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3 펭귄클래식 13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윤새라 옮김 / 펭귄클래식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러시아 작가의 고전문학은 읽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나는 도스토옙스키 작품 도장 깨기를 하다 그의 장편 중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악령' 초반부를 읽다 백기를 들었다. 거의 10년 전이었다. 그 이후로 악령 완독에 재도전하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너무나 재미있게 읽어서 죽기 전까지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도 아직 다시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문학을 읽다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구멍이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것 같다. 그 격정과 애수와 비탄과 울분과 환희는 내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에 비해 재미가 덜하다는 세간의 평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도스토옙스키 전작주의도 완성 못했는데 어떻게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을 수 있을까라는 마음도 있었다. 이랬던 러시아 문학에 대한 내 심경의 변화는 우연치 않게 찾아왔다. 최근에 '악령'을 다시 펼쳐보았는데 도저히 다시 읽을 엄두가 안 나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톨스토이가 생각났고 그나마 읽기 편할 것이라 짐작만 했던 '안나 카레니나'가 생각났다. '불륜 여성의 자살'이라는 개략적인 스토리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비슷한 점이 '재미가 없다'는 톨스토이 작품에 대한 나의 편견을 조금은 해소시켰던 것 같다.

'안나 카레니나'에는 문학사상 정말로 유명한 첫 문장이 나온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봉건주의 제정 러시아가 급진적인 사회주의 물드는 것을 우려했던 보수주의자였던 톨스토이가 '변화의 무서움'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문장이다. 그러나 정작 지금에 이르러서는 '행복의 보편성과 불행의 특수성'을 통찰하는 아포리즘으로 사용되고 있다. 톨스토이가 생전에 느꼈던 '진보의 흐름'이 당대에는 보편이 되었기에 이 해석의 변화는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불행한 가정'의 대표격인 주인공 안나의 불행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결국은 그녀의 이기심과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속해 있던 사회의 보편성과 사랑했던 아들 등의 주변 인물들의 특수성을 깡그리 무시해버리고 오로지 '사랑밖에 난 몰라'라는 심정으로 추구했던 열정적인 탐욕의 사랑! 끝까지 아내를 사랑하고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한 남편 카레닌의 존재를 끝까지 벌레 취급하고, 자신의 책임이 아닌 가정의 불행으로 혼란에 빠진 아들을 보듬어주지 않고, 자신에게 전념하지 않는 브론스키를 원망하는 안나에게 어떻게 행복이 찾아올 수 있을까? 그녀의 인생을 끝장낸 것 또한 자신의 감정의 격정 때문이었으니 안나는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을 것이다.

안나가 불행을 대표한다면 또 다른 주인공인 레빈은 행복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전형적인 러시아인'인 레빈은 격정적인 면모는 안나와 닮았으나 보수적이고 소시민적이고 찌질한 성격을 강하게 지니는 인물이다. 그가 키티와 결혼에 이르게 되는 과정도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진보의 물결로 요동치는 사회에서 고리타분한 농업을 주장하는 지주인 그에게 키티와 같은 적극적이고 사랑스러운 신여성 아내는 어쩌면 과분했을지도 모른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한 레빈의 행복한 결말은 레빈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톨스토이의 바램이 투영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바랬던 '행복한 가정'의 모범을.

그러나 지금의 독자들은 레빈과 키티가 아닌 불행을 대표하는 안나와 브론스키에게 열광한다.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완벽한 아름다움을 보여준 안나와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버린 브론스키가 목격한 기차에 사람이 깔리는 사고는 두 사람의 불행한 미래를, 또한 안나의 비극이 그녀 자신의 성정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정해진 운명에 한 발자국씩 다가설 수밖에 없는 비극의 주인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어쨌든 발걸음을 멈추고 이 죽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도 이를 거부한 것은 안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기차의 궤도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탈선' 외에는,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자해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는 점에서 안나의 마지막 선택은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든 비극은 등장인물의 죽음이라는 결말을 가지지만, 그 과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다르다. 이 죽음이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이 보편적이어야 할 것이다. 모든 읽는 이들이 느끼기에 말이다.

