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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아셰트클래식 4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모리스 포미에 그림 / 작가정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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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비딕]의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을만큼 간단하다. 포악한 고래 모비딕을 그에게 한쪽 발을 잃어 복수심에 불타는 선장이 포경선을 이끌고 뒤쫓는다는 상식 수준의 진행 이상이나 이하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두꺼운 800p짜리 소설이 오래도록 고전으로 남았을리도 없다. 싸게 말해서 [모비딕]은 일종의 블록버스터다. 아니, 이걸로는 설명이 좀 부족하다. 블록버스터 무비들이 돈을 아끼지 않고 가상의 사건을 현실로 재현해내지만 [모비딕]은 그저 글자들의 나열만으로 이 모든 일을 해내니까. 또 돈이 아닌 작가의 인생을 쥐어짜 완성해냈으니까.

 아마 지금에 와서 어떤 작가지망생이 [모비딕]의 장엄한 서술을 재현하겠다고 나선다면 그 가능성을 떠나 시도 자체가 뻘짓일 것이다. [모비딕] 곳곳에 삽입된 사건의 기승전결이나 맥락과는 무관한 생물학적/박물학적 지식이나 포경업에 대한 보고서들은 글로 된 텍스트나 작게 첨부된 삽화 외에 먼 바다의 고래라는 괴물을 접할 길 없던 시대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 시대에만 가능했고, 지금 와서 재현할 의미도 필요도 없을 백과사전식 묘사가 가득하다. 포경업에 종사했던 멜빌의 과거와 어떤 자료든 단 한줄이라도 고래와 관련된 책은 모두 섬렵했다는 집착은 이 시대에서는 위키피디아와 다큐멘터리 채널로 대체되리라.

 그렇다고 해서 [모비딕]의 문장들이 현 시대의 영상매체에 뒤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이제야 그릇을 만들 때 플라스틱이든 유리든 어떤 소재로 얼마든 찍어낼 수 있지만 오래고 오랜 옛날 장인이 흙을 고르고 섬세히 구워낸 자기와 비교할 카테고리가 애초에 아니지 않듯이. 골동품의 재현불가능함이란 그보다 나은 내구성따위의 기술력이나 투자금액이 아닌 이제껏 지나 온 인생을 한 작품으로 되바꿔놓는 그 집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제의식이나 시대정신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질 거라 본다. 책에 담긴 막대한 고래학에 대한 정보량과 서술에도 불과하고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로 그려지는 모비딕과 주술적 미신으로 예정된 운명이 포경선 피쿼드 호를 지배해나가는 그 과정은 어떤 방향으로든 해석될 여지를 남겨놓는다. 그러나 [모비딕]은 이처럼 어떤 소설에든 적용될 수 있는 방식을 떠나 이 매체 자체를 뒤흔드는 힘을 갖고 있다. 침대 위에 누워 방안에서 책을 읽는 자에게 깊은 바다 속에서 살아숨쉬는 고래를 글이라는 투박한 방식 하나만으로 온전히 재현해보이겠다는 야망만큼 그리고 그 터무니없는 도전에 성공했다는 사실만큼 이 소설 [모비딕]에 주목케하는 무언가는 없다. 장엄, 그리고 또 장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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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취미 식민지 일본어 문학.문화 시리즈 8
유재진.이현진.박선양 옮김 / 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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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살 때 기준이란 대게 단순한 것들이다. 저자나 장르에 대한 선호처럼 평범한 이유나 베스트셀러로 이슈화가 되었기에 혹은 표지 디자인의 매끈함처럼 속물적-변명하자면 나는 언제나 속물이다- 이유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탐정취미]는 좀 다른 연유로 구매하게 되었다. 그건 바로 이 책의 기획의도다. 자료적 필요성이나 소설적 재미 같은 것을 기대하지도 않는데도 흥미로운 기획이라는 이유만으로 책을 구매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탐정취미]는 역자 서문에서 '아마추어 탐정작가들이 쓴 일본어 탐정소설과 식민지 조선의 일본어 식자층이 읽었을 일본어 탐정소설을 발굴하여 번역한 것'이라 스스로를 소개한다. 근대화의 물결이 들어오고 일본어를 익혀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최첨단 유행의 모던뽀-이들이 취미로 쓰고 읽었을 탐정소설들을 번역해 모아놓았다니. 이 어찌 흥분이 되지 않을 기획이란 말인가?

