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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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 둘의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다. '설국'은, 뭔가 대자연의 하얀 눈이 가득 덮혀있는 후지산을 연상시키는, 그런 작품이라는것이 내가 이 작품에 갖고 있는 편견이었다. 책을 조금 읽었을때, 어딘가 매우 전통적인 방식의 일본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일본의 소설이 아니라 아마도 유교문화를 갖고 있는 국가들이라면 가졌을 성역할에 대한 관념들. 그것들이 적나라하게 흩뿌려졌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었다.

 

나는 그때서야 이 소설이 쓰인 해를 확인했다. 1937년. 시기상으로는 대한민국이 일제하에 있던 식민 통치기였으며, 일본 국격에 대한 여러가지 논란으로 도쿄가 어지러웠을 시기. 두번째로 이 시기는, 여전히 성에 대한 전통적 역할이 굳건히 건재하고 있을 시기. 이 두가지 전제조건을 갖고 다시 책을 읽었다. 역시 가장 먼저 눈에 띄였던 것은,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대화, 그 둘간의 대화. 그래서 '대자연의 어쩌고'는 차치하고, 나는 남성과 여성의 정통 성역할에 조금 더 집중해 읽기로 했다.

 

#1. 남자와 여자, 전통적인 성의 역할

 

뭔가, 우리가 아마도 고리타분하다고 느낄지 모르는 정통적인 성의 역할이란, 이런것이다. 남자는 떠날 것이고, 여자는 기다릴 것이다. 이 소설의 전체적으로 남/여가 어떻게 구분되어 있는지 먼저 살펴보면, 시마무라-남자, 반말을 사용, 도쿄시람, 도시남, '돌아갈 곳'이 있음. 고마토-여자. 존대어를 사용, 시골, 게이샤라는 직업, '남을 것'임 =또는, '도쿄로 데려가 줄' 것을 남자에게 부탁함. 이정도로 요약이 가능하다. 이 소설에서 확실하게 '전통적인 성역할이 구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여자는 어떤 남자를 위해 재원을 마련하려고 게이샤가 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해봐야'한다고 말한다.

 

'지겨워요, 그런 신파극 같은 얘기. 약혼녀라는 건 거짓말이에요......굳이 누굴 위해 게이샤가 된 건 아니지만,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해봐야죠.' 60.

 

그녀는 떠날 남자에게 나를 보러 와달라고 부탁한다, 아니. 애걸한다.

 

'1년에 한번이라도 좋으니 와줘요. 제가 여기 있는 동안은 1년에 한번, 꼭 와주세요'. 89

 

이런 분위기는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데, 고마코는 요코에 비해 매우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시마무라에게 여자는 '요코'다. 여자에 대한 전통적 이미지와 관념이 매우 크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고마코: 그걸로 족해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건 오직 여자뿐이니까. 112.

시마무라: 요즘 세상에선 그렇지. 하고 중얼거리다 시마무라는 이 말이 너무나 공허하여 오싹해졌다. 112.

 

시마무라: 그럼 돌아갈 때 데려가 줄까?

고마코: 네, 데려가 주세요. 117.

 

이 대화들을 읽으며, 과연 지금의 사람들은 이 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조금 고민이 되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목되었고, 이 작품의 포인트가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당연하게 '여성'이 된 입장에서 보이는 이런 정통성들. 아마도 90년대 한국 문학에서 여성작가들이 많이 사용했던 방법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하곤 했다.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정도. 남성의 폭력적 태도와 거기에 상처받은 여성의 모습. 이것이 그때의 그것과 무엇이 다를까.

 

조금 더 가자, 시마무라는 그 모성-여성- 안에 잠들며 안심한다. 떠나갈 남자는 여자를 취하고서야 어린아이가 된다. 게다가 게이샤-손님으로서의 관계를 벗어나 사랑을 느끼는 고마코가, 시마무라는 '이해가 안된'다.

 

마침내 시마무라는 여자의 뜨거운 몸에서 완전히 어린 아이처럼 안심했다. 126.

고마코가 자신에게 빠져드는 것이 시마무라는 이해가 안되었다. 133.

 

왜, 그들은 취하였고, 여성들은 기다릴 것이기 때문이다. 왜 오페라 나비부인이 생각나는가. 왜 오페라 주인공들은 늘 비극의 여주인공인가. 왜 남자들은 취하고 떠나는가. 왜 이 작품이 이렇게 읽혔는지는. 글쎄 그것까지 말하라면 할말을 잃을 것 같다.

