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눈이 내리다
김보영 지음 / 래빗홀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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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서평단에 선정되어 주관적으로, 그러나 진심을 담아 작성한 글입니다.

SF문학의 오래된 팬인 저에게 듀나를 위시한 1세대 한국 SF 작가인 김보영은 친숙한 이름입니다. 그가 저에게 '친숙한'에서 '최애'인 작가로 격상한 것은 읽는 내내 충격에 휩싸이며 감탄사를 내뱉었던 '종의 기원담'인데, 이후로 읽지 못한 김보영의 소설들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찾아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래빗홀클럽 5월 도서가 김보영 소설집이라니, 이런 기쁜일이 저에게 일어나다니!

저는 개인적으로 '뛰어난 스토리보다 더 뛰어난 세계관 내지는 설정'을 SF 장르문학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는데, 김보영의 소설은 이런 저의 취향을 잘 만족시키는데, 이 소설집은 더할 나위 없는 'SF 맛집'입니다. 어떤 작품을 고르더라도 독자를-장르문학 독자가 아니더라도-만족시키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래빗홀클럽 미션은 '문장 교환'이니 이 이상의 서평은 생략하고 '고래눈이 내리다'에서 인상 깊었던 문장을 공유합니다.

“우리 인생도 선택으로 가득해. 하지만 그래봤자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어차피 평생 갈 수 있는 길이 하나뿐이라면 결국 안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영웅적인 선택도 바보스러운 선택도 할 수가 없어. 원하지 않는 길을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고. 그렇게 우리는 다 자신의 인생에서 소외되는 거야…… 하지만 게임은 그렇지 않아. 선택지가 나타났을 때 알게 되는 거야. ‘나는 저 모든 길을 다 갈 수 있겠구나.’ 세계의 이면을 다 보고, 모든 가능성의 경로와 결과를 다 볼 수 있겠구나…… 그걸 알게 되는 순간 내 게임을 하는 사람은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그게 바로 게임이야. 그게 진짜 게임 시나리오라고.” (p. 46, ‘저예산 프로젝트’)

늘 바라마지않았다. 이런 풍경이 너의 결말이기를. 같이 맛있는 식사를 하고 수다를 떨고, 따듯하고 푹신한 곳에 편히 누워 고요함 속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되기를. 너의 결말이 안온함 가운데 찾아오기를. 그렇게 뚝 끊긴 너의 이야기에 내가 지금 만든 이 작은 결말을 덧붙이는 것으로 위로받을 수 있기를. 그렇게 너의 새 결말을 같이하는 것으로 또한 내 이야기를 다시 마무리하기를. (p.109, ‘껍데기뿐이라도 좋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나는요, 내 가족이 있으니까 존재해요. 나 혼자서는 살아 있어봤자 산 게 아니에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 나는요, 내 동생들이 보기에만 살아 있으면 돼요. 내가 지금 좀비면 어때요? 나는 그 애들에게 밥을 먹여주는 대단한 좀비예요. 그럼 이 좀비는 존재해야죠. 내가 살아 있는게 중요하냐고요? 아뇨, 하나도, 조금도 안 중요해요. 나는요, 가족이 살아 있는 게 세상 무엇보다도 중요해요." (p.139, ‘느슨하게 동일한 그대’)

나는 역장에 둘러싸인 채 제주공항 전송기에서 나타났다. 전신이 땀에 푹 젖어 옷이 축축했다. 숨은 헐떡였고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전송기는 내 단내까지 복사했다. 나는 ‘나’를 인지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느꼈다. 내게는 주관이 있었고 그 주관은 내가 영혼을 가진 존재처럼 느끼게 했다. 나는 죽음을 기억할 수 없었고 삶만을 기억했다. 전송기는 어떻게 영혼을 만들어내는 걸까? 하긴, 신 앞에서 엄마 뱃속에서의 열 달과 순간에 차이가 있겠는가? 둘 다 신에게는 찰나의 숨결에 불과한 것을. (p. 158, ‘느슨하게 동일한 그대’)

