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계수가 된 다프데 ]

페네이오스(페네이오스강의 신)의 딸 다프네는 아폴로의 첫사랑이었다. 아폴로는 우연히 이 다프네를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쿠피도(그:에로스)가 자신을 업신여기는 아폴로에게 앙갚음을 하느라고 그렇게 만든 것이다.
얼마전, 왕뱀을 죽이고 나서 으쓱거리며 다니던 이 델로스의 신은 활에 시위를 메기고 있는 쿠피도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건방진 꼬마야, 무사들이나 쓰는 무기가 너와 무슨 인연이 있느냐? 그런 무기는 나 같은 무사의 어깨에나 걸어야 어울린다. 나는 절대로 빗나가지 않게 겨냥할수 있어서 짐승이든 인간이든, 말하자면 뭐든 쏘아맞힐 수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얼마전에도, 나는 온 벌판에 똬리를 틀고 있는, 독이 잔뜩 오른 왕뱀 퓌톤을 여러개의 화살로 쏘아죽였다. 너는, 사랑의 불을 잘 지른다니까, 횃불 같은 것으로 사랑의 불이나 지르고 다니는 게 좋겠다. 나 같은 어른이나 얻는 칭송은 너에게 당치 않으니, 분수를 알아서 처신 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베누스의 아들은 이렇게 맞섰다.

"포에부스, 그대의 활이 아무거나 쏘아맞히는 활이라면, 내 활은 그대를 맞힐 수 있는 활이오. 짐승이 신들만 못하듯이 그대의 영광또한 내 영광만 못할 것이오"

쿠피도는 말을 마치자 하늘로 날아올라 파르나소스 산 꼭대기의 울창한 숲에 내렸다. 그는 화살이 가득 든 화살통에서 각기 쓰임새가 다른 화살 두 개를 뽑았다.
하나는 사랑을 목마르게 구하게 만드는 예리한 촉의금화살, 또 하나는 사랑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게 하는 납으로 된 뭉툭한 촉이 물려있는 화살이었다.
쿠피도 신은, 아폴로는 이 금화살로 쏘고, 페네이오스의 딸인 요정 다프네는 납화살로 쏘았다.
화살에 맞자마자 아폴로는 사랑에 빠졌고 다프네는 사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천리만리 도망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다프네는 원래, 댕기 하나로 머리카락을 척 묶고 숲속을 돌아다니며, 저 처녀신 디아나(그: 아르테미스,영:다이아나)와 겨루기라도 하듯 짐승을 잡는 일 아니면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던 처녀였다.
다프네에게는 구혼자들이 많았으나, 결혼이니 사랑이니 부부생활이니 하는 것은 쥐뿔도 아니었다.
페네이오스는 틈날때마다 이 선머슴같은 딸을 타일렀다.

"얘야, 결혼해서 아비에게 사위 구경이라도 시켜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때로는 이런말도 했다.

"아비에게 외손주를 낳아 바치는 것은 네 의무니라"

그러나 다프네는 얼굴만 붉힐뿐 결혼이라는 것을 무슨 못할 짓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포에부스 아폴로는 이 쿠피도의 화살을 맞은 뒤, 다프네를 보는 순간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앞일을 헤아리는 포에부스의 예언력도 하릴없었다. 포에부스는 오로지 자기의 욕망이 이루어지기만을 즉 다프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기만을 바랐다.
아폴로의 가슴은, 타작 마당에서 검불을 태우는 불길, 혹은 발길 가던 나그네가 새벽이 되자 내버린 횃불이 잘 마른 울타리를 태우듯이 그렇게 타 올랐다.
그는 이 허망한 사랑에 대한 희망을 끝내 버릴 수 없었다. 이성에 눈먼 아폴로는 목위로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다프네의 머리카락을 보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아,빗질이라도 한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워 보일까?" 그는, 별처럼 반짝이는 다프네의 눈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그의 눈은 다프네의 입술에도 머물렀다. 그는 그 입술을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다프네의 손가락,손,어깨까지 드러난 팔을 찬양했다. 그러면서, 보이는 것이 저렇게 아름다운데 보이지 않는 것은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폴로가 다가가면 다프네는 달아났다. 바람보다 빠르게 달아났다. 아폴로가 위에서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데도 다프네는 걸음을 멈추지도, 그의 하소연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요정이여, 페네이오스의 딸이여,부탁이니 달아나지 말아요. 비록 그대를 쫒고 있기는 하나 나는 그대의 원수가 아니오.
아름다운 요정이여, 거기에 서요. 이리를 피하여 어린 양이 도망치듯이, 사자를 피하여 사슴이 달아나듯이,비둘기가 독수리를 피하여 날개짓하듯이, 만물이 그 천적 되는 것을 피하여 몸을 숨기듯이, 그대는 지금 그렇게 내게서 달아나고 있소. 달아나지 말아요.
내게 그대를 뒤쫒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오. 그러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어쩌려오. 장미덩굴에 그 아름다운 발목이 긁히기라도 하면 어쩌려는 것이오.
그대에게 반하여 이렇듯이 번민하는 내가 누군지, 그것은 물어보고 달아나야 할것이 아니오? 나는, 산속에서 오막살이나 하는 농투성이가 아니오. 가축이나 먹이는 양치기나 소치기도 아니오. 어리석어라! 어째서 그대는 뒤따르는 내가 누군지 모르시오?
아시면 그렇게 달아나지 않을 것이오. 나는 델포이땅의 주인이며, 테네도스 섬의 주인, 파타라 항구의 주인이오.나는 저 신들의 아버지 유피테르의 아들이오. 내게는 과거,현재,미래를 아는 재주도 있소. 수금을 나보다 잘 뜯는 인간이나 신은 하나도 없을 것이오.
내 화살은 백발백중이오만, 나보다 솜씨가 나은 자가 있어서 내 가슴에 치유할 길 없는 상처를 입히고 말았소. 의술은 내게서 비롯되었소.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나를 일러 '파이에온(고치는자)'이라고 하오.
아, 나는 약초를 잘 아는 의신이오만, 이 사랑병 고칠 약초는 없으니 이 일을 어쩌리요. 남을 돕는 재주가, 있어야 할 그 임자에게는 하릴없으니 장차 이 일을 어쩌리요..."

