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의 제물 - 인민교회 살인사건 명탐정 시리즈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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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추리 소설의 묘미를 사건을 파헤치는 것이 아닌 이해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굳이 머리를 쓸 필요 없이 느긋하게 읽으며 추리 게임이 끝날 즈음에 진행되는 사건의 해결사-탐정, 형사, 작가 자신 등등-의 해설을 마음 편하게 즐기면 된다는 거죠. 요는 재미있게 읽는 것을 장르 소설의 미학이라 정의할 때, 추리 장르는 이 정의에 가장 잘 맞는 유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특수한 상황을 가정한 추리 소설은 독자의 쾌감을 더욱 자극할 수 있습니다. 왜나면 이 무대는 설계자가 현실의 제약 없이 창조한 세계로, 작가는 현실이라면 논리의 비약으로 취급되었을 트릭을, 이 세계에서는 논리적 완결성을 갖춘 것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 소설 명탐정의 제물에서 사이비 교단의 천여명의 신자가 집단 자살한 충격적인 사건의 진실-에 숨겨진 또다른 진실-같은 것 말입니다.

탐정 오토야 다카시는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조수 아리모리 리리코와 함께 미제 사건을 해결하며 명성을 떨쳐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리리코가 학회 참석차 뉴욕으로 간 뒤 행방이 묘연해지자 오토야는 미국으로 가 그녀의 행방을 추적한 끝에 그녀가 조든타운이라는 종교집단의 조사단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아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교세를 떨치며 2만명이 넘는 신자를 거느리던 인민교회교주인 짐 조든이 내부에서 발생한 스캔들로 독실한 천여명의 신자를 이끌고 남아메리카 가이아나로 집단 이주하였고, 미국 대부호 찰스 클라크가 망명을 지원해달라는 조든의 요청을 받아들이기 전 조사단을 꾸려 가이아나로 파견된 것. 다카시는 리리코를 데리고 오기 위해 친구이자 저널리스트인 노기의 도움으로 함께 조든타운으로 향하게 되나, 도착하자마자 조든타운의 간부에 의해 노기가 살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 조사단 멤버가 연이어 살해당하는데과연 다카시는 리리코를 무사히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작가 시라이 도모유키는 특수설정 미스터리’-일본 한정의 추리 세부 장르로 현실이 아닌 SF, 판타지의 세계관을 결합하여 비현실적 특수 설정을 전제한 상황에서의 추리를 하는 장르 소설로, 일본 유명 만화인 데스노트가 실례-의 대가로, 이번 작품에서 그는 폐쇄적인 종교집단 마을 조든타운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과 기적을 믿는 사이비 교단의 교주와 간부 및 신자전체가 용의자인 특수설정 밀실 살인을 펼쳐냅니다. 살인 장소, 살인 용의자, 살인 동기 등 모든 것이 특이한, 천여명이 거주하는 마을 전체가 밀실인 장소에서 끔찍한 방법으로 죽은 희생자의 연쇄 살인 사건의 트릭을 파헤치는 것이죠. 기기괴괴한 살해 방법과 비이성적인 조든 타운의 종교 집단의 행동, 동료의 죽음에도 차분하고 이성적인 주인공 일행 등의 모습은 이 스토리 전체가 특수설정 살인 사건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연극 무대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 소설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고 비판 받는 요인이죠. 그러나 이런 특수함을 받아들이고 책을 읽는다면, 여러분은 결말부의 사건의 진실 폭로부분에서 큰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사건의 진짜 반전이 드러나는 에필로그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을 정도로 진심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 등의 전통 추리물과 완전히 다른 이 소설의 매력에 빠져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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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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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조화가 컴퓨터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인 것과 마찬가지로, SF 장르소설에 있어 과학적 사실이나 이론, 기술을 기반으로 한 설정 및 세계관(하드웨어)과 이런 외삽을 기반으로 풀어내는 스토리와 내러티브(소프트웨어)의 조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장르소설은 순문학과 달리 세계관 자체가 소설의 핵심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속칭 ‘ㄱ쩌는 세계관’만 있다면 스토리가 어찌 되든 상관 없이 환호해주는 SF팬덤으로 인한-이 두 요소 사이의 미묘한 균형점-애초에 세계관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의-을 찾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저는 이러한 ‘SF소설 세계관 만능론자’로서 우리나라에는 이 균형점을 잘 포착해낸 작품이 아직은 없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초엽의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죠.