 

#2. 대자연과 인간

 

-제각기 산의 원근이나 높낮이에 따라 다양하게 주름진 그늘이 깊어가고, 봉우리에만 엷은 볕을 남길 무렵이 되자, 꼭대기의 눈 위에는 붉은 노을이 졌다.55.

-국경의 산을 북쪽으로 올라 긴 터널을 통과하자, 겨울 오후의 엷은 빛은 땅밑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 했다. 낡은 기차는 환한 껍질을 터널에 벗어던지고 나온 양, 중첩된 봉우리들 사이로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산골짜기를 내려가고 있었다. 75

-곰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털가죽이라면 인간의 관능은 틀림없이 아주 다르게 변했을 것이다. 인간은 얇고 매끄러운 피부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노을진 산을 바라보노나니, 감상적이 되어 시마무라는 사람의 살결이 그리워졌다. 95.

-계절이 바뀌듯 자연도 스러지고마는 조용한 죽음이었으나, 다가가보면 다리나 촉각을 떨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113.

-그토록 고생한 무명의 장인은 이미 죽은 지 오래고, 아름다운 지지미만이 남았다. 136.

-멀고 가까운 높은 산들이 하얗게 변한다. 이를 <산돌림>이라 한다. 또 바다가 있는 곳은 바다가 울리고, 산 깊은 곳은 산이 울린다. 이를 <몸울림>이라 한다. 137.

 

설국의 문장은 굉장히 심도깊고 유려하다. 대자연 속에서 인간이 한낱 생명체에 불과할 뿐이라고 이야기 해주는 듯 한 '雪'의 문장. 이 문장들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일본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정갈하고 단련된 표현. 주변환경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는 섬세함. 이야기의 스펙타클은 없지만 -마지막에 요코가 죽는 정도가 가장 스펙타클하다 할 정도로-. 매우 세밀하고 자세한 일본의 정통문학이라는 생각. 일본의 문화와 색깔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는 생각은 충분히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름에 읽는 '설국'은 참으로 답답했다.

탁트인 후지산 구경을 하고와야, 이 소설이 참으로 멋지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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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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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Angst des Tormanns beim Elfmeter_

(11미터*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

*페널티킥의 규정거리가 11미터인가보군요. 이 단어가 페널티킥을 가리키는 거리인줄 이 소설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독일 문학의 거장 중 하나인 페터 한트케는 ‘실험적인 문학’으로 입지를 다져왔습니다. 학부때 독문학을 전공했던 저에게 페터 한트케는 ‘연구해야할 대상’이었죠. 그도그럴것이, 그는 2-3학년 전공수업에 빠지지 않는 작가였습니다. 그때 접했던 작품들이 ‘관객모독’, ‘베를린 천사의 시’ 였는데, 그때만 해도 책을 읽으며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납니다. 작품 하나를 분석하는데 꼬박 한학기가 걸린 적도 있었습니다. 문장 하나를 놓고 이 문장과 사람의 인생과 가치에 비추어 보는 연습을 했습니다. (독문학 교수님들이 이런 방식을 좋아하시는가봅니다.) -비슷한 경험의 최고봉은 베르히트였던 기억도 납니다.- 각설하고, 이 작품,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 작품 곳곳에 묻어나는 언어 실험

 

실험 문학에 능한 작가 페터 한트케답다는 생각이 들었던 부분은 바로, 마치 초현실주의로 돌아가는 듯 여관방의 물건들을 묘사하다가 결국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선 혹은 점으로 보여지는 듯 그림으로 표현된 부분이었습니다. (112쪽) 두 번째로, 곳곳에 드러나는 실험적 방식이 매력적입니다. 가령, 한 문장을 표현할 때도 ‘한 문장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장난인데요, 순경들의 말장난 (혹은 그들의 암호를 문장화 시킨) 부분입니다. (41쪽) ‘Geh Weg’을 의도적으로 ‘Gehweg' (하나는 명령형이고 두 번째는 명사이니 전혀 다른 말입니다.) 이라고 말한다든지, ’ausweisen'을 ‘ausweissen'으로 말한다든지 (전자는 번역된 것 처럼 ‘증명하다’란 단어인데 사실 ‘신원조회해본다’로 쓰였을 겁니다. 후자는 하얗게 만들버린다는 뜻입니다. 전자는 아우스바이젠으로 읽히고 후자는 아우스바이쎈으로 읽힙니다. 이런 말장난.......정말 훌륭한 언어적 술수입니다. 이래서 아마 어느 평론가가 지난 십년간 독일어로 쓰인 가장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실험적 태도가 아마 피터한트케를 엄청난 매력을 지닌 작가로 각광받게 했을 것입니다. ‘언어 자체에 집중한 실험적인 탐구능력’말입니다. 작가라면 ‘언어’에 굉장히 예민한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그런 면에서 아마 피터 한트케는 상당한 실험적 태도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아, 언어에 민감한 이 작가가 언어 자체에 갖고 있는 태도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문장 하나만 걸고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그들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어 장애자들이에요 (95쪽)

