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누구에게나 상실은 존재한다. 상실은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상실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부재로 인한 크나큰 슬픔이 될 수 있다. 불의의 사고로 인해 생긴 지워지지 않는 한 가닥의 흉터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마음을 찢는 예리한 자상이 될 수도 있다. 상처 입은 자는 이를 원인으로 하여 스스로 삶을 마감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또는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상실의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는 과정이, 그 원인이. 상실이 어떤 고통이나 트라우마의 표출이자 결과가 되는 것이다.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어릴 적에 어떤 전조도 없이 처음으로 말을 잃게 된 후, 시간이 흘러 이혼을 하며 아이의 양육권과 일상을 빼앗기며 동시에 말을 다시 잃게 되었다. 신체 기능의 부재는 대부분의 경우 생계 수단의 부재로 이어진다. 그렇게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자가 선택한 것은 죽은 자들의 언어인 희랍어였다. 이 여성에게 희랍어를 가르치는 남자 또한 부재한 것이 있다. 그것도 아버지의 병력에서 이미 예견된 시력의 상실이라는 정말적인 부재. 그는 반대하는 가족들을 독일에 두고 홀로 한국에 돌아와 희랍어를 가르친다. 두꺼운 안경에 의지하며 힘들게 희랍어를 가르치는 그는 말도 표정도 없는 여성 수강생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죽은 사람과 같은 그녀의 얼굴에서 그는 두려움과, 또한 동질감을 느낀다.또 트라우마이다. 하지만 내가 읽었던 한강의 다른 작품과는 묘하게 다르다. 치유까지는 아니지만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바다에서 반짝이는 등대를 본 느낌이랄까? 무언가 희망을 보기 직전의 상황이랄까? 여자는 말을 잃었지만 그 원인은 불가역적인 것이 아니며, 남자는 시력을 잃을 것이지만 아직 어렴풋이 볼 수는 있다. 원복 가능한 것을 상실한 사람과 상실이 예정된 사람이 찰나의 순간에 만나게 된다면, 서로에게서 희망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소설의 마지막 순간은 한 장의 그림이나 사진과도 같다. 상실의 늪에 빠진 두 사람이 만나 더듬더듬 서로를 이해하는 장면은 곧 트라우마의 해소의 순간이다. 우리가 고통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가학적 관음증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그 생김새만큼이나 내면도 다양한 인간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존재와 정체성은 더욱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해는 경험에서 나오며, 소설은 가장 효과적인 경험의 수단이라는 것을 명심하자.#희랍어시간 #한강작가 #문학동네 #국내소설 #도란군의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