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조승리 지음 / 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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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녹록치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평안하기만 한 삶은 없겠지. 그러나 자, 해보자. 누가누가 잘 사는가를 기준으로 하여 줄을 세워보자. 소위 사회적으로 "무난하게 잘 산다"는 기준으로 세워보자. 작가님은 아마... 후하고 후하게 쳐도 중위권 이후에 있지 않을까.

우선, 작가님은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어릴 적에 작가라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의 캔디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거다! 라고 생각했었다. "온갖 불행 소스를 다 때려넣은 이 잡탕같은 인생에..." 라는 드라마 도깨비의 대사가 자꾸 뇌리에 머무른다. 책을 읽는 내내. 그렇다면, 조승리님은 천상 작가로 태어난거다. 작가가 되려고 이 모든 시련들을 겪어낸 거다. 책장을 덮고 나는 그리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람이 작가가 되지 않으면 아니 대체 무얼해.


내 운명이 빙산 같다고 생각했다. 바다를 홀로 떠돌다 결국 녹아 없어져 버리는 빙산처럼 나의 삶도 시간을 부유하다 무의미하게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다

-탱고를 추는 시간 중에서


86년 아시안 게임을 시청하다 작가님을 낳은 엄마 이선열님이 지어준 이름, 승리. 조승리. 2023년 샘터 문학상 대상 수상을 이선열님이 보셨다면 어떤 말을 하셨을까. 내가 이름 하나 잘 지었다니까, 하지 않으셨을까.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교양지 - 창간 당시 샘터의 캐치 프레이가 이러했다는데, 정말 취지에 부합하는 글이 아닌가! 샘터 출판사도 있는데, 굳이 달 출판사에서 이 책이 나온 것은 또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보통 추천사는 청탁한다는데, 이 책은 좀 다르지 않았을까. 이병률 시인의 추천사는 이러했다.


이 책을 읽고 슬펐고 뜨거웠으며, 아리고 기운이 났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전한다. 그리고 그녀의 훤칠한 글 앞에서 내가 바짝 쫄았다는 사실까지도.


-이병률 (시인/여행작가) 의 추천사


훤칠한 글, 2번째 챕터를 읽으면서 나는 이 표현이 무슨 뜻인지 바로 느꼈다. 글이 훤칠할 수 있구나. 훤칠하게 잘생긴 젊은이처럼 꼿꼿하고 싱그럽고 뒤끝없이 꿋꿋하구나, 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친구 둘과 같이 타이베이 자유여행을 갈 정도의 도전도 할 수 있는 사람, 장애에 대한 편견이 유독 심한 한국에서 서른이 넘도록 버텨온 조승리님의 글은 정말, 훤칠했다. 편견의 말들과 시선을 감내하며 버텨왔을 그녀의 글은, 정말이지 그랬다.


공간에 흐르는 가을 공기가 맨살에 소름을 오소소 돋게 했다. 평온한 일상에 안도한다. 순간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남의 불행을 자신과 비교하며 안도를 찾는 이들을 나는 얼마나 경멸했는가?


오래전 지인을 따라 방문한 어느 교회에서 목사는 나의 장애를 거론하며 말했다. 하나님이 왜 장애인을 이 땅에 만드셨는지 아시나요? 그건 여러분께 현실이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게 해드리려는 주님의 안배입니다. 저들을 바라보며 건강한 육신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아시길 바랍니다.


-그녀는 헬러윈에 갔을까 중에서


블라인드 서평단을 신청한 이유는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이 지랄맞음이 축제가 되겠지 - 라는 훤칠한 제목이 정말 궁금했다. 지랄맞음이라는 단어 안에 담긴 회한. 신을 탓하고 싶어지는 저 말에 대체 무슨 사연이 있을까 궁금했다. 이렇게 이미 궁금한데- 이병률 시인이 모든 예술가들이 살고 싶어하는 어떤 심연에 작가가 이미 도착해 있는 건 아닐까, 라고 하셨으니... 신청하지 않고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서평단을 위해 제작된 책이라, 순서가 그대로일지는 모르겠지만 - 샘터 대상 수상작인 "불꽃축제가 있던 날 택시 안에서" 로 시작하여 24개의 에세이가 담긴 이 책은 정말 매 편이 충만했다. 다 읽고 나서야 생각하게 되는 질문. 아니, 눈이 안보이는데 책을 어떻게 쓰지...? 영화는 어떻게 보는 거지? 그 모든 세상 일을 어떻게 다 알고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거지? 하는 저차원 궁금증에서부터, 과거와 현재의 삶에 일어난 일들을 하나하나 골라 긴 여운을 남기는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깊은 어둠에 고여있었을까, 하고 시간을 헤아려보느라 다 읽고 나서도 한참 책 등을 쓸었다.

