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 오후에 좀 과다하게 섭취한 카페인 탓인지 잘 자다가;;; 새벽 세 시에 일어났다. 잠도 안오고 새벽에 달리 할 일도 없어서 이래저래 미뤄놓았던 책 감상이나 채워넣는 중.
알랭 드 보통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할까'로 유명해진 작가다. (비싼 양장본에 여백의 미를 살린 편집으로 새로 나오기 전 구버전을 가지고 있어 더욱 행복;;;) 소설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원제인 Essays in love를 생각해보면 확실히 에세이에 더 가깝다. 소위 요새 유행하는 크로스오버라고 할까. 소설이면서 동시에 에세이이기도 한. 그러나 이후에 나온 후속작들은 전작만큼의 반응을 얻지 못하다가 얼마 전에 나온 이 책으로 다시 슬금슬금 이름이 들리는 것을 보니 괜찮은가 싶어서(여행의 기술을 한 권 더 준다는 말에 혹한 것도 있고) 냉큼 구입했다. 개인적으로 건축에 대한 관심이 드높은 것도 이유가 되고.

재미난 것은 이 글의 정체성이다. 제목에 건축이 들어갔고 소재에도 건축물이 이용되니 '이 글이 건축에 관한 글인가?'라고 묻는다면... 고개가 절로 갸웃 기울어진다. 아주 드물게 어려운 건축용어가 나오지만 그저 그뿐이다. 고전주의 양식이라던가 공학의 원칙이 대두된 모더니즘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그렇다고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건축양식의 변화과정을 소개한 건축역사서 또한 아니다.
이 작가 소개면 빠지지 않는 문학과 철학 등 인문학 분야에서 박학다식한 작가답게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집을 시작으로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생각을 전개해나간다. 이 글은 분명 에세이다(매우 높은 레벨의 혼자놀기와 공부하기라고나 할까;;). 방대한 문헌조사를 통해 '건축'을 공부한 후 그것을 소재로 아름다움에 관한 자신만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쳐나가는 그야말로 고차원적인 사고놀이의 궁극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나불나불 떠들어 자신이 가진 지식을 자랑하는 차원이 아닌 제대로 씹고 삼켜 작가 안에서 충분히 소화해 자신만의 생각을 자신만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한참 이해력이 떨어지는 독자지만 어설픈 내가 볼 때도 알랭 드 보통은 '생각하기', '생각을 성장시켜나가기'란 어떤 것인가를 차근차근 보여주는 진정한 에세이 작가다. 순간적인 감상과 얄팍한 지식을 그럴듯하게 꾸며내 세치 혀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레벨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를 꾸미는 박학다식한이란 수식어구는 그저 그가 말하고 싶은 바를 가능한 명확하고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지 전부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작가다. 독자가 에세이를 통해 얻고자 하는 즐거움을 기대보다 더 많이 줄 수 있는 작가라면 지나친 찬사일까.
앗! 어쩌다보니 책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작가에 대한 찬사로 늘어졌는데... 이런 작가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과 이 책을 즐기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믿으므로 굳이 사설이 길었다는 말은 하지 않으련다.
'행복을 위한 건축'은 '가로스가 늘어선 거리의 한 테라스하우스'란 문장으로 시작한다. 작가는 평범한 집에 대한 묘사로 말을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가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집에 대한 이미지로(한때 텔레비전에서 해피하우스라는 집을 리모델링해주던 프로그램이 빅 히트를 쳤던 것을 떠올려보자. 그때 바뀐 집을 바라보며 정말 행복한 미소를 짓던 그 사람들, 그리고 우리들을 말이다) 말을 이끌며 꾸미지 않은 다정함으로 다가온다. 딱딱한 용어를 그가 구사하는 편안하고 감성적인 어휘로 감싸 안아 살짝 긴장한 독자들을 부드럽게 안내한다.