나는 내 이어진 죽음을 생각했고 이어진 생명을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죽음 속을 걷고 있든 생명 속을 걷고 있든, 별로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가 아름답고 살아 있는 것들은 눈부시며,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니….. (p.165, ‘느슨하게 동일한 그대’)

그날, 내 모듈 한쪽이 열렸다. 국가기관에서 내 제어센터에 강제로 접속해 벌인 일이었다. 초기 거주구들은 기본적으로 탑재해야 했던 군사 모듈에 숨어 있던 생화학 미사일이 지상으로 낙하했다. 표토 위에 덮여 땅을 굳게 하고, 맹독을 살포하고, 식물을 말려 죽이고, 벌레들을 떼죽음당하게 하고, 바다에서 물고기가 섬처럼 떠오르게 하는 포탄이. 향후 수십 년간 반경 10킬로미터 이내에는 풀 한 포기 나지 않게 하는 포탄이. (p.252, ‘귀신숲이 내리다’)

어린 날에는 내 아픔이 다 밖에서 온 줄 알았다. 내가 본래 가진 것은 다 좋고 빛나는 것뿐이고 내게 있는 어둠은 다 세상이 주었다 믿었다. 하지만 어쩌면 슬픔은 처음부터 내 생명에 깃들어 있었으리라. 어떤 사람은 그렇게 심장에 가시를 박고 태어나는 모양이다. 아리고 쓰라리고 서러운 것이 애초에 내 영혼에 깃들어 있었고 단지 너처럼 좋은 인연이 있어 보듬고 달리주었ㅇ르 뿐이더라. (p.269, ‘ 봄으로 가는 문’)

* 이 글은 도란군의 서재 네이버 블로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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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에 관하여
베레나 카스트 지음, 최호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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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서평단에 선정되어 주관적으로, 그러나 진심을 담아 작성한 글입니다.

관계의 양면성은 무엇보다도 헌신과 개별화의 양면성인 것이다. 이런 양면성을 억누르면, 따라서 또한 우리의 분리 공격성을 억누르면 관계는 우리에게 훨씬 더 위험하게 작용할 것이다. 또한 관계 자체가 훨씬 더 위태로워질 것이다. 그래서 각자의 독립성이 사라진 공생 관계에 빠지거나, 이런 친밀감과 거리감의 끊임없는 수정이 없으면 어느 날 갑자기 이별의 위험에 직면할 것이다. 이런 친밀감과 거리감의 양면성은 인간관계에서 경험하는 모든 상실 불안의 토대를 이룬다. (p. 236)

이런 분리 불안에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 공허함과 지루함이다. 상상력을 발휘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처하면 불안감에 휩싸인다. 또는 존재가 부정되고 무가치해지는 것에 대한 커다란 불안과 절망감이 꿈틀댄다. (p. 266)

이 통합과 거리 두기의 단계에서는 더 이상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우리는 인간이 작별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살기 위해 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신이 이미 통합 단계에 있다는 것을 감지하면서도 여전히 초기 관계의 강렬함이 남아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하다. 작별하는 존재란 삶이 죽음을 포함하므로 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 (p. 283)

현대인에게 불안은 통제 불가능한 상수와도 같습니다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평안(平安)의 최소한의 전제조건인데, 우리는 대부분 무언가를 하거나, 누군가와 함께 있어 이 상태를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모바일 기기의 발전은 우리를 온종일 일종의 불안 중독에 빠지게 만듭니다. 이 세상엔 어찌나 사건사고가 많은지, 이 모든 일이 나한테도 벌어질 것만 같은 불안감으로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되는 것-아니면 잠깐만 보려던 쇼츠를 두 시간 동안 보다 후회에 빠진다던지-이죠. 이처럼 현대인의 만성질환이 되어버린 불안은, 그러나 뚜렷한 해결책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중에 나온 수많은 처방은 이미 불안이 패시브 스킬로 장착된 사람에게 사후약방문에 불과합니다. 이럴 때에는 근본적인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우선 이것의 정체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죠. 불안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걸까요?