엄마의 열정과 농담을 물려 받았으니


책에서 느껴지는 투사의 기운...! 어디서 왔을까 했는데 작가님에게는 역시 엄마가 있었다. 돈벌러 간다면서 자꾸 사라지는 애비를 대신해 세남매를 키워낸 엄마가. 밭일하고 가축도 키우며 억척스럽게 살았던 엄마가. 열다섯에 시력을 잃고 장애인 학교에 들어갔던 작가님이 부끄러워 졸업식에 한번도 가 주질 않았던 엄마가 있다. 아마도 결혼 전에는 삶에 대한 열정이 있었을테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자식을 위해 아득바득 애를 쓰며 버티기 위해 농담을 택했을 엄마가, 큰 산같은 뒷배가 있었다.



은사님은 내게 엄마 이아기를 써보는 것이 어떻겠나고 하셨다. 나는 준비가 되면 그래보겠다고 대답했다. 언젠가 내 엄마가 아닌 여자 이선열에 관해 쓰고 싶다.그녀의 열정과 농담을 이어받았으니 그것은 나의 힘이 될 거라고 믿는다.

-위로의 방식 중에서


작가님은 이 책을 통해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다 풀었을까. 아니면 아직 더 남았을까, 싶었다. 책 곳곳에 뿌려진 엄마와의 에피소드는 나의 눈물 버튼이었다. 한 해의 대부분 얼굴이 까맣고 거친 손으로 호탕한 웃음을 웃으며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몸집이 큰 여자 사람이 그려졌다. 엄마와 딸의 맞담배도 낯설었지만 떨어진 담배를 사기 위해 나갔던 밤 드라이브의 에피소드는 더 낯설고 그래서 유쾌했다. 숨어있는 순찰대를 놀리기 위해 부러 이상하게 운전을 하고, 결국 돌아오는 길에는 귀엽게 선도 넘으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라는 눈빛을 보내는 엄마. 아, 그러시면 안돼요~ 라는 말이 턱까지 찼지만 귀여우니까 인정. 이선열 엄마는 뜨겁게 사셨네, 싶은. 온갖 부조리를 겪어내며 원망만 할 수도 있는 인생이셨을텐데. 가슴에 묻은 일들이 오조오억개이셨을텐데. 남편에 이어 딸만 보면 억장이 무너졌을 것인데. 이 훤칠한 글 뒤에 숨은 절절함이 읽혀서 울었다. 이선열 엄마의 마음과 인생을 대하는 자세가 딸 조승리에게 이어졌구나, 해서 울었다.

장애 + 중국교포라서 두배의 차별을 받는 언니 대신 화를 내고 복수도 해주는 작가님, 가족들에게 이용 당하며 속만 문드러지는 마사지 손님에게 현실을 일깨워주는 작가님, "올바른" 얘기만 하는 봉사자에게 따끔한 일침을 날려주는 작가님, 절망에 빠진 장애아 엄마에게 당신은 죄가 없다고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는 작가님. 당장 자신이 겪는 불합리한 일들이 산적해있을텐데 세상의 다른 불합리를 보며 큰언니처럼 등을 두드려주는 삶을 사는 작가님의 글들 앞에서 무장해제되어 나는 또 울었다.


'내 눈에 박사, 너는 늘 열여덟으로 보인다. 어린데도 돈 벌어 집에 빚 갚아줘야 한다고 동동거리던, 우리 학교 아이들이 근처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맞고 오면 빗자루 들고 황소처럼 뛰어나가던 어른 같던 아이. 난 네가 나한테는 어리광도 피우고 떼도 썼으면 좋겠다."

무어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눈물 스위치가 뚝 하고 켜질 것만 같아 객쩍은 농담도 할 수가 없었다. 바오쯔가 다 쪄졌는지 언니가 뚜껑을 열어 김을 날렸다. 찜솥에서 바오쯔를 꺼낸 언니가 입으로 호호 불어 식힌 뒤 내게 가저왔다. 나는 뜨거운 바오쯔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무국적 만두 중에서


감히 추측컨데 엄마 이선열님도 이런 사람이시지 않았을까. 작가님은 엄마를 꼭 닮은 게 아닐까. 사랑했고 연민했고 애정을 갈구했고 더불어 증오도 했던 엄마를.