스스로 언어 안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하다보면, 내 생각들이 언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건지, 언어가 내 생각들을 만들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까지 생각이 가 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저도 그렇지만 사람들 누구나 일종의 ‘언어 장애’를 겪고 있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

 

작품 전체에 흐르는 무던한 긴장은 ‘불안’이라는 감정으로 귀결됩니다. 작품 초반에 살인을 저지르고 블로흐는 도망을 다니는 신세입니다. 그런데도 단 한번도 블로흐의 불안한 감정이 드러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 불안과 긴장감 자체가 바로 ‘페널티킥 앞에 서 있는 골키퍼의 불안’, 대놓고 드러낼 수 없으며, 곧 일어날 일에 대한 끈덕진 긴장감은 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입니다. 작품의 주인공이 실제로 골키퍼였다는 것을 개연성있게 밀고나가며 작품은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공을 차기 위해 키커가 달려 나오면, 골키퍼는 무의식적으로 슈팅도 되기 전에 이미 키커가 공을 찰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 키커는 침착하게 다른 방향으로 공을 차게 됩니다. 120.

어느 방향으로 들어올지 알 수 없는 극도의 불안감. 그 앞에서 날선 골키퍼가 되어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작가가 보여주고 싶어한 그 불안감은 바로 ‘어디서 어떻게 날라올지 모르는’ 페널티킥의 최후와 밀접하게 연관을 맺습니다. 실제로는요?

 

페널티 키커는 그의 두 손을 향해 공을 찼다. 120.

 

키커는 변주를 주려다 말고, 사실 골키퍼의 손을 향해 공을 차죠. 그 공의 방향이 변주된 곳이라고 생각했을 골키퍼는 직구로 날아오는 공의 방향에 질겁할 수도 있겠고, 미리 페널티키커의 발을 보고 그것을 알아챘을 수도 있습니다. 결말은,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일치 (92쪽)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 사건의 유의미함과 페널티킥

 

예전에, 독일에서 경찰 심문을 당했던 유학생 선배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경찰이 심문을 하려고 다가왔는데, 선배는 모르고 반대쪽으로 (그냥) 몸을 틀어 걸었죠. 경찰이 선배를 다급하게 불렀는데 선배는 이어폰을 끼고 있어 그걸 못들었어요. 그러다 뒤에 경찰이 선배를 잡으러 뛰어왔대요. 뒤에서 누군가 뛰어 자기에게 오는게 느껴지니까 반사적으로 선배는 뛰었고, 경찰은 선배를 잡았죠. 선배는 경찰차까지만 연행되었는데, 여권이 없어 또 애를 먹었다가 풀려났어요. 죄도 없으면서 왜 뛰었냐고 경찰이 물었대요. 선배가 대답했대요.

심문을 당할 수 있다고 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라고요.

 

심문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이 사건과 무관하다는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할 필요가 전혀없는 것이다. 사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85쪽)

윗 문장을 읽으면서, 몇 년전 그 얘기를 하던 선배의 표정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심문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소설 속 블로흐에게 이 이야기는 전혀 반대의 논조에서 읽혔겠죠. ‘사건이 존재하는 한’, 그 사건 앞에서 골키퍼 처럼 불안에 떨고 있는 블로흐에게는. 블로흐 뿐이겠습니까, 어떤 사건이 내일 벌어질지 모르는 이 시대의 사람들, 예정된 불안을 겪고 있는 사회의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런데 여관방에 있는 블로흐는. 블로흐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만은 너무 강렬해서 불안스러웠다(76쪽)’ 고 합니다. 불안이 도처에 깔린 이 사회 속에 우리는 의식하나가 너무 강렬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군요. 이런.