집은 물리적일 뿐 아니라 심리적인 성소가 되었다. 집은 정체성의 수호자였다. 오랜세월에 걸쳐 그 소유자들은 밖으로 떠돌던 시절을 끝내고 돌아와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했다. 일층의 판석들은 노령과 나이든 우아함을 이야기한다. 반대로 부엌 진열장의 규칙성은 위협적인 느낌은 주지 않는 질서와 규율의 모법이다. 커다란 미나리아재비가 인쇄된 매끈한 탁자보가 덮인 식탁은 그 옆의 엄격해 보이는 콘크리트 벽 때문에 더 장난스러워 보인다. 층계를 따라 걸려 있는, 달걀과 레몬을 그린 작은 정물화는 일상적인 것들의 복잡함과 아름다움으로 관심을 유도한다. 창턱 유리 항아리에 꽂힌 수레국화는 우울의 흡인력에 저항하도록 힘을 보태준다. 위층의 텅빈 좁은 방은 회복을 꿈꾸는 생각들이 부화하는 공간이다. 천장으 크레인과 굴뚝 위를 빠르게 움직이는 초조한 구름들을 향해 열려있다.
이 집이 그 거주자들의 수많은 병을 치료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 방들은 행복의 증거를 보여준다. 이 행복에 건축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기여했다.
이성적인 단어와 감성적인 단어가 어우러져있다. 그의 에세이는 처음에서 마지막까지 이런 모습을 유지한다. '건축'과 '행복'이라는 단어가 함께 있는 이 책의 제목처럼 말이다.

이쯤에서 이 책의 차례를 살펴보자(모든 책이 그러하지만 논문이나 에세이의 경우 목차는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좋은 작가는 절대 허투로 목차를 쓰지 않는다:).

1. 행복을 위한 건축
2. 어떤 스타일로 지을 것인가?
3. 말하는 건축
4. 집, 기억과 이상의 저장소
5. 건물의 미덕
6. 들의 미래

행복이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명사와 건축이라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단어를 결합하는 것으로 포문을 연 알랭드 보통은 다음 단계에서는 현존하는 건축물들을 되짚으며 그것이 가진 특징과 속성을 찬찬히 살펴 설명한다. 그리고 그런 인포들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화두와 결합시켜 우리에게 새로운 시선을 제공해준다.
무려 건축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는 사실이다.

스토크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첫째,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어떤 대상에서 인간 또는 동물을 연상한다는 것이다. <중략> 우리의 내적인 눈은 구상적 회화의 표현 능력과 추상적으로 배열된 돌들의 표현 능력을 다르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우리가 추상적인 조각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탁자와 기둥을 좋아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구상적인 작품을 존중하는 이유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양쪽 어느 장르이든 인간과 동물의 속성 가운데 가장 매혹적이고 의미있는 것을 환기시켜줄 때 그 작품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일단 보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우리 주위의 가구와 집에서 살이있는 형태를 암시하는 것들을 부족함 없이 찾을 수 있다. 주전자에는 펭귄이 있으며, 탕관에는 건장하고 자존심 강한 인물이 있으며, 책상에는 우아한 사슴이 있으며, 식탁에는 황소가 있다.
그리하여 챕터 3까지 읽고 잠시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모든 사물이 내게 말을 거는 경험을 가지게 된다. 늘 무심히 스쳐지나간 네모난 창문과 거리의 간판들, 자동차의 백미러의 모양 등이 어떤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유쾌하지많은 안다. 어떤 것은 보기만 해도 즐겁고 어떤 것은 보는 순간 절로 이맛살을 찌뿌리게 만든다. 그러면서 우리의 눈은 자연스럽과 미美와 추醜를 구별하게 된다. 아주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쯤이 되면 책을 읽는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짓게된다. 작가가 무엇을 위해 행복과 건축을 끌어왔는지가 짐작이 되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표제로 드러난 행복과 건축 이외에 필연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책읽기에 동반된다. 그리고 챕터 4 이후로는 이전에는 없었던 소제목들이 나타난다.

4. 집, 기억과 이상의 저장소
   - 기억
   - 이상
   - 이상이 변하는 이유
5. 건물의 미덕
   - 질서
   - 균형
   - 우아
   - 일치
   - 자기인식

그리고 보다 직접적으로 '나'는 건축에 개입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 환경이 우리가 존중하는 분위기와 관념을 구현하고,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주기를 은근히 기대한다. 건물이 일종의 심리적 틀처럼 우리를 지탱하여,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유지해주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우리 내부에 필요한 것ㅡ그러나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잊을 위험이 있는 것ㅡ을 표현해주는 물질적 형태들을 주위에 배치한다. 벽지, 벤치, 그림, 거리가 우리의 진정한 자아의 실종을 막아주기를 기대한다.
어떤 장소의 전망이 우리의 전망과 부합되고 또 그것을 정당화해준다면, 우리는 그곳을 '집'이라는 말로 부르곤 한다.

