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쁨과 슬픔 -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일을 하는가?,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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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서만...세번째 알랭 드 보통의 책 +_+ (이 작가 진짜 너무 좋다_가끔 이상한 사회운동 할려고 사람들 모으는 교주같아 보이지만 않으면 최고다)

좀 독특하다. 지금까지의 알랭 드 보통이 어땠느냐면, 굉장히 철학적으로 현실문제에 대해 사유하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사랑일까, 인생학교_섹스, 불안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그런데 이 책은 (다른 작가들책처럼) 평범해서 오히려 (보통의 책으로서는) 독특하다.

 

이 책은, 열가지 산업체에 발벗고 나서서 그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취재하고 관찰한 결과를 토해낸 결과물이다.

그러니_철학적이지 않는 것이 철학적인건가? 물론, 그는 틈틈히 내가 여전히 건재하다_는 문장을 집어넣는다. 내가 줄그은 문장들은 물론 모조리 그런 철학적 사유의 문장들일테다.

 

'어쩌면 비스킷을 구우며 오후를 보낸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상근직 5천명이 그 별것 아닌 일을 하는 회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랄사람도 많을 것이다' 로 맥을 끊으며 업계 1위의 비스켓 회사를 조롱하는 것을 보며, 우리는 우리가 그 '별것아닌'일에 왜 목매며 하루를 보내고 있는 건지에 대해 끊임없이 반문하게 된다. 업계 지배인 누구도 이런 '반문'거리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 이기 때문에 작가는 어쩌면 '유용하지도 않은'사고로 돈이 되는 일의 맥을 끊는 '맥없는'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은 언제 '의미'있게 되는 것일까  

 

일이 의미있게 느껴지는 건 언제일까?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자아내거나 고통을 줄여줄때가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이기적으로 타고났다고 생각하도록 종종 배워왔지만 일에서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행동하려는 갈망은 지위나 돈에 대한 욕심만큼이나 완강하게 우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합리적인 정신 상태에서도 출세길을 버리고 말라위 시골마을에 먹을 물을 공급하는 일을 도우면 어떨가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그저 물질만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라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86

 (물론 내 입장에서) 알랭 드 보통은 무엇을 생각하든 기대를 채워준다. 그것은 그 사람의 '사유'의 폭과 맞물려있을 것이다. 비스킷을 굽는 공장을 보면서 분업화 된 산업의 특성과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런 사유를 하는 사람도 있다.

 

진짜 문제는 비스킷을 굽는 것이 의미 있느냐가 아니라, 그 일이 5천 명의 삶과 6개 제조현장으로 계속 확장되고 분화된 뒤에도 여전히 의미 있게 여겨지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일은 오직 제한된 수의 일꾼의 손에서 활기차게 이루어질 때에만, 그래서 그 몇몇의 일꾼이 자신이 작업 시간에 한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상상하는 순간에만 의미 있게 보일 수도 있다. 아이들 책에 등장하는 어른들이 지역 영업 관리자나 건물 서비스 엔지니어인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분명히 의미심장하다. 아이들 책에는 보통 가게 주인, 건설 노동자, 요리사, 농부가 등장한다. 인류의 생활을 눈에 띄게 개선하는 일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선천적으로 균형과 비례를 의식하는 피조물인 우리는 '스위트 비스킷 브랜드 감독 코디네이터'같은 직책에는 뭔가 뒤틀린 것이 있다고 여기며, 빌프레도 파레토의 주장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명민하다 해도, 아직 아무도 설득력 있는 다른 이름을 붙이지 못한 다른 원리가 무시되고 더 섬세한 인간 법칙이 침해를 받고 있다고 느낄 수 밖에 없다. -88

(보통과 직감은 얼추 비슷하나) 원인과 결과에 대한 해석은 조금 다른 내 사유로는, 아이들 책에 등장하는 어른들의 직업에 지역 영업 관리자나 건물 서비스 엔지니어가 아니라 요리사, 농부, 소방관이 (아직도) 등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소명'과도 관련있지만 무엇인가 분업화 되지 않는 완전한 일을 해내어 직업으로서의 '완결성'을 갖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노동을 낭비하는게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니까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가? 나는 이보다 인간을 더 철저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묻고 싶다. 95. 비스킷 공장  

노동의 완전함과 가치에 대한 사유, 완전한 직업에 대한 보통의 생각은 직업상담사를 통해 드러난다. 물질적인 것들에 치우쳐 직업을 골랐던 사람들이 하나둘 가치를 찾는 노력을 하면서 직업상담가들을 찾는다. 여전히 지금 직업상담사들은 비주류의 활동을 하는 사람들로 인식될 뿐이고, 대중 앞에서는 '직업의 소명과 성공에의 의지'등을 불태우는 강연을 하고 뒤에와 한숨을 쉬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그들의 가치를 알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가치있는' 직업인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찬란한 성취의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서서, 목표에 가까이 다가온 것은 맞지만 아직은 저편이 아니라 분명히 이편에 서 있으며, 사소하지만 핵심적인 여러 가지 심리적 결함(약간 지나친 낙관주의, 날 것 그대로 나타나는 반항심, 치명적인 인내심 부족이나 감상주의)으로 인해 현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한다. 우리는 아주 작은 부품이 없어 활주로 옆에서 꼼짝도 못하는, 그래서 결국은 트랙터나 자전거보다도 더 느린 존재가 되어버린 첨단 비행기와 같다. 141. 직업상담.

