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 - 제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해경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대학 때의 어느 교양수업시간이었다. 선생님이 느닷없이 오늘은 자기의 장래희망을 써서 서로 발표하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하셨다. 학교와 학과에 따라 대충의 진로도 이미 정해진 마당에 웬 장래희망이냐, 우리가 국민학생이냐, 중학생이냐, 수업준비 못 해와서 저러는 거 아니냐는 비판적 목소리는 없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지겨운 수업보다 낫다며 좋아라 엎드려 글들을 쓰기 시작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소설가를 꿈꾸고 있구나, 라는 것을.

나로 말하면, 소싯적에 각종 문예대회에서 상도 좀(정말 좀) 받았고, 늘 동서고금의 훌륭한 소설책을 달고(달기만 하고) 다녔으므로, 늘그막에 소설 한 자락을 쓴다는 것은 정말이지 타당한 일이라고 생각되었으면서도, 소설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누구에게 얘기하기가 부끄러웠는데, 평소 소설책 한 권 읽는 걸 보지 못했던 많은 아이들이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 내 인생을 담은 소설을 쓰고 싶다고 당당하게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 장래희망에서 소설을 쓰겠다는 부분을 지워버리고 말았다. 나 하나로도 소설은 충분히 욕을 본 터인데 저렇게 개나소나 소설을 쓰고 싶어하다니, 정말 소설이 무슨 죄란 말인가! 싶어졌던 것이다.

이해경의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 그 날의 그 수업시간 속에 들어와 앉은 기분이었다. 아니, 이렇게도 많은 사람이 여전히 소설을 쓰고 싶어한단 말인가. 이미 등단한 L과 주인공의 선생님 외에, 주인공인 그, 그의 그녀, 그의 아내, 그의 직장동료 M, 그의 아내가 가입한 인터넷 동호회의, 인생이 소설인지 소설이 인생인지 구분도 안 가게 기구한 삶들을 저마다 살고 있을 숱한 아줌마 습작생들. 정말이지 이 소설 안에는 대가와, 될성부른 소설가 지망생, 가망 없는 소설가 지망생, 그 외의 어중이떠중이까지 온갖 종류의 소설가가 다 등장하고 있다.

그러자니 이야기는 길어지고, (그 소설가들의 길고 짧은 소설들로) 어수선하고, 대체 뭘 말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기만 하다. 게다가 ‘그’는 얼마나 말이 많은지, 그의 말마따나 적당하게 건너뛰어도 나쁠 것은 전혀 없는 정황이며,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상태까지 무슨 단편소설에서나처럼 세부적으로 지루하게 늘어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이 그다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건 아마도 많은 분들이 거슬린다고 지적한 저 구어적 문체 때문인 듯하다. 그 구어적 문체야말로 큰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그저 뒤에서 궁시렁대며 간당간당 살아가는 소시민인 ‘그’를 제대로 드러내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내가 재미있어 하던 그의 문체는 소설의 마지막에 접어들어, 그의 아픈 과거가 일깨워지면서 어느새 고의적으로 진지해진다. 하긴, 그 충격적인 경험의 기억은 그를 진지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했겠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이어, 진지해진 그가 그렇게도 벼르던 첫 문장을 제 데이빗에, 그리고 내가 읽고 있는 이 책 위에 내지른다. 그 첫 문장은 좀 약하긴 하지만, 그가 애정을 가지고 써나갈 수 있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녀와, 소설. 그의 어렵게 태어난 첫 문장에 무한의 격려를 보내며 책을 덮는 순간 아, 나도 문득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내일이면 싹 잊고 오로지 행복한 독자로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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