건축과 내가 상호작용을 시작하는 것이다. 집은 그래서 단순히 바람과 비를 피하게 해주는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목적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고 나와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 받게 된다. 나의 과거가 현재의 나를 만든 것처럼 건축 역시 인간과 사회가 가진 기억의 산물이며, 나의 이상이 나의 미래이듯 건축도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이상에 따라 변하고 새로운 이상을 제공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는 영혼처럼 '아름다움'이 붙어있다. 비록 취향에 따라 혹은 시대에 따라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다르다하더라도.
그리하여 챕터 5에 이르면 드디어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마음껏 펼친다. 나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하는 건축물과의 관계의 가운데에는 '아름다움'이 있음을 강조하며. '아름다움'에 대하여. 어떤 도시가 어떤 건축물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여기며 왜 그것이 아름다운 것인가에 대해. 더욱 나아가 앞에서 말한 모든 요소들, 환경들과 더불어 어떻게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그리고 챕터 5의 마지막 소제목 '자기인식'은 그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그것은 다른 말로 바꾸자면 행복이란 단어로 대표되는 사람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건축이며, 그것이 이루어질 때 아름다움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미학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요구를 이해하고, 이렇게 이해한 것을 건축 계획이라는 명료한 언어로 바꾸어야 하는 어려움을 고려할 때 그렇게 잊은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방에 조명이 적당하고 층계를 찾아다니는 것도 편할 때 그런 전환을 알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실제로 행복에 관한 이런 직관적인 느낌을 그 이유에 대한 논리적인 이해로 바꾸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설계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안다고 믿었던 것을 씻어내고 끈질기게 우리의 조건반사 뒤에 감추어진 기제를 쪼개보고, 불을 끄거나 수도를 트는 것 같은 일상적인 행동의 신비와 아연할 정도의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건물들이 이런 자기인식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슬프게 증언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건축가들이 자신의 요구에 대한 무의식적 이해를 남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믿을만한 지침으로 바꾸어내지 못한 방이나 도시가 많은 것도 놀랄 일은 아닌 것이다.
<중략>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결국은 공감의 실패라는 별로 신비할 것 없는 이유때문이다. 사람의 변덕스러운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건축가들 탓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캐물으며 미로와 같은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우리가 이러저러하다고 단정하는 단순한 관점의 유혹에 넘어가버렸다.

그러나 챕터 5까지는 거침없이 이야기를 풀어놓던 작가는 챕터 6에 와서는 두리뭉실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만다. 솔직히 말해 좀 뜬금없다.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이 책의 핵심은 챕터 5였고 챕터 6이 굳이 필요했을까..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다.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260페이지에 걸쳐 장장 늘어놓더니 결국 건축물이 세워지는 '들' 자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넘어가기에는 아무래도 좀 걸렸는지 언급은 하는데... 책의 나머지와 조화를 이루지도 못하고 이해도 상당히 부족하다.
건축이란 결국 인간이 만들어놓은 인공물이니까 들의 미래는 (그가 볼때) 건축물로 채워질 테니까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도록 자연의 미를 끌어들이고 싶었던 것은 이해는 하는데... 사족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자연과의 조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존중하고 공존할 줄 알았던 아시아와는 달리 서양 역사에서의 건축은 주변 환경과의 조화는 생각했을지언정 자연에 대해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성향을 숨기지 못했으니까, 그걸 인식한 작가의 지레찔려 자백하기라고나 할까. 나츠메 소세키의 일화를 빌어 언급한 마지막 챕터는 건축의 미래에 있어서 자연을 포함해야할 것 같다는 (챕터 5까지의 자세하고도 꼼꼼한 전개와 비교해) 막연한 생각내지 제언 정도이다. 만일 그가 서양 뿐 아니라 동양의 건축까지 공부했더라면 이 챕터의 비중이 상당히 올라갔으리라는 과감한 가정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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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바흐 : 호프만 이야기
TDK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오펜바흐 : 호프만 이야기 | 원제 Offenvach : Les Contes d´Hoffmann
Bryn Terfel | TDK

Disc - 2 장
상영시간 - 173분
자막 -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화면비율 - 16:9
오디오 - DTS & DD 5.1 & PCM Stereo, NTSC
지역코드 - 0


유럽 오페라 연출계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로버트 카르센의 경이로운 무대를 담은 바스티유 극장의 2002년 10월 실황에는 쓰리 테너급의 명가수로 인정받는 실력파 닐 쉬코프(호프만)를 비롯하여 데지레 랑카토레(올랭피아), 루스 앤 스웬슨(안토니아), 베아트리스 우리아-몽종(줄리에타), 수잔 멘처(뮤즈, 니클라우스) 등 세계적 가수들이 상대역으로 출연한다. 여기에 브린 터펠까지 악마 역으로 가세했다. 특히 프랑스가 자랑하는 메조소프라노 베아트리스 우리아-몽종의 고혹적 카리스마와 대담한 연기를 만끽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영상물이다.