처녀가 달아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한 말은 이보다 훨씬 더 길었으리라.
그러나 처녀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달아났다. 정신없이 달아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프네의 모습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바람은 달아나는 다프네의 옷자락을 날려 사지를 드러 나게 하고 있었다. 사지가 드러난데다 바람이 머리카락까지 흩날리게 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달아나는 모습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것도 당연했다.
사랑하는 마음은 이 젊은 신의 추격속도를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했다. 갈리아 사냥개가 풀밭에서 토끼와 쫓고 쫓기는 형국과 흡사했다. 이 젊은 신과 아름다운 요정은, 전자는 따라잡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후자는 잡히면 끝장이라는 공포에 쫓기며 빠르기를 겨루었다.
그러나 쫓는 쪽이 빨랐다. 아폴로에게는 쿠피도의 날개(사랑하는 마음)가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폴로의 숨결이 다프네의 목에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따라붙었다. 다프네는 힘이 다했는지 더 이상 달아나지 못했다. 다프네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지친 다프네는 아버지 페네이오스 강의 강물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아버지, 저를 도우소서. 강물에 정말 신비한 힘이있다면 기적을 베푸시어 둔갑의 은혜를 내리소서. 저를 괴롭히는 이 아름다움을 거두어주소서"

다프네는 기도를 채 끝마치기도 전에 사지가 풀리는 듯한, 정체모를 피로를 느꼈다.
다프네의 그 부드럽던 젖가슴 위로 얇은 나무껍질이 덮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나뭇잎이 되고 팔은 가지가 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해도 그렇게 힘있게 달리던 다리는 뿌리가 되고, 얼굴은 이미 나무 꼭대기가 되고 있었다. 이제 다프네의 모습은 거기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눈부신 아름다움만 거기에 남아 있을 뿐....
나무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포에부스 아폴로는 다프네를 사랑했다. 나무 둥치에 손을 댄 포에부스는 갓 덮인 수피 아래서 콩닥거리는 그녀의 심장 박동을 느낄수 있었다.
그는 월계수 가지를 다프네의 사지인 듯이 끌어안고 나무에 입술을 갖다대었다. 나무가 되었는데도 다프네는 이 입맞춤에 몸을 웅크렸다. 아폴로가 속삭였다.

"내 아내가 될 수 없게 된 그대여, 대신 내 나무가 되었구나. 내 머리, 내 수금, 내 화살통에 그대의 가지가 꽂히리라.
카피톨리움으로 기나긴 개선 행렬이 지나갈 때, 백성들이 소리높여 개선의 노래를 부를 때 그대는 로마의 장수들과 함께 할 것이다. 뿐인가? 아우구스투스 궁전 앞에서는 그 문을 지킬 것이며, 거기에 걸릴 떡갈나무관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날까지 한번도 잘라본 적 없는, 지금도 싱싱하고 앞으로도 싱싱할 터인 내 머리카락같이, 그대 잎으로 만든 월계관 또한 시들지 않으리라."

아폴로가 이런 약속을 하자 월계수는 자기를 앞으로 구부리고 잎을 흔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듯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