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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세계명작산책 3 - 성장과 눈뜸 ㅣ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3
이문열 엮음 / 살림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요즘 올인해서 읽고 있는 것들이 단편집들이다보니 - 개인적으로 단편들을 사랑한다. 농축되어 밀도가 높고 할 말은 다 하면서 주제도 오롯이 드러나니 시간 여유가 없을 때는 참으로 적당하다. - 마치 엄청나게 책이라도 읽어대는 인간 마냥 포스팅이 잦다. 허세로 보일까 싶어 약간 면구스럽다.
이문열 세계명작전집에서 제 3권 성장과 눈뜸에는 유난히 좋은 단편이 많다. 아무래도 어떤 작가든 성장을 피할 수 없기에 한번씩은 다 썼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싱클레어 루이스란 작가는 처음 접하는 작가였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이문열의 해설(?)을 읽을 때까지도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여하튼^^;; 여러가지로 주절댈거리가 많아 결국 수다스런 손을 놀린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작부터 범상치 않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읽었다.
양버들은 그 습성이 천하고 지저분한 나무다. 그 흰털이 바람에 흩어지면 집집 잔디밭에 온통 희게 깔려 동네 사람들의 의를 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 나무는 큼직하여 좋은 휴식처가 되고 의지가 된다. 높이 퍼진 잎사귀에 햇빛이 반짝이고 잎사귀 사이에서 우는 매미 소리는 먼지 많은 시내의 여름 오후를 상쾌하게 해준다. 평야에 우뚝우뚝 솟은 산과 옐로우스톤 강 사이에서는 보리밭에서 사재발쑥 벌판 일대에 걸쳐 땀 흘려 일하는 농사꾼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마련해 주는 것이 이 양버들이다.
크누트 액슬브롯은 예순다섯 살의 은퇴한(?) 농사꾼이다.
스칸디나비아에서 이민해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어릴 적 유명한 학자가 되어 여러 나라 말을 유창하게 하고 역사에 능통하고 지혜로운 책들 속의 아름다운 세계를 즐기길 원했지만 열여덟 살의 나이에 장가를 가는 바람에 가난과 가족이라는 그물에 얽혀 오금을 못펴게 되었다. 하루에 열여덟 시간씩 일하며 그래도 틈날 때마다 독서를 낙으로 삼고 자식농사 지으면서 그렇게 열심한 생활을 하다보니 어느덧 예순 셋.
딸 자식 내외에서 월 사백불의 생활비를 받는대신 농장을 물려주고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던 크누트는 어느 날 평생 소원이던 대학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이것저것 알아봐(그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을테니 얼매나 힘들었을꼬~) 하루에 열여덟시간씩 일하던 그 노력을 대학입시공부에 바친다. 그래서 영광스레 예일대학입학허가를 받기에 이른다.
그래, 꿈에 그리던 상아탑, 예일대학에 가 기숙사를 배정받고 부푼 대학생활을 시작했는데... 룸메이트란 놈은 어설픈 잘난척을 하며 크누트 속을 박박 긁고, 그누트가 꿈에 그리던 담장 위에 앉아 열띤 토론을 벌이는 학생도 없으며, 동료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교수들은 교수들대로 크누트를 슬슬 피하기만 한다. 꿈을 이룬 것은 좋았으나, 꿈꾸던 곳에는 꿈이 없었던 것. 그래도 버텨나가며 대학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
산책길에 우연히 길버트 워시번을 만났다. 속물 풍류객. 룸메이트는 길버트는 자신의 반의 수치라며 열심인 데가 없고 성적 올릴 생각도 하지 않고 남하고 상종도 않고. 듣자니 문학을 한다는데 문인을 쫒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상종할 인간이 아니라며 평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길버트가 크누트에게 진심어린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것이다. 몇 마디 말을 나눠보니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너무나 잘 이해하는 아주 멋진 상대. 크누트는 그날 길버트와 어울리며 깊은 대화를 나누고 이사예로 가서 음악을 듣는다. 그곳에서 윌리암 모리스 작품에서나 나오는 꿈처럼 아름다운 세계를 만나 황홀에 젖고, 돌아오는 길에는 차비가 모자라 메리든에서 내려 시월의 달빛 어린 신작로를 걸으며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만끽한다. 오늘 밤은 그야말로 우화등선한 그들. 방랑시인. 종자를 거느린 음유시인이 된 것이다. 그렇게 학교에 도착해서도 헤어지기가 아쉬워 길버트는 기숙사에서 돈을 가지고 나와 먹을 것을 사러 마을을 밤새 돌아다니고 비스킷 몇 통과 고기만두 등을 사와 길버트의 방에서 날이 샐 때까지 성찬을 즐기며 위대한 인물, 그리고 고매한 이상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길버트는 스티븐슨과 아나톨 프랑스의 작품을 몇 줄씩 낭독하더니 마침내 자작시를 낭독하기에 이른다. 그 시가 잘 쓰여졌는가 아닌가는 크누트에게 문제가 아닌. 실제로 시를 쓰는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이 크누트에게는 기적이었다!