 

* 불안이 시작된 지점

 

한가지를 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블로흐의 ‘불안이 시작된 지점’말입니다. 도망을 다니는 블로흐는 거의 끝에 가서야 고백합니다. ‘그는 너무 오래 무직 상태로 있었다’는 문장이었다. (77쪽). 그는 도망을 나왔습니다. 왜? 아침에 현장감독이 그를 ‘흘끗’ 쳐다보았기 때문이죠! 그는 그것을 무려 해고의 표시로 이해했습니다. 혹시, 누군가 내게 아무생각없이 어떤 말을 건넸는데, 그것에 상처를 받은 적 없으세요? 그것을 겪은 사람이라면 알겁니다. ‘아무생각없이’ 받은 어떤 행동이 나를 얼마나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지 말입니다. 그것이 불안의 시작입니다. 정당성을 찾을 수 없는 불안, 그리하여 그 불안에서 안으로 갇혀버리고 마는 상태. 불안을 느끼는 블로흐의 모습에서 카프카가 보입니다.

 

깊이 잠들지도 못했는데 다시 깼다. 처음에는 몸이 분리되어 바닥으로 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침대에 그대로 누워있음을 알았다...... ‘곱사등이 되었나!’ ......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누워있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동작이자 쓸모없는 일이었다. (75쪽)

 

마치 금지된 소리를 듣는 것 처럼(45쪽), 블로흐의 불안은 여관방 한쪽에서 깊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

한참 못 읽었던 독일 작품을 오랜만에 읽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 것들이 불안하게 익숙했습니다. 이 작품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불안을 소재로 다룬 영화들이 독일에 참으로 많습니다. 갑자기 영상처럼 떠오른,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추천해드립니다. 통일 전의 독일을 다룬 많은 작품에서도, 통일 후 독일 사회를 다룬 작품에서도, 이 ‘불안’은 마치 독일 사회 저변에 깔린 분위기인 양 흔들리는 화면속에 늘 내재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불안이야 어느 사회든 없을 수 없지만요. 불안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어가는가. 지금 사회의 불안은 과연 어떤 것인가. 어쩐지 이런 것들에 대해 깊이 사유해보고 싶은 일요일 오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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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일을 하는가?,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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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서만...세번째 알랭 드 보통의 책 +_+ (이 작가 진짜 너무 좋다_가끔 이상한 사회운동 할려고 사람들 모으는 교주같아 보이지만 않으면 최고다)

좀 독특하다. 지금까지의 알랭 드 보통이 어땠느냐면, 굉장히 철학적으로 현실문제에 대해 사유하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사랑일까, 인생학교_섹스, 불안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그런데 이 책은 (다른 작가들책처럼) 평범해서 오히려 (보통의 책으로서는) 독특하다.

 

이 책은, 열가지 산업체에 발벗고 나서서 그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취재하고 관찰한 결과를 토해낸 결과물이다.

그러니_철학적이지 않는 것이 철학적인건가? 물론, 그는 틈틈히 내가 여전히 건재하다_는 문장을 집어넣는다. 내가 줄그은 문장들은 물론 모조리 그런 철학적 사유의 문장들일테다.

 

'어쩌면 비스킷을 구우며 오후를 보낸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상근직 5천명이 그 별것 아닌 일을 하는 회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랄사람도 많을 것이다' 로 맥을 끊으며 업계 1위의 비스켓 회사를 조롱하는 것을 보며, 우리는 우리가 그 '별것아닌'일에 왜 목매며 하루를 보내고 있는 건지에 대해 끊임없이 반문하게 된다. 업계 지배인 누구도 이런 '반문'거리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 이기 때문에 작가는 어쩌면 '유용하지도 않은'사고로 돈이 되는 일의 맥을 끊는 '맥없는'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은 언제 '의미'있게 되는 것일까  

 

일이 의미있게 느껴지는 건 언제일까?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자아내거나 고통을 줄여줄때가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이기적으로 타고났다고 생각하도록 종종 배워왔지만 일에서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행동하려는 갈망은 지위나 돈에 대한 욕심만큼이나 완강하게 우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합리적인 정신 상태에서도 출세길을 버리고 말라위 시골마을에 먹을 물을 공급하는 일을 도우면 어떨가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그저 물질만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라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86

 (물론 내 입장에서) 알랭 드 보통은 무엇을 생각하든 기대를 채워준다. 그것은 그 사람의 '사유'의 폭과 맞물려있을 것이다. 비스킷을 굽는 공장을 보면서 분업화 된 산업의 특성과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런 사유를 하는 사람도 있다.