 여러 작가의 작품, 그것도 상업적으로 검증되었다기보다는 당시의 동인이나 번안소설따위의 역사적인 의의를 가진 작품을 모아놓은 책이라 추리라는 장르로서는 기대할 것이 크게 없지만 그 구성이 주는 재미가 있다. 특히 셜록 홈즈의 배경을 일본으로 옮겨놓은 번안소설 [명마의 행방]이나 당대 지사들과 운동조직의 암투가 담긴 [여자 스파이의 죽음]은 근대 식민시기의 풍경을 탐정소설의 언어로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인 작품들이다.

 더욱이 이 책의 백미이자 권두를 장식하는 김삼규의 작품 [말뚝에 선 메스]는 여러가지로 주목을 끌 요소가 많은 작품이다. 우선 이 작품은 1929년 11월에 연재가 시작된, 한국작가가 (일본어로) 쓴 최초의 탐정소설이다. 나는 이제껏 첫 한국추리소설 작가를 김내성으로 알고 몇권인가 논문도 읽었는데도 [탐정취미]를 통해 새로 하나 더 배운 셈이었다.

-이하는 [말뚝에 선 메스]의 반전에 대한 감상이다-

 [말뚝에 선 메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 소설은 신경질적이다 싶을 정도로 탐정의 욕망에 대해 추궁한다는 점이다. 많은 탐정소설에서 주역을 맡는 탐정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외부자의 시선을 취하기 마련이다. 이성과 과학의 신봉자이자 살아있는 논리의 화신인 탐정에게 이는 당연한 의무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말뚝에 선 메스]에 와서는 이런 초월자적인 위상은 하염없이 추락한다. 탐정취미는 나쁜 취미다.

 탐정의 욕망을 추궁한다고 해서 사실은 탐정이 범인이라거나 친인척이 범죄에 연루되어 전전긍긍하거나 그런 류의 욕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말뚝에 선 메스]에서 주인공이 모든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은 바로 외부자의 시선을 취하겠다는 욕망, 탐정이 되겠다는 욕망 그 자체에서 비롯한다. 초월자는 간데없고 결핌만 가득한 앙상하게 메마른 범인(凡人)이 남을 뿐이다.

 물론 이런 류의 반전이야 근자의 추리물에서 드문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 최초의 탐정소설이 탐정을 부정하는 소설이라는 점은 눈여겨볼만한(봐야만하는) 지점이다. 이 재미난 역설에 대해서는 다양한 비평이 가능하겠으나 나는 식민지의 소설이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과잉해석하고 싶다. 계몽이라는 미명 하에 식민지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성의 화신인 탐정이라 자처하는 양반들이 저 잘날 것 없는 맹탕으로 보일 수밖에 없잖은가?


-다 적었다-

 고전에는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기에 고전이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고전이 아닌 골동품에는 시대가 지나 변해버린 무언가가 남아있어 색대조표마냥 지금과는 구별되는 이상한 것들로만 가득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읽을 재미로는 후자가 더 있을 지도 모른다. 시공간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무언가라면 이제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줄창 보겠으나 맹랑하여 잊혀진 것들은 구태여 찾지 않는 한 앞으로 만날 일 없을 귀한 몸이시니 말이다. [탐정취미]는 그런 점에서 반드시는 아니어도 고루할 때 한번 읽어볼만한 아주 좋은 기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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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어벤져스
조스 웨든 감독,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외 출연 / 월트디즈니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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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다수의 슈퍼히어로는 히어로로서의 정체성과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둘 모두를 갖고 있다.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역시 그들이 쓰고 있는 마스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명의 히어로가 있으면 백개의 가면이 있는 법. 각자의 가면이 갖는 의미는 각자의 히어로들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어벤저스] 개봉에 맞추어 마블코믹스의 히어로들의 가면과 그 뒤에 숨겨진 정체에 대해 짤막한 감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단 나의 마블코믹스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여 여기서는 영화화된 작품들만을 다루겠다.