이후부터는 발췌다.
그러나 기숙사를 나와 보니 밖은 훤했다. 시간은 아침 여섯시 반. 붉은 벽돌담에 조용한 아침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이제부터 자주 그 방을 찾아가자. 벗이 하나 생겼다."
크누트는 이렇게 말했다. 길버트가 굳이 갖고 가라고 들려준 뮈세 시집을 그는 손에 꼭 쥐었다.
신학서동으로 몇 발자국 걸음을 내디디며 크누트는 피로를 느꼈다. 이렇게 날이 밝고 보니 간밤의 일은 모두 꿈같기만 했다.
기숙사의 자기 방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늙은이와 젊은이, 이것은 오래 결합되지 못하는 거라." 층계 올라가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청년을 다시 만나도 이젠 그 청년이 내게 흥미를 느끼지 않을걸. 내가 하려는 말은 다 들었을 테니까." 그리고 자기 방문을 열면서 또 한마디 했다. "내가 대학에 온 목적은 바로 이거다. 이 하룻밤을 위해 나는 대학에 왔다. 이 기분을 잡치기 전에 어서 떠나야지."
그는 길버트에게 편지 한 줄을 적어 놓고 가방에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공기가 탁한 방에서 쿨쿨 코는 고는 레이 그리블을 그는 깨우지도 않았다.
그날 오후 다섯 시 서행 낮 열차에 앉은 어떤 노인이 혼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끝없는 만족감이 어리어 있었다. 그리고 그 손에는 조그만 프랑스 책이 한 권 쥐어져 있었다.
얼마나 유쾌한 기분으로 책을 덮었는지.
이 단편을 읽고 나서 문득 공자의 유명한 말이 떠올랐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낙지자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그동안은 이 말을 그저 말 그대로 생각했다. 즉 좋아하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낫고, 즐기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보다 낫다고. 그런데 '늙은 소년 액슬브롯'을 읽고나니 퍼뜩 깨달음이 오는 게 아닌가.
아 이 말은 낫다(better 혹은 superior)의 의미가 아니라 성장의 단계, 포함의 의미로구나.
즉, 아는 게 많아지면 좋아하게 되고 그래서 많이 좋아하게 되면 즐길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보통은 저 말을 듣고 그래 '재밌는 게 최고다.'라고 해석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데, 결국 즐길 수 있다는 것은, 그저 재미있는 것을 즐기는 것(사실 이건 당연한 게 아닌가)이 아닌 어떠한 것에서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단계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렇게 즐기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것'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충분히 갖춰야 하고 '그것'을 진심으로 좋아해야 가능해지는, 결국 성장의 가장 윗 단계란 의미말이다.
그래서, 크누트는 바로 '樂之者'의 레벨에 이른, 지금까지 삶의 경력과 연륜, 그리고 배움의 노력으로 인한 지식의 축적, 좋아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모두 갖춘, 그래서 원하고 바라던 그것을 얻었을 때 조금의 미련도 없이 떨치고 분연하게 나설 수 있었지 않았을까는 생각이 들었다. 이 얼마나 현명한가. 떠날 때를 아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