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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흡입력이 굉장한 이야기다. 처음보다 끝이 강한 구성이다.
겉으로는 서른 여섯의 여자와 열다섯의 남자가 만나는 사랑이야기쯤으로 보이겠지만.
그 안에 묻어든 노련한 역사와 철학적 구성력이 돋보인다.
서른 여섯의 여자는 '나치시절'의 상징으로, 열 다섯의 남자는 '"이런 역사를 수용해야만 하는""경악과 수치감으로 입을 다문" 그래서 "유대인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지금의 세대'를 상징한다. 
 


- 이전 세대와 현 세대의 갈등, 그것을 쫓아가지도, 그것에 얷매여 있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이 세대에 관한 이야깃거리는 많이 다뤄졌다. 김기덕의 사마리아가 그랬다. 경찰에게 끌려가는 아버지와, 그것을 붙잡지 못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그래서 다른 세대를 일구어야 할 젊은 혈기들이 그런 주제에서 나온 이야기들이다. 

 
게다가 배경은 가장 법률적인 나라. 확실하고 근엄한 법 체계가 갖춰진 나라, 독일이다.
나치시대 후의 세대간의 갈등과 고민은 그린 소설과 영화가 많기는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유대인 수용소의 감독이었던 인물을 끌어온 것 자체가, 큰 흥미거리였을테다.
또 한 주인공은 아버지가 철학자인, 지금 세대의 법률가다.
이야기는 나치세대를 대표하는 '노련하고 정숙하지만 과거가 많은' 서른 다섯과 '이성적인 사고를 가졌으나 정작 현실 앞에 어찌할 줄 모르는' 열 다섯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들의 사랑은 복잡하게 얽혀있고 꽁꽁 묶인 두 세대간의 갈등과 사랑, 혈연으로 묶인 복잡한 감정들이 주를 이루는 것이다.

-일제후의 우리나라가 빨갱이를 다루었던 그 때와, 사실 독일도 크게 다르지는 않더라는 것이 보인다.

 

중요한 이야깃거리 중 하나는 서른 다섯 한나가 '문맹'이라는 것. 이 모티브가 크게 작용하는 이유는, 그 모든 것들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었기 보다는 그 세대 하에 묶였던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연민을, 품고 있다. 다른 면에서 보면 그들의 방관에 대한 비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5.18에 광주로 가야했던 군인들을 생각해보면, 그 군인들이 군사정권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일반 시민이었을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작가의 비난 섞인 연민이 어쩐지 이해가 된다.  


가장 중요한 행위인 '읽기'는, 이전 세대가 이후 세대에게가 아닌 자기 이성과 합리에 열중해 온 지금의 세대가 윗 세대에게 읽어주는 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책 읽는 남자'로서의 미하엘은 한나를 위해 읽기도 했으나, 결국은 자기를 위한 책읽기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을 위해 한나가 목을 매는지, 이것이 윗세대의 결말과 현세대의 시작을 다시 말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결국 한나가 죽을 때까지 간직한 미하엘의 사진은 끝까지 앞 세대와 뒷 세대간의 징검다리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법학자가 쓴 소설이라는 것이 더 특이한 소설, 더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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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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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사고방식을 가진 작가들, 특히 이쪽 중유럽에서는 동양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신비감 같은 것들이 다분하다. 흥미롭긴 하지만, 막상 다가가려고 하면 어려운 것이 동양의 문화인 것이다. 그 신비로움이 잘 동화되어 녹아 있는 역사 소설, Annam. 그리하여 베트남에 도착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삶은 그저 행복한 것으로 그저 밝고 건강한 들판 위에서의 삶. 자연과 동화되어 무거운 수녀복을 벗어놓았다고 묘사된다. 1990년대의 그들에게도 역시, 동양이 가지고 있는 신비성이 가라 앉지 않았다는 뜻이려니와, 베트남은 소설속의 주인공들에게 고향 프랑스를 잊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노스탈지어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들이 Annam에 도착하기 전까지 중간도착지점에서 고생한 이야기들은, 마치 신비의 섬에 들어가기전 그들이 겪어야 할 연습과정-혹은 고행과정으로 묘사된다. 그 모든 고행과정을 겪고 마지막에 살아 남은 두 사람, 수녀와 수사는 결국 인간의 정을 느끼고 사랑을 나눈다. 신을 잊고 인간의 길로 들어서니, 드디어 그들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줄거리는 이 짧은 소설의 단맥을 잇지만, 줄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은 전반의 느낌이 더욱 중요하다. 죽음과 맥이 닿은 삶. 죽음을 바탕에 깔고 있는 오묘한 신비감. 그 두가지 느낌의 봉합이 이 단 소설 하나로 스타작가 반열에 들어선 바타유의 흔적이다.

 

삶과 죽음의 그림자에 드리워진 햇살을 관찰하는 재미, 1780년대 아시아와 유럽의 중간지점에 선 그들의 행로. 특히 혁명으로 바쁘던 프랑스 역사에 낀 베트남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고 하지만, 역시나 역사소설은 소설의 뒤 끝에 역사를 뒤적여 보는 흥미를 갖게 한다.