1.스파이더맨은 돌연변이 거미에 물려 거미의 신체적 특징과 강력한 힘을 얻게 된 소년이다. 자신이 아무 생각없이 놓아준 범죄자의 손에 삼촌이 목숨을 잃고 자신의 힘에 어울리는 책임을 지기로 다짐해 영웅이 되었다. 스파이더맨은 마블 계열의 히어로 중 최초로, 또 장기적으로 성공한 시리즈일만큼 영웅들의 이중성을 잘 잡아낸 히어로이다. 어쩌면 가장 전형적이었기에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로 자리잡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영웅으로서의 삶과 소시민으로서의 현실 간의 괴리가 중요한 테마였다. 1편의 악역 그린고블린은 가면을 씀으로써 내면의 욕망을 드러내었지만 그와 반대로 스파이더맨은 가면을 쓰는 것과 동시에 초인적인 힘을 가진 자로서의 책무를 (뒤집어)쓴다. '다정한 이웃 스파이더맨'이라는 표현은 어느 동네의 시장 선거 카피로도 쓰일 법 하다. 공적/사적 경계에서 괴로워하는 피터 파커의 모습은 업무와 가족-친지 사이에서 골머리를 썩혔던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의 행복이 더 기쁘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가장 대표적인 명장면은 역시 거꾸로 매달린 스파이더맨에게 MJ가 복면을 반쯤 벗긴 뒤 입을 맞추었던 장면일 것이다. 과장을 좀 보태면 이 장면만이 스파이더맨이 자신 스스로로서 존재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의 키스라는 포상은 스파이더맨과 피터 파커의 경계가 사라진 상황에서 가능했다. 히어로물 시리즈에서 이보다 더 로맨틱한 키스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2.아이언맨은 군수산업체의 대부, 토니 스타크가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되었을 때 그 테러단의 기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낸 강화갑옷이다. 이후 군수산업에 회의적이 된 토니 스타크에 의해 아이언맨은 신형병기와 친환경에너지라는 이중적인 최첨단 기술의 집결체로 떠오른다. 아이언맨은 갑부와 가난뱅이라는 대조 외에도 스파이더맨의 훌륭한 대척점이 될 수 있는 인물이다. 아이언맨의 슈트(강화갑옷)는 가면이 아니다. 슈트는 일종의 정장이고, 남자의 옷차림은 전략이다. 아이언맨은 일종의 최신형 스포츠카와 같은 매력을 가진 도구에 가깝다. 히어로계의 람보르기니 디아블로라고나 할까? 세계적 재벌의 아낌없는 사치와 무한한 권력의 상징인 셈이다. 아이언맨 슈트는 상황에 맞게 여러벌이 제작되어있으며 그 조종자의 정체가 숨겨진 것도 아니다. 그저 도구일 뿐인 것이다. 스파이더맨이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사이를 마스크로 구분해야 하는 것과 달리 아이언맨에게 공사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는 엄청난 갑부고, 그가 사적으로 입은 빤쓰는 공적(세계적) 유행이 되는 빤쓰다. 파파라치가 초고속 제트기에 올라탄 재벌의 얼굴 사진을 클로즈샷으로 찍지 못한다고 해서 그 정체가 가려지던가? 오히려 그 부유함의 과시만 될 뿐이다. 아이언맨2에서 토니 스타크의 비서 페퍼 포츠는 키스를 해달라는 토니 스타크의 제안에 아이언맨 마스크에만 키스를 한다. 차 창문 열고 뽀뽀해달랬더니 차 엠블렘에다 입을 맞춘 셈. 물론 페퍼 포츠가 돈만 보는 사람이라가 아니라 일종의 유머를 던진 것이다. (나의 페파 따응은 돈에 환장한 사람이 아니야) 스파이더맨의 마스크 반쯤 벗긴 키스와 매우 대조적이면서도 익살스러운 장면이다.



