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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내려놓음 -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은혜 ㅣ 이용규 저서 시리즈
이용규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7년 12월
평점 :
더 내려놓으라고 웃겨
“더 내려놓으라고? 웃겨!”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붙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놓치기 쉬운 희망을 붙들고, 하나님을 붙들고, 현시대를 힘차게 살아가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시대에 맞지 않게 [내려놓음], 그것도 모자라서 [더 내려놓음]이라고?
처음에는 이 책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난 첫 번째의 책, [내려놓음]을 구입했으나 끝을 맺지 못했다. 아니 유명하다기에 구입했지만 읽는 것이 꺼려졌다. 마치 내게 ‘더 많은 것을 내려놓으라’ 고 할 것 같았다. 그러면 ‘더 이상 내려놓을 것이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더 내려놓음]을 통해서 “풍성하게 채워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족하고 비워진 내 것을 놓음으로 풍성하고 가득 채워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전공서적이 아님에도 전공서적과 같은 깊이가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연구하며 읽을 수 있는 사고적(思考的)이고, 신학적이고, 치유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힘들게 읽어야 하는 전공서적과 같이 내용이 힘든 책은 더더욱 아니다. 깊이가 있으나 가볍지 않은 책이다. 처음엔 가볍게 읽으면서 흥미를 느끼고, 다시 읽을 때는 그 깊이에 빠져보는 것이 이 책의 읽기 방식이다.
한 마디로 “값을 하는 책이다. 아니 책값 그 이상을 하는 책”이다. 나를 감동시킨 책이다.
이 책을 읽노라면 선긋기가 계속된다.
소중한 글들이 이어지고, 그 글들대로 인도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어 선긋기는 계속된다.
2006년에 출간한 [내려놓음]이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기에 그것을 내려놓았다는 것’이란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 [더 내려놓음]을 저술했다.
[내려놓음]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자아(自我)가 죽는 것, 이것이 바로 내려놓음이다. 나는 “내려놓을 때 하나님으로 채워진다.”라고 설명함으로써 바로 내 자아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을 때, 주께서 내 안에서 다시 사신다는 말씀을 풀이하려 했다.
자아를 내려놓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접근해야할 세부영역 과제로 자기애(自己愛)와 자기의(自己義))라는 두 가지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가는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먼저 1부에서는 자기애(自己愛)와 관련한 우리의 문제를 작은아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통해 확인하고 정리한다. 2부에서는 자기의(自己義)가 갖는 문제점을 큰 아들의 모습과 상태에 견주어 다루고 있다.
저자와 함께 걷기
‘내려놓음’에 대한 의미
“‘내려놓음’이란, 내가 추구하는 길과 주님이 내 인생 가운데 부여하신 목적이 서로 다를 때, 내가 추구하는 것을 버리고 주님의 목적을 붙잡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려놓음이라는 단어는 복음의 핵심가치인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을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빌려온 표현이다.”
100퍼센트 순종은 내려놓음의 척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면서 먼저 계획을 하고, 준비를 다 해 놓고 하나님께 결제도장을 받듯이 통보하는 식이다. 내가 좋은 일을 계획했으니 도와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순종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100퍼센트 순종하겠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십시오.” 라고. 좀 더 깊게 “하나님,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액수를 적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그저 순종하겠습니다.” 그렇다. 하나님과 대화가 통하는 것이 신앙이다. 하나님이 최우선인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일을 벌여놓고 하나님께 뒷수습해 달라는 것이 우리가 하는 기도의 주요내용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붙잡혀 있다. 특별히 우리를 가장 집요하게 묶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에 대한 집착이다.” 나는 여전히 목회에 성공하고 싶으며, 상담전문가로 이름을 떨치고 싶어 하며, 가정도 행복하고 물질의 염려도 없었으면 하고 내 자신의 성공에 집착한다.
내려놓음은, “극대화된 자아의 시대”에 자아를 내려놓는 것, 자아를 우상시하는 시대에 그 반대로 사는 것을 말하고 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내려놓을 때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채워질 때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아버지의 긍휼히 여기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볼 수 있다.”
