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 훔치기 - 한 저널리스트의 21세기 산책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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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대학들의 리포트 짜집기가 문제가 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학교수들의 논물, 전문적인 학술논물조차 짜집기하면서 마치 자기것인양 떠벌리고 있다. 자신의 깊이 없이 마치 남의 것을 자기것인양 나열하는 지식이다. 자신의 지적재산권은 악착같이 주장하면서 남의 지식은 도둑질 하고 있다. 지적재산권의 효용성은 둘째로 치고도 떳떳하게 거짓말하는 것은 굉장히 역겨운 일이다. 그런데 여기 대놓고 남의 지식(코드)를 훔쳐왔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으니 관심을 가져볼만한다.

 고종석이라는 사람 저널쪽이나 많은 독서를 하기전에는 듣기 어려운 이름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세계의 대표 보수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이다. 그리고 의식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훔쳐온 지식이 어떤지 궁금하다.

 40개의 다양한 주제에 관한 모색. 대부분의 다른 유명인물들의 저작들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어떻게 보면 가치중립적이라고도 볼 수 있고, 어떻게 보면 자신이 원하는 내용들만 가져왔기때문에 편향적이기도 하다. 그의 말처럼 그속에 무슨 의지가 있고 욕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것은 좀 더 나은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 때론 진보의 입장에서 때론 소수의 의견에서 때로는 다수의 사람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그의 태도는 지극히 카멜레온적이기도 하지만, 옳다는 것은 꼭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소수도 아니고 다수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독서를 하면서 그의 방대한 지식량, 아니 훔쳐온 지식의 양에 놀랐고, 적재적소에 짜집기 하는 그의 실력에 감탄을 계속했다. 하지만 가끔은 그의 깊은 생각이라기보다는 이렇게 짜집기하여서 인용만 하는 그가 조금 아쉬움으로 느껴졌다. 또한 몇몇 구절, 그의 얼마안되는 그의 생각, 그의 코드가 들어있는 곳에서 아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가족의 유연화에서

"남자든 여자든 동시에 여러 배우자를 지닐 수 있게 되고, 남자든 여자든 동시에 여러 배우자를 지닐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사랑은 에리히 프롬이 정식화한 '소유에서 존재로의 이행'을 경험할 것이다."

 이런 글귀에서 상당히 아쉬움을 느꼈다. 내가 느꼈을때는 그가 에리히 프롬의 저서를 오독을 했던지 아니면 자기 의견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껴맞춘 것 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글 상당수가 종교와 연관되서 설명되었다. 특히 현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기독교가 많이 등장하였다. 그 중 기독교의 창조론을 믿는 자들을 광신으로 폄하하는 것이나 기독교가 사회의 악처럼 비쳐지는 것은 상당히 아쉬운 일이다. 과학에서도 창조론과 진화론 어느 한쪽도 과학적으로 완전하지는 않다고 한다. 한쪽은 불완전한 과학을 더 믿고, 한쪽은 보이지 않은 신을 더 믿을 뿐이다. 그가 저널리스트로서 비판을 하기 위한 대상을 찾기 위해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조금 가지 않았나 생각한다.

 저널리스트는 사회의 잘못된 것을 꼬집을 수 있고, 사회를 좀 더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하며, 보다 좋은 사회를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 사회가 곪는 것을 막기 위한 백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때론 사회가 그들의 이러한 노력에 길들여져 그들의 글이 항생제처럼 되어 또 다른 면역이 생기지 않길 바란다. 결국은 어렵지만 철인 저널리스트가 되어야한다. 이루기 힘든 유토피아를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진리 추구자의 길이다.

 많은 지적 사치에 빠졌다. 좀 더 아쉬운 것은 이 책은 단행본 보다는 신문으로 보는게 더 좋았을 것 같았다. 그게 독자에게 더 감동을 주었을 것 같다. 그래도 읽으면 좋은 교양 백과사전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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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한국경제를 파탄으로 몰았는가
이교관 지음 / 동녘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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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IMF체제라고 하던 시절이 지난간지도 꽤 지났다. 하지만 그 때보다 우리의 수준이 많이 나아졌냐고 하면 그것은 의심스럽다. 아직도 우리의 모습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어쩌면 더 나빠졌다. 청년실업은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고, 침체에 빠진 내수시장은 구멍난 독에 물을 붇는 것처럼 어떠한 처방에도 약효가 먹히지 않는다. 경제!경제! 외치지만 그럴수록 희망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고, 우리의 아픈 현실만 상기시켜주는 것 같다.