3.캡틴 아메리카는 애국심 가득한 청년 스티브 로저스가 자원입대를 해 슈퍼솔져 프로젝트-약물을 통한 강화인간 계획-에 참가해 초인적인 힘을 얻어 탄생한 히어로이다. 그러나 영화의 경우, 캡틴 아메리카는 초인적인 힘을 얻었다고 슈퍼 히어로가 된 것은 아니었다. 테러 습격으로 실험실에 사고가 일어나 이후의 슈퍼솔져 프로젝트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정부는 유일한 성공작인 그를 일종의 차력쇼를 통해 군 사기 진작을 위한 홍보수단으로 이용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스티브 로저스는 친구를 위해 자진해서 전장에 뛰어듬으로써 2차대전의 진정한 히어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전쟁 당시 빙하에 갇혀 2차대전으로부터 70년이 지난 현대에 다시 깨어나 여러가지 시차적인 문제를 겪으면서도 올드패션한 윤리적 원칙을 지키는 것이 매력인 인물이기도 하다. 재미난 것은 캡틴 아메리카의 가면이 필요한 것은 스티브 로저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군인이고, 그의 정체따위야 군대 및 정부에서 당연히 파악하고 있다. 거기다 유니폼을 입든 입지 않든 그는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하게 도덕적으로 행동한다. 그럼에도 그는 마스크를 쓰고 유니폼을 입는다. 작게 보면 이는 정부의 홍보정책에 따르기 위함이지만 크게 보면 그의 가면이 그 자신이 아닌 그를 바라보는 타인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캡틴아메리카를 지켜보는 이들은 그 가면을 통해 스티브 로저스 개인이 지워짐으로써 캡틴 아메리카가 일개 시민인 자신을 대변하는 인물이라 여기게 되는 것이다. 작중에서도 그는 일개 요원인 콜슨의 이입 대상이었다.



4.토르는 아스가르드의 신이자 신들의 왕인 오딘의 장남이기도 하다. 여기서 신이라고는 해도 절대자나 창조주로서의 신은 아니며, 우주의 지배세력의 일원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올바를 것이다. 교묘한 말솜씨와 냉철한 지략을 가진 동생 로키 때문에 함정에 빠지기도 하고 같이 싸우기도 하는 복잡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 포스팅에서 토르를 다루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우선 토르는 마스크를 쓰고 있지도 않거니와 인간조차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도 이중적인 면은 있었다. 그의 영화 첫 작품에서 토르는 신이지만 너무나 인간다웠고, 절제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지구로 추방되어 인간으로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인간이면서도 신으로서의 책임의식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신으로 돌아와 지구를 구하게 된다. 신일 때 인간답고 인간일 때 신다웠던 토르의 모습은 분명 특기할만하나 이후 어벤저스나 여타의 시리즈에서도 이런 이중성을 유지할 것이라 보기는 힘들다. 어벤저스에서 토르는 일관되게 절대자로서의 책무를 지키려 노력한다. 그나마 로키와의 관계가 이중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왕으로서 국민을 보호함과 동시에 같은 왕족을 보호하려는 태도라고 보면 그렇게 모순되어 보이지도 않는다. 원작 코믹스에서 토르는 인간이자 의사인 도날드 블레이크와 아스가르드의 신인 토르가 한 몸에 공존하는 이중성을 가졌다지만 이 설정이 이어질 것 같지도 않는다.



5.헐크는 인간에게 초능력을 부여하기 위한 감마선 실험에서 연구원 브루스 배너가 막대한 양의 감마선을 쬔 결과 나타난 브루스 배너의 이중인격이자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 괴인이다. 헐크는 여타의 작품과 달리 몇번이고 주연 배우를 바꿔가며 새로운 영화 시리즈로 재촬영이 되어야 했다. 이는 헐크라는 캐릭터가 갖는 개성을 살리는 것이 여간 어려운 노릇이 아니라는 증거다. 헐크의 특징은 그의 이면의 정체성이 유니폼이나 마스크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격노한 상황에서 일종의 발작과 같이 나타나는 제 2의 인격이라는 점이다. 분노가 터져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폭발적인 힘을 쏟아붓는 것이 헐크다. 그러니 헐크가 되기 전의 인격, 브루스 배너가 어떻게 자신의 화를 제어하고 다스리느냐가 이 인물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에드워드 노튼의 브루스 배너는 아쉽게도 그 매력을 전달하는데 실패했다. 그는 분노를 참는 모습만, 신경질적인 모습만 보여줬다. 헐크는 타일러 더든이 아니다. 에드워드 노튼은 천성적으로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매력을 가진 배우이지만 헐크와는 다르다. 반면 마크 러팔로의 브루스 배너의 분노는 보다 자연스러워 보인다. 억압받고 천대시 당하는 인물, 그 억울함에서 뛰쳐나올 것 같은 분노를 견디는 모습이야말로 더 큰 파괴력을 예상하게 한다. 분노는 물을 막는 둑과 같아 그 막는 힘이 커질수록 터져나오는 힘이 더 거세진다. '내가 화나면 너 죽는데 내가 참는다.'라는 쾌감은 에드워드 노튼의 신경질적인 얼굴보다는 마크 러팔로의 순하고 착한 얼굴에 더 어울린다.