#안나카레니나 #톨스토이 #고전문학 #서평 #도란군의서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와일드 시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19년 8월
평점 :
품절


타인의 육체를 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남자의 이름은 '도로'이다. 그의 정신이 새로운 육체로 옮겨 가면, 그 육체의 원래 소유자의 정신과 그가 머물렀던 육체는 소멸한다. 이 무서운 능력으로 도로는 셀 수 없는 육체를 갈아치우며 수천 년을 살아왔다. 그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어쩌면 자신의 후손일지도 모를 다양한 초능력자들을 찾아냈고 서로를 교배시켰다. 기나긴 삶으로 미치지 않기 위해 그가 선택한 목표가 자신과 같은 불사의 '종'을 창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육체를 세포 단위로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여자의 이름은 '아냥우'이다. 그녀는 충분히 노력한다면 어떤 모습으로든 변신할 수 있고, 자신의 신체를 치유할 수 있다. 이 경이적인 능력으로 아냥우는 수백 년을 살아왔다. 그녀는 오랫동안 한 곳에 정착하여 마을 사람들을 보살피고 보호했다.

도로는 아냥우를 찾아와 기묘한 제안을 한다. '너의 손으로 묻지 않아도 될 불사의 아이를 갖게 해주겠다'라고. 도로는 강력한 능력을 지닌 아냥우에게서 자신의 목적을 이룰 희망을 찾게 된 것이다. 도로와 같은 '불사'의 능력을 가진 아냥우를 대상으로 한 교배 실험이 성공한다면 말이다. 아냥우 역시 결국에는 자신을 스쳐 지나갈 뿐인 수많은 이별로 고통받았기에, 도로의 제안을-일종의 청혼이라고도 할 수 있는-수락하고 그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알지 못했다. 도로의 실험은 피험자를 배려하지 않는 무자비하고 참혹한 짓이라는 사실을. 도로는 이미 자신과 잠자리를 가졌고 그를 남편이라고 믿던 아냥우를 자신의 아들 초능력자인 아이작과 결혼시키려고 한다. 아냥우는 이를 비도덕적이라 생각해 아이작과의 결혼을 거부하지만 도로는 그녀를 강제로 결혼시키려 한다.

도로와 아냥우의 대결은 사실상 성립될 수 없다. 도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아냥우의 육체를 취할 수 있기 때문.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 육체의 능력까지는 사용할 수 없는 도로는 불사의 종족을 만들 수 없게 되므로 아냥우를 기망한 것이다. 아냥우 자신은 돌고래나 독수리 등으로 변신하여 숨을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이 아끼는 일족이 도로에게 몰살당하게 될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그에게 협력한 것이다.

50여 년 동안 도로와 함께 살며 아이들을 낳은 아냥우는 결국 도로의 폭력과 압제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 버린다. 그러나 아냥우가 과연 언제까지 숨을 수 있을까? 그와 그녀는 자살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인데. 긴 시간 동안 아냥우를 추격하던 도로는 결국 그녀를 찾아내고 다시 자신에게 협력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거부하면 그녀의 가족들을 죽이겠다는 섬뜩한 협박과 함께. 그러나 도로는 왠지 모르게 아냥우를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였고, 아냥우도 그를 예전과는 다르게 대하기 시작한다. 과연 두 불사신의 앞날은 어떻게 될지.

문학의 세상은 참으로 넓고 깊은 것 같다. 평생 꽤 많이 읽어왔다고 자부하던 나조차도 이 소설과 같이 완전히 새롭고 경이로운 책을 이제서야 발견했으니 말이다. 경이로운 초능력을 지닌 자들이 꼭 히어로나 빌런이 되어 대승적인 정의를 추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개인적인 목표를 위해 능력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과 닮은 가족을 만들고자 했던 도로와 자신이 보호하는 가족을 만들고자 했던 아냥우처럼.

#와일드시드 #옥타비아버틀러 #SF #서평 #도란군의서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누구에게나 상실은 존재한다. 상실은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상실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부재로 인한 크나큰 슬픔이 될 수 있다. 불의의 사고로 인해 생긴 지워지지 않는 한 가닥의 흉터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마음을 찢는 예리한 자상이 될 수도 있다. 상처 입은 자는 이를 원인으로 하여 스스로 삶을 마감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는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상실의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는 과정이, 그 원인이. 상실이 어떤 고통이나 트라우마의 표출이자 결과가 되는 것이다.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어릴 적에 어떤 전조도 없이 처음으로 말을 잃게 된 후, 시간이 흘러 이혼을 하며 아이의 양육권과 일상을 빼앗기며 동시에 말을 다시 잃게 되었다. 신체 기능의 부재는 대부분의 경우 생계 수단의 부재로 이어진다. 그렇게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자가 선택한 것은 죽은 자들의 언어인 희랍어였다. 이 여성에게 희랍어를 가르치는 남자 또한 부재한 것이 있다. 그것도 아버지의 병력에서 이미 예견된 시력의 상실이라는 정말적인 부재. 그는 반대하는 가족들을 독일에 두고 홀로 한국에 돌아와 희랍어를 가르친다. 두꺼운 안경에 의지하며 힘들게 희랍어를 가르치는 그는 말도 표정도 없는 여성 수강생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죽은 사람과 같은 그녀의 얼굴에서 그는 두려움과, 또한 동질감을 느낀다.

