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미디어창비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상대로 달려야 했다. 끝까지 달려야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책이었다. 역사 추리소설이라는 생소한 장르. 참 오랜만에 스토리로 승부하는 소설을 본 듯. 21개의 챕터로 오로지 달려 달려 달려! 하는 그런 책이었다. 결말이 궁금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책이라, 가족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녘에 시작하길 잘 했다 여기게 된 그런 책이었다.

소설가 천선란님이 쓰셨듯, 에놀라 홈즈가 떠올랐다. 민환이가 꼭 슬픈 이 나라의 애놀라 홈즈 같았다. 물론 민환이는 애놀라 홈즈처럼 사랑하고 지지해 주는 엄마도 없지만. 시체도 발견하지 못한 채 부고로만 전해진 아버지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제주까지 내려온 여성이긴 하지만. 민환이는 댕기머리 탐정이니까! 여성이라 슬프고 서러운 조선의 탐정이니까. 용감하게 사건을 대하고 진척시켜 가는 모양이 꼭 영국의 애놀라 홈즈 같았다. 

영화처럼,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야기


음악이든 소설이든 눈앞에 그림을 그려주는 작품을 좋아한다. 가사가 없는 음악은 이미지가 떠오르고, 직접적으로 표현해 주는 소설은 보다 자세하게 눈앞에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책을 읽는 동안 내 눈앞에 한 편의 영화가 흘러가는 걸 보니 이 책도 영화화 얘기가 나오지는 않을지..! 

배경은 1426년 조선. 주인공은 민환이. 동생은 민매월.  고모네가 있는 목포에서 엄격한 통제를 받으며 지내던 민환이는 아버지 민 종사관의 부고와 함께 복선이라는 미지의 여성이 보내온 아버지의 수사 일지를 비밀리에 전해 받는다.  고모의 허락 없이 아버지를 찾으러 제주로 향하는 민환이. 노경 심방 (무당)의 수양딸처럼 지내고 있는 동생 매월이와 사라진 13명의 소녀들이 있는 제주 노원으로. 

13명의 소녀는 어디로 갔을까. 
  
제주는 아름답지만 서글프다. 섬이라 식량과 물이 귀하고 육지에선 귀향지로 지정해 버렸고. 농경지가 드물고 바다가 있으니 해녀가 있고. 육지의 높으신 분은 돌보지는 않으면서 공물을 요구하고. 근대로 올수록 아픈 역사투성이고. 그래서 외지인에 대해 경계가 깊고 말이다. 

또한 그 당시 여성이 물질로 생계를 책임졌기 때문에 그 지위가 육지에 비해 높으며 운신이 자유롭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댕기머리 탐정 민환이가 "비교적" 자유롭게 사건을 해결해 나갈 수 있었을지도, 그래서 작가는 제주를 배경으로 삼았는 것인지도. 캐나다에서 살았던 작가의 아버지가 제주 출신이라던데, 정말 책을 읽다 보면 제주의 문화가 곳곳에 드러나 좀 놀랐다. 뿐만이 아니다. 캐나다 사람인 작가가 이렇게까지 세부적으로 당시의 정황을, 분위기를, 여성의 지위를, 문화를, 시대상을 위화감이 없이 그려내다니, 하고 또 놀랐다. 


한라산도 나오는데, 잠깐 묘사하는 장면마저도 내가 다녀온 한라산이의 풍경이더라. 눈앞에 떠오르는 제주의 풍광들과 사람들. 풍경 묘사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것도 아닌데,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런 소설이었다.

아버지와 딸, 그리고 자매

여러 관계가 등장하는 데 유독 두드러지는 관계는 부녀, 그리고 자매다.

명나라에 조공으로 미성년 여성을 보내야 했던 시대. 아름다운 미성년 처녀를 골라 조공으로 바쳐야 했던 그 시절. 내 자식이 어여쁘지 않은 아버지가 있을까. 어느 아버지가 딸자식을 그렇게 보낼 수 있을까. 각기의 처지와 지위에 맞춰 아비들은 딸자식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다. 힘없는 나라에서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 지금도 똑같다. 얼마나 많은 나라에서 여성들은 희생되고 있는지. 그 맘 아픈 역사에 우리나라도 있었다.