아버지와 나
이 책에서 저자는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됨으로 육신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돌이켜 보며,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관계를 회복케 된다고 하였다. 나 또한 그렇게 해 보며 치유를 경험했다.
아버지와 두 아들
내가 육신의 내 아버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였을 때, 마음에 평안을 얻었고, 용서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큰 사랑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큰아들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굶주림과 작은 아들의 사랑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었다.
현시대를 잘 반영해 주는 표현으로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는 두 아들에 대한 모습이다. “작은 아들이 굶주린 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큰아들은 배를 주리지는 않았지만 굶주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두 아들 모두 길을 잃었다. 한 아들은 육신이 굶주린 채, 또 다른 아들은 마음이 굶주린 상태로, 두 사람 모두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했다. 두 사람 모두 아버지께로 돌아와야 했다. 이 두 가지 모습이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으며 이 모습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버지는 있으나 아버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현시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람들의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책의 표현대로 하면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태도이다. 그 큰아들은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한다.’는 열심히 특심 파 아들, ‘아버지 하나님이 다 해주시겠지’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노는 거룩한 백수 인 작은 아들이다.
그런데 이 두 아들 ‘거룩한 백수’와 ‘열심히 특심 파’ 아들 모두에게 하나님은 아버지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나님 아버지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아들은, 하나님의 힘으로, 지혜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배워서 이마에 땀이 흘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큰아들은, 하나님의 힘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를 깨닫고 배워서 내 방식,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야 한다.
아버지와의 관계
“나는 네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보고 평가하지 않는다. 네가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내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하는 것이 내가 너를 보는 기준이다.” 새벽 한 시 또는 새벽 두시에 깨우셔서 기도하게 하신다. 말씀을 읽게 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대화가 필요할 때는 가장 평안한 시간에 깨우셔서 기도하게 하시고, 여러 가지 책을 읽게 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야 한다. 나는 자꾸 무슨 일인가를 잘하려고만 한다.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인정해 주지 않을 때 분노가 일어난다. 이것은 큰아들의 숨겨진 자기 공로, 자기 의의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거나 바라시지를 않는다. 그저 내 모습 이대로 보기를 원하신다.
아버지의 사랑, 지경을 넓히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훈련할 때이다. “지금 내가 견디는 힘을 세 배 이상 더 굳건히 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내가 아직도 주님이 원하시는 만큼 풍성히 품는 마음을 갖지 못한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본 내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완벽하거나 충분하다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멀었던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 나를 마음껏 넓혀 주십시오, 내가 느끼는 비난의 아픔은 때로 스트레칭 할 때 느끼는 근육통 같은 것이겠지요. 하나님의 연단을 통해서 내 마음이 더 넓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을 품을 수 있다면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소원합니다.” 훈련의 유격조교는 우리의 자아를 건드리면서 더 단련되고 훈련된 군인이 될 수 있다. 책을 읽어도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을 읽게 된다. 나의 관심 밖의 분야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관심 밖의 분야의 책들은 읽지를 않았다. 나는 알라딘의 서평단 백 명 중 한 사람이 되어서 책을 읽는다. 관심 밖의 책들도 읽는데, 처음엔(물론 아직도) 읽어지지도 않고, 힘들었지만 한 권씩 한 권씩 읽어갈 때면 지경이 훨씬 넓어진 나를 바라보게 된다. 사람이나 환경 등의 지독한 훈련을 통해서 아버지는 아들의 지경을 넓히시는 사랑을 베푸신다. 피도 눈물도 없는 훈련의 유격조교와 같으시다가 지경이 넓어지면 부어주시고 풍성케 해 주신다.
아버지의 사랑, 긍휼
긍휼 없는 마음은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영혼을 파리하게 한다.