보통의 직업 탐구는 인문, 과학, 사회를 아우른다. 물론 그 소실점은 직업으로서의 가치, 생명력있는 노동으로 귀결된다. 심지어 엔지니어들은 분업화된 노동으로 인해 자신의 노동을 낭비하기에 이르며, 이것이 개인적 에고를 제한 시킨다고, 보통은 주장한다.

 

헤어네트를 쓴 여러 그룹의 엔지니어들이 위성 발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자 현재 과학계의 삶이 개인적 에고의 제한 또는 말살을 의미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개인적 영광의 기회는 없었다. 전기가 기록되거나 일반인이 기억할 만한 이름으로 남을 전망이 없었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도, 심지어 어떤 상업적 또는 학술적 조직도 명예를 독차지할 수 없는 집단적 기획이었다.

 

천재들이 관측소나 작업장에서 일로매진하여 과학사의 방향을 바꾸던 시절은 지나갔다. 우리는 천체물리학자와 항공 엔지니어들이 어느 한 사람을 우리 시대의 갈릴레오로 띄우려는 미디어의 시도에 저항하면서 공동 실험실에서 작은 수수께끼를 10년 동안 함께 공략하는 소박한 시대에 들어섰다.  157.

어쩐지, 나는 보통이 현대의 엔지니어와 단순기술 노동자가 뭐가 다르냐고 반문하는 것 처럼 느껴졌다.

 

책상들을 ML6W.246 같은 뻣뻣한 약어로만 확인할 수 있는 오픈 플랜의 포괄적인 규칙성에 도전하여 직원들은 각자의 작업대에 미묘한 개성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펠트 판에는 가족사진이 붙어 있다. 이따금씩 스포츠 팀이나 휴가 목적지를 기념하는 머그나 장신구가 보인다. 바닥에 몸을 웅크리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발을 카펫에 문지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동작은 나일론이 많이 섞인 직물이 면과 마찰되는 자극적인 느낌을 줄 뿐 아니라, 비록 작기는 하지만 규칙을 깨고 집의 친밀한 느낌을 일하는 영역으로 가져왔다는 만족감도 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매우 유머러스한 구절 추가. 나도 회사원인 이상, 연구원이든 사기업이든 우선 회사에 다니는 일꾼으로서, 환경을 길들여가고 있다는 말에 공감했다. 더불어, 익숙해진다는 것 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익숙해질 수록 사람은 편한 것에 의지하게 되고, 그렇게 될 수록 긴장은 없어지고 능숙도는 늘어난다. 하루 가운데 진짜 생산적인 일을 하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사무실 고참들은 환경을 길들이는 데 능숙하다. 그들은 공동 주방의 어디에 자기 먹을 것을 감추어야 하는지, 언제 화장실에 가야 조금 전까지 좋은 향기가 나는 긴장된 분위기의 좁은 공간에서 칸막이를 가운데 두고 나란히 앉아 있던 동료와 세면대에서 어쩔 수 없이 대화를 나누는 일을 최대한 피할 수 있는지 안다. 생산적 활동의 분출은 저녁식사 약속, 연애에 관한 소식 확인, 영화배우와 살인자들의 기묘한 행동에 대한 철저한 분석 때문에 중단된다. 하루 가운데 진짜로 돈을 버는 시간은 얼마나 적은지, 그 사이 사이에 백일몽에 빠지거나 다시 기운을 차리는 데 쓰는 시간은 얼마나 많은지. 289   

생산적인 일, 가치있는 삶과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를 갖는다는 것을 안다면,

일하는 것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되새김질 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해주었던 소중한 책.

일의 기쁨과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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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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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포터는 그의 첫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통해, 놀랍도록 담담하게 이야기를 ‘뱉어낸다’. 이 행위 속에는 무기력한 주인공들과, 주인공의 주변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들과, 그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 숨은 따뜻한 인간애들을 볼 수 있다.