오페라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좀 애매하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것과 오페라를 좋아하는 것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 챙겨서 보느냐고 묻는다면, 챙겨서 보고 싶긴 한데, 까다롭다 축에 들어간다. 다른 클래식 카데고리에 비해 오페라에 대해서는 많이 까다롭게 된다.
가창력은 필수에 무대, 연기, 의상 등 클래식의 종합예술인지라 전체적인 완성도에 따라서 이게 참 오페라를 좋아할 수도 있고, 지겹게 느낄 수도 있다. 특히, 프리마돈나 하나 정도 대표하는 가수만 있는 경우... 굉장히 실망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오페라의 질은, 정말 그 오페라단의 수준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물론 주인공인 소프라노와 테너의 유명세(가창력)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떠받쳐주는 나머지 가수들의 실력도 무지하게 중요하고 현대에 와서는 연출가의 능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솔직히 고백컨대, 그래서 난 (스스로도 매우 재수없다는 것을 알지만) 국내 오페라단의 공연은 보러 가지 않는다ㅠㅜ(이따금 실력 체크를 위해 몇 년에 한번씩은 가지만... 늘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게 어찌 오페라단에만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 역사와 그 문화를 향유하는 관객의 스펙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현실. 꼭 오페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공연문화 전반에 걸쳐 길게 내다보는 안목이 깊지 못함은 참으로 아쉽고 아쉽다.) 대신 이탈리아, 프랑스 오페라단의 내한 공연의 경우, 거금을 주고라도 반드시 가는 편이고, 후우, 공연 다녀온 후에도 정말 그 비싼 표 값이 아깝다는 생각을 안하니, 오페라의 경우 만큼은 어쩔 수 없이 사대주의다. ㅠㅜ
하지만 내한 공연은 자주 없고(오페라는 무대장치만 해도 돈이 많이 들어서 그런 듯) 돈도 돈이고;;; 그래서 오페라의 경우는 DVD를 많이 즐기는 편이다. 특히 TDK사에서 출시하는 오페라는 정말 훌륭하다.

'호프만의 이야기'도 여러 레이블에서 나왔는데 고민하다 TDK를 선택, 정말 재밌게 봤다. ㅠㅜ
위의 선전이 아니더라도, 호프만 역의 닐 쉬코프의 가창력과 연기력은 정말 환상적이었고, 호프만을 끝없이 괴롭히는 브린 터펠의 그 섬세한 연기와 바닥을 쫙 까는 근사한 바리톤은... 찌릿찌릿. 뮤즈와 니클라우스를 연기한 수잔 멘처의 메조는 우아하면서도 엄격한 게 상당한 호소력을 자랑했다. 공연 후반부 줄리에타 역인 우리아-몽종의 열연은 세포까지 건드리는 짜릿함과 매혹으로 가득해서... 후우 노래 하나가 끝날 때마다 막 혼자 박수치고 열광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줄리에타와 니클라우스의 이중창(보통 호프만의 뱃노래라고 일컫는)은... 기대했던 것 이상의 만족감을 주었다.
이렇게 가수들 하나하나의 능력도 좋았지만,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 그리고 현대적이면서도 원작의 분위기를 훼손하지 않는 무대는 두 시간이 넘는 공연에 그대로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음악에 취하고 이야기에 빠져서 정말 제대로 즐겼다. 완성도에 어찌나 감탄했는지 1부를 보고 나서 나도 모르게 누가 연출했나 체크까지 들어갔다.(로버트 카르센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유럽 오페라 연출에서 뜨는 태양이란다;;)