 

사족. 이런..;;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판으로도 번역이 되었구나. 이 100쪽 가량을 짧은 책을, 나는 2주에 걸쳐 읽었다는거. 번역하는 것도 아니고. 땀 닦아 가면서;

또 사족. 독일어 번역이 너무 딱딱해 다시 한국어로 읽어야 겠다 생각. 한국에 있다면 한국판을 읽었겠지만, 또 한편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독일판은 읽지 않았겠구나. 다행스럽다는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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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와 나혜석 그리고 까미유 끌로델
정금희 지음 / 재원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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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기간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한 책. 깔끔한 표지가 마음에 들어 찜해뒀던 책이었다.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세 여류 화가가 불행한 일생을 살면서 그들이 어떤 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예술로 승화시켰는지, 각기 다른 나라에서 다른 환경에서 다른 생활 습관으로 살고 있었지만  여성 폄하와 남성 위주라는 비슷한 시대 상황이 그들을 어떻게 파멸시켜 갔는지에 주력하고 있다. 결국 깊이 있는 연구와 작가에 대한 이해는 부족한 듯 보인다.  작가의 일생을 빠른 속도로 둘러보는 가운데 간간이 간단한 작품 설명을 곁들이고 있는 것 같아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 책은 반대로 각기 시대 상황이나 한 남자의 여인으로서 그녀들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게 한다. 이것은 작품 자체로서 작품을 보기보다는 화가를 통해 작품을 보려하는 시도 였다.  그도 그럴것이, 이 세명의 뛰어난 화가들은 이미 18세기 후반, 19세기 전반 남성으로서도 갖기 힘든 시대를 뛰어넘는 사고 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욕구와는 반대로 시대는 그들을 밀어내려고만 했으니, 스스로도 더욱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예술을 했다는 것이 놀라울 뿐더러 선각자라는 분위기를 내면서 그들의 화풍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또 곁들여진 그림이나 조각 삽화들이 글의 이해를 쉽게 하고 있다. 세 여성화가들에 대해 둘러보고 그녀들의 이야기를 비교 분석해보는 것도 특이하다.

 프리다 칼로는 초현실주의와 접선하면서 그녀의 예술성을 더 발휘할 수 있었다. 20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그녀가 겪었던 상처로 평생을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그림을 그렸다는 것, 남편 디에고의 어이없고 화나는 외도들로 그녀의 마음이 썩어가면서도 그녀는 남편을 의지했었다는 것. 이런 이야기들이 모여 그녀의 그림을 더욱 감성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책에 소개된 여러가지 일화들이 보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프리다의 그림에는 자화상이 많은데 이것은 프리다 말대로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소재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자화상에는 항상 두 눈썹이 맞붙여 있다. 이것은 프리다가 어렸을때 친구들에게 썼던 편지나 일기장에 재미있게 자기를 표현을 하던 습관대로 그림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녀의 그림들에는 그냥 보기에도 초현실적인 기법들이 쓰이고 있는 것 같다. 이미 그녀는 초기 자신의 자화상에 모딜리아니가 썼던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일상에서의 거부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이것이 여러 초현실주의자를 만나면서 그녀의 그림을 초현실적으로 만들게 되었다. 중성적인 이미지의 멕시코인 프리다의 그림은 어딘지 모르게 우수에 차있고 고독한 느낌을 받게 한다.   

 나혜석 역시 그 시대 조선에서 찾기 힘든 자유스러운 화풍을 가지고 있었다. 야수파와 인상주의를 접하면서 그녀가 어떤 식으로 변화했는지, 그것이 일본의 개화풍 그림의 느낌을 담으면서 어떤 식으로 한국에 표현되었는지등은 그녀를 통해 한국이 서양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나혜석의 개방적인 사고로 그녀는 이혼이라는 엄청난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혼은 사회가 그녀를 냉담한 시선으로 보게 만들었고, 그녀는 수없이 사회제도에 저항하는 글을 썼다. 세상의 거센 비판과 냉담한 태도는 그녀를 고독과 고통의 순간으로 밀어 넣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컸던 그녀는 사회의 비판과 차가운 시선 속에 방황했고, 그녀의 그림은 재료를 살 수 없어 완성되지 못한 작품도 있다고 하니, 참.. 어이가 없고 혼란스러웠다. 

  이런 이야기는 환경은 다르지만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까미유 끌로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로댕의 그늘에 가려 자신의 예술적인 천재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던 까미유 끌로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친어머니가 정신병원에 그녀를 가둠으로써 점점 더 퇴폐되어 갔다. 로댕은 그녀의 재능을 인정했지만 그녀가 베풀었던 사랑에는 보답하지 못했고, 그의 아내를 데리고 나가버리는 어쩔 수 없는 한 여자의 남편이었다. 까미유는 로댕을 만나 정열적인 사랑을 했지만, 그녀의 슬픔과 고통의 원인 또한 로댕이었다. 로댕과 성향이 비슷한 조각품들은 그녀가 로댕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게 했다. 실은 오히려 로댕이 끌로델의 작품에 영감을 받고 그녀를 모델로한 작품을 만들었다. 지옥의 문에 그려진 손과 발은 끌로델의 작품이라는 평도 나고 있다고 한다.

 이 세 작가의 안타까운 이야기는 그 어느 시대에도 낳을 수 없는 위대한 여성 예술가를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그녀들이 시대를 잘못 타고 났다는 생각에는 동조할 수 없다. 그녀들은 물론 앞선 시대나 조금 뒤에 태어나 활동했다면 좀 더 편하게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겠지만, 이 모든 작품들은 그녀들의 삶과 고통 속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대가 사람을 만들어 내듯, 그녀들 역시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하는 막바지에 섰기 때문에 더 빛이 나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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