계속 써주세요, 읽을게요


작가님은 읽었다고 했다. 시력을 잃어간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학업을 중단하고 도서관으로 달려가 닥치는 대로 읽었다고 썼다.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부터 눈이 부쩍 많이 피로해진 나는 가끔 눈에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를 생각하곤 하는데 ... 아찔하다. 정말 아찔하다. 책을 읽지 못하고 영화를 보지 못하고. 오감 중에 중요도를 따지면 아마도 눈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할 만큼. 책을 좋아하는 십대 소녀에게 시력 상실이라는 건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감히 상상도 못하겠다. 지금이야 오디오북이라는 옵션도 있고 기술 발전의 힘으로 뭔가 더 가능해졌겠지만...그 당시 그 어떤 기술 발전이 그려졌을까, 아니 과연 희망의 끄트머리를 떠올릴 수나 있었을까. 친척들은 나만 보면 울고, 엄마는 낫게 하겠다고 온갖 미신까지 찾는 그 와중에. 도서관으로 달려간 작가님의 마음은 대체 어땠을까. 책이 어떤 의미였을까. 그렇게 읽은 책들을 작가님에게 어떻게 쌓였을까.


나는 수미씨의 올바름에 화가 났다. 그녀는 결핍을 모르는 사람이다. 수미씨, 수미씨는 장애인 자식 없어봤잖아요. 그래본 적 없으면서 희생하지 않는다고 헐뜯을 자격 있어요?"

-정지된 도시 중에서


책 끝머리에 적힌 작가님의 장래희망은 "한 떨기 꽃"이란다. 비극을 양분으로 가장 단단한 뿌리를 뻗고, 비바람에도 결코 휘어지지 않는 단단한 줄기를 하늘로 향하겠다고. 세상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품은 꽃송이가 되어 기뻐하는 이의 품에, 슬퍼하는 이의 가슴에 안겨 함께 흔들려야겠다고 썼다. 그렇게 누군가가 꽃의 향기를 맡으며 위로를 받는다면, 본인 비극의 끝은 사건의 지평선으로 남을 것이라고, 그렇게 이 책은 끝이 난다.

아마 작가님은 겪은일, 들은일의 반의 반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글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는 이런게 에세이지! 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에세이가 넘쳐나서 에세이를 잘 읽지 않게 되어 버렸지만... 이런 에세이는 꾸준히 있어야 한다고, 내가 읽겠다고, 좋은 독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는게 고통이지만 또 그렇게 이겨낼 수 있다고, 무너지지 말고 원망하지 말라고. 굽이굽이 걸어가면 내리막이 보일 거라고, 좋은 꽃밭도 있을 거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넌지시 자신의 지난 날을 건네주는 이런 에세이. 또 읽고 싶다. 조승리님의 에세이를 계속 읽고 싶다.




*출판사에서 서평단용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내 운명이 빙산 같다고 생각했다. 바다를 홀로 떠돌다 결국 녹아 없어져 버리는 빙산처럼 나의 삶도 시간을 부유하다 무의미하게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다 - P200

공간에 흐르는 가을 공기가 맨살에 소름을 오소소 돋게 했다. 평온한 일상에 안도한다. 순간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남의 불행을 자신과 비교하며 안도를 찾는 이들을 나는얼마나 경멸했는가?



오래전 지인을 따라 방문한 어느 교회에서 목사는 나의 장애를 거론하며 말했다. 하나님이 왜 장애인을 이 땅에 만드셨는지 아시나요? 그건 여러분께 현실이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게 해드리려는 주님의 안배입니다. 저들을 바라보며 건강한 육신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아시길 바랍니다. - P187

그와 나는 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며 속없이 낄낄거렸다. 나는 아저씨가 자책에 빠져 누군가를 저주하며 인생을 낭비하지 않길 바랐다. 진정한 복수는 앙갚음도 용서도 아니다. - P76

철없죠. 아이는 죽어가는데 어미가 돼서 내 즐거움을 찾고 있으니. 나는 그녀를 응원하고 싶었다. 그래서 잘한 일이라고, 앞으로도 자신의 행복을 찾아나가시라고, 그것이 아이가 바라는 것일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엎드려 오열했다. 잘했다는 말을 너무도 오랜만에 들어본다고 했다. 아이를 낳은 이후로 자신은 행복하면 안 되고 오로지 아이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자기검열에 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내가 물었다. 장애아를 낳으면 죄인이 돼아 하나요? 그게 사회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사실인가요? 그럼 저는요, 저는 죄의 근원인가요?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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