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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남자와 여자. 둘의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다. '설국'은, 뭔가 대자연의 하얀 눈이 가득 덮혀있는 후지산을 연상시키는, 그런 작품이라는것이 내가 이 작품에 갖고 있는 편견이었다. 책을 조금 읽었을때, 어딘가 매우 전통적인 방식의 일본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일본의 소설이 아니라 아마도 유교문화를 갖고 있는 국가들이라면 가졌을 성역할에 대한 관념들. 그것들이 적나라하게 흩뿌려졌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었다.
나는 그때서야 이 소설이 쓰인 해를 확인했다. 1937년. 시기상으로는 대한민국이 일제하에 있던 식민 통치기였으며, 일본 국격에 대한 여러가지 논란으로 도쿄가 어지러웠을 시기. 두번째로 이 시기는, 여전히 성에 대한 전통적 역할이 굳건히 건재하고 있을 시기. 이 두가지 전제조건을 갖고 다시 책을 읽었다. 역시 가장 먼저 눈에 띄였던 것은,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대화, 그 둘간의 대화. 그래서 '대자연의 어쩌고'는 차치하고, 나는 남성과 여성의 정통 성역할에 조금 더 집중해 읽기로 했다.
#1. 남자와 여자, 전통적인 성의 역할
뭔가, 우리가 아마도 고리타분하다고 느낄지 모르는 정통적인 성의 역할이란, 이런것이다. 남자는 떠날 것이고, 여자는 기다릴 것이다. 이 소설의 전체적으로 남/여가 어떻게 구분되어 있는지 먼저 살펴보면, 시마무라-남자, 반말을 사용, 도쿄시람, 도시남, '돌아갈 곳'이 있음. 고마토-여자. 존대어를 사용, 시골, 게이샤라는 직업, '남을 것'임 =또는, '도쿄로 데려가 줄' 것을 남자에게 부탁함. 이정도로 요약이 가능하다. 이 소설에서 확실하게 '전통적인 성역할이 구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여자는 어떤 남자를 위해 재원을 마련하려고 게이샤가 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해봐야'한다고 말한다.
'지겨워요, 그런 신파극 같은 얘기. 약혼녀라는 건 거짓말이에요......굳이 누굴 위해 게이샤가 된 건 아니지만,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해봐야죠.' 60.
그녀는 떠날 남자에게 나를 보러 와달라고 부탁한다, 아니. 애걸한다.
'1년에 한번이라도 좋으니 와줘요. 제가 여기 있는 동안은 1년에 한번, 꼭 와주세요'. 89
이런 분위기는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데, 고마코는 요코에 비해 매우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시마무라에게 여자는 '요코'다. 여자에 대한 전통적 이미지와 관념이 매우 크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고마코: 그걸로 족해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건 오직 여자뿐이니까. 112.
시마무라: 요즘 세상에선 그렇지. 하고 중얼거리다 시마무라는 이 말이 너무나 공허하여 오싹해졌다. 112.
시마무라: 그럼 돌아갈 때 데려가 줄까?
고마코: 네, 데려가 주세요. 117.
이 대화들을 읽으며, 과연 지금의 사람들은 이 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조금 고민이 되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목되었고, 이 작품의 포인트가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당연하게 '여성'이 된 입장에서 보이는 이런 정통성들. 아마도 90년대 한국 문학에서 여성작가들이 많이 사용했던 방법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하곤 했다.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정도. 남성의 폭력적 태도와 거기에 상처받은 여성의 모습. 이것이 그때의 그것과 무엇이 다를까.
조금 더 가자, 시마무라는 그 모성-여성- 안에 잠들며 안심한다. 떠나갈 남자는 여자를 취하고서야 어린아이가 된다. 게다가 게이샤-손님으로서의 관계를 벗어나 사랑을 느끼는 고마코가, 시마무라는 '이해가 안된'다.
마침내 시마무라는 여자의 뜨거운 몸에서 완전히 어린 아이처럼 안심했다. 126.
고마코가 자신에게 빠져드는 것이 시마무라는 이해가 안되었다. 133.
왜, 그들은 취하였고, 여성들은 기다릴 것이기 때문이다. 왜 오페라 나비부인이 생각나는가. 왜 오페라 주인공들은 늘 비극의 여주인공인가. 왜 남자들은 취하고 떠나는가. 왜 이 작품이 이렇게 읽혔는지는. 글쎄 그것까지 말하라면 할말을 잃을 것 같다.
#2. 대자연과 인간
-제각기 산의 원근이나 높낮이에 따라 다양하게 주름진 그늘이 깊어가고, 봉우리에만 엷은 볕을 남길 무렵이 되자, 꼭대기의 눈 위에는 붉은 노을이 졌다.55.
-국경의 산을 북쪽으로 올라 긴 터널을 통과하자, 겨울 오후의 엷은 빛은 땅밑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 했다. 낡은 기차는 환한 껍질을 터널에 벗어던지고 나온 양, 중첩된 봉우리들 사이로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산골짜기를 내려가고 있었다. 75
-곰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털가죽이라면 인간의 관능은 틀림없이 아주 다르게 변했을 것이다. 인간은 얇고 매끄러운 피부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노을진 산을 바라보노나니, 감상적이 되어 시마무라는 사람의 살결이 그리워졌다. 95.
-계절이 바뀌듯 자연도 스러지고마는 조용한 죽음이었으나, 다가가보면 다리나 촉각을 떨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113.
-그토록 고생한 무명의 장인은 이미 죽은 지 오래고, 아름다운 지지미만이 남았다. 136.
-멀고 가까운 높은 산들이 하얗게 변한다. 이를 <산돌림>이라 한다. 또 바다가 있는 곳은 바다가 울리고, 산 깊은 곳은 산이 울린다. 이를 <몸울림>이라 한다. 137.
설국의 문장은 굉장히 심도깊고 유려하다. 대자연 속에서 인간이 한낱 생명체에 불과할 뿐이라고 이야기 해주는 듯 한 '雪'의 문장. 이 문장들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일본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정갈하고 단련된 표현. 주변환경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는 섬세함. 이야기의 스펙타클은 없지만 -마지막에 요코가 죽는 정도가 가장 스펙타클하다 할 정도로-. 매우 세밀하고 자세한 일본의 정통문학이라는 생각. 일본의 문화와 색깔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는 생각은 충분히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름에 읽는 '설국'은 참으로 답답했다.
탁트인 후지산 구경을 하고와야, 이 소설이 참으로 멋지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