 

포터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비밀 같은 구멍을 갖고 있다. 그 구멍은 너무 컴컴해서 바닥을 내려다 볼 수 없는 (p.8) 크고 빈 공간이다. 이 구멍은 가끔은 동물(코요테)로, 가끔은 주인공(아술)으로, 가끔은 주인공과 내연관계에 있는 인물의 아지트같은 형태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드러난다. 이 구멍을 파고드는 끝에, 포터 소설은 진실의 형체를 오래도록 곱씹게 한다. 현상 안쪽에 가려진 진실, 그 형체를 알 수 없는 진실의 모습이 무엇인지 독자는 오래오래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에요, 하고 나는 그분들에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꿈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탈은 살게 되는 그 부분은. (p.15)

 

#. 인물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포터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채색이다. 그들의 입을 통해 사건이 전달되고, 다른 인물들의 행위, 그것이 사회나 어떤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들이 알려진다. 그러니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 얼마나 주관적으로 세상이 보여질 수 있는지, 사람 안에서 피어나는 생각들이 얼마나 그 사람의 생각을 통제시킬 수 있는지 알려준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밝히고 있듯, 그들은 모두 자기 안에 갇힌 생각 때문에 세상을 너무나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소시민에 불과하다. 게다가 작가는 능청스럽게도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너무나 담담하게, 내가 ‘의심’을 하고 있었노라고 고백하기까지 한다.

 

그제야 내가 너무 앞서 가고 있다는 것을, 사실상 나는 아술이 그 아이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p.77)

 

무채색의 주인공들 덕분에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주변인은 온갖 색으로 덧입혀져있다. 그 색깔 역시, 주인공의 눈을 통해 밝혀진다. 비록 그것이 주인공들과 상관없는 일일지라도.

“얘야, 이 일은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란다. (158)”.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지만 무기력하게 그것들을 바라볼 수만도 없는 소시민들, 평범한 이웃들. 포터는 이 인물들을 조용히 소설 속으로 끌고와 담담하게 이웃의 이야기를 꺼내놓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을 통해 바라본 세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은 책의 제목과 같은 이름의 소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소설 안에 드러난 세 인물의 구도를 조금만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주인공이 세상에 무기력해져버린 이유를 독자는 어느새 찾아버리게 된다. 주인공 헤더는 두 남자에게 마음을 준다. 로버트는 물리학과 교수이자 헤더의 선생이며, 매우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세상에 임하는 인물이다. (“모든 물리학자에게는 자기 너머 수준의 사고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와요. 자기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준. ” -로버트의 말 p. 97) 콜린은 주인공의 입을 통해 고백하듯, '로버트가 아닌 모든 것’이다.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의대생이며, 수영선수이고, 젊고 활기에 가득차있다. 헤더는, 헤더는 결국 콜린과 결혼할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버트에게서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낀다. (“마치 평생토록 어떤 깊은 방식으로 그를 알아온 것 같았다.(104)”) 콜린은 늘 예측가능하지만, 로버트는 예측불가능하다. (나는 그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떠오르길 기다리며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그저 재미있어하는 표정이었다. (105))콜린은 바깥세상의 모든 것이고, 로버트는 바깥의 세상과 아무런 연관도 없을 것 같은 공간에 있는 비밀스러움을 갖고 있다. 헤더는 죄의식을 느껴야 할 일인지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워하며, 로버트의 집에 찾아간다. 콜린과의 만남을 고대하지 않을 수록, 로버트와의 만남은 고대하게 되는 것이다. (108)

 

세상을 사는 사람들, 우리들. 피상적 인간관계를 맺으며 사회생활을 해야하는 사람들에게 주인공의 방황과 갈등, 인물에 대한 애착은 너무도 당연하게 우리의 그것과 맞물린다. 바깥 세상과 닮은 콜린 -그러니 자본, 지위, 명예같은 바깥세상의 것들-을 거부하면서도 그것과는 평생을 같이 해야 하는 것을 본능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소시민들. 그러다 보니 나 자신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p.120) 무력감에, 우리는 빠져들고야 마는 것이다. 작가는 두 인물을 거의 대등한 위치에 두고있다. 그러나 독자는, 우리는 이 놀랍도록 무덤덤한 문체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등줄기에 땀을 쥐어낼 수밖에 없다. 바깥세상과 밀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로버트가 갖고 있는 이상과 그 이상에 대한 갈구를 비밀스럽게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순간, 그제야 우리 사이에 지금껏 말을 넘어선 교감이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p.122)

 

진실은 어디에 가려져 있는가. 과연 우리가 겪고 듣고 보는 이 모든 것들은 진실에 얼만큼 닿아있는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야 비로소, 우리는 ‘유일한 진실이 우리가 숨기는 비밀에 있다(128)는 것을 알게 된다. 다만,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우리는 모든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하는 것 (129)뿐이다.

 

로버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헤더는, 어둠 속에 앉아 오래도록 눈물을 쏟는다. 그러나 ‘결국에 나는 (로버트의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 가슴이 멍울져 나를 크게 짓누르다가 빠져나간다. 진실을 알고 보는 것은, 상처를 허락한다는 뜻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소시민적인 주인공들, 무채색인 그들, 사랑 받고 싶어하는 그들, 이 모두의 눈을 통해 작가는 이야기 한다.

