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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직업 배정의 날



 어른들은 자신들의 일을 열심히 했고, 아이들은 열두 살이 될 때까지 학교에 다녔다. 학교를 다니는 마지막 날은 ‘배정일’이라고 불렀다. 그날은 졸업하는 학생들이 직업을 배정받는 날이었다.

 

졸업생들은 모두 엠버 학교의 8교실에 모여 있었다. 241년 배정일, 아침이면 늘 시끌벅적하던 이 교실이 평소와는 달리 쥐죽은 듯 고요했다. 졸업생 스물네 명은 이미 한참 작아져 버린 책상 앞에 허리를 꼿꼿이 편 채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제 막 선생님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모든 졸업생들에게 행운을 비는 것으로 마지막 날 연설을 마쳤다. 할 말이 바닥 난 선생님은 닳아서 올이 풀린 숄을 어깨에 꼭 두르고 초조한 표정으로 책상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명예로운 특별손님인 엠버의 시장은 아직까지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 발로 바닥을 이리저리 문질러 댔다. 쏜 선생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문이 덜거덕거리며 열리더니 시장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마치 약속시간에 늦은 장본인이 자신이 아니라 학생들이라고 하는 듯했다.


 “어서 오십시오, 콜 시장님.” 쏜 선생님이 인사하며 시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장은 입술을 실룩이며 웃었다. “쏜 선생.” 쏜 선생님의 손을 감싸 쥐며 시장이 입을 뗐다. “또 한 해가 시작되는군요. 모두 축하합시다.” 시장은 몸집이 크고 뚱뚱한 사람이었다. 배가 얼마나 뚱뚱한지 팔은 상대적으로 작고 초라해 보여서 마치 몸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시장은 한 손에 작은 헝겊가방을 들고 있었다.

 

 어기뚱거리며 걸어가 교실 앞에 선 시장은 학생들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시장의 축 처진 회색빛 얼굴은 보통 사람의 피부보다 훨씬 뻣뻣해서, 뭔가 특이한 소재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시장의 얼굴은 지금 애써 웃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최고 학년의 젊은이 여러분.” 시장이 연설을 시작했다. 일단 여기서 말을 멈춘 시장은 교실을 잠시 훑어 보았다. 그의 눈초리는 머릿속으로 깊이 경계하는 듯 매서웠다. 시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배정의 날입니다, 그렇죠? 예! 먼저, 우리는 교육을 받습니다. 그런 다음 엠버 시를 위해 봉사합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줄지어 앉아 있는 학생들을 따라 앞뒤로 움직이더니 누군가가 연설 내용을 수긍이라도 해 주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은 들고 있던 가방을 쏜 선생님의 교탁 위에 올려놓더니 손을 그 위에 얹었다. “그 봉사활동이 무엇이 될까요, 네? 아마도 지금 여러분들 모두가 궁금해 하고 있겠지요.” 시장이 다시 웃음을 짓자, 무거운 뺨이 주름져 접혀 올라갔다.

 

 리나의 손이 차가웠다. 리나는 망토로 몸을 단단히 감싸고는 무릎 사이에 손을 끼우고 지그시 눌렀다. 제발 서둘러 줘요, 시장님. 리나는 숨죽여 말했다. 제발 우리들이 선택하고, 그걸로 끝나게 할 수는 없나요? 둔 역시 마음속으로 같은 말을 되뇌고 있었다. 단지 ‘제발’이라는 단어만 쓰지 않을 뿐이었다.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리며 시장은 말을 이어나갔다. “명심해야 할 것은 여러분이 오늘 뽑은 직업은 단지 3년간만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3년이 지나면 평가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맡은 일을 잘 해낸다면? 좋습니다. 여러분은 그 일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또 다른 곳에 인원이 더 필요하다면? 여러분들은 재배정될 것입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학생들을 향해 손가락을 쿡쿡 찔러 대며 시장은 계속해서 말했다. “엠버 시의…… 모든…… 작업들은 반드시 제대로 수행되어야 합니다.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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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2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면산 2008-09-25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간만에 흥미로운 책 발견^^
엠버시가 어떻게 생겼을지,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궁금..
책읽고 영화보러 가야지~
 
짧은 글









엠버 시를 위한 안내문


엠버 시가 갓 건설되어 아직 사람들이 살지 않던 무렵, 건설 책임자와 부책임자 모두 지쳐 바닥에 앉아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적어도 200년 동안은 사람들이 이 도시를 떠나서는 안 될 거야.” 건설 책임자가 말했다. “아니, 어쩌면 220년이 넘게 걸릴지도 모르지.”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할까요?” 부책임자가 물었다.