불안에 관하여는 카를 융 심리학 권위자이자 심리 치료사인 베레나 카스트 교수의 저작으로, 무려 15판까지 출간된 불안 심리학의 고전입니다. ‘우리는 왜 불안한가?’에서 출발하는 이 책은, 불안을 인간이 아플 때 생기는 증상으로 정의합니다. , 불안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보내는 위험 신호라는 것이죠. 우리가 느끼는 불안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말이 맞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나의 상태-외모, 직업, 심리 등 내외면 전반에 대한-불안, 나의 불행한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타인과의-가족 등의 정서적으로 가까운 이들을 포함한-관계에 대한 불안 등은 방치하면 우리를 불안병에 걸리게 만들고, 이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데미지를 입히게 되는 것이죠. 또한 불안은 정신분석학 관점에서 무의식의 측면에서 그 원동력을 분석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불안이 초래하는 신체적, 심리적 상태나 불안으로 인한 장애도 각양각색입니다. 저자는 불안을 해소하는 여러 실용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불안에 맞서는 자세,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불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불안이 전달하는 감정적 신호에 주모하고 이에 따른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이 책은 불안을 다스리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써 머리맡에 꼭 두어야할 필수재와도 같습니다. 누구든 불안하지 않은 자는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불안을 품고 보듬어 우리 모두가 희망의 바다에서 유영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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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의 제물 - 인민교회 살인사건 명탐정 시리즈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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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추리 소설의 묘미를 사건을 파헤치는 것이 아닌 이해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굳이 머리를 쓸 필요 없이 느긋하게 읽으며 추리 게임이 끝날 즈음에 진행되는 사건의 해결사-탐정, 형사, 작가 자신 등등-의 해설을 마음 편하게 즐기면 된다는 거죠. 요는 재미있게 읽는 것을 장르 소설의 미학이라 정의할 때, 추리 장르는 이 정의에 가장 잘 맞는 유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특수한 상황을 가정한 추리 소설은 독자의 쾌감을 더욱 자극할 수 있습니다. 왜나면 이 무대는 설계자가 현실의 제약 없이 창조한 세계로, 작가는 현실이라면 논리의 비약으로 취급되었을 트릭을, 이 세계에서는 논리적 완결성을 갖춘 것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 소설 명탐정의 제물에서 사이비 교단의 천여명의 신자가 집단 자살한 충격적인 사건의 진실-에 숨겨진 또다른 진실-같은 것 말입니다.

탐정 오토야 다카시는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조수 아리모리 리리코와 함께 미제 사건을 해결하며 명성을 떨쳐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리리코가 학회 참석차 뉴욕으로 간 뒤 행방이 묘연해지자 오토야는 미국으로 가 그녀의 행방을 추적한 끝에 그녀가 조든타운이라는 종교집단의 조사단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아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교세를 떨치며 2만명이 넘는 신자를 거느리던 인민교회교주인 짐 조든이 내부에서 발생한 스캔들로 독실한 천여명의 신자를 이끌고 남아메리카 가이아나로 집단 이주하였고, 미국 대부호 찰스 클라크가 망명을 지원해달라는 조든의 요청을 받아들이기 전 조사단을 꾸려 가이아나로 파견된 것. 다카시는 리리코를 데리고 오기 위해 친구이자 저널리스트인 노기의 도움으로 함께 조든타운으로 향하게 되나, 도착하자마자 조든타운의 간부에 의해 노기가 살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 조사단 멤버가 연이어 살해당하는데과연 다카시는 리리코를 무사히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작가 시라이 도모유키는 특수설정 미스터리’-일본 한정의 추리 세부 장르로 현실이 아닌 SF, 판타지의 세계관을 결합하여 비현실적 특수 설정을 전제한 상황에서의 추리를 하는 장르 소설로, 일본 유명 만화인 데스노트가 실례-의 대가로, 이번 작품에서 그는 폐쇄적인 종교집단 마을 조든타운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과 기적을 믿는 사이비 교단의 교주와 간부 및 신자전체가 용의자인 특수설정 밀실 살인을 펼쳐냅니다. 살인 장소, 살인 용의자, 살인 동기 등 모든 것이 특이한, 천여명이 거주하는 마을 전체가 밀실인 장소에서 끔찍한 방법으로 죽은 희생자의 연쇄 살인 사건의 트릭을 파헤치는 것이죠. 기기괴괴한 살해 방법과 비이성적인 조든 타운의 종교 집단의 행동, 동료의 죽음에도 차분하고 이성적인 주인공 일행 등의 모습은 이 스토리 전체가 특수설정 살인 사건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연극 무대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 소설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고 비판 받는 요인이죠. 그러나 이런 특수함을 받아들이고 책을 읽는다면, 여러분은 결말부의 사건의 진실 폭로부분에서 큰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사건의 진짜 반전이 드러나는 에필로그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을 정도로 진심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 등의 전통 추리물과 완전히 다른 이 소설의 매력에 빠져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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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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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조화가 컴퓨터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인 것과 마찬가지로, SF 장르소설에 있어 과학적 사실이나 이론, 기술을 기반으로 한 설정 및 세계관(하드웨어)과 이런 외삽을 기반으로 풀어내는 스토리와 내러티브(소프트웨어)의 조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장르소설은 순문학과 달리 세계관 자체가 소설의 핵심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속칭 ‘ㄱ쩌는 세계관’만 있다면 스토리가 어찌 되든 상관 없이 환호해주는 SF팬덤으로 인한-이 두 요소 사이의 미묘한 균형점-애초에 세계관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의-을 찾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저는 이러한 ‘SF소설 세계관 만능론자’로서 우리나라에는 이 균형점을 잘 포착해낸 작품이 아직은 없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초엽의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죠.