이런 비극적 환경에서 나타나는 부녀의 갈등.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공감 가는 부분이 아닐까. 자식이자 부모인 내가 모두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얘기가 아닐지.

모든 형제 자매가 겪을 부모에 대한 쟁탈전도 그렇다. 부모는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대도...


이 모든 감정선은 스토리를 따라가며 자연스레 독자에게 전달된다. 각기 다른 이해=오해가 생기며 사건은 꼬여 가지만... 사건의 해결됨에 따라 시간이 만들어낸 감정의 골들도 해결되며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같음과 다름


외국소설을 읽고 있는 기분이 분명히 들었다. 배경이 제주이고 주인공이 한국 이름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번역된 소설을 읽고 있다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자꾸 애눌라 홈즈가 떠올라서 그런가. ^^;; 다른 분들의 후기가 궁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결론을 읽으며 눈물이 주르륵. 이 감성은 한국 감성인데, 그러면서 주르륵. 부녀의 관계도, 자매의 관계도 참 한국적인데, 그러면서 주르륵. 한국 감성이 글로벌 감성인가, 그러면서 주르륵.


더 나은 세상이 되길 


스피디하게 달리는 사건, 그 안에 담긴 감정선, 생생한 풍경 묘사, 살아 숨쉬는 인물들, 충실한 고증. 수많은 외국 매체들의 추천사 만큼이나 재밌게 읽은 책이었다. 외국 소설 같기도, 한국 소설 같기도 한 그런 신기한 책. 외국계 한국인이 지어 번역된 다른 책들도 궁금해졌다. 


80년 동안 끌려간 고려 여인 2천 명, 공식적 기록에 의한 조선 여인 114명, 비공식적으로 끌려간 11-18세의 더 많은 조선의 여성들을 애도한다. 그 긴 시간 동안 인간 조공이 되어 내 의지와 무관하게 슬픔을 겪고 고통을 당한 여성들을 애도한다. 그리고 지금도 여러 방식으로든 이어지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의 슬픔과 눈물이 아프다.


더 나아지길. 제발 더 나은 세상이 되길. 여성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위협받는 세상이 아니게 되길.


넓은 지대에 돌로 만든 커다란 집 세 채가 서 있었고, 초가지붕은 햇살을 받아 백금색으로 반짝였다. 뒤에 우뚝 선 나무의 초록색 잎사귀들이 서늘한 가을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자라면서 일상처럼 들었던 소리. 검고 낮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집은 5년 전과 똑같았다. 여전히 아담하고 수수했다. 아버지는 부유한 편이지만 육지에서 기와집 재료를 공수할 만큼 재력가는 아니었다. 거친 비바람으로 유명한 제주에 커다란 기와집을 짓는다는 발상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험한 날씨에 보호막이 되게 지은 집이 아니면 강풍에 무너지기 십상이다. - P80


"이상하지예?"

가희가 말했다.

"어멍 아방은 자식 위한거랜 생각허지만 정작 자식 입장에선 원허지 않는 일을 할 때가 하영있주마씀."

가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아방헌티 날 위해 혼 팔아달랜 부탁한 적 어수다. 겐디 아방은 다 너를 위한 일‘이랜 했고예"

...

"아방은 나 먹여 살리겐 무슨 일이든 해수다. 영 생각하면 감사허고, 경 허당 그런 생각을 한 나를 원망허고. 왜냐하면 아방이 얼마나 나쁜 짓 해신지 아니깐. 겐디 아방을 범죄자랜 생각허민... 굶어서라도 나 배불리 밥 먹게 해준 사실을 잊을 수 어수다."

 - P365


매일이 패배의 연속이라오. 이 일을 하다 보면."

유 어사가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남을 지키는 의무를 다한다는 일이 원래 그렇소. 몇 명을 구해도 대부분은 잃지. 이번만 그런 게 아니오."

 - P402

매월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럼에도 순수하고 찬란한 하늘과, 더욱 짙어진 언덕 아래의 나무들이 보였다. 슬픔이 우리 안에 골짜기를 만들었고 그 사이로 따스한 바람이 지나갔다. - P4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