“그래야겠지. 우리로선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런데 그때가 되었을 때,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부책임자가 다시 물었다.

“물론, 그들에게 안내문을 남겨 두어야겠지.” 책임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누가 그 문서를 보관하죠? 항상 안전하게, 비밀을 지키며 안내문을 보관하는 임무를 누구에게 믿고 맡길 수 있을까요?”

“엠버의 시장이 그 임무를 맡게 될 거야.” 책임자가 답했다.

“정해진 때가 되면 자동으로 열리는 자물쇠가 달린 상자에 안내문을 넣어 둘 걸세.”

“그럼, 시장에게는 그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미리 일러둘 건가요?” 부책임자가 물었다.

“아니. 그거야말로 그들이 절대 알아선 안 되는 정보지. 상자가 저절로 열리기 전까진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돼.”

“그럼 첫 시장이 다음 시장에게, 그 시장은 또 그 다음 시장에게, 그렇게 해가 지날 때마다 상자가 전달되면 모든 비밀들은 지켜지겠군요.”

“우리가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나?” 책임자가 말했다.“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여전히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어. 손꼽아 기다린 그날이 왔는데 정작 도시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고, 그들이 돌아갈 안전한 장소가 아예 없을 수도 있지.”

그렇게 해서 엠버 시의 첫 번째 시장이 상자를 건네받았다. 시장은 상자를 신중히 보호하고 비밀을 지키겠다고 엄숙하게 맹세했다. 나이가 들고 임기를 마친 첫 번째 시장이 다음 시장에게 상자를 물려주었다. 다음 시장은 상자에 관한 비밀을 철저하게 지켰으며, 그 다음 시장도 정해진 대로 잘 따랐다.

오랫동안 아무런 차질 없이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잘 진행되었다. 그런데 일곱 번째 시장은 앞선 시장들에 비해 그다지 존경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던 반면 상황은 더 절박했다. 시장은 병-그 당시 엠버 사람들이 흔하게 걸리던 기침병이었다-을 앓고 있었는데, 그 상자 안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줄 신묘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장은 공회당 지하에 마련된 비밀 보관소에서 상자를 꺼내 집으로 몰래 가져와 망치로 상자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그때 시장은 이미 몸이 무척이나 쇠약해진 상태였다. 시장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상자 뚜껑을 살짝 찌그러트리는 것뿐이었다. 결국 시장은 도시의 비밀 보관소에 상자를 되돌려 놓지도 못하고 다음 시장에게 이 비밀에 대해 털어놓지도 못한 채 죽었다. 상자는 낡은 가방들과 잡동사니들에 떠밀려 벽장 뒤 깊숙한 곳에 처박히고 말았다.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한 해 한 해 지나갔다. 그러다가 어느덧 정해진 시각이 되었다. ‘틱!’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저절로 풀리자 상자의 뚜껑이 스르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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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군 2008-09-25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사람을 잘 뽑아야한다는 교훈인가요 ㅋㅋ
재있을 것 같네요. 엠버시를 안내문은 어떤 내용일지..
계속 연재해주세요^^

fdsa8906 2008-09-25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V에서 영화 소개를 봤다, 겨울에 볼만한 기대작이 아닐까?
SF,환타지 영화, 소설 등은 빼놓지 않고 보는 편이다.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세상이 어쩌면 지금의 MB정권과 닮아있는지... -.-;;;
영화보기 전에 미리 책을 구해서 봐야겠다.
기대되는 책,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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