 

너는, 사랑할 준비가, 진실을 알 준비가,

되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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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철학 - 이야기 탐구의 아이리스
김용석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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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철학으로 만든 책. 철학을 즐겁게 보고 싶은 분들께 추천. 각 장이 독립적이라 듬성듬성 볼 수 있는 장점도 있음. 단, 뭔가 철학적인 읽기의 `시도`를 해봐야겠다는 분들께는 비추. 양서의 목록에 들어갈 가치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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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술 밀란 쿤데라 전집 11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 민음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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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정말로' 예쁜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 개정판.

들고 다니는 시간에 기분이 좋을만큼 예쁜 책.

 

소설의 기술에 대한 에세이, 대담을 묶어 만든 책인데 밀란쿤데라 소설의 본질을 볼 수 있다.

강의듣는 기분으로 읽었다.

 

소설을 쓰는 순간에는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느라, 다른 어떤 이론적 상황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다시 말하면, 소설을 '쓸' 때가 아니라 (적어도 나에게는) 작품을 구성할 때,  이 모든 것들이 작품을 쓰기 전에 뼈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소설이 무엇인가'와 같은 이야기를 해도 좋은 그런 시간이다.

 

소설의 정신은 복잡함의 정신이다. 모든 소설은 독자들에게 "사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 라고 말한다. 33.

이 문장에 감명을 받아, 나는 방정맞게 별표를 쳐두었다.

자아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 그렇지만 절대로 답을 알 수 없는 과정. 나는 그것이 소설의 본질이자 삶을 통찰하는 방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람들이 사유하고 넘어가지 않는 부분. 철학자들이 이론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부분. 소설가는 유희와 이야기를 섞어 그것을 맹렬하게 비난하거나 동감시키거나 무심한듯 던져놓는다. 그것이 소설이다.

 

사람들은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사람들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비합리적인 체계가 이성적인 생각보다 얼마나 더 우리 태도를 좌우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만 하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어항 속 물고기에 대한 애착으로 내 신경을 건드리고, 어제 나에게 끔찍한 불행을 가져다준 사람에게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불신감을 갖게 될 것이다. 95.

요새 내가 개인적으로 겪은 불신과 배신에 대한 경험을 소설은 유희스럽게 녹여넣는다. 그 '키치'가 꾸며진 것이라 하더라도. -비록 이것이 순수문학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없더라고 하더라도 김영하적 발상에서의 키치는 한국 문학사에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고 여긴다-

 

-우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어요. 즉 소설의 몸으로 들어오면 성찰의 본질이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소설 바깥에서 사람들은 확인의 영역에 있죠.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하는 말에 확신합니다. 경찰이건 철학자건 수위건 다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소설의 영역에서는 확인하지 않습니다. 놀이와 가설의 영역이거든요. 그러니까 소설적 성찰이란 본질적으로 의문적이고 가설적인 겁니다. 116.

 

확인하지 않는 상태에서 (왜냐하면 확인할 필요가 없으므로) 소설은 자유를 얻는다.

사람들의 생각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이기적이고 감상적일 수 있는가. 그 사람들이 얽혀있는 세상은 어떠한가. 그렇다면 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만큼이나 소설은 복잡하다.

 

현실에 대한 환상을 통해 환기되어서 우리는 전혀 그럴듯하지 않기는 하지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138.

쿤데라는 스물다섯까지 문학보다 음악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많은 음악가들과 그 정서가 자신의 글에 영향을 주었다고. 무엇이든 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소설가의 일생이 그의 글에 녹아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쿤데라가 '작가'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소설가'라는 단어를 고집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가는 늘 자신의 작품 뒤로 숨어있는 작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악장의 길이가 거의 다 같다면 전체적인 통일성은 깨져 버릴 거예요. 135.

 

이 책 역시 통일성이 깨지지 않는 (모든 장의 길이가 다른)데, 6부에는 쿤데라 소설에서 사용된 단어를 낱말로 풀어주고 있다. 그 중 몇가지 고찰이 매우 독특한데, 옮기면 다음과 같다.

 

죽음 노학자는 시끌벅적한젊은이들을 지켜보다가 문득, 이 강당에서 자유의 특권을 지닌 이는 자신뿐이며 그것은자신이 나이가 들었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사람이 자기 무리의 의견을, 대중과 미래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이 들었을 때뿐이다. 나이 든 사람은 이제 가까이 다가온 죽음과 더불어 혼자이며, 죽음에는 눈도 귀도 없으며 그러니 죽음한테 잘 보일 필요가 없다. 이제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 삶은 다른 곳에 중.

획일성 오늘날 획일성을 지니지 않은 인간이란 이미 그 사실만으로도 이 세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주게 된다. (-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어떤 현상이 일반화되고 일상화되어 도처에 있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것을 식별할 수 없게 된다. 획일적인 삶의 행복감에 도취된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이 걸친 제복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 211.