왜 이런 현실이 온걸까? 누가 이렇게 만들었던 것이고, 언제부터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걸까? 그걸 연구하고 책으로 쓴 사람이 한국에서 가장 탄압받는 기자중 한사람으로 선정된 이교관이다. 그는 왜 우리가 IMF체제에 들어가야했고, 왜 그렇게 한국국민들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을 전체적인 면에서 알려준다. 그 이야기는 터무니없는 음모론처럼 보이기도하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왠지 잘 꾸며진 소설처럼 구조가 탄탄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허구의 소설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라는 가슴 아픈 현실이다.


그럼 누가 한국 경제를 파탄으로 몰았는가?


우선 나의 생각은 부실경영을 일삼는 재벌기업들과 사치와 향락에 빠진 국민들이라고 생각하고 거기다 약간으로 초국적기업의 초단기기금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미디어에서는 대체적으로 우리나라 사람의 사치를 문제 삼고, 국민성 등을 많이 문제 삼았다. 일찍 터트린 샴페인이라고 하면서 그 전부터 자주 예견이 되어왔다. 그래서 일반 국민들에게 '한국경제 파탄이 나에게 있구나 반성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맞다. 나도 잘못하고 국민들도 모두 잘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경제파탄의 원인에 넣는다면 가장 밑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누가 한국경제를 파탄으로 몰았는가? 그 대답은 명쾌하다. 미국이다. 미 재무부와, 국제통화기금(IMF), 월가의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합작이라는 것이다. 말만 들으면 음모론에 가까운 내용이지만. 저자는 체계적인 논리로 이를 뒷받침해준다. 일본, 한국등이 IMF에 맞선 금융기구 창립에 반대하고, 한국의 금융개방을 위해, 그리고 미국의 부의 원천인 금융자본들의 이익을 위해서 한국을 파탄의 지경으로 몰았던 것이다. 그 내부사정은 아주 쪼잔하면서도 치밀한 이익에 우선을 둔다.


이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만약 저들의 이익이 군사적인 것으로 해결할려고 했다면, 그래서 북한을 군사력으로 침공하여 이익을 대변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한편으로 생각해본다. 다행히(?) 그 군사력에 의한 이익은 이라크에서 얻으려는 모습이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알수록 두려운 나라이다. 다른 이데올로기도 아닌 오직 이익에 의해서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돈에 눈이 멀었기때문에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환자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힘이 있는 환자이기에 더 두렵다.


미국이 한국의 외환위기에 강력한 역활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한가지 이유로만 돌릴 수는 없다. 내부적인 이유도 있다. 문제는 알면서도 고칠 수 없었던 재벌개혁과 금융개혁, 그리고 이리저리 표만 보고 정권의 이익만 보던 정치인들에게도 큰 원인이 있다. 그들이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거머리에게 피를 보이지 않으면 거머리는 붙어도 신경쓸바 아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피를 보였으니 그들이 피를 빨아가는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다.


내면을 알면 알수록 내 가슴이 아팠다. 세계경제공황은 공부하면서 자칫 한국의 공황은 보지 못하는 경제를 공부할 뻔했다. 아직도 우리의 경제체제는 미국식이다. 미국의 주류경제학속에 속해있지만, 연구자료와 통계, 그리고 교수님들의 박사학위조차도 그들의 경제모습을 보고 논문을 작성한다. 그래서 한국의 경제는 알 수가 없는 것이고, 누구하나 한국경제에 대해서 책임질 사람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솔직히 지금 내가 한국경제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뜻있는 지식인들의 움직이는 모습이 기대된다. 한국적인 경제학, 우리체질에 맞는 경제학, 허준처럼 우리체질에 맞는 처방을 내릴 경제학자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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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자누스 2005-11-21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체질에 맞는 경제학' 언제 나올런지 기다려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http://blog.naver.com/ritter13/20006044726
 
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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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이라는 녀석의 이름을 처음들은 것은 고등학교때였다. 친구녀석이 데미안을 읽더니 황홀했던지 감성적으로 이 책에 대해서 청소년시기에 읽을만한 책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난 이 책이 멜로북(?)으로 청춘들의 애정행각을 버리는 책인지 알았다. 그래서 이 책을 보면 가슴떨리는 사랑을 구하게 될 것 같은 책인지 알았다.
이게 끝이었다. 순수문학작품 별로 안좋아하던 나에게 이 책은 그냥 유명한 고전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집에 구석에 있던 문고판 데미안을 잡게되었다. 이제 나도 어디가서 데미안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얼마나 기쁜가. 아 사랑은 얼마나 낭만적일까 생각하면서 책을 들었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은 데미안이 아니고, 녀석은 사랑스런 연인의 이름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크로모로부터 해방시켜준 친구 데미안에게서 감사를 느낄 수도 없었다. 다만 가난한 크로모가 부유한 싱클레어의 약점을 가지고 착취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크로모와 싱클레어의 추악한 인간의 심성을 보았다. 신비로운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구원자였고, 진실한 친구였을것이다. 하지만 싱클레어가 허영심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일찍 부모님께 고백했다면... 과연 데미안과의 만남이 이루워졌을까 생각해봤다.

