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지성 시인선 397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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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앞에 없는 사람│심보선│문학과지성사│2011.08.09│p.150

 

 

 

진은영의 발문을 읽으며 나는 적잖이 주눅이 듭니다.

 

 

사람들은 작품 속에는 작가가 몰래 숨겨둔 금화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작가일수록 많은 금화를 깊숙이 숨겨두고, 현명한 독자일수록 그것을 많이 찾아낸다는 것이다.

   - 발문. 진은영

 

 

나는 왜 책을 읽는가, 나의 독서는 이대로 괜찮은가를 반문하며 아주 잠시 실의에 빠집니다. 읽어냄이 다른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나는 진은영의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을 주문했습니다. 시집을 읽기 시작한 건 그와 이별 후입니다. 그가 내게 남긴 (고마운) 습관 하나. 목 디스크가 심해지면서 어깨 통증 또한 더해지니 상대적으로 가벼운 시집을 가방에 넣기 시작했는데 사실 내게 가벼운 시집이란 한 권도 없었습니다. <눈 앞에 없는 사람> 또한 박음질을 하듯이 몇 번이나 같은 자리를 맴돌아야 했습니다.

 

‘없는’ 그러니까 부재에 관한 심보선의 이야기는 “기쁨과 슬픔 사이의 빈 공간에/딱 들어맞는 단어 하나”를 만들겠노라는 그의 선언처럼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나이가 채워지며 이별 앞에 내 모습이 참 많이도 변했음을 느낍니다. 눈물을 씨앗 채 삼킨 듯 오열했던 젊은 날들의 이별이 덤덤히 밥을 삼키고, 여전히 커피를 마시는 지금의 이별보다 더 슬펐을까요. 사랑이 실망이라는 이름을 달고 미움을 채웠던 어린 날의 이별이 이해의 끄덕거림으로 안쓰러운 마음을 도닥이는 지금의 이별보다 짧았던 것은 굶주림도, 달갑지 않음도 모두 눈물이라는 도구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갓난아이와 닮아 있기 때문이겠지요. 나는 이제 울지 않는 눈물을 배웠습니다.

 

 

  이 별의 일

 

너와의 이별은 도무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

그다음에 이별하자.

어디쯤 왔는가, 멸망이여.

 

 

  '나'라는 말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

.

.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는 음각일 때가 더 좋습니다.

사라질 운명을 감수하고 쓰인 그 말을

 

 

  이상하게 말하기

 

내 그림자가 조금씩 흐려지는 것을 바라본다

내 그림자가 네 그림자보다 더 진했었지

라고 말한다면 서글프겠지

 

 

  음력

 

내가 아주 슬펐을 때

나는 발아래서 잿빛 자갈을 발견했었지.

그것은 음력으로

인간의 아물지 않은 흉터이고

그때 그대의 사랑스러운 이름은

지상에서 이미 반쯤 지워진 채

화석 같은 인광으로 푸르게 빛나고 있었던 거야.

 

 

  변신의 시간

 

아무 꺼리낌 없이 인생은 시작됐다

어린 나뭇가지들이

계절과 계절 사이에서 죽어갈 때

 

 

  그라나다

 

발에는 헐거운 바람을 신고

등에는 단단한 태도를 걸치고

여행을 떠난다

 

 

  체념

 

새벽녘 공기의 성긴 그물 아래에서 깨어나면

지난밤 꿈이 운 좋게 포획한 한 마리 물고기인 양

가슴속에서 심장이 퍼덕거린다

나는 수평선을 바라본다

세상에서 가장 기다란 사물인 그것을

어떤 요구와도 무관한 기다림 끝에

나는 문득 깨닫는다

시계는 시간이 거짓말이라는 증거인 것을

 

 

  Stephen Haggard의 죽음

 

여행이란 가장 온순한 형태의 투쟁이다, 라고

그는 마른 강아지풀로 바람 한 방울을 찍어 어둠 위에 기록한다.

 

 

그의 시를 여러 번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좋아서 한 번, 알 수 없으니 한 번 더 그렇게 눈이 아니라 출·퇴근 길에는 옹알이를 하듯이, 꿈자리 전에는 발음 하나하나 신경을 써서 그렇게 시를 읽었습니다. 대부분의 시는 결국 그렇게 알 수 없었지만 역시나 시는 눈이 아니라 입으로 읽어야겠습니다. 보여지는 시보다 읽혀지는 시가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나는 그 때문에 시를 읽습니다. 그리움이나 애뜻함 따위의 감정이 아니라 우리 시간에 대한 타당한 보상으로.

 

 

 

하다.

copyright ⓒ 2012 by. Yu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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