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혹한 이야기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김보은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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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샀을 때는 시리즈인 줄 모르고 샀다. 읽다가 뭔가 이상한 게 느껴져서 봤더니, 과연…… 시리즈로 묶인 작품이었다. 그것도 첫째 편이 아니라 무려 다섯 번째 편……. 원래 앞 권이랑 이어지든 안 이어지든 차례대로 읽는 성격이라 중도에 포기하고 다른 책 읽을까 했지만 이미 읽기 시작한 책이고 내용도 궁금해서 그냥 읽었다.
전작을 몰라도 상관은 없지만 스포 당하는 기분이라 조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 소설은 한 오두막에서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된다. 잔뜩 겁에 질린 두 남자. 한 명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다른 한 명은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는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촛불 아래에서, 어느덧 성큼 다가온 공포를 무시하려 노력하며.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 중 한 명이던 올리비에는 적막한 오두막에 은둔자를 내버려둔 채 스리 파인스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음날 스리 파인스 유일한 비스트로에서 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아르망 가마슈 경감은 부하 직원들을 이끌고 차가운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스리 파인스로 오게 된다.

사실, 나는 전작을 읽지 않아서인지 왜 이렇게 이야기가 두서없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보통 추리미스터리 하면 사건에 중점을 두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사건보다는(물론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기는 하지만) 스리 파인스의 주민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보기엔 쓸모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중구난방처럼 펼쳐져 있어서 불편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서야, 이 소설은 `살인사건`이 아니라 스리 파인스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하고 있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퀘벡 시의 숨겨진 마을, 스리 파인스. 마을이 품고 있는 비밀과 주민들 사이의 감정선, 어쩌다 마을로 오게 된 이방인들의 이야기.

사실 그러다 보니까 이야기가 좀 질질 끄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론 피해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흉기도 없고 사람들은 뭔가를 감추어둔 채 이야기를 들려주지도 않고…… 그러기는 했지만 페이지를 늘리려는 속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야기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바람에 초반에는 지루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사건의 실마리가 점점 풀려가기 시작하는 때부터는 잔뜩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특히, 조각품들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온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실마리를 찾는 현재가 반복되면서 나오는데 그 덕분에 더욱 집중하며 재미있게 읽었던 듯하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궁금하기도 하고.

마지막 즈음에 범인이 밝혀지는데 솔직히 의뭉스러웠다. 어쩐지 너무 딱딱 떨어진다고 할까. 마치 다른 누군가가 더 있을 것 같은……. 게다가 그 범인이라는 사람이, 내가 정말로 좋아하던 캐릭터라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 사람이 거듭 거짓말을 하는 통에 호감도가 점점 하락하고 답답해 오는 마음과는 별개로 여전히 좋아하는 캐릭터라서…….

소설 속 계절은 여름 후반부에서 가을로 넘어가기 직전인데 제목에서부터 왜 이렇게 시원함이 느껴지는지 잘 모르겠다. 표지 때문에 그런가. 그냥 겨울과 어울리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 재미있기는 했지만 어쩐지 결말이 찝찝해서 다음 권을 얼른 읽고 싶어졌다. 다행히도 다음 권은 이미 한국에 번역이 되어 있으니 돈이 생기는 대로 바로 질러서 읽어봐야겠다.

가마슈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어째서 이 마을의 비스트로인 겁니까?
지구 상에 이 마을을 아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마을을 발견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당신은 발견했군요.
남자의 차가운 손을 여전히 잡은 채
가마슈가 생각했다.
피해자는 마을을 발견했고
죽음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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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는 아니지만 - 구병모 소설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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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어떤 알 수 없는 일그러짐이 느껴졌다. 마음속을 기괴하게 파고드는 악의가, 열면 안 되는 불편한 진실같은 것들이, 한도 없이 펼쳐졌다. 눈을 돌리고 싶은데도 차마 그럴 수 없는…….

현실 속에 잔혹 동화가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현실과 기괴한 환상을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맞물리게 접목시켜 놓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름끼칠 정도로 적나라한 현실의 고통이, 개개인마다 지금도 겪고 있을 지극히 현실적인 그 고통들이 말 그대로 `잔혹 동화`를 연상시킨다.