하나 재밌는 것은, 오펜바흐의 '호프만 이야기'는 갈라로도, 공연으로도 종종 즐기던 작품이었는데 정작 원작에 대해서는 궁금하지도 않았고 알 생각도 안했다는 점. 그런데 공연실황 디비디를 다 보고 나서 한 번 더 보고 서울로 돌아올 때 펴든 책이 독일작가 E.T.A.호프만의 '모래 사나이'. 읽다가 '에에? 어째 호프만 이야기랑 비슷하잖아?'는 생각이 들어 찾아봤더니 오펜바흐의 이 오페라, 좋아하는 발레작품 '코펠리아'의 원작이 바로 '모래사나이'란다;;; 참내 인연이 보통은 아닌게, 오페라를 다 보고 난 후에 펴든 책이 그 원작이라니. 때로는 이런 기막힌 우연이 취미생활을 더욱 발랄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작가 호프만은 독일에서는 그닥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오히려 프랑스에게 인기를 끌었단다. 하하, 그러니 고민하다 파리 국립 오페라단 작품을 택한 것도, 우연이지만 제법 괜찮은 선택이었던 듯.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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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세계명작산책 3 - 성장과 눈뜸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3
이문열 엮음 / 살림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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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올인해서 읽고 있는 것들이 단편집들이다보니 - 개인적으로 단편들을 사랑한다. 농축되어 밀도가 높고 할 말은 다 하면서 주제도 오롯이 드러나니 시간 여유가 없을 때는 참으로 적당하다. - 마치 엄청나게 책이라도 읽어대는 인간 마냥 포스팅이 잦다. 허세로 보일까 싶어 약간 면구스럽다.
이문열 세계명작전집에서 제 3권 성장과 눈뜸에는 유난히 좋은 단편이 많다. 아무래도 어떤 작가든 성장을 피할 수 없기에 한번씩은 다 썼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싱클레어 루이스1란 작가는 처음 접하는 작가였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이문열의 해설(?)을 읽을 때까지도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여하튼^^;; 여러가지로 주절댈거리가 많아 결국 수다스런 손을 놀린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작부터 범상치 않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읽었다.


양버들은 그 습성이 천하고 지저분한 나무다. 그 흰털이 바람에 흩어지면 집집 잔디밭에 온통 희게 깔려 동네 사람들의 의를 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 나무는 큼직하여 좋은 휴식처가 되고 의지가 된다. 높이 퍼진 잎사귀에 햇빛이 반짝이고 잎사귀 사이에서 우는 매미 소리는 먼지 많은 시내의 여름 오후를 상쾌하게 해준다. 평야에 우뚝우뚝 솟은 산과 옐로우스톤 강 사이에서는 보리밭에서 사재발쑥 벌판 일대에 걸쳐 땀 흘려 일하는 농사꾼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마련해 주는 것이 이 양버들이다.
크누트 액슬브롯은 예순다섯 살의 은퇴한(?) 농사꾼이다.
스칸디나비아에서 이민해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어릴 적 유명한 학자가 되어 여러 나라 말을 유창하게 하고 역사에 능통하고 지혜로운 책들 속의 아름다운 세계를 즐기길 원했지만 열여덟 살의 나이에 장가를 가는 바람에 가난과 가족이라는 그물에 얽혀 오금을 못펴게 되었다. 하루에 열여덟 시간씩 일하며 그래도 틈날 때마다 독서를 낙으로 삼고 자식농사 지으면서 그렇게 열심한 생활을 하다보니 어느덧 예순 셋.
딸 자식 내외에서 월 사백불의 생활비를 받는대신 농장을 물려주고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던 크누트는 어느 날 평생 소원이던 대학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이것저것 알아봐(그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을테니 얼매나 힘들었을꼬~) 하루에 열여덟시간씩 일하던 그 노력을 대학입시공부에 바친다. 그래서 영광스레 예일대학입학허가를 받기에 이른다.
그래, 꿈에 그리던 상아탑, 예일대학에 가 기숙사를 배정받고 부푼 대학생활을 시작했는데... 룸메이트란 놈은 어설픈 잘난척을 하며 크누트 속을 박박 긁고, 그누트가 꿈에 그리던 담장 위에 앉아 열띤 토론을 벌이는 학생도 없으며, 동료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교수들은 교수들대로 크누트를 슬슬 피하기만 한다. 꿈을 이룬 것은 좋았으나, 꿈꾸던 곳에는 꿈이 없었던 것. 그래도 버텨나가며 대학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
산책길에 우연히 길버트 워시번을 만났다. 속물 풍류객. 룸메이트는 길버트는 자신의 반의 수치라며 열심인 데가 없고 성적 올릴 생각도 하지 않고 남하고 상종도 않고. 듣자니 문학을 한다는데 문인을 쫒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상종할 인간이 아니라며 평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길버트가 크누트에게 진심어린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것이다. 몇 마디 말을 나눠보니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너무나 잘 이해하는 아주 멋진 상대. 크누트는 그날 길버트와 어울리며 깊은 대화를 나누고 이사예로 가서 음악을 듣는다. 그곳에서 윌리암 모리스 작품에서나 나오는 꿈처럼 아름다운 세계를 만나 황홀에 젖고, 돌아오는 길에는 차비가 모자라 메리든에서 내려 시월의 달빛 어린 신작로를 걸으며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만끽한다. 오늘 밤은 그야말로 우화등선한 그들. 방랑시인. 종자를 거느린 음유시인이 된 것이다. 그렇게 학교에 도착해서도 헤어지기가 아쉬워 길버트는 기숙사에서 돈을 가지고 나와 먹을 것을 사러 마을을 밤새 돌아다니고 비스킷 몇 통과 고기만두 등을 사와 길버트의 방에서 날이 샐 때까지 성찬을 즐기며 위대한 인물, 그리고 고매한 이상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길버트는 스티븐슨과 아나톨 프랑스의 작품을 몇 줄씩 낭독하더니 마침내 자작시를 낭독하기에 이른다. 그 시가 잘 쓰여졌는가 아닌가는 크누트에게 문제가 아닌. 실제로 시를 쓰는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이 크누트에게는 기적이었다!

