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김훈을 처음 만난 건 지난 해 여름 ‘칼의 노래’를 통해서였다. 어찌나 글을 잘 썼던지 김훈이라는 이름은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다. 그리고 올해가 되어 난 서점에서 무심결에 김훈의 산문집 ‘밥벌이의 지겨움’을 사게 되었고, 다시 한 번 그에게 감탄했다. 유난히도 얼 그레이를 좋아하는 나무늘보로부터 김훈의 수필집인 ‘자전거 여행’을 얻을 수 있었고 얼마 전에는 김훈이라는 이름만보고 28회 이상문학상수상작품집을 사버렸다. 그러다 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을 데라고 하면 몇몇 다른 작가의 이름과 함께 김훈이라는 이름도 흘러나올 것이다.
그는 연필로 글을 쓴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그의 문장은 놀랍도록 소박하고 단아하다. 때론 관능적이기까지 한 그의 문장에 내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의 문장은 난중일기를 닮아있다. ‘칼의 노래’는 난중일기에 대한 그만의 재해석이다. 바다 건너 몰려오는 수많은 적들을 홀로 바다에서 맞이해야만 했던 한 장수의 입장에서 그는 세상 속에 내던져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지필묵이 아닌 연필과 원고지로 난중일기를 썼다면 칼의 노래가 됐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게 할 만큼 그는 그의 내면을 통해 인간 이순신을 녹여냈다. 칼의 노래는 분명 한 작가에 의해 재창조 된 소설이지만 그 어떤 전기보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에게 다가가 있다.
그의 문장은 자전거를 닮아 있다. 페달을 밟으면 그 동력은 기어와 체인을 통해 잘게 나뉘어 진다. 그리고 그 나뉘어 진 동력으로 바퀴는 누르고, 자전거는 앞으로 움직인다. 그렇게 그는 전국 산야를 자전거로 누비며 사람과 길과 풍경에 대해 썼다. 그리하여 그의 자전거 풍륜은 늙고 병들어 퇴역했고, 대신 새 자전거를 장만했다 한다. 그렇게 쓴 글이 책으로 나왔고 그는 그 책을 팔아 새 자전거 값 월부를 갚는 단다. 그게 2000년이니 지금쯤 책 팔은 돈으로 월부는 다 갚았을 게다. 유난히도 얼그레이를 좋아하는 나무늘보와 함께 서점에 갔을 때 ‘밥벌이의 지겨움’에 붙어있는 ‘자전거 여행’이 눈에 띄었다. 나무늘보는 ‘밥벌이의 지겨움’을 샀고 덤으로 딸려 온 ‘자전거 여행’은 집에 있단다. 그래서 증정본이란 도장이 선명한 책은 내 차지가 되었다. 덕분에 이사 오며 친척에게 줘버린 자전거가 그리워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다시 찾아 올 수도 없으니 그저 아쉬워 할 뿐이다. 더 아쉬워 자전거를 안 사고는 못 배길 지경에 이르기 이전에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수 있어 다행이다.
내가 감탄을 마지않는 작가 중에 한 명이 박민규다. 그만의 독특한 서사법과 현실에 대한 인식체계는 놀라움 그 자체이다. 사실 내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28회 이상문학상수상작품집을 산 건 김훈과 함께 박민규란 이름이 껴있어서였다. 만약 김훈이란 이름 만으로 사야 했다면 조금 망설임이 있었겠지만 후회는 안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후회가 무슨 소린가. 기대만 남아있다. 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단편 ‘화장’에서 그는 언어의 관능을 극대화시킴과 동시에 또 다른 수필집에서 이야기 했던 ‘밥벌이의 지겨움’을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여남은 생을 아껴 두 편 정도 장편을 더 쓸 거라는 데 그 또한 기대된다.
내 나이 50이 됐을 때 내 글이 과연 어느 정도 위지에 가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 알 수 없음이 두려움이 되도록 만드는 글이 김훈의 글이다. 금아 선생은 수필에서 수필이 서른여섯 살 중년의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라던데 그 말에 반박하고 싶어도 내 글로는 도무지 반박할 꺼리를 만들 수 없다. 김훈의 나이가 서른다섯만 되더라도 그 말에 당당히 반박할 수 있을 테지만 김훈은 수년 안에 회갑을 맞이할 노 언론인이며 신인 작가이다. 기자시절부터 문장이 탁월해 주목을 받았다던데 난 그럴 자신이 없다. 그래도 써야지 실력이 늘 테니 이렇게 펜을 놀리고 있다.
김훈은 정말 글을 잘 쓴다. 독자에게 김훈은 큰 기쁨을 주는 작가이지만 나처럼 글 좀 써보겠다는 지망생에게는 재난일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내 문장은 김훈의 그것을 닮았다. 정말 글 잘 쓰는 사람의 문장을 닮아 그 만큼 쓸 수 있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래서야 어디 되겠는가. 그보다 더 잘 써야지. 그래서 금아 선생의 수필에서 수필이 서른여섯 살 중년의 고개를 사람의 글이라는 말에 반박 한 번 해보자. 그런데 다 쓰고 나서 훑어보니 정말 잡스럽다. -- 2004/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