책 속에 들어 있는 단편들 중 하나의 제목인 「고의는 아니지만」을 표제작으로 선정한 것도 묘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고의는 아니었을 테지만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많은 사건들. 그런 사건들에서 악의가 생기고 그 악의는 또 다른 사건을 불러 오고…….
고의는 아니었을 테지만.

표지에 있는 그림들이 각 단편이 시작하는 장마다 그려져 있는데 몸은 사람인데도 얼굴은 사람이 아닌 그것들이 언뜻 우스워 보이면서도 책의 내용과 뒤섞이면서 문득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다 읽은 지금도 왜 그림이 소름 끼치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바라보게 만드는 중독성이 있는 그림인 것 같다.

어느 하나를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전부 다 재미있게 읽은 것 같다. 비유가 사라져 버린 어느 도시의 이야기인 「마치 ……같은 이야기」,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만 유치원 선생님의 이야기 「고의는 아니지만」, 미운 4살의 아이와 엄마의 이야기를 담은 「어떤 자장가」, 현재도 여전히 문제시 되고 있는 성범죄자들의 처벌 문제에 관한 「곤충도감」등.

그래도 굳이 이 중 하나를 꼽으라는 악의가 다분한 부탁을 한다면, 「곤충도감」을 선택할 것 같다. 결말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성범죄자들에게 주는 처벌이 대리만족이라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들었다. 나는 이 세상에 죽음으로밖에는 용서를 할 수 없는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중 하나가 성범죄를 저지른 작자들이다.
마지막 이야기라는 이점도 있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소설이 가장 기억 깊숙한 곳에 남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나왔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도 인상 깊게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전에 나온 이 소설이 더 마음에 든다.

남자는 욕실에서 나와 마주 보고
꼭 껴안은 채로 잠든 모자를 내려다본다.
둘 다 곤히 잠든 평화로운 그림이다.
그때 아이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돌아눕는 바람에
여자의 팔에서 빠져나온다.
그러더니 이불을 걷어차다가 여자의 목에
다리를 척 얹어놓고 손가락으로 자기 목을 긁는다.
뭔가 거치적거리는 게 있는지
아니면 꿈을 꾸는지,
여자의 가슴과 얼굴을 연속으로 걷어차면서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을 하며
자기 잘 자리를 찾아간다.
그걸 바라보다가 남자는,
매번 느끼는 거지만 세상 모든 아이들의 얼굴은
잘 때가 제일 예쁜 법이라고 맘속으로 말하며
여자를 깨우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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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가 끝난 뒤
함정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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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디자인, 제목, 줄거리.
내가 책을 고르는 거의 대부분의 기준에서 빠지지 않는 요소이다. 이 책 또한 예정에 없던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지 디자인이 너무 예뻐서, 그리고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충동적으로 구매한 책이다. 결론적으로 사기를 아주 잘 했다고 생각하는 책 중 하나.

단편집이나 소설집은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내가 읽기에도 어딘가 편안한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사실 내가 읽은 단편 소설들은 끝이 애매모호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됐다는 거야? 하는 식의 답답함을 불러왔다. 그런 애매모호함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런 유의 소설은 내게 공허로 다가오는 경우가 허다해서 단편 소설을 읽을 때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읽어야 했다.
나에게 단편소설 = 공허함 그 자체였다. 그것도 약간의 우울함을 동반한.

이 소설은 그러지 않아서 좋았다. 완벽하게 깔끔한 뒷맛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련한 여운을 남기는 책이 아니라서…… 나름 가벼운 기분으로 죽 읽어 내려간 것 같다.

소소하고 편안한 일상을 저녁식탁 앞에서 들려주는 듯해서 읽기가 수월했다. 막히는 데 없이 술술 넘어가기도 하고 이야기들 자체도 불편한 구석이 한 군데도 없고.

나는 죽음을 다룬 글들을 읽을 때면 으레 마음 한 구석이 경직되고는 했다. 죽음을 과도할 정도로 두려워하는 나머지 내가 결국에는 죽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소설을 접하면 한없이 불안정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부분인가부터 이 책은 죽는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구나. 하고 깨달았다.
죽는다는 것에 대해,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차분한 어조 때문인지 불안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토록 많은 죽음이 등장하는 소설이 내게 아무렇지도 않다니. 죽음마저 일상으로 끌어들인 탓일까. 누군가 내 어깨를 감싸 안고 가만히 다독이는 것 같았다.