이후부터는 발췌다.

그러나 기숙사를 나와 보니 밖은 훤했다. 시간은 아침 여섯시 반. 붉은 벽돌담에 조용한 아침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이제부터 자주 그 방을 찾아가자. 벗이 하나 생겼다."
크누트는 이렇게 말했다. 길버트가 굳이 갖고 가라고 들려준 뮈세 시집을 그는 손에 꼭 쥐었다.
신학서동으로 몇 발자국 걸음을 내디디며 크누트는 피로를 느꼈다. 이렇게 날이 밝고 보니 간밤의 일은 모두 꿈같기만 했다.
기숙사의 자기 방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늙은이와 젊은이, 이것은 오래 결합되지 못하는 거라." 층계 올라가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청년을 다시 만나도 이젠 그 청년이 내게 흥미를 느끼지 않을걸. 내가 하려는 말은 다 들었을 테니까." 그리고 자기 방문을 열면서 또 한마디 했다. "내가 대학에 온 목적은 바로 이거다. 이 하룻밤을 위해 나는 대학에 왔다. 이 기분을 잡치기 전에 어서 떠나야지."
그는 길버트에게 편지 한 줄을 적어 놓고 가방에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공기가 탁한 방에서 쿨쿨 코는 고는 레이 그리블을 그는 깨우지도 않았다.
그날 오후 다섯 시 서행 낮 열차에 앉은 어떤 노인이 혼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끝없는 만족감이 어리어 있었다. 그리고 그 손에는 조그만 프랑스 책이 한 권 쥐어져 있었다.

얼마나 유쾌한 기분으로 책을 덮었는지.
이 단편을 읽고 나서 문득 공자의 유명한 말이 떠올랐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낙지자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그동안은 이 말을 그저 말 그대로 생각했다. 즉 좋아하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낫고, 즐기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보다 낫다고. 그런데 '늙은 소년 액슬브롯'을 읽고나니 퍼뜩 깨달음이 오는 게 아닌가.
아 이 말은 낫다(better 혹은 superior)의 의미가 아니라 성장의 단계, 포함의 의미로구나.
즉, 아는 게 많아지면 좋아하게 되고 그래서 많이 좋아하게 되면 즐길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보통은 저 말을 듣고 그래 '재밌는 게 최고다.'라고 해석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데, 결국 즐길 수 있다는 것은, 그저 재미있는 것을 즐기는 것(사실 이건 당연한 게 아닌가)이 아닌 어떠한 것에서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단계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렇게 즐기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것'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충분히 갖춰야 하고 '그것'을 진심으로 좋아해야 가능해지는, 결국 성장의 가장 윗 단계란 의미말이다.
그래서, 크누트는 바로 '樂之者'의 레벨에 이른, 지금까지 삶의 경력과 연륜, 그리고 배움의 노력으로 인한 지식의 축적, 좋아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모두 갖춘, 그래서 원하고 바라던 그것을 얻었을 때 조금의 미련도 없이 떨치고 분연하게 나설 수 있었지 않았을까는 생각이 들었다. 이 얼마나 현명한가. 떠날 때를 아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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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엑스트라바간자 [한글자막] - 베르비에 음악제 10주년 기념 콘서트 실황
키신 (Evgeny Kissin) 외 / 소니뮤직(DVD)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이런 실황은 사서 보는 게 결국은 이득이란 게 평소의 지론.

미디어와 통신의 발달을 쌍수 들고 환영할 때는 바로 이런 때다.
클래식이나 오페라, 연극 등 과거 소수 있는자들을 위한 고급 유흥거리가 일반 서민,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다 기록장치의 발달 아니겠는가.
마음이야 스위스 베르비에로 날아가 그 현장에서 팔딱팔딱 뛰는 생생한 콘서트를 두 눈으로, 두 귀로, 오감, 육감 다 동원해서 즐기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 가까운 일본도 힘든 판에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근 5년 전에 큰 맘 먹고 갖춰놓은 홈 씨어터 덕에 그나마 그럭저럭 맛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 해야겠지.
오프닝 크레딧부터 두근두근이다.
익숙한 몬스터들의 얼굴들이 하나 하나 스쳐지나가는데, 스위스 베르비에의 아름다운 풍경은 그 얼굴들에 묻혀버린다.