김초엽 작가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데뷔 후 꾸준한 작품활동을 이어왔는데, 저는 그가 ‘파견자들’에서 하드-SF-적 세계관을 일정 수준 완성한 것으로 조심스레 평가합니다. 웰스의 ‘우주 전쟁’을 통해 확립된 SF 하위 장르인 ‘외계의 침공(Alien Invasion)’의 플롯을 가지고 있는 이 소설은, 지구를 찾아온 외계 생명체가 목적과 이유가 없는 비인간형-비지성체인 일종의 균류라는 변주를 시도하여 전형적인 정복자-피정복자 관계의 서사를 절묘하게 비틉니다. 의식이 없는 존재를 대상으로 한 복수가 성공한 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주에서 지구로 불시착한 이들 범람체는 닿는 즉시 그 생명체에게 광증을 퍼뜨리는 아포(芽胞)로, 인류는 지상을 뒤덮은 아포를 피해 지하에 도시를 세우고 어둠의 삶을 힘겹게 이어 나갑니다. 그러나 인류는 원래 자신들의 것이었던 지상을 탈환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이어왔고, 이 시도는 ‘파견자’라는 존재를 통해 구체화 됩니다. 그들은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지상 출입이 가능한, 얼마 안되는 지하도시와 지상을 잇는 통로를 관리하고 거주 가능한 곳을 탐험하는 이들입니다. 주인공 태린은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스승 이제프와 같은 파견자가 되기 위해 자격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태린은 모든 사람들이 이식하는 보조기억장치 ‘뉴로브릭’의 연결이 끊어졌다는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합니다. 그러나 1차 시험을 종료를 앞두고 머릿속에서 누군가 말을 거는 듯한 강한 환청과 환상으로 기절하고 마는데. 뉴로브릭 연결 부작용으로 보이는 이 증상에 태린은 ‘쏠’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길들이려 노력하게 됩니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쏠과의 협력으로 2차 시험 과제를 완료하고 무사히 복귀하며 합격을 눈앞에 두게 된 태린. 그러나 그순간 갑자기 쏠이 의식을 지배하고 태린이 어떻게 할 틈도 없이 과제로 습득한 아포가 담긴 용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 개방해버리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이 일로 상벌위원회에 회부된 태린의 앞날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언급은 할 수 없지만, 이 소설의 숨겨진 주제는 ‘의식의 범위와 정의’입니다. 우리 몸은 생물학적으로 수많은 세포와 세균의 집합체이나, 과학적으로 의식은 우리 뇌에서 구현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은,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미세 생물을 대표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부부는 어떻습니까? 매우 친밀하며 모든 것을 함께 하다 보니 결국 서로를 (물리적으로) 닮게 되는 부부는 공동의 의식을 갖는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외계의 방문자는 인류를 지구라는 거대 유기체를 좀먹는, 의식을 공유하지 않는 악질 바이러스로 간주할 지도 모릅니다. 지구를 덮은 범람체의 행동은 일종의 친교 행위일수도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악수를 나누는데, 마주잡는 손바닥 사이에 작디작은 벌레가 끼여 죽었다고 이를 가엾게 여기진 않을 것입니다.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하기 싫다면, 인간은 나름의 방법으로 생존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태린이 했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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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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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읽은 후 작성한 서평에서도 언급했었지만, 그의 소설들은 ‘흡인력’이 정말로 강합니다. 왜 그런 소설들 있잖아요.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도저히 멈출 수 없어서 결국 마지막 장까지 무엇에 홀린 듯 탐식하게 되는 그런 책 말이죠. 몸의 소설이 딱 이렇습니다. 최하급의 소재가 주어져도 최상급의 이야기를 창조해내는 작가.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라 할지라도 한 수 접는 천재 이야기꾼의 장편소설, ‘면도날’을 읽어보았습니다.