김초엽 작가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데뷔 후 꾸준한 작품활동을 이어왔는데, 저는 그가 ‘파견자들’에서 하드-SF-적 세계관을 일정 수준 완성한 것으로 조심스레 평가합니다. 웰스의 ‘우주 전쟁’을 통해 확립된 SF 하위 장르인 ‘외계의 침공(Alien Invasion)’의 플롯을 가지고 있는 이 소설은, 지구를 찾아온 외계 생명체가 목적과 이유가 없는 비인간형-비지성체인 일종의 균류라는 변주를 시도하여 전형적인 정복자-피정복자 관계의 서사를 절묘하게 비틉니다. 의식이 없는 존재를 대상으로 한 복수가 성공한 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주에서 지구로 불시착한 이들 범람체는 닿는 즉시 그 생명체에게 광증을 퍼뜨리는 아포(芽胞)로, 인류는 지상을 뒤덮은 아포를 피해 지하에 도시를 세우고 어둠의 삶을 힘겹게 이어 나갑니다. 그러나 인류는 원래 자신들의 것이었던 지상을 탈환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이어왔고, 이 시도는 ‘파견자’라는 존재를 통해 구체화 됩니다. 그들은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지상 출입이 가능한, 얼마 안되는 지하도시와 지상을 잇는 통로를 관리하고 거주 가능한 곳을 탐험하는 이들입니다. 주인공 태린은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스승 이제프와 같은 파견자가 되기 위해 자격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태린은 모든 사람들이 이식하는 보조기억장치 ‘뉴로브릭’의 연결이 끊어졌다는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합니다. 그러나 1차 시험을 종료를 앞두고 머릿속에서 누군가 말을 거는 듯한 강한 환청과 환상으로 기절하고 마는데. 뉴로브릭 연결 부작용으로 보이는 이 증상에 태린은 ‘쏠’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길들이려 노력하게 됩니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쏠과의 협력으로 2차 시험 과제를 완료하고 무사히 복귀하며 합격을 눈앞에 두게 된 태린. 그러나 그순간 갑자기 쏠이 의식을 지배하고 태린이 어떻게 할 틈도 없이 과제로 습득한 아포가 담긴 용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 개방해버리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이 일로 상벌위원회에 회부된 태린의 앞날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언급은 할 수 없지만, 이 소설의 숨겨진 주제는 ‘의식의 범위와 정의’입니다. 우리 몸은 생물학적으로 수많은 세포와 세균의 집합체이나, 과학적으로 의식은 우리 뇌에서 구현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은,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미세 생물을 대표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부부는 어떻습니까? 매우 친밀하며 모든 것을 함께 하다 보니 결국 서로를 (물리적으로) 닮게 되는 부부는 공동의 의식을 갖는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외계의 방문자는 인류를 지구라는 거대 유기체를 좀먹는, 의식을 공유하지 않는 악질 바이러스로 간주할 지도 모릅니다. 지구를 덮은 범람체의 행동은 일종의 친교 행위일수도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악수를 나누는데, 마주잡는 손바닥 사이에 작디작은 벌레가 끼여 죽었다고 이를 가엾게 여기진 않을 것입니다.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하기 싫다면, 인간은 나름의 방법으로 생존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태린이 했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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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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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읽은 후 작성한 서평에서도 언급했었지만, 그의 소설들은 ‘흡인력’이 정말로 강합니다. 왜 그런 소설들 있잖아요.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도저히 멈출 수 없어서 결국 마지막 장까지 무엇에 홀린 듯 탐식하게 되는 그런 책 말이죠. 몸의 소설이 딱 이렇습니다. 최하급의 소재가 주어져도 최상급의 이야기를 창조해내는 작가.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라 할지라도 한 수 접는 천재 이야기꾼의 장편소설, ‘면도날’을 읽어보았습니다.

조실부모에도 유복한 후견인 밑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래리. 그는 평범한 상류층의 삶을 살고 어려서부터 사귀어 온 어여쁜 약혼녀도 있는, 상류사회의 일원으로서의 미래가 보장된 청년이었습니다. 소원이었던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이유로 참전했던 1차 세계대전에서 친해진 전우가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눈앞에서 숨을 거두는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종전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존재론적 질문에 깊이 사로잡히게 됩니다. 수년간의 방황과 고민 끝에 그는 결국, 자신의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인간 존재의 고결함의 완성을 위한 기나긴 구도의 여정을 떠납니다. 한편, 그녀에게 버림받은 전 약혼녀 이사벨은 래리와는 정반대의 선택을 합니다. 사랑을 버리고 안정되고 화려한 삶을 선택한 것이죠. 래리의 친구인 재벌2세 그레이와 결혼한 그녀는 예정된 상류사회의 인생을-물론 부침은 있었지만-그레이와 함께 살아갑니다. 각자가 선택한 인생, 과연 누가 옳은 것일지.