6.엑스멘은 뮤턴트들의 결사다. 돌연변이로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능력을 가진 이들이 모여 단체를 이룬 것이다. 이들의 적들 역시 뮤턴트다. 엑스멘은 뮤턴트가 아닌 인간들과의 화합을 위해 활동하며 그들의 적은 뮤턴트가 지배하는 세상을 위해 암약한다. 엑스멘은 가면을 쓰지 않는다. 그들에게 마스크는 없다. 다만 유니폼을 입는다. 엑스멘 본 시리즈도 그렇고, 엑스멘의 프리퀄이자 리붓인 퍼스트 클래스에서도 그렇고 최종결전에 앞서 이들은 유니폼을 맞춘다. 엑스멘 시리즈는 언제나 소수자들의 담론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 특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이든 동성애든 장애인이든 어떤 이유로든 사회적 차별을 받았던 이들이 스스로 연대하고 억압에 맞서나간다는 테마는 공통되게 나타났다. 이들이 유니폼을 입는 것은 NGO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유니폼은-퍼스트 클래스의 노락색 쫄쫄이가 나찌가 유대인에게 붙인 노란색 별과 색이 같다는 비약도 한번 섞어주면-그들을 구속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실제로 엑스멘의 주인공들은 스스로의 능력을 봉인하고 있다. 싸이클롭스는 특제 선글라스로 자신의 레이저빔을 감추고, 울버린은 재생능력 속에 아다만티움 칼날을 숨긴다. 진 그레이는 피닉스 포스를 감추고 있으며 로그는 피부접촉을 막는다. 이들이 유니폼을 입는 것은 사회적/법적 제어 하에서 자신의 힘을 개방하겠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들의 적대세력 브라더후드 오브 이블 뮤턴트가 복장자유라는 것도 나름 대조적이다.



 이렇게 간략히 마블 코믹스의 히어로들과 그 각각의 개성에 대해 짧게 평을 남겨보았다. 판타스틱4는 보지도 않았고 어차피 리붓된다니까 볼 생각도 안들어서 적지 않았다. 막상 포스팅을 다 쓰고보니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할지 막막하다. 되게 뻘쭘하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막상 포스팅 쓰기 시작했을 땐 패기로 가득 찼는데 끝맺는 법을 모르겠다. 히어로의 이중성의 중요함과 한국의 메타히어로물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모든 결론을 한국의 장르적 특성과 그 미래로 마무리하는 찌질함을 되풀이하고 싶지가 않아 관뒀다. 어쩌지. 앞으로의 슈퍼히어로 시리즈를 기대한다, 같은 말이라도 할까? 내가 기대하면 뭐 누가 좋아라도 해주나? 다 필요없다. 아무 얘기나 하겠다. 김꽃비는 참 예쁜 것 같다! 뭘 먹으면 그렇게 예쁠까. 하루만 예쁘게 살고 싶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렇게 매일 예쁘게 살면 힘들지 않을까. 괜한 걱정을 하게 된다. 그냥 그렇다. 김꽃비가 예쁘면 됐지 이딴 포스팅 결론을 잘 낸다고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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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우유신화 1
MASA, JOANA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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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만화, 그 중에서도 능력자 배틀로 분류되는 장르는 필연적으로 구도자적인 성격을 가진다. 초능력이든 스탠드이든 넨이든 능력자 배틀의 화두는 주인공이 어떻게 최강의 자리에 오르느냐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르에서는 물리학적 이론에서 오컬트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배경지식을 통해 어떤 것이 가장 강한 것이며 이 경지에 오르는 수련법을 연마해 절대적이라고 생각되는 악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데 어찌 이 장르의 주인공이 구도자가 아니겠는가.

