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쓰려고 하지 마라 - 퓰리처상 수상 작가의 유혹적인 글쓰기
메러디스 매런 엮음, 김희숙.윤승희 옮김 / 생각의길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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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본업으로 하는 이 시대 선두 작가들의, 글 쓰며 사는 이야기. 글쓰는 것은 결국, 인간의 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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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쓰려고 하지 마라 - 퓰리처상 수상 작가의 유혹적인 글쓰기
메러디스 매런 엮음, 김희숙.윤승희 옮김 / 생각의길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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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하는 이들에게 창작이란 무엇인가는 끊임없는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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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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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시점에 이 책을 꺼내들어 읽을 것인가. 나에게는 오직 그것이 문제였다.

숨쉴틈도 없었지만 숨을 쉬지 않기 위해 한문장을 여러번 거듭해 읽었다.

나는 확신한다. 김영하는 평행우주론과 불확정성의 원리를 정확히 꿰고 예술에 접목하려했다.

 

김영하는 오랫동안 천주교인었다고 고백해왔다. 신부님이나 천주교도가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런 그가 불교를 꺼내들었다.

 

나는 이 책의 서두에 쓰인 금강경의 한구절(應無所住 而生基心)과 반야심경을 읽고, 이 책의 의도가 공과 점으로 수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거의 직감해버렸다. 그리고 책을 덮었을때, 엄청난 강도의 숨이 한꺼번에 몰려나왔다.

아....김영하.....

 

여러해 김영하라는 소설가의 팬으로 살았지만, 그의 소설을 하나씩 덮을 때마다 생각한다.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불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지만 그것이 두렵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불에 타버려야 실감하게 된다.

그것이 불과 같은 열기로 나를 덮어버렸다는 것.

 

대중들에게는 매우 흡인력있는 이야기로 보였을 소설,

소설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재능에 대해 엄청난 시기를 느끼게 했을 소설.

모든 것이 공과 무로 어떻게 수렴해가는지 알려준,

그리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준.

 

김영하의 최신작.

 

 

-

책 속에서 꺼내온 문장들

 

오이디푸스는 무지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파멸로 진행했다. 나는 정확히 그 반대다. 파멸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무지로, 순수한 무지의 상태로 이행할 것이다.

 

평행우주로 보내진 것 같다. 이 우주에서 박주태는 경찰이고 안형사는 없고 나는 은희의 살해범이다.

 

사람들은 모른다. 바로 지금 내가 처벌받고 있다는 것을. 신은 이미 나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나는 망각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미지근한 물속을 둥둥 부유하고 있다. 고요하고 안온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공空속으로 미풍이 불어온다. 나는 거기에서 한없이 헤엄을 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 가 없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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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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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소설의 마지막 문장인 이 문장을 오래도록 기다렸습니다. 회고록같은 소설을 통해 불멸의 사랑을 꿈꾸는 험버트 험버트가 부르짖는 문장 말입니다.

 

롤리타는 쉽게 읽히는 소설이 아니었습니다. 이 긴 소설을 어떻게 촘촘하게 읽어 갈까, 하는 생각으로 저는 읽으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문학의 심미는 윤리적인 것과 무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롤리타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저에게 시험대와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님펫과 사랑에 빠진 험버트 험버트가 미국 일대를 여행하는 장면은 저에게 미지의 장소로 가는 신비한 여행과도 같았습니다. 미국에 가본 적이 없는 저는, 책 뒤편의 522쪽에 첨부된 지도를 수없이 참고하며 미국 일대를 여행했습니다. 긴 시간의 여행을 마친 험버트 험버트의 앞에 놓인 것은 롤리타의 실종이었지만요.

 

사실 이 책에 정말 '야한' 장면은 없습니다. 님펫을 좇는 험버트의 시선조차 야하다고 생각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정도지요. 물론 사랑하는 사람이 많이 어린 여자아이이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매우 불순한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험버트 자체를 놓고 보았을 때, 저는 이 여린 님펫을 어쩌지도 못하고 바라보는 그가 안타까웠습니다. 험버트에게만큼은, 그건 사실 사랑이니까요.

