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열정」에 관한 책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It`s only movies, but movies it is.」라는 문장 하나가 소설 전체를 의미한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결코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무언가에 대한 열정. 극복하지 못한 상처가 있음에도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는 그 열정. 해설에서는 문학에 대한 찬가라고 했지만 나는 이 소설을 열정이라고 하고 싶다(물론 문학에 대한 찬가라는 말에도 동의한다)

애너벨 리에서는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린스를 자주 언급하는데(M계획에 대해 말하면서) 계속해서 미하엘 콜린스가 언급되니까, 또한 그 책 내용이 너무 흥미진진해서 나는 그 소설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애너벨 리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 소설이라 그 시대의 문화나 당시 일어났던 사건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래서 이 책도 실재하는 책인가 검색해보니 실제로 존재하는 책이었다. 속에서 우러나오는 환호성을 지르고 그 책을 냅다 장바구니 안으로 넣었다.
다소 복잡하고 정치색이 짙은 책이라지만 뭐 어때. 이미 애너벨 리 때문에 관심을 가져버렸는데.
태평한 생각이나 하며.

소설 속 중심인물은 세 명이다. 나, 사쿠라, 고모리.
M계획이라고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린스를 주제로 여러 나라에서 동시상영을 하려는 계획인데 그 때문에 고모리가 `나`를 찾아온다. 원래는 한국의 김지하가 시나리오를 맡을 예정이었지만 그가 체포되는 바람에 `나`를 찾아오게 된 것이다. `나`는 시나리오 작가로써 사쿠라와 고모리와 함께 M계획에 동참한다.
`나`는 사쿠라와 점점 가까워지고 그 와중에 과거에 애드거 앨런 포의 애너벨 리를 영상화한 걸 본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사쿠라에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사쿠라는 과거 아역스타였다. 그녀는 그 시절 영화 한 편을 찍는데 포의 시 「애너벨 리」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사쿠라는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을 찍을 때 잠이 들어서 그 부분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녀는 자신이 꾸는 악몽이 그 기억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 막연히 예상하고 `나`에게 영화의 마지막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나`는 잠깐 보았던 장면에서 그 스타소녀가 적나라한 알몸을 하고 누워 있었던 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어떤 예감을 했던 건지, 막연한 불안감인지.

여기에 포의 「애너벨 리」에 대해 계속된 질문을 하는(어쩌면 똑같은 의문일지도 모를)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녀는 사쿠라의 친구인 야나기 부인이다.
그녀는 `나`에게 묻는다.
˝`I`는 죽은 애너벨 리의 몸에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나요?˝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친구에게 과거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은 걸지도 모른다.
봉인된 기억 속에 어떤 끔찍하고도 알아서는 안 되는 진실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아마 친구에 대한 염려가 그 직감을 불러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영화도 아니고 포의 시에 대해 집착어린 질문을 쏟아낼 때는 왜 이러나 싶었는데 그녀가 간절한 염원처럼 내뱉은 그 대사로 알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등장인물들 중 고모리가 제일 좋았었다. 우아하고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미소년이 절로 상상이 되어서 나는 그를 가장 마음에 들어 했었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실망감이 더 컸을 거라 생각한다.
고모리는 사쿠라가 자신의 과거를 딛고 일어서야 한다고 했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본인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상처를 굳이 끄집어내서 눈앞에 들이밀 필요가 있나. 비록 죽는 그 날까지 악몽에 시달려야 한다고 해도 본인이 원치 않는 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나`가 고모리에게 저열하다고 욕을 해도 할 말은 없다. 정말로 그런 식으로 행동했으니까.

고모리가 애너벨 리 영화 무삭제판을 가져와 그것을 모두의 눈앞에 공개하려는 순간 나는 속으로, 안 돼! 하고 수십 번은 외친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 그 영화의 뒷내용이 이미 알고 있었던 내 눈에는 마치 그들이 결코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 쪽으로 다가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막연한 불안감과 그 불안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희열.
나는 그 봉인된 상자를 열어 모든 진실이 밝혀졌으면 하는 마음. 동시에 차라리 감추어 두고 영원히 열지 말았으면 하는 간절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도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내가 안타까워하든 폭력과도 같은 기대를 갖든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절망 속으로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었다.

소설은 현재에서 시작해 과거로 회귀를 한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며 종장을 맞이한다. 현재로 돌아온 지금은 과거에 품었던 환상 따위는 조금도 없지만 그들이 온 힘을 쏟아 완성한 열정만은 삶의 증거가 되어 고스란히 남기를 희망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쿠라 씨가 잠이 들었는지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야나기 부인이 일어나 복도 쪽 문을 연 다음,
다시 돌아와 커튼 아랫자락을 안아 올리듯 하며
소리를 내지 않고 커튼을 쳤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야나기 부인이 내게 물었다.
"`I`는 죽은 애너벨 리의 몸에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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