조실부모에도 유복한 후견인 밑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래리. 그는 평범한 상류층의 삶을 살고 어려서부터 사귀어 온 어여쁜 약혼녀도 있는, 상류사회의 일원으로서의 미래가 보장된 청년이었습니다. 소원이었던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이유로 참전했던 1차 세계대전에서 친해진 전우가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눈앞에서 숨을 거두는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종전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존재론적 질문에 깊이 사로잡히게 됩니다. 수년간의 방황과 고민 끝에 그는 결국, 자신의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인간 존재의 고결함의 완성을 위한 기나긴 구도의 여정을 떠납니다. 한편, 그녀에게 버림받은 전 약혼녀 이사벨은 래리와는 정반대의 선택을 합니다. 사랑을 버리고 안정되고 화려한 삶을 선택한 것이죠. 래리의 친구인 재벌2세 그레이와 결혼한 그녀는 예정된 상류사회의 인생을-물론 부침은 있었지만-그레이와 함께 살아갑니다. 각자가 선택한 인생, 과연 누가 옳은 것일지.

작가 자신이자 이야기의 화자인 ‘나’는 평생에 걸친 우정을 맺은 사교계의 명사이자 이사벨의 외숙부인 엘리엇을 통해 이사벨과 래리 뿐 아니라 엘리엇을 포함한, 그들과 인연이 된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느슨하게 관찰하고, 때로는 직접적으로 개입하면서 서사를 이끌어 나갑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을 함부로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죽음 직전까지도 사교계에서의 평판을 얻기 위해 평생을 바친 엘리엇,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던 이사벨, 시대의 전형적인 남성상이었던 그레이, 자유분방하고 타락한 삶을 살아간 래리를 스쳐 지나갔던 수잔과 소피 등 래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부정적’으로 살아갔다고 비판 받을 만한 여러 등장인물들에 대해 화자인 나는 그들의 긍정적인 면모도 부각시키면서 오히려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봅니다. 흔히 말하는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아포리즘의 기나긴 각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아주 재미있고 흥미로운.

‘나’는 구도자의 삶을 선택한 주인공-이라고 화자는 생각하지도 않는 듯한-래리에 대해서도 이상적이라고 평하지도 않습니다. 그 또한 고를 수 있는 인생의 선택지라고 보는-이사벨과 결혼하는 선택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것이죠.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래리의 삶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소설에서만, 현실이라 할 지라도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가능한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나와 맞지 않다고 말이죠.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저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텐데, 다행히도 몸은 이 소설을 흔한 교양소설로 마무리하지 않는 것으로 저를 포함한 범인(凡人)들에게도 면죄부를 부여했습니다.

이 소설까지 읽음으로서 ‘인생의 베일’을 제외한 몸의 주요 장편소설을 모두 읽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몸도 저의 전작주의 목록에 들어갈 작가가 될 것 같네요. 너무나 재미있다면, 읽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 이 글은 도란군의 서재 네이버 블로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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