소설을 쓰기 위한 첫번째 단계는 역시 '사유'하는 것이다. 어떤 현상에 대해, 단어에 대해, 인물과 공간과 시간과 사건에 대해 고찰하는 것. 그러한 사유가 녹아든 글이 바로 소설이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사람뿐 아니라,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 소설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지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책이 바로 이 책, (다시한번 말하지만 표지가 아주 예쁜) '소설의 기술 (밀란쿤데라)'이다.

 

 

아래는 소설 기법에 관련된 인용구

 

저는 주제와 모티브를 구분합니다. 모티프라는 것은 주제나 이야기의 한 요소로서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항상 다른 맥락 속에서 여러차례 반복되죠. 무거움이나 키치같은 주제를 가로질러 가기도 합니다. 123.

 

-소설을 구성하는 것도 여러 다른 정서에 공간을 배열하는 것이라는 것, 제 생각에 이것이야 말로 소설가의 가장 섬세한 기술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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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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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읽으며 좋은 구절이 나올때마다 책장을 접는 습관이 있다.

이 습관은 출퇴근 시간에 흔들리는 지하철 속에서 책을 읽으면서 생긴 것인데, 줄을 그으면 자꾸 줄이 비뚤어져서 나중에 다시 읽을때 걸리적거려 만들어진 습성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정말' 좋은 구절이 나오더라도 펜으로 책에 표시를 하지는 않는다.

연필로 체크를 해두거나 줄을 긋는다. 내가 줄을 긋는다는 것은 내 기준에서 아주 심각하게 이 글이 마음에 든다는 뜻이다.

이 책은, 삼십년동안, 그래도 책을 적게 읽지는 않으면서, 내 짧은 독서인생 중에 가장 많은 책장이 접힌 책이다.

그리고도 모자라, 연필을 가지고 다니면서, 연필로 그은 줄만 몇십개는 될 것같다.

 

서른의 봄에_ 사랑에 빠져버린 그의 지성과 섬세함이_ 놀라울 따름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컨셉으로 나뉘어 있다.

불안의 원인_그리고 해법.

사실 이 책의 원작 타이틀은 Status anxiety_지위에 대한 불안. 이 제목이 사실 내용상 더 잘 맞는다.

사람이 어떤 '지위'에 오르는가, 그 지위에 오르는 사람들을 보는 마음가짐이 어떠한가에 따라 불안을 느낀다고 틈틈이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책의 서문에 비친 지위에 대한 정의는 굉장히 중요하다. 책 전반을 아우르는 지위에 대한 불안이 여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위_좁은 의미에서는 한 집단 내의 법적 또는 신분적 신분을 가리키는 이 말은,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이라는 뜻을 '더불어' 갖고 있다. 그러나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존엄을 잃고 존중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되며, 이러한 걱정은 매우 '독성'이 강해 생활의 광범위한 영역의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다.

지위로 인한 불안을 느끼는 원인으로 제시한 것들은,

사랑 결핍/속물근성/기대/능력주의/불확실성. (모두 본능적으로 알아채기 쉬운 불안의 요인들이나 이 책은 생각만큼 '감각'적이지는 않다. 알랭 드 보통 아닌가.).

불안을 해쳐나갈 해법으로는

철학/예술/정치/기독교/보헤미아가 제시된다. (결국 해답은 하나로 귀결될 것이다.)

 

1. 원인_기대

 

"질투심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 사이의 커다란 불균형이 아니라 오히려 근접 상태다. 불균형이 심하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며, 그 결과 우리에게서 먼 것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지 않게 되거나 그런 비교의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데이비드 흄 <인성론, A Treatise on Human Nature> - 58. 기대.

이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내용의 대부분은 나 역시 그렇다고 느껴왔거나 들어왔던 것들에 대해 깔끔하게 정의를 내리거나 그에 대한 인용구를 찾아 인용하고 있다는데 있다. 고전의 가치에 대해 송구스럽게도 다시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1835년 프랑스의 법률가이자 역사가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 역시, 미국인은 번영속에서 왜 그렇게 불안을 느끼는가 라는 화두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며 데이비드 흄의 입장에 숟가락을 얹었다.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적인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65.  

그러한 생각이 근원이 되어 눈에 띌만한 토크빌의 사고에는, (따라서) 귀족사회와 민주사회에서는 구성원들에게 빈곤의 개념이 다르게 적용된다는 것이 있다. 귀족사회에서 하인들은 선뜻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지만, 민주사회에서는 언론과 여론이 하인들도 사회의 정상에 올라설 수 있다고 '무자비하게 부추기기' 때문이다. 토크빌의 미국 여행 뒤에 미국인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의 자존심과 가치관을 걸고 어떤일을 했을 때 그 일을 이루지 못하면 자존심이 상하게 되며 수모를 느낀다는, 토크빌의 논리에서 한발짝 앞서나간 사고를 보인다. 자존심이란 기대수준과 부합한 방정식을 이루며, 우리의 기대수준이 높아지면 수모를 당할 위험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자존심 = 이룬 것/ 내세운 것. - 69.