작가 자신이자 이야기의 화자인 ‘나’는 평생에 걸친 우정을 맺은 사교계의 명사이자 이사벨의 외숙부인 엘리엇을 통해 이사벨과 래리 뿐 아니라 엘리엇을 포함한, 그들과 인연이 된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느슨하게 관찰하고, 때로는 직접적으로 개입하면서 서사를 이끌어 나갑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을 함부로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죽음 직전까지도 사교계에서의 평판을 얻기 위해 평생을 바친 엘리엇,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던 이사벨, 시대의 전형적인 남성상이었던 그레이, 자유분방하고 타락한 삶을 살아간 래리를 스쳐 지나갔던 수잔과 소피 등 래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부정적’으로 살아갔다고 비판 받을 만한 여러 등장인물들에 대해 화자인 나는 그들의 긍정적인 면모도 부각시키면서 오히려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봅니다. 흔히 말하는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아포리즘의 기나긴 각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아주 재미있고 흥미로운.

‘나’는 구도자의 삶을 선택한 주인공-이라고 화자는 생각하지도 않는 듯한-래리에 대해서도 이상적이라고 평하지도 않습니다. 그 또한 고를 수 있는 인생의 선택지라고 보는-이사벨과 결혼하는 선택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것이죠.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래리의 삶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소설에서만, 현실이라 할 지라도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가능한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나와 맞지 않다고 말이죠.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저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텐데, 다행히도 몸은 이 소설을 흔한 교양소설로 마무리하지 않는 것으로 저를 포함한 범인(凡人)들에게도 면죄부를 부여했습니다.

이 소설까지 읽음으로서 ‘인생의 베일’을 제외한 몸의 주요 장편소설을 모두 읽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몸도 저의 전작주의 목록에 들어갈 작가가 될 것 같네요. 너무나 재미있다면, 읽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 이 글은 도란군의 서재 네이버 블로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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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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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서평단에 선정되어 주관적으로, 그러나 진심을 담아 작성한 글입니다.

‘남의 집 불구경 않는 군자 없다’는 도덕적인 것보다 흥미로운 것에 지배되기 쉬우며 타인의 불행을 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성향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속담을 이렇게 해석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남의 집이 불타는 장면을 보는 이유는 타인의 고난의 원인이 되었을 ‘불행한 운명’이 나에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타인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서도 이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데, ‘운명의 장난’이 더욱 극적으로 작용하는 비극이 더 사랑받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리뷰할 ‘그녀를 지키다’처럼 말입니다.

아이가 석공이었던 아버지를 닮아 미켈란젤로처러 훌륭한 조각가가 되기를 바랬던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미켈란젤로(미모) 비탈리아니’. 어머니의 바램대로 당당한 성품과 천재 석공예가의 자질을 타고 났지만 ‘불행의 운명’의 화살은 그를 비껴가지 않아 그는 왜소증으로 태어난 난쟁이었고 아버지는 전쟁으로 죽고 미모의 동생을 밴 어머니는 가난에 시달리다 어쩔 수 없이 그를 무능력하고 폭력적인 석공예가에게 도제로 보내고 맙니다. 위대한 석공예가의 꿈을 품었으나 괴롭고 힘든 나날을 보내던 미모는 이탈리아의 명문가인 오르시니 가문에 일을 하러 갔다가 그의 평생의 운명이 될 비올라를 만나게 됩니다. 뛰어난 머리와 강한 탐구심,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라는 재능의 날개를 타고난 비올라는 그러나, 난쟁이라는 천형을 짊어진 미모와 같이 ‘명문가의 조신한 여성 귀부인’이라는 불행의 운명을 타고났고, 그녀의 날개는 펼쳐질 수 없는 숙명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의 날개를 최초로 펼칠 수단으로 당시 막 발명되었던 비행기를 손수 제작해 하늘을 날고자 합니다. 비올라와 미모는 서로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이루는데 도움이 될 것을 맹세합니다. 이제 열네 살이 된 그들에게 이 맹세는 진지했고, 미래는 장밋빛으로 보였습니다. ‘불행의 운명’조차 꺾을 수 없는 염원을, 두 사람은 실현할 수 있을까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유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티칸에 의해 첨단 경보 시스템에 의해 그 정체가 철저하게 숨겨진 피에타상과 이를 만든 죽음을 앞두고 있는 노년의 미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미모와 비올라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며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다시 유폐되어버린 피에타상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소설을 읽게 되며 짐작하게 된-그러나 마지막까지 분명하게 사실로 드러나지는 않은-미모가 피에타상을 조각하게 된 이유와 과정은 미천한 도제에서부터 유명 조각가이자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된 그의 성공기와, 그의 영혼이자 운명이었던 비올라의 격정의 인생, 그녀가 속한 오르시니 가문의 영광과 몰락이 모두 펼쳐지고 난 이후에야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 그대로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일 때문에 말이죠.