이윽고 시작하는 모짜르트 4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 세상에 아르헤리치와 키신의 협연이라니 ;ㅁ; 아이고, 이런 근사한 광경을 어디가서 또 볼 수 있을까나. 근데 아르헤리치 아줌마, 젊었을 때보다 많이 착해진 얼굴;;; 하핫, 모님 덕에 아르헤리치를 알고 그녀의 치열한 쇼팽을 듣고 반했는데, 영화 오라버니는 무션 아줌이라며 연주는 좋지만 인간성이 별로라고 에비에비하는 것을, 친구도 아닌데 그녀의 인간성이 어떨지 어떻게 아냐며 발끈, 난 연주만 좋으면 다 좋아~♡라는 오묘한 발언을 하기도 했었다. 각설하고 아르헤리치 여사님과 우리의 키신 옵빠의 연주는, 그저 두 사람이 이따금 한번씩 눈빛을 교환하며 미소를 나누기만 해도 행복하기만 했다.

개인적으로 몹시나 좋았던 것은 급조된 해피버스데이 오케스트라(웃음)의 해피 버스데이 변주곡들.

세상에 저렇게 유쾌한 변주곡이라니. 한 마디로 향연이라는 말이 너무나 어울리는. 여전히 잘 웃는 장영주는 참으로 예뻤고(하지만 연주활동을 오래하면 왜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가들은 좀 느끼해지는 걸까?) 은근히 기돈 크레머와의 친근함이 드러나서, 괜히 흐흠~하며 지켜보고, 드미트리 시트코베츠키(아저씨! 아저씨 골드베르그 베리에이숑 디게 좋아해요;ㅁ;), 미샤 마이스키등과 함께 즐겁과 화사한 협연을 보여준다. 처음엔 기본 테마를 간단히 소개하고 나서(웃음) 하이든 풍으로, 베토벤 곡과 더불어, 그리고 탱고 리듬에 맞춰, 앤드 마지막으로 집시풍의 헝가리 차르디쉬로 마무리하는 연주 릴레이에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저런 생일 축하 노래 받으면, 황홀해서 잠 다잔다. 

전체 연주곡 중 가장 좋았던 것은
바흐의 4대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아아, 정녕 황홀했다. 해피버스데이 오케스트라와 아르헤리치, 키신, 르바인, 플레트네프가 함께 하는 바흐라니.
시작부터 감동에 취하는 나머지 어쩌구 저쩌구 분석할 틈 없었다.
그냥 몸으로 느끼고 귀로 즐기고 눈으로 황홀해하면서 빠져들었음 ;ㅁ;
나중에 또 들어야지! 


그리고 이어지는 8대의 피아노가 화려하게 협연하는 연주곡들.
크으, 개인적으로는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이 가장 좋았다. 특히 젊은 연주가들을 많이 비춰주는데, 나의 사랑 키신과 너무 나대는 랑랑의  손가락이 부러질 듯 파워풀하게 뿜어내는 에너지가 그대로 클라이막스로~~(쓰러짐).
근데 랑랑, 얘 왜 이렇게 튀냐? 보니까 재미난 게 개 중에 그래도 젊은 장영주, 키신, 랑랑의 옷차림이 다른 연주가들과 차이가 졌다. 장영주는 화려한 반짝이 드레스를, 키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크림색 턱시도, 그리고 랑랑은 파란색 실크의 중국풍 의상을 입고 나왔는데, 나름 베리에이션이고 기획이란 생각이 들어 재미났다. 그런데 랑랑! 얘 키신 옆에 바로 앉아서 카메라가 참 많이도 비춰주는데... 아, 그래! 만일 노다메가 연주하면 요런 스타일이 아닐까 싶게 연주한다(웃음) 어쨌든 정말 튄다. 만화에 나올법한 음악에 취해 캐오버해서 연주하는 스타일. 조신하게 앉아서 차분히 연주하는 키신과 어찌나 대조가 되는지. 눈도 왕방울처럼 떴다가 막 눈을 감고 감정에 취했다가, 대따 웃긴다. 혼자만의 연주였으면 그래도 귀엽게 봐줬을텐데 이 놈 땜시 키신이 자주 나오질 못해서(이, 이쁜 녀석 ;ㅁ;) 괜히 미워짐.
왕벌의 비행은 기대는 가장 많이 했는데(곡의 특성상 그 붕붕 거리는 소리가 8대의 피아노로 펼쳐질 때의 장관을 막 황홀하게 상상했음) 역시나 쓸데 없는 망상적 기대 탓에 감동은 쫌 반감. 예상외로 좋았던게 stars and stripes와 한물 흘러간 파퓰러 곡들의 변주곡들. 유쾌하고 분위기를 상승시키고 연주하는 이들도 부담없이 즐기면서 연주하는 게 보여서 좋았다. 