2. 원인_능력주의

 

그런데, 요구를 늘여놓는 이 사회에서는 적절한 자존심을 얻는 것이 매우 어렵다. 사회의 분위기가 성공에 호의적이라면 이러한 사회의 분위기때문에 사람들은 생각도 못했던 행동이나 소유에 자신을 거는 방향으로 '떠밀려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극대화 된 것이 <공산당 선언> 직전 엥겔스가 발표한 <영국 노동계급의 조건 Die Lage der arbeitenden Klasse in England(1845)>이다. 부자들은 사회가 원하는 성공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교활하고 비열해진다. 부르주아가 자기 이익을 극단으로 추구하는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다. -91.

 

불안을 일으키는 성공 이야기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등장하는 키워드다. 우리 사회만 돌아봐도, 서점의 베스트셀러만 봐도, 가히 충격적으로 자기계발서가 많다. 이런 현상은 18세기 중반 부터 시작되었고, 세가지 이야기 1) 빈자가 아니라 부자가 쓸모있다. 2)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3)가난한 사람들은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에 의해 발단된 것이다. 사회진화론자 허버트 스펜서의 발언은 끔찍하리만큼 진화론적이다.

 

그들이 살 만큼 완전하다면 살 것이고, 그럴 경우에는 그들이 사는 것이 좋은 것이다. 만일 그들이 살 만큼 완전하지 않다면 죽을 것이고, 그럴 경우에는 그들이 죽는 것이 최선이다. -110

 

3. 원인_불확실성

 

삶은 불확실하다. 재능은 한동안 우리 손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그간의 성공마저 물거품으로 만들곤 한다. 우리는 가끔씩만 재능을 보여줄 뿐, 평소에는 그런 재능의 소유자답지 못하게 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의 성취의 많은 부분은 외적인 힘이 준 선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118  이런 불확실성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운'도 그런 경우다. (보면서 완전 빵! 터진 문장하나: 우리의 지위는 '운'이라는 말로 느슨하게 얽어 넣을 수 있는 어떤 범위의 우호적 조건들에 의존하고 있다.ㅋㅋㅋㅋ -119) 왜 그런 경우가 있다. 유리한 상황은 마치 '운'이 작용한 덕분일 것 같은 그런 거.

이러한 불확실한 상황에 처한 인간들의 불안한 심리는 인용구에서 극대화 된다.

 

우리는 언젠가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적과 함께 살아야 하고, 언제 원수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친구와 함께 살아야 한다 (라브뤼예르) - 124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의 범위는 세계경제까지 넓어진다. 경제사적으로도 서양 경제의 역사가 성장과 후퇴를 주기적으로 반복했다는 것은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작가는 불안의 원인을 다루는 이 책에서 진짜 '똑똑하게' 성장 후퇴 그래프를 집어넣고, 경제환경의 지속적인 불안으로 사람들이 불안을 느낀다는 것을 역으로 이용하고 있다. (아.....진짜 보통이 아닌 보통이다)

 

마지막으로 원인 파트에서 나오는 기찬 문장 하나를 더 읊어본다면,

 

인간은 웃어줄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어주지 않는 법이다. -130

가족적이고 공동체적인 관계는 18세기 후반 부르주아가 권력을 잡으면서 파괴된다. 자본과 과학기술을 부리는 능력으로 무장한 부르주아 계급이 가진 중대한 관심사는 바로 '돈'. 이때부터 사람들은 대도시로 몰려들고, 돈에 민감한 자본주의시장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사실 이걸 읽을 때까지만 해도, 아 이사람 대체 논리를 어떻게 전개시키려고 이런 무모한 이야기들을 벌여놓는 걸까,라는 생각이 줄곧 들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인간은 속물주의, 자본의 노예, 불확실함에 치를 떠는 약한 존재들이기만 하기 때문이다. Botton 논리의 진짜는 여기서 부터 시작이다.  

 

자, 이번에는 알랭 드 보통이 제시한 불안한 마음을 없애는 해법을 알아볼 차례다.

 

1. 해법_철학

 

어느 사회에서나 '지위'의 유지는 모든 성인남성 (이라고 이 책에서는 이야기 하나 사실 양성평등화가 실현되어가는 지금 사회에서는 사실상 모두에게) 일차원적인 과제가 되었다. 사회가 인정하는 일정한 지위에 오르는 것은 사람의 권위나 신용에 더 큰 신뢰성을 준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지금 읽고 있는 책 지식의 통섭에 나오는 글귀가 아주 적절하게 얽힌다.