싱클레어, 이 녀석은 데미안 없이는 타락하는 인간일 뿐이다. 녀석은 데미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마치 연인들이 사랑하는 자기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몽롱하다. 뭔가에 홀린듯 싱클레어는 꿈꾸고, 홀린듯 그림을 그리고, 뭔가에 홀린듯 데미안을 만나고, 그리고 에바부인을 만난다. (여기서 에바부인과 신세기엔반게리온의 에바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 볼일이다. 왠지 은연중 같은 알 모티브를 채용하고 몽롱함을 추구한게 아닌지 생각해본다.) 이젠 몽롱하다 못해 어지럽다. 그리고 데미안에게서 얻었던 해방은 다시 어지러운 세상으로 헤메이게 된다. 어지러울려면 책 속에 있는 사람들이나 어지럽지 왜 나한테까지 전이 되는지, 지하철에서 책 읽고 오다가 어지러워서 쓰러질뻔했다.

꿈이라는 것은 좋다. 환상도 좋다. 몽롱한 것은 더욱 좋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이것들을 연구했을 것이다. 나도 꿈꾸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그러한 환상속에서 나의 현실을 맡길 순 없다. 프로이트의 역활은 이러한 꿈과 성에 관에서 연구하는 것으로 끝나고, 헤세의 역활은 이러한 것을 자신의 삶과 작품에 반영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렇다 내 한몸 어지러울 때 어떻게 사회를 생각하고 남을 생각하겠는가. 천재여 그래서 괴로웠던 헤세여. 당신마저 세상을 등지면 평범한 나는 어찌하리. 당신은 알 속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은 알을 깰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을 파괴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에게는 불행히도 날개도 없습니다. 제발 환상속에서 태양을 쫒다 불속으로 간 이카루스처럼 되지 마시기를...

이제 데미안은 알속으로 들어가고 건강한 포유류 싱클레어는 나와서 세상으로 뛰어갈 모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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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빠라기 - 남태평양 티아비아 섬 투이아비 추장의 연설문
투이아비 원작, 유혜자 옮김 / 동서고금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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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전 군대에서 읽을 책을 찾아 서고를 찾았을때 조금 낡은 이 책을 발견했다. 호기심으로 읽었을때 보물을 찾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들어보지도 않고 표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그 내용은 나를 깨우치게 했다. 그 때 책은 많이 낡았지만 지금 나온 책은 표지도 깔끔하고 안에 삽화도 잘 되어있고, 읽기 하게 출판되서 나왔다.

 책은 읽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고 했던가. 지난번에는 빠빠라기의 언어와 생각과 우리가 가지는 사물의 개념의 차이를 보면서 다른 세계와의 만남으로 많이 봤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더 익숙한 언어들..

빠빠라기-사모아어로 하늘을 찢고 온 사람, 즉 백인이고
옷은 허리도롱이, 거적 이라고 표현하고
돈은 둥근 쇠붙이, 묵직한 종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좀더 문명비판적으로 더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소중하다고 느끼는 가치가 다른 세계, 투이아비 추장에게는 가치가 없어보였을 것이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 돈과 물질이 추장에게는 큰 가치가 아니였을 것이다. 문화상대주의를 떠나 이 책은 과연 인생에서 인생의 즐거움과 여유 없이 시간에 쫒기며 좀더 더 소비하고 소유하고 돈을 벌기위해 반복되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생각해볼 시간을 준다.

 허리도롱이라는 것이 나온다. 지금은 잘 안입는 옷이지만 브래지어기능이 있는 꽉 조이는 속옷을 말하는 것 같다. 그것에 관해 추장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몸통과 엉덩이에 많은 거적과 허리 도롱이를 걸치고 다닌다. 그래서 살갗이 흉터와 끈에 눌린 자국 투성이다. 그래서 살갗이 흉터와 끈에 눌린 자국투성이다. 젖가슴은 생기가 없고, 목에서부터 가슴 아래부분까지 묶고 등에 동여맨 거적에 눌려 젖이 한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것에 대해 불쌍히 보는 추장이다. 우리가 살 곳을 위해 애쓰는 아파트도 그는 답답하고 종족사람들이 오면 살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지극히 반문명적인 태도이다. 하지만 때론 나는 그들이 부럽다. 그리고 비판적으로 이야기 하는 추장도 부럽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돈도 많이 가진 이들도 부럽고, 추장처럼 치열하게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수 있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고 여유롭게 삻을 누리는 사람도 부럽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의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부러워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간다.

