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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의 생활명품 101
윤광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8월
평점 :
받고 싶은 선물이 생겼다. 부들부들한 검정 양피, 속은 두툼한 미색의 고급 양장지, 이를 묶어주는 고무 밴드로 구성된 수첩 그리고 만년필이다. 신간을 구경하려 교보문고에 갔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독서 용품에 관심이 갔다. 몇 달 만의 퇴원 후 보상을 원했다. 망설여진다. 써 본 적이 없다. 비싸다. 굴러다니는 볼펜이 한가득이다. 꾸준히 쓸 수 있을까?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록하는 도구도 바뀌었다. 일상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들을 모았다 필요할 때 꺼내고 싶었다. 첫 선택은 구글 노트북이었다. 검색이 쉬웠다. 유지보수 걱정도 없었다. 서비스 종료 전까지. 그 후 블로그로 이전하였다. 수일이 걸렸다. 일일이 올려야 했다. 글의 제목을 짓기 어려웠다. 구글 노트북은 제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공개형과 공개형으로 나누어 운영했다. 비공개형은 서류 등 타인에게 노출되면 안 되는 항목 등을 담았다. 공개형은 인터넷 서점 블로그를 활용했다. 당시 추천을 받으면 적립금을 받을 수 있었다. 꽤 쏠쏠했다. 쓰임이 다하면서 생명력을 잃었다. 방금 비공개형 블로그가 사라진 걸 알았다. 아직 서점 블로그는 살아있다. 생각이 나면 다시 글을 올렸다. 오래가지 못했다. 그동안 올렸던 글들의 발행일이 보였다. 띄엄띄엄 간극이 컸다. 몇 달에서 몇 년까지. 지층처럼 보였다.
요즘 핸드폰 메모장에 글을 남긴다. 간단했다. 다른 기기와 동기화가 되었다. 부족함을 느꼈다. 노션 등 요즘 대세인 서비스를 배워볼까 고민했다. 필기, 일정 등을 한 공간에서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멋져 보였다. 거부감이 들었다. 복잡해서? 언젠가 사라지기 때문일까? 기록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투병이 계기였다. 시간을 자산으로 남기고 싶었다. 후회된다. 회상할 추억이 없었다. 늦었다. 지금부터라도 써야 한다. 핸드폰에서라도. 간단하게라도. 그 후 수정하면 되니까. 쓰기 전과 후는 달랐다. 그동안 나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다. 취향이 없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몰랐다. 놀랐다. 감정이 살아났다.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다뤄야 할지 어려웠다. 그때마다 물었다. 어디서 왔는지? 답변을 생각했다.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자신을 알아가고 있다. 오직 나만을 위해 질문하고 고민하는 유일한 순간. 신성한 의식에 걸맞은 도구를 갖고 싶다. 주술적 힘을 발휘해 글이 잘 써지길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나에 대해서 좀 더 알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