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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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랍어 시간│한강│문학동네│2011.11.10│p194

 

 

강약중강약, 나의 독서는 암묵적으로 4박자의 리듬을 따릅니다. 그 리듬은 텍스트의 무게의 가늠하여 얼거리를 잡는데 한강의 <희랍어시간>은 ‘강’ 중에서도 ‘강강’이랄까. 책장의 한켠에서 켜켜의 먼지를 쌓아올리고서야 내 손에 쥐어집니다. 극세사로 비유되는 그녀의 텍스트는 호흡을 가다듬는 일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가까이 닿아 있습니다. 그것, 우리의 연약한 본질 그 어딘가로 숨결이 닿는 거리에. 여린, 위태로운, 예민한 그들의 이야기가 한 편의 예술영화를 보듯 느릿하여 긴장을 더하는 불안, 브라운관이 아니라 그 장면들 어딘가에 스며 그와 그녀를 관찰하고 깨어난 듯 피곤함이 쉽게 가시지 않을 작정인가 봅니다. 고르고 골랐을 그녀의 텍스트를 마주 하는 일은 감탄과 그 비례하는 버거움,

 

   

p.174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뛰어오른다.

검은 빗방울에 싸인 모국어 문자들.

둥글거나 반듯한 획들, 짧게 머무른 점들.

몸을 구부린 쉼표와 물음표.

  

 

말을 잃어가는 여자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남자의 빛이 맞닿습니다. 침묵과 어둠, 그들이 함께 할 수 없는 무한의 공간 언저리를 손바닥에 어렵게 써내린 글자로 헤아리듯 조심스럽게 가늠해 나갑니다. 침묵을 깨기 위한 희랍어, 어둠에 의연해지기 위한 희랍어는 아무리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해도 결국 죽은 글자에 불과합니다. p. 165 셀 수 없는 혀와 펜들로 수천 년 동안 너덜너덜해진 언어. 그녀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덜너덜하게 만든 언어. 하나의 문장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늙은 심장이 느껴졌다. 누덕누덕 기워진, 바싹 마른, 무표정한 심장. 그럴수록 더 힘껏 단어들을 움켜쥐었다. 한 순간 손아귀가 헐거워졌다. 무딘 파편들이 발등에 떨어졌다. 팽팽하게 맞물려 돌던 톱니바퀴가 멈췄다. 끈덕지게 마모된 한 자리가 살점처럼, 숟가락으로 떠낸 두부처럼 움푹 떨어져나갔다. '잃다'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일, 그 잔악한 통증이 가득 채워진 이야기는 그러나 태연하고 유유(幽幽)하며 부드럽기까지 해서 나는 호흡의 리듬을 몇 번이나 잃어야 했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 열흘의 시간, 이제 그녀의 텍스트에 대한 잔상과 불투명한 유리에 끼워진 듯 한 한장의 유화 - 그림에서는 그녀가 잃은 언어도 그가 잃은 빛도 표현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 를 보는 듯 한 느낌만 어렴풋이 남았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쓰는 일이 나에게 허락되어 있다는 것, 글쓰기가 내 삶을 힘껏 밀고 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는 고작 리뷰를 남기는 일에도 고됨이 턱 밑까지 차오릅니다. 나는 왜 이렇게 부끄러운 일을 나아짐도 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 조금씩 내려놓는 일을 연습해야 할 것 같습니다.

 

 

 

p. 123

 

삶이란 게, 결코 견디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고.

 

 

 

 

 

하다.

copyright ⓒ 2012 by. Yu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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