 빠빠라기들은 남태평양까지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해준다. 그래서 투이아비 추장 등은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의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받아 살게 되지만, 추장은 왜 백인들은 그 빛을 알고 있으면서 믿지 않고 우상(돈, 물질)을 숭배하느냐고 말한다. 백인들이 전해준 복음은 그들에게 전쟁을 그치게 하고 평화를 줬지만, 왜 그들은 전쟁으로 서로를 죽이느냐고 외친다.

 이 책은 읽기 쉽고, 삽화도 좋다. 중고등학교 같은데에서 추천독서 몇번 올려주면 좋을 듯하다. 언제 읽어도 좋은 책이지만 청소년때 읽으면 더 좋을 책같다. 더 좋은 화음의 핸드폰, 더 좋은 화소의 핸드폰, 화려한 옷 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언제나 시테크, 재테크 하면서 성공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2003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에서 존재하지 않은 다른 세계의 외계인이 우리를 봤다면, 지구 저편에 존재하는 거의 100년전 쯤 다른 세계 추장의 모습으로 우리를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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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항한 양심 - 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자작나무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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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던 칼뱅은 뛰어난 기독교 교리서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고, 제네바에서 개신교로 신정일치를 이끈 종교개혁가였다. 하지만 제목에서 풍기는 냄새를 보면 폭력은 칼뱅이고 그에 대항한 양심은 카스텔리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테판 츠바이크라는 유명한 전기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해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중심인물 2명이 있다. 칼뱅과 카스텔리오다. 둘다 종교개혁시기에 개신교를 지지한다. 칼뱅은 지지정도를 떠나 루터에서 시작한 종교개혁을 제네바에서 완성시킨자라고 할 수 있다. 칼뱅은 약간 독선적이기는 하지만 뛰어난 신학자이고 종교개혁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개신교중 칼뱅에 영향을 받은 장로교가 최대교파임을 보면, 그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본 모습, 아니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은 실로 내 지식에 반항적인 것이었다.

폭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제네바의 개신교에 입성한 칼뱅은 그곳을 금욕주의로 다스리기 시작한다. 자신에게도 엄격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그 강요는 폭력이 수반된다. 심지어는 교회에서 졸았다고 감방행이고, 길거리에서 노래 불렀다고 도시에서 추방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런 곳에서 살았다면... 비록 내가 개신교에 속해있지만 그것은 끔직하다. 아무런 자유도 없는곳. 그리고 다른 의견. 신학적인 의견, 칼뱅에 비판적인 의견을 낸다는 것은 죽음의 길로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르베토는 화형을 당하고 만다. 세트베토가 신학적으로 다르다고 해서 과연 그에게 화형을 시킬만한 권리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러한 제네바에서 칼뱅에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는 다는 것은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다. 양심을 가지고 있더라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카스텔리오는 칼뱅이 잘 못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도 칼뱅과 신학적인 견해에서 조금 다른면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지적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의 폭력이다. 그의 독선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세르베토를 화형한 일에 관해서 그는 극렬히 반대한다. 칼뱅은 폭력으로 그리고 언제나 긴장을 풀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는 이 모든것을 온화함으로 맞선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양심적인 투쟁은. 폭력이 아니라. 책을 통해서 비판을 하는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저서는 칼뱅에 대해 가치중립적이지 못한 문체로 계속된다. 하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츠바이크가 칼뱅에 비판을 가하는 것은 그의 폭력성이다. 그의 과도한 권위주의이다. 그의 신학을 잘못된 여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을 썼을 당시가 개신교국가 독일이 나치치하에 있던 시기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왜 그렇게 폭력을 싫어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지금도 칼뱅이 믿은 기독교를 믿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칼뱅이 행한 폭력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를 보면 인간에게 버거운 권력이 주어질 때 얼마나 무서워 지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진정한 사랑없이 오직 율법으로만 금욕으로만 치닫는 그를 보면 사랑없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다.

지금 그가 있던 스위스 제네바는 세계 최고의 자유국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이 전해진 영국과 미국, 네덜란드 또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가장 앞선 나라들이다. 츠바이크의 말처럼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일까? 그가 잘못된 방법으로 종교개혁을 이끌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 혜택을 누리고 있고,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무섭고, 진리는 무섭다. 그렇지만 자기만 의롭다 여기는 것은 더 무섭다. 그리고 역사의 진실을 알게 되는 것 또한 두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덮어두고 모른채 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이리저리 괴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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