미셸 푸고(Michel Paul Foucault)의 표현을 빌리면 진리는 "권력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 안"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지식의 통섭, 52)

이것이 극대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장터의 조롱'이다. 마치 중학생들에게서 잘 나타나는 '지위'석권의 문제라 하겠다. 지나가다가 훅, 하고 누가 칠때, 아, 어떤 새끼야, 하고 돌아봐줘야 '지위'가 선다는 것이다. 장터에서 조롱을 당하거나 거리에서 누가 불쾌하게 째려보았을 때 싸움을 걸지 않으면 자신을 모욕한 자의 행동이 옳다고 확인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143)

 

자, 이런 지위와 조롱에 맞서는 해결방안은 뭘까. 보통이 말한 첫번째 지위의 불안에 대한 해결방안은 바로 '철학'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경멸하는가? 경멸하라고 해라. 나는 경멸 받을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다. -로마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149)

 

사실, 위의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되고, 이것은 스스로가 자신을 파악하고 있으며 모욕을 당하는 것에 대해 적어도 스스로에게 그렇지 않다로 위안을 해줄 수 있다는 말과 상통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비난이나 질책을 근거 없이 무시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가치평가를 지적인 양심에 맡기는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다. (149) 철학은 성공과 실패의 위계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 과정을 재구성할 뿐이다. 따라서 철학은 주류의 가치 체계에서는 어떤 사람이 부당하게 모욕을 당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부당하게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149)

 

철학자들은 함께 모여 연구를 한 것도 아닌데 입을 모아 외부의 인정이나 비난의 표시보다는 우리 내부의 양심을 따르라고 권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157) 쇼펜하우어의 말을 들어보자, "모든 질책은 그것이 과녁에 적중하는 만큼만 피해를 줄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질책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만만하게 그런 질책을 경멸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2. 해법_예술

 

예술은 무엇보다도 존재의 부족한 부분을 해석하고 그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 -163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맛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혀있다. -164

그러므로 에술은 '삶의 비평'이다

 

비극작가들, 희극작가들은 자신의 방법대로 사회를 '비틀어'본다. 보통은 비극작가의 예와 희극작가의 예를 들어 '비틀림'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비극작가가 낳은 인물의 특성: (비극에서) 눈에 두드러지는 요소가 있다. 빅그의 주인공은 윤리적 수준에서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 좋은 자질과 더불어 어떤 약점, 예를 들어 지나친 자만심이나 격한 기질이나 충동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인물은 동기가 악해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 hamartia, 즉 판단의 잘못이라고 부른 것, 또는 일시적인 맹목, 또는 현실적이거나 감정적인 과실때문에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

 

여기에 포인트가 있다. 평범한 독자인 우리들은 '주인공에 대한 동정심, 주인공과 동일시를 했기 때문에 생기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비극작품은 재앙을 피하는 우리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동시에 재앙을 만난 사람들에게 공감을 느끼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따라서 극장을 나설때면 쓰러지고 실패한 사람들을 우월한 태도로 대하기가 어려워진다. (192)

비극작가들은 저항할 수 없는 진실로 우리를 이끌면서, 우리 역시 엉뚱한 상황에 닥치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우리가 비극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실패에 평소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 작품을 통해 실패의 유래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97.

 

우리는 플로베르의 소설을 덮으면서 우리가 사는 방법을 배우긷오 전에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 행동이 엄청난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잘못에 대한 공동체의 반응이 무자비하다는 사실에 대해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게 된다. 200.

 

-희극작가들은 사회를 '비꼬아'보게 마련이다. 골방에서 킬킬대면서 읽는 김영하 소설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재밌는가? 그것이 다가 아니다. 그 후에 밀려드는 쓸쓸함과 허망함. 희극작가들은 그것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18세기 말 잉글랜드 상류 사회의 여자들 사이에서는 모유 먹이기가 유행했다. 그러자 전에는 아기에게 관심도 갖지 않던 여자들이 모성애에 대한 진보적 사상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아기에게 젖을 물리기 시작했다. 육아실에 고개를 들이밀지도 않던 여자들이 굳이 젖가슴을 드러내고 젖을 먹였으며, 심지어 점심이나 저녁 식사 때 음식이 나오는 사이사이에 먹이기도 했다. 그러자 풍자만화가들이 나서서 절제를 요구했다. 210

비정상적인 사회를 꼬집는데 희극이 사용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몇가지 사례가 더 나오는데, 이건 책을 읽으면서 킬킬대시길.

 

3. 해법_정치

 

이 책의 제목은 status anxiety이다. 부에 대한 지위, 명예에 대한 지위, 그 모든 지위들에 대한 불안을 가진 사람들을 꼬집어 해답을 구해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자, 마치 희극같이 해법을 늘여놓는 보통의 솜씨를 보자.

 

부는 단지 높은 지위를 제공할 뿐 아니라, 늘 변하는 광범위한 소비재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여 행복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장려되기도 한다. 그런 소비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전 세대의 제한된 삶을 연상하며 동정심과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230.

 

이런 이상이 아무리 자연스럽게 보인다 해도, 정치적 시각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듯이, 이것은 단지 인간이 만든 것일 뿐이다. 231.

