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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평점 :
두근두근 내 인생│김애란│창비│2011.06.20
두근두근 내 인생? 파스텔톤 표지에 덮혀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철썩 믿어 버렸어요. 핑크색 팡팡, 날리는 알콩, 달콤한 로맨스이리라고. 그래서 한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켜도 모른 척 하였는데, 생각보다 제법 굳건히 자리를 지켜 내길래 '그래, 좀 가볍게 읽어내자' 하고 집어 들었습니다. 김애란? 낯익은 이름에 기억을 살피니 얼마 전 읽었던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대상 수장자였네요. 긴 장마에 모든 것을 잃고 혼자가 되었던 소년의 이야기 <물속 골리앗>. 그녀가 말했죠. p.51 그리고 문학이 할 수 있는 좋은 일 중 하나는 타인의 얼굴에 표정과 온도를 입혀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니 '희망'이란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용기 있는 사람들이 발명해내는 것인지도 모르리라. 농밀했던 문장들에 감탄을 거듭하며 읽었던(정말 활자의 힘을 느끼게하는 작가였어요), 절망의 순간에 혼자 남겨진 소년은 먹구름 사이 한줄기의 여린 빛처럼, 그렇게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위태로움 가운데에서도 슬픔의 바닥으로 꼬꾸라지거나 눈물로 얼룩져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의 힘이 아닐까 합니다. 슬퍼도 울지 않도록.
p.50
"네가 뭘 해야 좋을지 나도 모르지만, 네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좀 알지."
"그게 뭔데요?"
"미안해하지 않는 거야."
"왜요?"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네"
"흔치 않은 일이니까……"
"……"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
"그러니까 너는,"
"네, 아빠."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렴."
"……"
"그리고 마음이 아플 땐 반드시 아이처럼 울어라."
<두근두근 내 인생>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아들의 이야기예요. 17살에 부모가 되고 그 아이는 이제 열일곱살이 되었지만 열여덟이 될지, 열아홉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조로증'에 걸려 10배의 속도로 살고 있는 아이 '아름'이는 머리가 빠지고, 시력을 잃어가며, 심장은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너무 일찍 부모가 되어 누리지 못한 부모에게도 희귀병을 앓는 아름에게도 청춘은 한 발 물러서 쉽게 다가오지 않고 그대로 시들어 버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청춘(靑春), 그 단어만으로도 두근두근 설레임이 가득찬 그 순간을 아름을 놓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울지 않습니다.
빠르게 자라버린 몸보다 어쩌면 훨씬 빠른 속도로 마음이 먼저 자라 버린 아름은 희귀질병을 앓게 되어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완벽한 존재가 완벽하지 않은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겠냐고 심드렁하게 대답합니다. 그렇게 담담해지기까지, 세상에서 제일 웃긴 아들이 되고 싶다고 말하기까지의 아름은 도대체 얼마큼의 마음을 키워버린 것일까요? p.79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나는 그 찰나의 햇살이 내게서 급히 떠나가지 않도록 다급하게 자판을 두드렸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그래서 아름은 글을 씁니다. 부모의 청춘, 그 푸르름을 기억하기 위해서. p.44 모든 생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터져나오는' 거란 걸 어머니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게 터져 나온 생명, 아름은 바람이 불고 계절이 바뀌듯이 흐름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p.172
"그애들, 앞으로도 그러고 살겠죠? 거절당하고 실망하고, 수치를 느끼고, 그러면서 또 이것저것을 해보고."
"아마 그렇겠지?"
"그 느낌이 정말 궁금했어요. 어, 그러니까……저는……뭔가 실패할 기회조차 없었거든요."
"……"
"실패해보고 싶었어요. 실망하고, 그러고, 나도 그렇게 크게 울어보고 싶었어요."
p.208
나는 조금 더 성급해지고 경솔해져도 좋을 것 같았다. 특히 상대가 장씨 할아버지 같은 분이라면 더할나위없이 좋았다. 그게 정답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대답 속엔 누군가의 삶이 배어 있게 마련이고, 단지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당신들의 시간을 조금 나눠갖는 기분이었다.
단단하게 여문 김애란의 글은 한 순간의 쉼표도 없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재미있습니다. (아름이에게 조금 미안할 정도로요) 지난하여 으스대지 않고, 엉성하여 놓지치 않도록 살뜰이 살펴 갑니다. 하지만 그 풍요로움에 비하여 나는 비루한 끄적임조차 버겁습니다. 어떤 무용(無用)한 말조차 쉬이 허락치 않습니다. 아마도 작가에게 적잖히 주눅이 들어버린 탓이테지요. p.192 이곳 병원에도 가을이 왔다. 하늘을 양쪽에서 잡아당긴 듯 팽팽해진 공기가 가슴팍을 바쁘게 들락거렸다. 신의 입김이란 게 있다면 딱 이정도 온도이지 않을까 싶을 만큼 차고 맑은 기운이었다. 어쩜 이렇게.(감탄) 아주 잠깐이라도 그녀의 사전을 훔쳐보고 싶은 마음뿐이예요. 어떻게 이렇게 써내릴 수 있을까요? 감탄을 거듭해도 내 모양새는 나아질 줄 모릅니다. (거듭 실망)
지난 주 이사를 하며 책을 꾸리는데 제법 짐이 됩니다. 사실 한 번 읽으며 또 들춰보지 않는 책들이 대부분인데 왜 그렇게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지, 그리고 나는 왜 시간에 쫓기면서도 책을 읽고 그 시간을 쪼개여 볼품도 없는 글자를 끼워 맞추느라 끙끙대며 진땀을 빼고 있는건지 도대체 왜? 라는 먹먹한 물음표가 따라 붙습니다. 서평단 활동도 해보고, 이렇게 북로거로 지원을 받기에 내 글자들은 정말 조잡스럽기까지 하여 부끄럽다는 모양조차 죄송스러울 만큼 똑같은 글을 읽어내도 읽어냄이 다른 이들을 보면서 나는 정말 무얼하고 있나, 내게 끊임없이 묻고 물었습니다. p.260 어른이 되는 시간이란 게 결국 실망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글이란 게 그걸 꼭 안아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보다 '잘' 실망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무엇인지도 모르겠어. 아마도 나는 글을 통해 '잘' 실망하는 법을 배우며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제 갓 서른을 넘긴 그녀는 도대체 어떠한 글들로 그렇게 누군가를 도닥일만큼 어른이 되었을까요) 파릇파릇한 청춘, 누구보다 녹푸른 청춘을 가진 아름이를 통해 나도 한 뼘 자라난 마음입니다. 그리고 곧, 그녀의 다른 이야기들에게 달려갈 것 같습니다. 매력적인 이야기꾼, 김애란을 만나서 참 반가웠노라며.
소녀, 어른이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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