 

진짜 문제는 비스킷을 굽는 것이 의미 있느냐가 아니라, 그 일이 5천 명의 삶과 6개 제조현장으로 계속 확장되고 분화된 뒤에도 여전히 의미 있게 여겨지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일은 오직 제한된 수의 일꾼의 손에서 활기차게 이루어질 때에만, 그래서 그 몇몇의 일꾼이 자신이 작업 시간에 한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상상하는 순간에만 의미 있게 보일 수도 있다. 아이들 책에 등장하는 어른들이 지역 영업 관리자나 건물 서비스 엔지니어인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분명히 의미심장하다. 아이들 책에는 보통 가게 주인, 건설 노동자, 요리사, 농부가 등장한다. 인류의 생활을 눈에 띄게 개선하는 일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선천적으로 균형과 비례를 의식하는 피조물인 우리는 '스위트 비스킷 브랜드 감독 코디네이터'같은 직책에는 뭔가 뒤틀린 것이 있다고 여기며, 빌프레도 파레토의 주장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명민하다 해도, 아직 아무도 설득력 있는 다른 이름을 붙이지 못한 다른 원리가 무시되고 더 섬세한 인간 법칙이 침해를 받고 있다고 느낄 수 밖에 없다. -88

(보통과 직감은 얼추 비슷하나) 원인과 결과에 대한 해석은 조금 다른 내 사유로는, 아이들 책에 등장하는 어른들의 직업에 지역 영업 관리자나 건물 서비스 엔지니어가 아니라 요리사, 농부, 소방관이 (아직도) 등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소명'과도 관련있지만 무엇인가 분업화 되지 않는 완전한 일을 해내어 직업으로서의 '완결성'을 갖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노동을 낭비하는게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니까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가? 나는 이보다 인간을 더 철저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묻고 싶다. 95. 비스킷 공장  

노동의 완전함과 가치에 대한 사유, 완전한 직업에 대한 보통의 생각은 직업상담사를 통해 드러난다. 물질적인 것들에 치우쳐 직업을 골랐던 사람들이 하나둘 가치를 찾는 노력을 하면서 직업상담가들을 찾는다. 여전히 지금 직업상담사들은 비주류의 활동을 하는 사람들로 인식될 뿐이고, 대중 앞에서는 '직업의 소명과 성공에의 의지'등을 불태우는 강연을 하고 뒤에와 한숨을 쉬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그들의 가치를 알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가치있는' 직업인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찬란한 성취의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서서, 목표에 가까이 다가온 것은 맞지만 아직은 저편이 아니라 분명히 이편에 서 있으며, 사소하지만 핵심적인 여러 가지 심리적 결함(약간 지나친 낙관주의, 날 것 그대로 나타나는 반항심, 치명적인 인내심 부족이나 감상주의)으로 인해 현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한다. 우리는 아주 작은 부품이 없어 활주로 옆에서 꼼짝도 못하는, 그래서 결국은 트랙터나 자전거보다도 더 느린 존재가 되어버린 첨단 비행기와 같다. 141. 직업상담.

보통의 직업 탐구는 인문, 과학, 사회를 아우른다. 물론 그 소실점은 직업으로서의 가치, 생명력있는 노동으로 귀결된다. 심지어 엔지니어들은 분업화된 노동으로 인해 자신의 노동을 낭비하기에 이르며, 이것이 개인적 에고를 제한 시킨다고, 보통은 주장한다.

 

헤어네트를 쓴 여러 그룹의 엔지니어들이 위성 발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자 현재 과학계의 삶이 개인적 에고의 제한 또는 말살을 의미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개인적 영광의 기회는 없었다. 전기가 기록되거나 일반인이 기억할 만한 이름으로 남을 전망이 없었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도, 심지어 어떤 상업적 또는 학술적 조직도 명예를 독차지할 수 없는 집단적 기획이었다.