또 트라우마이다. 하지만 내가 읽었던 한강의 다른 작품과는 묘하게 다르다. 치유까지는 아니지만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바다에서 반짝이는 등대를 본 느낌이랄까? 무언가 희망을 보기 직전의 상황이랄까? 여자는 말을 잃었지만 그 원인은 불가역적인 것이 아니며, 남자는 시력을 잃을 것이지만 아직 어렴풋이 볼 수는 있다. 원복 가능한 것을 상실한 사람과 상실이 예정된 사람이 찰나의 순간에 만나게 된다면, 서로에게서 희망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소설의 마지막 순간은 한 장의 그림이나 사진과도 같다. 상실의 늪에 빠진 두 사람이 만나 더듬더듬 서로를 이해하는 장면은 곧 트라우마의 해소의 순간이다. 우리가 고통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가학적 관음증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그 생김새만큼이나 내면도 다양한 인간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존재와 정체성은 더욱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해는 경험에서 나오며, 소설은 가장 효과적인 경험의 수단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희랍어시간 #한강작가 #문학동네 #국내소설 #도란군의서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창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름 그 자체가 장르인 작가들이 있다. 이를테면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은 최소한의 소재만으로 된 작품들이다’라며 스타일이 문학의 처음이자 끝이라 천명했던 귀스타브 플로베르처럼. 그는 흔하디 흔한 유부녀의 불륜과 사치의 일탈을 ‘마담 보바리’라는 걸작으로 탄생시켰다. 내용이 아닌 형식을 중시하는 그의 작품은 지금도 수많은 독서가들의 서가에 꽂혀 수없이 읽히고 있다. 위대한 문학가를 고름에 있어 극단론은 지양하고 싶지만,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서 ‘스타일’의 정점에 선 사람은 단연코 ‘구병모’이다. 그가 그려내는 인물과 이야기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이세계에 속해 있다. 아가미가 있는 인간, 현역 살인청부업자인 노년의 여성, 소원을 이루어주는 특별한 빵을 만드는 제빵사 등등. 구병모의 인물들을 볼 때마다 나는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신작도 마찬가지 느낌이었다. 타인의 절창의 단면을 만져야만 생각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젊은 여성과 그를 원하는 의문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라니. 어떻게 읽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남편과의 사별 후 입주 가정교사 면접을 위해 한 대저택을 방문한다. 그녀는 대저택의 정원에서 느닷없이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누군가 한 남성을 죽기 직전까지 고문하고 구타하고 있었던 것. 그래도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자 오언은 한 아가씨가 다가가 베인 상처에 손을 대더니 그가 끝까지 숨기던 비밀을 알려주고 홀연히 저택 안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는 나를 저택의 주인인 성공한 사업가 ‘오언’은 합격시키고, 이 수수께끼의 대저택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집 안에는 그 아가씨와 오언의 수행비서들, 입주 도우미만 있을 뿐이며, 오언은 수시로 집을 비우기 일쑤다. 냉정했던 아가씨는 점차 나에게 마음을 열게 되고, 아가씨의 능력의 기원과 과거와, 그녀와 오언의 관계에 대해 점차 알아가게 된다. 이윽고 나는 아가씨를 위해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는데…

구병모의 스타일은 ‘특별하다’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의 문장은 다량의 수식어가 접목된, 호흡이 매우 긴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물론 누군가에게 그의 스타일은 ‘미사여구로 현혹하는 늘어진’ 글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과 여기서 파생되는 심연의 철학적 사유를 탐구하는 구병모의 소설은, 어떻게 보면 이런 화려한 스타일의 글에서 더욱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자들이 눌변이자 단변인 경우를 보지 못했듯이.