근대의 이상 가운데 부와 미덕의 연결, 가난과 미덥지 않은 태도의 연결만큼 정밀한 조사를 측면도 없다. '공동체에서 존경받을 만한 자리를 차지하려면 돈이 필수적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물질주의적인 태도와 거리가 먼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부를 축적하여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불명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요구를 느낄 것이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불안한 마음과 책임감에 시달리는 것이다. 231

어떤 일자리든 그것을 유지하려면 지능, 힘, 선견지명, 남들과 협동하는 능력이 요구된다.234. 이러한 강요는 사람들에게 끝끝내,

' 갖추고 사는 사람은 행동이 대단히 훌륭하고 미덕을 많이 갖추었다고 상상하게'한다. 존 러스킨은 <최후의 사람에게 Unto This Last>(1862)에서 "부자가 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근면하고, 결단력 있고, 자신만만하고, 열의가 있고, 상상력이 없고, 둔감하고, 무지하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완전히 어리석고, 완전히 지혜롭고, 게으르고, 무모하고,겸손하고, 사려깊고, 둔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예민하고, 아는 것이 많고, 앞일을 생각하지 않고, 예상할 수 없게 충동적으로 사악한 모습을 보이고, 꼴사나운 악당이고, 드러난 도둑이자 완전히 자비롭고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다"라고 정의내린다. .... 많이 봐오지 않았는가. 철학책을 옆에 낀 뒷부분의 모습을 본연으로 한 '오빠 선배'가 대기업에 들어가면 앞문장의 모습이 되는 것.

 

+ 해결책, 불안이 무엇이든.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우리는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 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 247

 

부란 나비에서부터 책이나 미소에 이르기까지 뭐든지 풍부한 상태를 의미한다. 러스킨은 부에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 부에 강박감도 느꼈다. 그러나 그가 염두에 두었던 부는 특별한 종류였다. 그는 친절, 호기심, 감수성, 겸손, 경건, 지성에서 부유해지기를 바랐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쵣애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251.

 

마르크스가 보기에 이데올로기적인 믿음을 주로 퍼뜨리는 사람들은 사회의 지배계급들이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이런 관념들은 강압적인 듯 보이면 결코 지배를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무색무취의 가스처럼 사회에 방출된다. 그것은 신문, 광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교과서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릴 때 우리 모두 가졌던 환상, 즉 우리가 살아가는 제도가 날씨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환상을 머리에서 씻어내야 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257

 

4. 해법_기독교

 

프랑스인이니, 글의 대부분은 '천주교'일 것이다. 기독교는 그저 '기독교' 자체가 아니고, 신성한 것에 대한, 혹은 종교에 대한 가치이다. 주요하게 나오는 개념이 '죽음'인다. 죽음을 생각하면 생활에 진정성이 찾아온다는 논리를 펴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의 가장 큰 효과는 아마 나일 강변에서 술을 마시든, 책을 쓰는, 돈을 벌든, 우리가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가장 중요한 일로 시선을 돌리게 해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덜 의존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276. 죽음에 대한 생각은 악용을 할 수도 있지만, 잘 이용하면 성공을 위해 근본적인 일을 계속 미루며 살아가는 태도를 고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해골앞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억압적인 의견도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278.

 

죽음을 생각하는 관점에서 의미있는 활동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기독교적인 생각과 세속적인 생각은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 진정한 사회관계, 자선에 대한 강조는 공통되는 것 같다. 또 권력, 군사적인 힘, 금전적인 야욕, 명예에 대한 관심을 비판하는 것도 공통되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생각 옆에 갖다 놓으면 어떤 행동들은 하찮아 보일 수 밖에 없다. 278.

 

마지막으로, 우리의 지위에 대한 하찮은 걱정을 천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우리 자신의 미미함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정을 얻게 한다는 생각에서 정점에 이른다.

 

5. 결론.

 

보통이 불안한 마음을 달래는 해법으로 제시한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356.

(독서기에서 언급하지 않은) 보헤미안의 자유에 대한 표현이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꽤나 중요한 것 같다. 보헤미안은 이모든 주류적 사회습관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일률적인 봉급을 받지 않고 살았다. '상징'성 같은 것이었다.

 

나는 늘, 결국 '균형'에 해답이 있다고 믿는다.

물질적인 부는 삶의 여유를 갖는데 필요하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고서는 사람들은 부에 '빈곤함'을 느낀다. 이때 사람들은 '빈곤'을 달래기위해 '희생'을 하게 된다.

정신적 부는 사람이 물질적인 면에 치중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이 둘의 균형, 나는 거기에 답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을 읽으며 작가에게 놀랐던 것은, 생활에서 잡아낸 논리를 끌어내는 논리력과 그것의 바탕이 되는 방대한 독서였다.

한 사람의 사유가 이렇듯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이유, 반드시 있을 것이다.

보통의 사유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길. 그래서 그들이 불안한 삶을 온연히 즐기며 살 수 있게 되길,

한 사람의 독자로서 바라며,

이제 더 깊은 사유를 하기 위해 나를 내려놓을 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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