 

물론 아무도 그런 험버트를 이해해주지 않습니다. 롤리타마저도 '내가 너와 잠을 자주면 나에게 돈을 주겠냐?'고 묻습니다. 험버트는 그래서 더 외롭습니다. 그에게는 사랑인 것이 사회에서는 부도덕한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험버트가 말합니다. 나의 사랑은 보잘것이 없었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기괴하고 짐승 같은 동거생활을 하는 동안, 평범하기 그지 없는 나의 롤리타는 날이 갈 수록 가정생활이 아무리 불행해도 근친상간의 패러디 같은 관계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이 고아소녀에게 마련해준 삶은 그렇게 보잘것 없었다.

험버트는 님펫을 자신으로부터 빼앗아간 범죄자를 찾아갑니다. 그는 님펫 유괴자를 향해 복수의 칼을 들이밉니다. 그런데 그를 죽이는 과정이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둘은 티격태격 싸우고 분명이 험버트는 퀼티를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퀼티가 웃으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퀼티를 죽이는 장면에서도 그런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를 죽였던 것은 맞을까요?

 

총알이 이 불쌍한 사내(퀼티)를 죽여버리기는커녕 마치 강력한 특효약이 담긴 캡슐처럼 불끈불끈 원기를 북돋워준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실망스럽고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험버트는 마음이 아픕니다. 사랑을 빼앗긴 가련한 여자처럼. 독자들은 윤리적 고뇌에 빠지면서도 그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무엇보다 절망적이고 가슴 아픈 것은 내 곁에 롤리타가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화음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주일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이 책을 들고 다니며 읽었습니다. 술술 읽힌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중에 이 소설이 비윤리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떄는 오직 이 글이 비윤리적이라고 쓰인 해설서와 각주들을 읽을 때 뿐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저는 한번도 이 작품이 엄청난 비윤리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채 롤리타와 험버트의 여행에 동참했습니다.

 

이 책의 주제를 찾으라면 뭐라고 선뜻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작품속에 풍덩 들어갔다 나왔을 뿐이라고밖에. 작품 속 니보코프는 이 작품의 원래 목적은 재판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원래는 이 기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재판에 사용할 생각이었다. 물론 내 목숨이 아니라 내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 재판에서조차 험버트는 당당합니다. 그의 비윤리성이 독자들에게 비윤리성으로 읽히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습니다.

 

나는 교훈적인 소설은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다.

롤리타는 가르침을 주기위한 책이 아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오늘, 저는 이 책을 나중에 다시 읽어야겠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습니다. 한번만 읽어서는 모를 책. 피상적으로 둘러진 롤리타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하려던 이야기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왜 그는 롤리타를 데리고 미국을 횡단하려고 했을까? 왜 굳이 긴긴 시간을 들여 롤리타에 대한 겁탈이 겁탈이 아니었음을 이토록 장황하게 설명해야 했을까? 그 이유를 찾아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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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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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문제가 어니었다. 어느 시점에 이 책을 꺼내들어 읽을 것인가. 나에게는 오직 그것이 문제였다.

숨쉴틈도 없었지만 숨을 쉬지 않기 위해 한문장을 여러번 거듭해 읽었다.

나는 확신한다. 김영하는 평행우주론과 불확정성의 원리를 정확히 꿰고 예술에 접목하려했다.

 

김영하는 오랫동안 천주교인었다고 고백해왔다. 신부님이나 천주교도가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런 그가 불교를 꺼내들었다.

나는 이 책의 서두에 쓰인 금강경의 한구절(應無所住 而生基心)과 반야심경을 읽고, 이 책의 의도가 공과 점으로 수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거의 직감해버렸다. 그리고 책을 덮었을때, 엄청난 강도의 숨이 한꺼번에 몰려나왔다.

아....김영하.....

 

여러해 김영하라는 소설가의 팬으로 살았지만, 그의 소설을 하나씩 덮을 때마다 생각한다.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불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지만 그것이 두렵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불에 타버려야 실감하게 된다.

그것이 불과 같은 열기로 나를 덮어버렸다는 것.

 

대중들에게는 매우 흡인력있는 이야기로 보였을 소설,

소설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재능에 대해 엄청난 시기를 느끼게 했을 소설.

모든 것이 공과 무로 어떻게 수렴해가는지 알려준,

소설가는 어떤 자세로 글을 지어가야 하는지 알려준.

그리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준.

 

김영하의 최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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