제가 계속해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을 쓰는 이유는, 이것 말고는 그들의 운명을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으로서, 우리는 이 운명의 장난이 초래한 엄청난 결과와 이로 인한 위대한 예술의 탄생을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목도하기만 할 뿐입니다. 충격에서 겨우 벗어나더라도, 남은 인생 내내 이 ‘목도의 순간’은 우리의 정신을 휘감을 것이고, ‘털고 일어설 수 없는 부재들’이라는 소설 속 문장을 떠올리며 나에게 올지 모를 운명의 순간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적어도 의연하게는 말이죠. 미모의 피에타상과도 같은, 훌륭한 예술적인 문장을, 뛰어난 번역을 통해 때로는 두근거리고 때로는 기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제가 웬만하면 강하게 추천하지 않는데, 이 소설은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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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
이윤하 지음, 조호근 옮김 / 허블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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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는 일제강점기를 모티프로 삼은 가상의 국가 ‘화국(=조선)’과 화국을 식민 지배하는 ‘라잔 제국(=일본)’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 화국인 ‘제비’는 먹고 살기 위해 라잔식 이름으로 개명(=창씨개명)을 하고 라잔 예술성(=조선총독부 기관)에서 화가(=친일파)로 활동하기를 꿈꾸지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시험에 낙방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라잔의 군인에게 남편을 잃은 언니 ‘봉숭아’(=독립군)에게도 절연 당해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라잔 방위성의 장관 대리 ‘하판덴’(일본군 장성)의 권유로, 라잔이 비밀리에 개발중인 기계 용 ‘아라지’에 생명을 부여하는 마법 문양을 그려 넣어 전쟁 병기로 이용하려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그러나 제비에 의해 깨어난 아라지는 평화주의자였으며 아라지와의 교감을 통해 절친이 된 제비는 아라지를 구출하려는 계획을 품게 됩니다. 한편, 제비는 전쟁 중에 언니의 남편을 죽인, 자신의 감시자이자 방위성 소속 결투관 베이와 친해지며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본서는 박경리의 ‘토지’ 등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일제강점기를 다룬 기존의 소설들과는 결이 다른, 허구의 세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분야의 유명 작품이자 한국 장르소설에 한 획을 그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실패해 일제강점기가 지속’된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허구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SF/환타지 장르소설의 문법으로 만들어진 ‘완전한’ 허구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토지’와 ‘비명을 찾아서’의 경우는 그 내용과 결말이 이미 벌어졌던 역사적 과거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이 소설은 우리 민족이 나아갈 수 있는 더 좋은(또는 더 못한) 미래를 그려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접근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윤하 작가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점에서 이 주제는 독자에게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를, 타국에 사는 한국 출신 사람이 몸소 실천한다는 것은, 소위 말해 ‘국뽕’이 차오로고 주모를 찾는 정도의 기쁨인 것이죠.

작품 속에는 구미호, 자동인형, 마법 문양 등 동양적 요소들이 SF와 판타지 장르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독특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특히 주인공 제비와 라잔 방위성 소속 결투관 ‘베이’의 관계는 동성애적 요소를 품고 있으면서도 섬세하고 진솔하게 그려져,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두 인물 간의 관계는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격랑의 시대 속에서 지배국과 피지배국인 원수지간 개인이 정체성과 사랑을 어떻게 지켜나갈 수 있는지를 묻는 서사로 이어집니다. 화국 출신 제비와 라잔 출신(이곳에서 제작되었으니) 아라지의 절로 웃음이 지어지는 유머 담당 티키타카도 작품의 재미에 한몫 하구요.

이윤하는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으면서도, 가상의 세계를 통해 그 시기를 특별하게 재조명합니다.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과 디아스포라의 감수성이 섬세하게 녹아 있는 세계는 독자에게 익숙함과 현실감을 제공합니다. 그는 아픈 역사를 가상의 세계로 단순히 그려내는 것이 아닌, 섬세하면서도 대담한 상상력을 통해 새롭고 독창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우리 민족의 독창적인 정서와 감각으로 빚어진 이 특별한 SF소설은 독자 여러분께 잊지 못할 독서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

* 이 글은 도란군의 서재 네이버 블로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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