저자가 “판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서 큰아들의 초췌해 가는 영혼의 모습을 말하려고 하였다. ‘조이 도우슨’도 같은 생각을 하였다. ‘목회자를 비난하고, 헐뜯을 때, 오히려 우리들의 영혼은 힘을 잃는다’ 고. 자신의 책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누군가를 판단한다면 그때는 대체로 내가 영적으로 고갈되고 메마른 시기였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이것은 큰아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판단”과 “비판”을 같이 혼용하여 사용하였다. 성경에서나 국어에서 판단과 비판이 비슷하게 쓰임을 볼 수 있다. “판단”은, ‘사물을 인식하여 논리나 기준 등에 따라 판정을 내림’이고, “비판”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밝힘’이다. 그런데 저자는 “하나님의 긍휼어린 눈으로 형제자매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 이것이 판단이다.”라고 하였다. 차라리 이 “판단”이라는 단어보다는,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이라는 뜻을 가진 “비난”이라는 단어가 저자가 의도한 뜻을 잘 표현해 주는데 낫지 않을까 싶다. 우리말에도 ‘비판은 하되, 비난은 하지 말라’가 있지 않는가? 무엇이 옳고 그름은 가려내되, 그것을 공개적으로 헐뜯으며 비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큰아들의 모습이, 사람들이나 일들에 대해 사사건건(事事件件) 헐뜯으며 비난하여서 자신의 교만함을 드러내며, 좋은 것을 보지 못함으로 영혼이 메마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비난을 하는 이유는 내 안에 동일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비난하는 사람에게는 동일한 죄의 문제가 있다. 결국 내가 하는 그 판단으로 주님께서 당신을 판단하실 것이다.” 누군가에게 상처 받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그 상처받음은 죄를 짓도록 한다고 하였다. 상처가 죄를 짓는 사람, 죄인으로 바꾸어 버린다는 것이다. 상처를 받을 때 자신의 자아 안에 취약한 어떤 부분이 상처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좋지 않는 마음을 갖게 된다. 알고 보면 그 사람 안에도 똑같은 교만이 있는데, 다른 사람을 향해서 교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 이해해 주고, 용납해 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남을 판단하지 말고, 그들을 이해하고 긍휼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긍휼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면, “그분들을 변화시키실 하나님의 계획과 능력을 신뢰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들에 대해 동일한 사랑을 품고 기다리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후에야 상대의 약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중보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긍휼의 마음은 관계마저도 회복시킨다.
낭비와 사명
“박사학위까지 가진 분이 몽골로 가는 것은 낭비가 아닌가요? 그 지식을 가지고 좀 더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른 태도가 아닐는지요?” 정당하다고 생각한 질문을 통해서 저자는 낭비와 사명을 설명한다. 아내가 박사과정을 내려놓느냐 계속하느냐의 갈등을 극복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는가?’ 고민할 때, 그것은 내려놓음이다. 낭비와 영향력의 차이는 ,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문제이다.
낭비란,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역의 기회를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일관성이 있다. 하나님은 변덕을 부리시는 분이 아니며 일관되게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내려놓음은, 사명을 완수하는 어려움을 겪어야한다. 좁은 길을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은 사명을 완수할 좋은 마음이다.
저자를 학문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과 선교사로 부르신 것에 대한 상충된 고민은 저자가 제 3세계의 대학교로 부르심을 받음으로 예상을 뛰어넘고 사명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선교와 학문은 상충 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의 융합이 되며, 내가 예상한 자리가 아닌 그 이상을 뛰어넘는다.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극적이자 동시에 일관성이 있다.
“하나님 안에서의 내려놓음이 단순한 행복의 포기나 욕망의 비움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로는 계속하기 어려운 일도 회피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들고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내려놓음이 될 수 있다.”
책 밖에서 책 보기
이 책은 나에게 ‘아버지에 대해서 용서할 마음을 주었다.’ 그리고 ‘내가 붙잡아야할 것과 내가 놓아야 할 것을 분별하게 해 주었다.’ 또한 ‘저자의 용기도 중요하게 보이고, 쉬우나 삶으로서는 쉽지만은 않은 내려놓음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철저하게 ‘내려놓음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결정하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의 뜻을 더 확실하게 추구하고 붙잡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라고 크리스천들은 묻곤 한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내려놓음이다. 그리고 내려놓음이란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내려놓아서는 안 되는 것과 순종해야 할 것을 깨닫게 된다. 이론적으로 알아왔던 것을 체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추구하고 붙잡게 되는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둘째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확실하게 붙잡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계속적으로 주신 것, 좁은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사명이다.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이 세대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기를 갈망해 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방황하는 그들에게 주신 사명을 확실하게 붙잡는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붙잡게 될 것이다.