 

천재들이 관측소나 작업장에서 일로매진하여 과학사의 방향을 바꾸던 시절은 지나갔다. 우리는 천체물리학자와 항공 엔지니어들이 어느 한 사람을 우리 시대의 갈릴레오로 띄우려는 미디어의 시도에 저항하면서 공동 실험실에서 작은 수수께끼를 10년 동안 함께 공략하는 소박한 시대에 들어섰다.  157.

어쩐지, 나는 보통이 현대의 엔지니어와 단순기술 노동자가 뭐가 다르냐고 반문하는 것 처럼 느껴졌다.

 

책상들을 ML6W.246 같은 뻣뻣한 약어로만 확인할 수 있는 오픈 플랜의 포괄적인 규칙성에 도전하여 직원들은 각자의 작업대에 미묘한 개성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펠트 판에는 가족사진이 붙어 있다. 이따금씩 스포츠 팀이나 휴가 목적지를 기념하는 머그나 장신구가 보인다. 바닥에 몸을 웅크리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발을 카펫에 문지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동작은 나일론이 많이 섞인 직물이 면과 마찰되는 자극적인 느낌을 줄 뿐 아니라, 비록 작기는 하지만 규칙을 깨고 집의 친밀한 느낌을 일하는 영역으로 가져왔다는 만족감도 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매우 유머러스한 구절 추가. 나도 회사원인 이상, 연구원이든 사기업이든 우선 회사에 다니는 일꾼으로서, 환경을 길들여가고 있다는 말에 공감했다. 더불어, 익숙해진다는 것 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익숙해질 수록 사람은 편한 것에 의지하게 되고, 그렇게 될 수록 긴장은 없어지고 능숙도는 늘어난다. 하루 가운데 진짜 생산적인 일을 하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사무실 고참들은 환경을 길들이는 데 능숙하다. 그들은 공동 주방의 어디에 자기 먹을 것을 감추어야 하는지, 언제 화장실에 가야 조금 전까지 좋은 향기가 나는 긴장된 분위기의 좁은 공간에서 칸막이를 가운데 두고 나란히 앉아 있던 동료와 세면대에서 어쩔 수 없이 대화를 나누는 일을 최대한 피할 수 있는지 안다. 생산적 활동의 분출은 저녁식사 약속, 연애에 관한 소식 확인, 영화배우와 살인자들의 기묘한 행동에 대한 철저한 분석 때문에 중단된다. 하루 가운데 진짜로 돈을 버는 시간은 얼마나 적은지, 그 사이 사이에 백일몽에 빠지거나 다시 기운을 차리는 데 쓰는 시간은 얼마나 많은지. 289   

생산적인 일, 가치있는 삶과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를 갖는다는 것을 안다면,

일하는 것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되새김질 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해주었던 소중한 책.

일의 기쁨과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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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앤드류 포터는 그의 첫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통해, 놀랍도록 담담하게 이야기를 ‘뱉어낸다’. 이 행위 속에는 무기력한 주인공들과, 주인공의 주변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들과, 그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 숨은 따뜻한 인간애들을 볼 수 있다.

 

포터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비밀 같은 구멍을 갖고 있다. 그 구멍은 너무 컴컴해서 바닥을 내려다 볼 수 없는 (p.8) 크고 빈 공간이다. 이 구멍은 가끔은 동물(코요테)로, 가끔은 주인공(아술)으로, 가끔은 주인공과 내연관계에 있는 인물의 아지트같은 형태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드러난다. 이 구멍을 파고드는 끝에, 포터 소설은 진실의 형체를 오래도록 곱씹게 한다. 현상 안쪽에 가려진 진실, 그 형체를 알 수 없는 진실의 모습이 무엇인지 독자는 오래오래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에요, 하고 나는 그분들에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꿈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탈은 살게 되는 그 부분은. (p.15)

 

#. 인물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포터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채색이다. 그들의 입을 통해 사건이 전달되고, 다른 인물들의 행위, 그것이 사회나 어떤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들이 알려진다. 그러니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 얼마나 주관적으로 세상이 보여질 수 있는지, 사람 안에서 피어나는 생각들이 얼마나 그 사람의 생각을 통제시킬 수 있는지 알려준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밝히고 있듯, 그들은 모두 자기 안에 갇힌 생각 때문에 세상을 너무나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소시민에 불과하다. 게다가 작가는 능청스럽게도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너무나 담담하게, 내가 ‘의심’을 하고 있었노라고 고백하기까지 한다.