소설 중 내 마음에 가장 와 닿았던 것은 「어떤 여름」이었다.
여행지에서 만난 두 남녀의 이야기. 여자는 스탕달의 「적과 흑」을 읽고 있었고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무엇도 묻지 않은 채로 함께 여행을 다니는데 그 이야기의 여운이 여전히 내 마음에 남아 있다.

끝이 없어 보이는 어둠이 한없이 두려워 잠 못 이루는 날, 이 책이 많은 위로가 될 것 같다.

그날 이후 박은 날마다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가
같은 자리에 앉았고,
소녀는 눈을 내리깐 채
꼬치를 굽는 모습 그대로 한결같았다.
그리고 스물여섯 살의 그가 서른 살이 되도록
소녀와 그의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그사이 소녀는 그녀가 되었고,
그는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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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버전트 컬렉션 다이버전트 시리즈
베로니카 로스 지음, 이수현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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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다이버전트 시리즈 중에 제일 재미있었던 편. 다이버전트 프리퀄로써 포의 시선에서 바라본 이야기다.
진짜 다이버전트 시리즈 보면서…… 처음에는 너무 멋있었던 포가 갈수록 찌질 해지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었는데. 다행히 여기에서는 다이버전트의 포가……. 하지만 다이버전트에서보다는 조금 더 인간적인 모습의 포가……!
암튼 정말 만족스러웠다.

얼리전트를 그렇게 끝내놓고 나서, 물론 엔딩이 마음에 안 든 건 아니다. 나름 마음에 드는 엔딩이었다. 단지 트리스가…… 무튼 용납을 할 수 없었을 뿐. 나의 트리스…….

포를 기대했던 것 중 한가지는 바로 포의 입장에서 트리스를 볼 수 있을 거란 기대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트리스가 나올 거라고 기대했는데(물론 첫 편에서 아주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언급만.) 프리퀄이라 그런지 포가 돈트리스에 오기 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게 조금 아쉬웠는데 그걸 상쇄할 정도로 아주 재미있어서 만족했다. 3편에서는 포가 교관이고 트리스가 입문생이던 시절이 그려지기도 했고.
마지막에는 다이버전트의 명장면을 포의 시선으로 보여준 것도 좋았다. 포는 이런 생각을 했구나 하면서 포에 대한 애정도가 무럭무럭 상승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어쩐지 이 이야기는 나에겐 아득하게 느껴져서 조금 슬펐다. 아마도 얼리전트까지 다 보고 난 뒤의 부작용이겠지.
왠지 지난 과거를 추억하는 것 같기도 하고. 포의 표정이 상상되어서 마음이 아팠다.
분명 즐거운 장면임에도 어쩐지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아마, 다이버전트 시리즈를 다시 읽는 건 한참 후가 되겠지만 포만은 종종 들춰 보게 될 것 같다. 마치 흐릿한 과거의 잔상을 되짚듯 앨범을 들추어 보듯.

트리스가 내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나는 놀라서 그녀를 보았다.
나는 그 손을 가볍게 쥐었고,
불안하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이제까지 내가 판단력을 잃어
트리스와 닿은 일은 대여섯 번 있었지만
트리스가 나에게 접촉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트리스는 곧 몸을 돌리고
친구들을 따라잡으려 뛰어갔다.
나는 복도에 혼자 서서 바보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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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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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열정」에 관한 책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It`s only movies, but movies it is.」라는 문장 하나가 소설 전체를 의미한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결코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무언가에 대한 열정. 극복하지 못한 상처가 있음에도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는 그 열정. 해설에서는 문학에 대한 찬가라고 했지만 나는 이 소설을 열정이라고 하고 싶다(물론 문학에 대한 찬가라는 말에도 동의한다)

애너벨 리에서는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린스를 자주 언급하는데(M계획에 대해 말하면서) 계속해서 미하엘 콜린스가 언급되니까, 또한 그 책 내용이 너무 흥미진진해서 나는 그 소설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애너벨 리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 소설이라 그 시대의 문화나 당시 일어났던 사건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래서 이 책도 실재하는 책인가 검색해보니 실제로 존재하는 책이었다. 속에서 우러나오는 환호성을 지르고 그 책을 냅다 장바구니 안으로 넣었다.
다소 복잡하고 정치색이 짙은 책이라지만 뭐 어때. 이미 애너벨 리 때문에 관심을 가져버렸는데.
태평한 생각이나 하며.

