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 - 2024 부커상 수상작
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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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자가 물건의 성능을 홍보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권위’이다. 연예인이 애용하거나 전문가가 극찬한 제품이 많이 팔리는 것은 우리보다 수준이 높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판단을 맡기는 쉬운 선택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이 권위는 ‘상’으로 확보되는 경우가 많다. 작품이나 그 제작자가 권위있는 상을 수상하는 것이 강력한 세일즈 포인트가 되는 셈. 영화나 뮤지컬, 전시회, 책 같은 것들의 ‘후기’는 공산품의 그것이 높은 객관성을 확보한 것과 달리 개인의 주관에 따라 천차만별이므로 더더욱 소비자는 권위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 권위가 담보하는 작품성의 기준이 일반 대중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에서 나온다. 책 좀 읽는다 하는 독서가들 사이에서도 수상의 권위는 논란의 여지가 매우 많으며, 나 역시 책을 고를 때 상을 기준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구매한 이유는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부커상’을 수상한 작품이 아닌, ‘부커상을 수상한 SF소설’이기 때문이었다. 장르소설에 결벽증 수준의 거부감을 보이는 순수 문학상이 SF소설에 상을 줬다고?

‘궤도’는 24시간 동안 90분 간격으로 지구를 16번 도는 궤도의 국제우주정거장에 근무하는 우주비행사 여섯 명의 하루에 대한 소설이다. 무섭도록 고요해 평온한 것처럼 보이는 우주와 지구-그러나 생명체를 확실하고 고통스럽게 죽음으로 몰아넣는 흉포하고 검은 공간과 거대한 태풍조차 그저 조금 복잡한 흰색 무늬로 보일 정도의 아름다운 푸른색 구슬-를 보며 그들이 느끼는 생경함에서 비롯되는 몽환적인 6가지 각기 다른 사색의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90분마다 한번씩 찾아오는 일출과 일몰을 겪으며 드라마틱하게 변화하는 지구의 모습이 그들을 명상가와 사색가로 만든다. 그렇게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지구 수십억 명의 인류와의 묘한 일체감-신처럼 지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지적 시점에서 비롯된, 어린양 하나하나를 굽어 살피는 신이 된 것 같은 착각으로 말미암은-을 느끼며 그들의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그들이 살고 있는 지구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우주의 음유 시인이 되어 노래한다.

(이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내 돈과 시간을 버려가며 출판사의 함정 카드를 발동시킨 대가를 치렀으니 비판적인 서평을 작성할 자격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SF 장르 소설’도, ‘명상집’도, ‘다큐멘터리’도 되지 못했다. 우주비행사의 고립이나 모험을 보려면 앤디 위어의 ‘마션’을 읽고,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한 깊은 사색을 엿보려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보라. 지구의 경이로움을 알기 위해서는 BBC의 ‘플래닛 어스’를 시청하면 된다. 생명의 경이로움은 집 근처의 화단에서, 인간의 방종과 오만함은 주기적으로 들르는 마트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우주정거장과 우주비행사가 아닌, 평범한 보통 사람의 눈으로도 말이다. 장르 소설로서는 치밀한 세계관과 스펙타클이 없으며 소설로서는 기승전결이 없고, 명상집으로서는 깊이가 없고, 교양서로서는 정확한 사실과 정보 전달이 없다. 한마디로 이도 저도 아닌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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