운 좋게 포획한 한 마리 물고기인 양

가슴속에서 심장이 퍼덕거린다

나는 수평선을 바라본다

세상에서 가장 기다란 사물인 그것을

어떤 요구와도 무관한 기다림 끝에

나는 문득 깨닫는다

시계는 시간이 거짓말이라는 증거인 것을

 

 

  Stephen Haggard의 죽음

 

여행이란 가장 온순한 형태의 투쟁이다, 라고

그는 마른 강아지풀로 바람 한 방울을 찍어 어둠 위에 기록한다.

 

 

그의 시를 여러 번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좋아서 한 번, 알 수 없으니 한 번 더 그렇게 눈이 아니라 출·퇴근 길에는 옹알이를 하듯이, 꿈자리 전에는 발음 하나하나 신경을 써서 그렇게 시를 읽었습니다. 대부분의 시는 결국 그렇게 알 수 없었지만 역시나 시는 눈이 아니라 입으로 읽어야겠습니다. 보여지는 시보다 읽혀지는 시가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나는 그 때문에 시를 읽습니다. 그리움이나 애뜻함 따위의 감정이 아니라 우리 시간에 대한 타당한 보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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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마이 러브
가쿠타 미츠요 지음, 안소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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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굿바이 마이 러브│가쿠타 미쓰요│소담출판사│2012.04.20│p.368

 

 

 

“그렇게 아팠는데도 나는 또다시 사랑을 시작했다.” 라는 표지의 문구를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나는 사랑할 준비가 되었던가, 내 마음을 조심스럽게 살펴봅니다. 뻔한 연애 소설이겠거니 하는 가벼운 마음, 이렇게 싱그러운 봄날이라면 괜찮겠구나 했지만 부디 내 심장을 너무 말랑거리게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굳바이 마이 러브>를 만났습니다.

 

7편의 사랑이야기가 성기게 얽혀 사랑의 주체가 되고 이별의 주체가 되기도 하며 그렇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사이 나도 제법 그들의 이별에 태연해집니다. p. 262 역까지 돌아가는 길에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 기마코는 내심 놀랐다. 울어보려고도 해보았다. 하지만 울 수 없었다. 오히려 값비싼 보정 속옷을 벗어버리고 나왔을 때와 같은 해방감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이번 주말에 소꼬리를 고아야지, 콩을 삶아야지, 만두피를 반죽해야지. 역에 도착할 무렵에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하고 기마코는 생각했다. 나는 구로다와 헤어지기 위해 그렇게 열렬한 사랑을 했는지도 모른다. 아프지 않은 이별이야 없겠지마는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다면 이별의 무게가 좀 가벼워지지 않을까 자위(自慰)했던 마음을 그들과도 조심스럽게 나눠봅니다.

 

어딘가 조금 어설프고 안쓰러운 그들을 만나며 나의 어리석음을 되짚기도 합니다. p. 49 구마 짱. 지금은 나, 네가 조금 이해된다. 평범하고 평화로운 하루하루가 절대로 나를 쓸모없게 만들지 않아. 그런 나날의 앞에 나만이 손에 넣을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할 거라고 깨달은 지금은 너를 이해할 수 있어. 구마 짱. 그들의 사랑은 한결같이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한 동경에서 사랑을 시작합니다. 끊임없이 내 안에 부족한 나를 꾸짖고 채찍질하던 모질던 날들을 이제는 웃으며 고백합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타인을 사랑할 수 없음을, 또한 사랑받을 수 없음을 나는 여러번의 사랑을 견디고서야 알았습니다. 아, 문득 사랑이라는 감정은 무엇일까, 그것이 사랑이었던가, 잠시의 혼란이 나를 흔들지만 그 모든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다른 방향을 걷고 있다 하여도.

 

 

p.209

 

중앙분리대 언저리에서 우리는 우연히 스쳐 지나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마코와 보낸 시간은 그런 순간이었을까. 그렇다면 수긍이 간다. 애초에 가는 방향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함께 걸어갈 수 없었다. 스쳐 지나가는 한순간이 지나면 그다음에는 등을 돌리는 일만 남았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한 채.

 

 

사랑, 처럼 공평하지 못한 게임이 또 있을까요? 마치 두 사람이 시소를 타듯 사랑의 무게만큼 한쪽으로 기울고야마는 불공평한 게임을,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불리하다고 말하는 게임을 우리는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시간을 보태고서야 나는 알게 됩니다. 내가 먼저 이별을 말했다고 해서 그 게임의 승자가 내가 아니었다고. 쓰라린 실연의 상처 또한 시간이 덮이면 흉은 남지만 고운 새살이 돋아 말랑말랑해진다는 것을.

 

지난 주말 죽음을 앞두고 헤어진 옛 애인을 찾아온 여자의 이야기 연극 <배고파5>를 봤습니다. 남자는 사고로 기억을 잃고 여자의 존재 또한 사고와 함께 잊혀집니다. 여자에겐 시간이 없지요. 자신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여자의 노력, 그리고 그 남자 곁을 지키는 새로운 여자, 연극은 끊임없는 웃음으로 배앓이를 하게 하지만 여자의 뜨거운 고백은 그 작은 공간의 시간을 멈추게 했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누군가는 함께 했던 그 사람의 소중함을 그렇게 그녀의 눈물과 함께 적십니다. p. 309 "재능이든 뭐든 유효한 건 늘 지금밖에 없잖아요.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가와 상관없고 미래에 무엇을 할 것인가와 상관없어요. 지금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지금 무언가 하지 않으면 미래로 이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죠. 제로 곱하기 제로는 제로이고 분타는 지금 제로예요. 히사노부씨의 기억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나도 다시 사랑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p. 311

 

원하는 바를 이루는 건 말이죠.

 스스로 눈앞에 있는 걸 하나하나,

스스로 선택해서 과감하게 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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