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이 녹록치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평안하기만 한 삶은 없겠지. 그러나 자, 해보자. 누가누가 잘 사는가를 기준으로 하여 줄을 세워보자. 소위 사회적으로 "무난하게 잘 산다"는 기준으로 세워보자. 작가님은 아마... 후하고 후하게 쳐도 중위권 이후에 있지 않을까.
우선, 작가님은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어릴 적에 작가라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의 캔디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거다! 라고 생각했었다. "온갖 불행 소스를 다 때려넣은 이 잡탕같은 인생에..." 라는 드라마 도깨비의 대사가 자꾸 뇌리에 머무른다. 책을 읽는 내내. 그렇다면, 조승리님은 천상 작가로 태어난거다. 작가가 되려고 이 모든 시련들을 겪어낸 거다. 책장을 덮고 나는 그리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람이 작가가 되지 않으면 아니 대체 무얼해.
내 운명이 빙산 같다고 생각했다. 바다를 홀로 떠돌다 결국 녹아 없어져 버리는 빙산처럼 나의 삶도 시간을 부유하다 무의미하게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다
-탱고를 추는 시간 중에서
86년 아시안 게임을 시청하다 작가님을 낳은 엄마 이선열님이 지어준 이름, 승리. 조승리. 2023년 샘터 문학상 대상 수상을 이선열님이 보셨다면 어떤 말을 하셨을까. 내가 이름 하나 잘 지었다니까, 하지 않으셨을까.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교양지 - 창간 당시 샘터의 캐치 프레이가 이러했다는데, 정말 취지에 부합하는 글이 아닌가! 샘터 출판사도 있는데, 굳이 달 출판사에서 이 책이 나온 것은 또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보통 추천사는 청탁한다는데, 이 책은 좀 다르지 않았을까. 이병률 시인의 추천사는 이러했다.
이 책을 읽고 슬펐고 뜨거웠으며, 아리고 기운이 났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전한다. 그리고 그녀의 훤칠한 글 앞에서 내가 바짝 쫄았다는 사실까지도.
-이병률 (시인/여행작가) 의 추천사
훤칠한 글, 2번째 챕터를 읽으면서 나는 이 표현이 무슨 뜻인지 바로 느꼈다. 글이 훤칠할 수 있구나. 훤칠하게 잘생긴 젊은이처럼 꼿꼿하고 싱그럽고 뒤끝없이 꿋꿋하구나, 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친구 둘과 같이 타이베이 자유여행을 갈 정도의 도전도 할 수 있는 사람, 장애에 대한 편견이 유독 심한 한국에서 서른이 넘도록 버텨온 조승리님의 글은 정말, 훤칠했다. 편견의 말들과 시선을 감내하며 버텨왔을 그녀의 글은, 정말이지 그랬다.
공간에 흐르는 가을 공기가 맨살에 소름을 오소소 돋게 했다. 평온한 일상에 안도한다. 순간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남의 불행을 자신과 비교하며 안도를 찾는 이들을 나는 얼마나 경멸했는가?
오래전 지인을 따라 방문한 어느 교회에서 목사는 나의 장애를 거론하며 말했다. 하나님이 왜 장애인을 이 땅에 만드셨는지 아시나요? 그건 여러분께 현실이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게 해드리려는 주님의 안배입니다. 저들을 바라보며 건강한 육신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아시길 바랍니다.
-그녀는 헬러윈에 갔을까 중에서
블라인드 서평단을 신청한 이유는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이 지랄맞음이 축제가 되겠지 - 라는 훤칠한 제목이 정말 궁금했다. 지랄맞음이라는 단어 안에 담긴 회한. 신을 탓하고 싶어지는 저 말에 대체 무슨 사연이 있을까 궁금했다. 이렇게 이미 궁금한데- 이병률 시인이 모든 예술가들이 살고 싶어하는 어떤 심연에 작가가 이미 도착해 있는 건 아닐까, 라고 하셨으니... 신청하지 않고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서평단을 위해 제작된 책이라, 순서가 그대로일지는 모르겠지만 - 샘터 대상 수상작인 "불꽃축제가 있던 날 택시 안에서" 로 시작하여 24개의 에세이가 담긴 이 책은 정말 매 편이 충만했다. 다 읽고 나서야 생각하게 되는 질문. 아니, 눈이 안보이는데 책을 어떻게 쓰지...? 영화는 어떻게 보는 거지? 그 모든 세상 일을 어떻게 다 알고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거지? 하는 저차원 궁금증에서부터, 과거와 현재의 삶에 일어난 일들을 하나하나 골라 긴 여운을 남기는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깊은 어둠에 고여있었을까, 하고 시간을 헤아려보느라 다 읽고 나서도 한참 책 등을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