소설 속 중심인물은 세 명이다. 나, 사쿠라, 고모리.
M계획이라고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린스를 주제로 여러 나라에서 동시상영을 하려는 계획인데 그 때문에 고모리가 `나`를 찾아온다. 원래는 한국의 김지하가 시나리오를 맡을 예정이었지만 그가 체포되는 바람에 `나`를 찾아오게 된 것이다. `나`는 시나리오 작가로써 사쿠라와 고모리와 함께 M계획에 동참한다.
`나`는 사쿠라와 점점 가까워지고 그 와중에 과거에 애드거 앨런 포의 애너벨 리를 영상화한 걸 본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사쿠라에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사쿠라는 과거 아역스타였다. 그녀는 그 시절 영화 한 편을 찍는데 포의 시 「애너벨 리」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사쿠라는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을 찍을 때 잠이 들어서 그 부분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녀는 자신이 꾸는 악몽이 그 기억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 막연히 예상하고 `나`에게 영화의 마지막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나`는 잠깐 보았던 장면에서 그 스타소녀가 적나라한 알몸을 하고 누워 있었던 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어떤 예감을 했던 건지, 막연한 불안감인지.

여기에 포의 「애너벨 리」에 대해 계속된 질문을 하는(어쩌면 똑같은 의문일지도 모를)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녀는 사쿠라의 친구인 야나기 부인이다.
그녀는 `나`에게 묻는다.
˝`I`는 죽은 애너벨 리의 몸에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나요?˝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친구에게 과거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은 걸지도 모른다.
봉인된 기억 속에 어떤 끔찍하고도 알아서는 안 되는 진실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아마 친구에 대한 염려가 그 직감을 불러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영화도 아니고 포의 시에 대해 집착어린 질문을 쏟아낼 때는 왜 이러나 싶었는데 그녀가 간절한 염원처럼 내뱉은 그 대사로 알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등장인물들 중 고모리가 제일 좋았었다. 우아하고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미소년이 절로 상상이 되어서 나는 그를 가장 마음에 들어 했었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실망감이 더 컸을 거라 생각한다.
고모리는 사쿠라가 자신의 과거를 딛고 일어서야 한다고 했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본인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상처를 굳이 끄집어내서 눈앞에 들이밀 필요가 있나. 비록 죽는 그 날까지 악몽에 시달려야 한다고 해도 본인이 원치 않는 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나`가 고모리에게 저열하다고 욕을 해도 할 말은 없다. 정말로 그런 식으로 행동했으니까.

고모리가 애너벨 리 영화 무삭제판을 가져와 그것을 모두의 눈앞에 공개하려는 순간 나는 속으로, 안 돼! 하고 수십 번은 외친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 그 영화의 뒷내용이 이미 알고 있었던 내 눈에는 마치 그들이 결코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 쪽으로 다가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막연한 불안감과 그 불안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희열.
나는 그 봉인된 상자를 열어 모든 진실이 밝혀졌으면 하는 마음. 동시에 차라리 감추어 두고 영원히 열지 말았으면 하는 간절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도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내가 안타까워하든 폭력과도 같은 기대를 갖든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절망 속으로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었다.

소설은 현재에서 시작해 과거로 회귀를 한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며 종장을 맞이한다. 현재로 돌아온 지금은 과거에 품었던 환상 따위는 조금도 없지만 그들이 온 힘을 쏟아 완성한 열정만은 삶의 증거가 되어 고스란히 남기를 희망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쿠라 씨가 잠이 들었는지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야나기 부인이 일어나 복도 쪽 문을 연 다음,
다시 돌아와 커튼 아랫자락을 안아 올리듯 하며
소리를 내지 않고 커튼을 쳤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야나기 부인이 내게 물었다.
"`I`는 죽은 애너벨 리의 몸에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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