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니, 선영아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 난 후일담 소설만 보면 형상기억 브래지어가 생각나. 세탁기에 돌리면 일반 브래지어가 좀 상하듯이 사회에 나가면 적당히 망가져야만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많거든. 졸라리 많아. 망가지는 게 정상인데, 자꾸 옛날의 기억으로 돌아가니까 이거 문제가 많은 거지. 자기 젖은 AA컵이 됐는데, 브래지어는 아직도 D컵 뿐이니 그 빈자리가 얼마나 허전하겠냐? 그러니까 자꾸만 돈에 미치거나 과대망상에 빠지거나 잃어버린 세월을 돌려달라고 말하는 거지. 그 문제 해결하는 건 간단하거든. 새로 AA컵 사면 돼. "

- 김연수, 사랑이라니 선영아. 

 ' 그러나 김연수의 세대는 달랐다. 김종광은 오래된 충남 보령산 형상기억 브래지어를 21세기형 신모델로 바꾸어 착용했고, 백민석은 꽹과리와 징 모양의 얇고 넓은 형상기억 브래지어를 온갖 하위문화 기호로 콜라주 된 활동성 브라탑으로 교체했다. 몇몇 이름들을 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도상학자 김경욱, 시장통 페미니스트 이명랑, 뒤늦은 세대의 대변자 류소영 등. 물론 그들의 시도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그간 우리 소설이 자주 잊어버렸던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좋은 낡은 것 위에 세우지 말고 나쁜 새로운 것 위에 세워라" 라고 하는 브레히트의 경구였기 때문이다. 

  - p181 문학평론가 김형중의 "형상기억 브래지어를 벗어 던지다" 작품 해설 중. 

 김연수가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은 소품같은 책이라고 말했듯, 중편정도의 길이를 가지고서 펼쳐진다. 길지 않고 속도가 빠르며 사건 중심으로 휙휙 지나가기 때문에 빨리 읽을 수 있고 빨리 읽힌다. 몇가지 장면과 배경이 영화처럼 지나가고 나면 주인공들의 독백같은 대사가 몇마디 기억이 나고, 또 잠시 우리의 사랑이 언저리를 지나간다. 

냉소로 가득차 있다. 주인공들은 저마다 슬프고 저마다 이유가 있다. 엇갈리고 질투하고 못 믿으며 사실을 그 사람에게 확인하지 못하고 돌려돌려 확인하고, 지레 상처받으며 나도 모르는 새 나는 망가지고. 어떤 우유를 골라야 할 지 알 수 없었다고 한탄하고, 그 속에 담긴 메세지를 상대방은 얼핏이라도 감지하지 못하고, 또 그렇게 시간은 흘러 아이가 탄생한다. 젊었던 시절은 가고, 이제는 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흰머리에 잡담할 시간들이 되었다. 

몇가지 문화적 코드와 광고의 이미지들을 삽입해 세태소설에 가까워보이며 평론글이 이렇게 잘 읽히는 책도 간만이었고 하도 띄엄띄엄 읽어 감정 몰입이 잘 안됐어도 평론글이 이해가 잘 됐다. 평론가의 글에서 집어낸 부분들이 내가 마침 눈여겨보고 있던 부분들이었기 때문일까.

김연수의 새로운 장편은 두껍고 시대물이라 선뜻 손이 가지 않아 우선 패스하고 이 책을 선택했다. 얼마나 조사를 많이 했을까. 

김연수의 첫 초기작을 보고, 스무살 어쩌구 하는 책을 보고난 이후 김연수에 대한 애정은 변치 않았으나 그간 나왔던 소설들을 한개도 챙겨보지 못했었는데, 역시 그의 따뜻한 냉소는 여전하다는 느낌이 든다. 

책의 맨 뒷 표지에 적혀있는 글이 참 괜찮았다.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덧정을 쏟을 곳은 기억 뿐이다.
모든 게 끝나면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처럼 사랑했던 마음은 반품시켜야만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우리에게 남는다."

 - 김연수, 사랑이라니 선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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