근디 타이틀에 문제가 있는 건지 원래 그런 건지,
9번째 트랙에서 10번째로 넘어갈때 듀얼레이어라서 그런건지 화면 멈춤이 생기는데,
문제는 그냥 멈추기만 하는게 아니라 막 지직댄다는 거.
두번째는 스페셜 피처로 제작과정을 보는데 르바인의 인터뷰 한참 하다가 뚝 끝난다;;; 이거 원래 이런 건지 어떤건지. 알라딘에 문의는 해놨는데 품절로 되어있어 좀 걱정;;;; (-> 오 이유를 알았다. Pal 방식 dvd를 NTSC로 전환하면서 생긴 문제란다.. 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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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혈압이 떨어졌다.
동반하는 증상은 어지럼증, 대략의 무기력증.
집에서 쉬면서 논문 몇 줄 읽다가 도저히 안되겠어서 그냥 잡히는 책을 펼쳐들었다.
처음 읽는 심윤경의 글.
감상적기가 미묘하다.
일단은 열광하는 사람들처럼 열광은 안된다는 사실.
아아, 역시나 나이가 먹으면서 참으로 글에 대한 열광은 점차 줄어들고 있는 건 분명하다.
굳이 흠을 잡으려고, 보려고 하는 건 아닌데 툭툭 드러내며 보이니...
이를 어찌하리.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니고, 설익어 세상에 나온 칠삭동이를 보는 느낌이랄까.
수많은 한자 조어들, 명문종가가 가지는 품격의 허와 실, 비밀과 거짓말, 이 모든 것을 다루지만
풍요로운 한자의 어휘가 명문종가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고, 명문종가를 다룬다고 해서 빠른 변화의 시대에 정체되어 있는 정지된 이질적 세상의 정취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구나, 씁쓸하게 느꼈다.
외려 이 책을 다 읽고 난후 펼쳐든 성석제의 '참말로 좋은 날'이 고어를 사용하지도, 드러내고 옛것에 파묻힌 인간을 소재로 쓰지도 않았지만, 그의 글에서 심윤경의 바랐던 쿨함이 아닌 끈적끈적한 옛날식 정서를 자연스레 발견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침대에 앉아있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달의 제단'도 아니고, '참말로 좋은 날'에 대한 것도 아니고,
과연 작가가 육성으로 말하는 글의 힘, 글쓰기의 어려움이 새삼 사무쳤기 때문이라면 건방은 건방일 것이다.
개인을 변화시키고, 더 넓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
뭐야, 이미 그런 것을 글에서 바랄 수 없다고 현대문단에서 너나할 것 없이 목청껏 외치지만,
쯔쯧, 시대를 잘 따라가지 못하는, 혹은 따라가지 않으려 버티는 나를 포함한 몇몇 이들은 여전히 이것을 믿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을 바꾸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혁명이나 전복이 아니더라도, 시선을 환기시키고, 다르게 하여 경계를 확장시키고 이전과 같되 더 이상 같지 않은 어떤 것을 발아시키는 힘.
역시나 그런 힘은, 그저 흉내내기만으로는 차마 바라지도 힐끗 엿보지도 못할 그런 숭고한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심윤경의 '달의 제단'은 끝까지 읽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었고 재밌기도 했지만,
그것은 육성이 아닌 어디서 들은 것을 흉내내어 중얼거린 것처럼 들렸다.
공감을 얻지 못한 치열함은, 필연적으로 조소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체화되지 못한 작가의 흉내낸 옛날식의 진지함은 독자를 그저 멀뚱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게 했다.
주제 역시 심화되지 못하고 껍데기만 어설프게 빚다 그쳐졌고, 동일한 주제라면 은희경의 '비밀과 거짓말'이 전달력이 더욱 좋다고 할 수 있다.
글에 들인 노력이나 시도는 좋았지만 아쉽게도 결과가 성공적이라 말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계속해서 지켜볼만한 작가.
그저 확실한 것은 앞으로가 기대가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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