큰아들이든 작은아들 헐벗고 굶주리기는 마찬가지다. 두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 하신다는 확신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계신다는 진리만큼 현대인들에게 힘을 주는 메시지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폭포수 같이 부으시는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확실하게 붙잡는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넷째로, 내려놓음의 삶을 살게 해 줄 것이다.
읽고, 깨달았고, 결심했으니, 그렇게 사는 것이 진정한 내려놓음이리라. 이 책은 내려놓음으로 그 가치를 발한다. 읽고, 깨닫고 내려놓음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가장 멋진 삶을 살게 할 것이다.
이렇게 유익을 주는 것과는 다르게 몇 가지 보완했으면 하는 것이 있다.
독자들에게 더 많은 유익을 주기 위해서 저자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어떻게 하였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내려놓음으로 채워지는 것, 내려놓아할 이유에 대해서 저자의 체험을 통해서 은혜롭게 전달하고 있다. 일보다 우선시 되는 것이 그 사람이요, 그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내려놓음의 원칙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이 부분에 대한 보완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또한 용서와 치유에 대한 한 장(chapter) 정도의 보완이 필요하다.
저자는 용서와 치유에 대해 무게있게 다루었다. 용서와 치유에 대해서 말할 의도였다면, 한 장(chapter)을 할애해서 독자들에게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게 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독자들이 용서와 치유에 대해 삶으로의 적용을 하기에는, 그 내용들이 파편처럼 책 전체에 널려있다. 파편을 통해서 적용하기에는 부족하고 의문만 남겨 놓았다. ‘용서는 무엇이고 치유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얕은 물가에서 옷만 버리고 가게 할 것이 아니라 물을 모아서 목욕을 하게 하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다른 이를 통해 [남김없이 내려놓음]이라는 책이 출간되었으니, 다음 번, [더 더 내려놓음]에서는 저자가 받은 치유의 순간들을 독자들과 나눈다면 더 큰 유익을 주게 될 것이다. ‘어떻게 용서하며, 어떻게 치유의 체험을 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 시대에 길을 제시하는 등불이다.
마치 자신이 처한 자리와 입장에서 머물고 한 걸음도 옮기지를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걸음을 떼게 해 줄 것이다. 이론적으로만 믿던 하나님을 삶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모시며 살게 될 것이다.
[더 내려놓음], 길을 묻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이 책은, 하나님의 뜻을 몰라 길을 묻는 이들이 읽어야 한다.
무엇을 붙잡아야하고, 어떤 길을 가야할지 몰라 길을 묻는 이들에게,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어떤 길을 가야할지를 가르쳐 주는 길라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금융위기에 힘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고, 더 내려 놓을 것이 없어서 흐느끼는 이들에게 내려놓음의 복을 알게 해 줄 것이다. 또한 가장 낮은 곳에서 붙잡아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다시 일어서게 해 줄 것이다. 독자들에게 있는 이 위기가 복의 전환기가 될 것이라 소망한다.
바라기는, 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아끼고 사랑했으면 한다.
또한 읽음으로 만족하지 말고, ‘내려놓음’, ‘더 내려놓음’으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욥(Job)이 위대한 것은 그 고난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자신을 내려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 ‘야훼 신앙’을 내려놓지 않고 붙잡았다는 것이요, 이론적인 하나님에서, 현실적인 하나님, 우리네 삶속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만났다는 것이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의 삶을 읽는다는 것이요,
한 권의 책을 쓴다는 것은, 한 사람의 삶을 내려놓는 다는 것이요,
한 권의 책을 서평 하는 것은, 그렇게 살도록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것이다.
이제 ‘더 내려놓음’의 책을 손에서 내려놓으며 더 내려놓음의 삶으로 걸어간다.
오늘 나는 어제와는 다른 장(chapter)과의 책을 써 간다. 누군가에게 읽혀져도 부끄럽지 않는 ‘김영덕의 인생’이라는 제목의 책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