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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눈이 내리다
김보영 지음 / 래빗홀 / 2025년 5월
평점 :
* 이 글은 서평단에 선정되어 주관적으로, 그러나 진심을 담아 작성한 글입니다.
SF문학의 오래된 팬인 저에게 듀나를 위시한 1세대 한국 SF 작가인 김보영은 친숙한 이름입니다. 그가 저에게 '친숙한'에서 '최애'인 작가로 격상한 것은 읽는 내내 충격에 휩싸이며 감탄사를 내뱉었던 '종의 기원담'인데, 이후로 읽지 못한 김보영의 소설들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찾아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래빗홀클럽 5월 도서가 김보영 소설집이라니, 이런 기쁜일이 저에게 일어나다니!
저는 개인적으로 '뛰어난 스토리보다 더 뛰어난 세계관 내지는 설정'을 SF 장르문학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는데, 김보영의 소설은 이런 저의 취향을 잘 만족시키는데, 이 소설집은 더할 나위 없는 'SF 맛집'입니다. 어떤 작품을 고르더라도 독자를-장르문학 독자가 아니더라도-만족시키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래빗홀클럽 미션은 '문장 교환'이니 이 이상의 서평은 생략하고 '고래눈이 내리다'에서 인상 깊었던 문장을 공유합니다.
“우리 인생도 선택으로 가득해. 하지만 그래봤자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어차피 평생 갈 수 있는 길이 하나뿐이라면 결국 안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영웅적인 선택도 바보스러운 선택도 할 수가 없어. 원하지 않는 길을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고. 그렇게 우리는 다 자신의 인생에서 소외되는 거야…… 하지만 게임은 그렇지 않아. 선택지가 나타났을 때 알게 되는 거야. ‘나는 저 모든 길을 다 갈 수 있겠구나.’ 세계의 이면을 다 보고, 모든 가능성의 경로와 결과를 다 볼 수 있겠구나…… 그걸 알게 되는 순간 내 게임을 하는 사람은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그게 바로 게임이야. 그게 진짜 게임 시나리오라고.” (p. 46, ‘저예산 프로젝트’)
늘 바라마지않았다. 이런 풍경이 너의 결말이기를. 같이 맛있는 식사를 하고 수다를 떨고, 따듯하고 푹신한 곳에 편히 누워 고요함 속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되기를. 너의 결말이 안온함 가운데 찾아오기를. 그렇게 뚝 끊긴 너의 이야기에 내가 지금 만든 이 작은 결말을 덧붙이는 것으로 위로받을 수 있기를. 그렇게 너의 새 결말을 같이하는 것으로 또한 내 이야기를 다시 마무리하기를. (p.109, ‘껍데기뿐이라도 좋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나는요, 내 가족이 있으니까 존재해요. 나 혼자서는 살아 있어봤자 산 게 아니에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 나는요, 내 동생들이 보기에만 살아 있으면 돼요. 내가 지금 좀비면 어때요? 나는 그 애들에게 밥을 먹여주는 대단한 좀비예요. 그럼 이 좀비는 존재해야죠. 내가 살아 있는게 중요하냐고요? 아뇨, 하나도, 조금도 안 중요해요. 나는요, 가족이 살아 있는 게 세상 무엇보다도 중요해요." (p.139, ‘느슨하게 동일한 그대’)
나는 역장에 둘러싸인 채 제주공항 전송기에서 나타났다. 전신이 땀에 푹 젖어 옷이 축축했다. 숨은 헐떡였고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전송기는 내 단내까지 복사했다. 나는 ‘나’를 인지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느꼈다. 내게는 주관이 있었고 그 주관은 내가 영혼을 가진 존재처럼 느끼게 했다. 나는 죽음을 기억할 수 없었고 삶만을 기억했다. 전송기는 어떻게 영혼을 만들어내는 걸까? 하긴, 신 앞에서 엄마 뱃속에서의 열 달과 순간에 차이가 있겠는가? 둘 다 신에게는 찰나의 숨결에 불과한 것을. (p. 158, ‘느슨하게 동일한 그대’)
나는 내 이어진 죽음을 생각했고 이어진 생명을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죽음 속을 걷고 있든 생명 속을 걷고 있든, 별로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가 아름답고 살아 있는 것들은 눈부시며,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니….. (p.165, ‘느슨하게 동일한 그대’)
그날, 내 모듈 한쪽이 열렸다. 국가기관에서 내 제어센터에 강제로 접속해 벌인 일이었다. 초기 거주구들은 기본적으로 탑재해야 했던 군사 모듈에 숨어 있던 생화학 미사일이 지상으로 낙하했다. 표토 위에 덮여 땅을 굳게 하고, 맹독을 살포하고, 식물을 말려 죽이고, 벌레들을 떼죽음당하게 하고, 바다에서 물고기가 섬처럼 떠오르게 하는 포탄이. 향후 수십 년간 반경 10킬로미터 이내에는 풀 한 포기 나지 않게 하는 포탄이. (p.252, ‘귀신숲이 내리다’)
어린 날에는 내 아픔이 다 밖에서 온 줄 알았다. 내가 본래 가진 것은 다 좋고 빛나는 것뿐이고 내게 있는 어둠은 다 세상이 주었다 믿었다. 하지만 어쩌면 슬픔은 처음부터 내 생명에 깃들어 있었으리라. 어떤 사람은 그렇게 심장에 가시를 박고 태어나는 모양이다. 아리고 쓰라리고 서러운 것이 애초에 내 영혼에 깃들어 있었고 단지 너처럼 좋은 인연이 있어 보듬고 달리주었ㅇ르 뿐이더라. (p.269, ‘ 봄으로 가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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