 

그제야 내가 너무 앞서 가고 있다는 것을, 사실상 나는 아술이 그 아이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p.77)

 

무채색의 주인공들 덕분에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주변인은 온갖 색으로 덧입혀져있다. 그 색깔 역시, 주인공의 눈을 통해 밝혀진다. 비록 그것이 주인공들과 상관없는 일일지라도.

“얘야, 이 일은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란다. (158)”.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지만 무기력하게 그것들을 바라볼 수만도 없는 소시민들, 평범한 이웃들. 포터는 이 인물들을 조용히 소설 속으로 끌고와 담담하게 이웃의 이야기를 꺼내놓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을 통해 바라본 세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은 책의 제목과 같은 이름의 소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소설 안에 드러난 세 인물의 구도를 조금만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주인공이 세상에 무기력해져버린 이유를 독자는 어느새 찾아버리게 된다. 주인공 헤더는 두 남자에게 마음을 준다. 로버트는 물리학과 교수이자 헤더의 선생이며, 매우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세상에 임하는 인물이다. (“모든 물리학자에게는 자기 너머 수준의 사고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와요. 자기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준. ” -로버트의 말 p. 97) 콜린은 주인공의 입을 통해 고백하듯, '로버트가 아닌 모든 것’이다.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의대생이며, 수영선수이고, 젊고 활기에 가득차있다. 헤더는, 헤더는 결국 콜린과 결혼할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버트에게서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낀다. (“마치 평생토록 어떤 깊은 방식으로 그를 알아온 것 같았다.(104)”) 콜린은 늘 예측가능하지만, 로버트는 예측불가능하다. (나는 그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떠오르길 기다리며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그저 재미있어하는 표정이었다. (105))콜린은 바깥세상의 모든 것이고, 로버트는 바깥의 세상과 아무런 연관도 없을 것 같은 공간에 있는 비밀스러움을 갖고 있다. 헤더는 죄의식을 느껴야 할 일인지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워하며, 로버트의 집에 찾아간다. 콜린과의 만남을 고대하지 않을 수록, 로버트와의 만남은 고대하게 되는 것이다. (108)

 

세상을 사는 사람들, 우리들. 피상적 인간관계를 맺으며 사회생활을 해야하는 사람들에게 주인공의 방황과 갈등, 인물에 대한 애착은 너무도 당연하게 우리의 그것과 맞물린다. 바깥 세상과 닮은 콜린 -그러니 자본, 지위, 명예같은 바깥세상의 것들-을 거부하면서도 그것과는 평생을 같이 해야 하는 것을 본능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소시민들. 그러다 보니 나 자신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p.120) 무력감에, 우리는 빠져들고야 마는 것이다. 작가는 두 인물을 거의 대등한 위치에 두고있다. 그러나 독자는, 우리는 이 놀랍도록 무덤덤한 문체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등줄기에 땀을 쥐어낼 수밖에 없다. 바깥세상과 밀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로버트가 갖고 있는 이상과 그 이상에 대한 갈구를 비밀스럽게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순간, 그제야 우리 사이에 지금껏 말을 넘어선 교감이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p.122)

 

진실은 어디에 가려져 있는가. 과연 우리가 겪고 듣고 보는 이 모든 것들은 진실에 얼만큼 닿아있는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야 비로소, 우리는 ‘유일한 진실이 우리가 숨기는 비밀에 있다(128)는 것을 알게 된다. 다만,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우리는 모든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하는 것 (129)뿐이다.

 

로버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헤더는, 어둠 속에 앉아 오래도록 눈물을 쏟는다. 그러나 ‘결국에 나는 (로버트의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 가슴이 멍울져 나를 크게 짓누르다가 빠져나간다. 진실을 알고 보는 것은, 상처를 허락한다는 뜻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소시민적인 주인공들, 무채색인 그들, 사랑 받고 싶어하는 그들, 이 모두의 눈을 통해 작가는 이야기 한다.

 

너는, 사랑할 준비가, 진실을 알 준비가,

되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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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철학 - 이야기 탐구의 아이리스
김용석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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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철학으로 만든 책. 철학을 즐겁게 보고 싶은 분들께 추천. 각 장이 독립적이라 듬성듬성 볼 수 있는 장점도 있음. 단, 뭔가 철학적인 읽기의 `시도`를 해봐야겠다는 분들께는 비추. 양서의 목록에 들어갈 가치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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