구병모는 소재의 발굴에 있어서도 또한 특별하며 변칙적이다. 접촉 사이코메트리는 흔하디 흔한 히어로의 능력이나, 상처를 접촉해야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설정은 너무나 기발하지 않나? 타인의 진심을 이해하기 위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종국적으로는 빈번하게는 내면의 상처로, 드물게는 내면의 상처를 보듬는 과정에서의 상대방의 진심을 이해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결국 ‘상처’라는 것은 이해의 트리거가 되는 것이며, 이를 비틀어 외면의 상처를 만져야만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상처는 필연이고 용서는 선택이지만, 어쩌면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 인해, 상처를 만짐으로 인해, 상처를 통해야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p.344)

누구나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이 상처를 만지는 것은 그를 아프게 하지만, 결국 만져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

#절창 #구병모 #독서 #문학 #도란군의서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궤도 - 2024 부커상 수상작
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6월
평점 :
품절


판매자가 물건의 성능을 홍보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권위’이다. 연예인이 애용하거나 전문가가 극찬한 제품이 많이 팔리는 것은 우리보다 수준이 높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판단을 맡기는 쉬운 선택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이 권위는 ‘상’으로 확보되는 경우가 많다. 작품이나 그 제작자가 권위있는 상을 수상하는 것이 강력한 세일즈 포인트가 되는 셈. 영화나 뮤지컬, 전시회, 책 같은 것들의 ‘후기’는 공산품의 그것이 높은 객관성을 확보한 것과 달리 개인의 주관에 따라 천차만별이므로 더더욱 소비자는 권위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 권위가 담보하는 작품성의 기준이 일반 대중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에서 나온다. 책 좀 읽는다 하는 독서가들 사이에서도 수상의 권위는 논란의 여지가 매우 많으며, 나 역시 책을 고를 때 상을 기준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구매한 이유는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부커상’을 수상한 작품이 아닌, ‘부커상을 수상한 SF소설’이기 때문이었다. 장르소설에 결벽증 수준의 거부감을 보이는 순수 문학상이 SF소설에 상을 줬다고?

‘궤도’는 24시간 동안 90분 간격으로 지구를 16번 도는 궤도의 국제우주정거장에 근무하는 우주비행사 여섯 명의 하루에 대한 소설이다. 무섭도록 고요해 평온한 것처럼 보이는 우주와 지구-그러나 생명체를 확실하고 고통스럽게 죽음으로 몰아넣는 흉포하고 검은 공간과 거대한 태풍조차 그저 조금 복잡한 흰색 무늬로 보일 정도의 아름다운 푸른색 구슬-를 보며 그들이 느끼는 생경함에서 비롯되는 몽환적인 6가지 각기 다른 사색의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90분마다 한번씩 찾아오는 일출과 일몰을 겪으며 드라마틱하게 변화하는 지구의 모습이 그들을 명상가와 사색가로 만든다. 그렇게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지구 수십억 명의 인류와의 묘한 일체감-신처럼 지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지적 시점에서 비롯된, 어린양 하나하나를 굽어 살피는 신이 된 것 같은 착각으로 말미암은-을 느끼며 그들의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그들이 살고 있는 지구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우주의 음유 시인이 되어 노래한다.

(이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내 돈과 시간을 버려가며 출판사의 함정 카드를 발동시킨 대가를 치렀으니 비판적인 서평을 작성할 자격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SF 장르 소설’도, ‘명상집’도, ‘다큐멘터리’도 되지 못했다. 우주비행사의 고립이나 모험을 보려면 앤디 위어의 ‘마션’을 읽고,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한 깊은 사색을 엿보려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보라. 지구의 경이로움을 알기 위해서는 BBC의 ‘플래닛 어스’를 시청하면 된다. 생명의 경이로움은 집 근처의 화단에서, 인간의 방종과 오만함은 주기적으로 들르는 마트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우주정거장과 우주비행사가 아닌, 평범한 보통 사람의 눈으로도 말이다. 장르 소설로서는 치밀한 세계관과 스펙타클이 없으며 소설로서는 기승전결이 없고, 명상집으로서는 깊이가 없고, 교양서로서는 정확한 사실과 정보 전달이 없다. 한마디로 이도 저도 아닌 책.

#서맨사하비 #2024부커상 #SF #서평 #도란군의서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