 얼마 전 완결된 마사토끼와 조안나의 [커피우유신화]는 이 능력자 배틀에 있어서 경지에 이른 작품이다. 마사토끼는 이 작품으로 신의 존재나 운명의 문제,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명쾌하면서 알기 쉽게 풀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작가는 스스로를 이과적인 작가라고 한계를 짓지만 이는 너무 겸손한 태도다. 마사토끼는 사랑에 대하여 그저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였을 뿐이나 그 집요함을 통해 자연스레 철학으로서의 깊이를 이끌어내었다. 운명과 자유, 신과 인간 그리고 윤리와 이윤의 대립되는 화두를 마사토끼는 철두철미한 논지와 개드립을 통해 자연스레 하나의 결론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커피우유신화]는 두뇌배틀을 주로 그렸던 마사토끼답게 세계관이 복잡하니 정리하고 넘어가자. [커피우유신화]의 세계에는 세 가지 '힘'이 존재한다. 첫째는 '신'이다. 신이라고 하여도 전능한 초월자를 일컫는 것은 아니며 일정 조건을 클리어하여 자신이 믿는 것이 현실이 되는 능력을 갖게 된 사람을 가리킨다. 지금의 시대에는 커피의 신과 우유의 신이 있으며 미래에 이 둘이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아 커피우유라는 새로운 존재가 세계에 편입되며 신들은 그 능력을 잃고 인간으로 돌아올 운명이 주어져 있다.

 둘째로 신들을 음지에서 보좌하는 '회원'과 이들이 모여 이룬 단체인 '협회'가 존재한다. 이들은 인간을 초월한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원근감을 무시해 물리력을 펼치거나 중력을 무시하는 식의 다양한 초능력도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우주의 법칙이 있다. 이 법칙에는 두 신은 반드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거나 신의 힘은 회원과 상대방 신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 등이 있다.

 이 독특하면서도 평화로워 보이는 세계에 균열이 생긴다. 바로 가짜신의 등장이다. 앞서 말한대로 신이 되기 위해선 어떤 조건을 클리어해야 한다. 커피신의 경우에는 커피를 한잔을 마시고 5년 동안, 정확히 1억 5776만 6400초가 될 때까지 1만 잔을 마셔야 한다는 조건이다. 그리고 이 법칙을 알아낸 회원 '로우위'가 신이 되는 조건에 도전해 운명이 정한 신과는 달리 정화된 세계를 만들도록 노력하는 신이 되겠다고 나선 것. 몇몇 회원들은 로우위의 의견에 동조하고 커피신이 될 예정으로 점지된 고등학생 '리하이'를 암살하기로 결정하면서 협회간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얼마전까지 평범했던 고등학생인 리하이는 한시바삐 우유의 여신 '오선지'를 만나 임신을 시켜 신의 능력을 지우지 않는 한 암살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고만 것이다.

 이렇게 주인공이자 원조 커피신 리하이가 해야 할 일은 두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운명을 따라 우유여신 오선지와 사랑에 빠질 것. 다른 하나는 로우위의 위협에서 자신과 주변 인물들을 지킬 것. 그러나 이 두 문제 모두 해결이 녹록치가 않다. 우선 리하이는 우연으로 인해 우유여신 오선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오선지로 착각해 오선지 본인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또한 로우위는 협회를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슈톨렌이라는 강력한 회원의 도움을 받고 있다. 슈톨렌은 신이 된 로우위 덕에 능력을 개화한 회원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미래만을 선취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 슈톨렌이 로우위를 신처럼 여기기에 우주의 모든 것들이 로우위에게 최상의 결과만을 가져다주게 되었다.


 마사토끼가 이 이야기를 통해 제시하는 화두는 바로 운명과 자유의 문제이다. 운명적으로 정해진 사랑에 따르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주제를 러브코미디식 능력자 배틀물로 엮어내는데 어찌 구도자적이 아니랄 수 있을까? [커피우유신화]는 이 화두를 리하이와 오선지의 사랑의 가치와 리하이와 로우위의 싸움의 의미를 통해 묻는 것이다.

 우선 리하이와 오선지의 사랑부터 다루어보자. 리하이는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우유여신의 협력이 필수적이며 둘 사이의 사랑의 결실인 임신을 통해 이 세계에서 신의 능력을 지워야만 한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으로 리하이는 다른 여학생을 오선지로 착각하고 오선지를 평범한 사람이라 착각한다. (실은 엑스트라)오선지에게 접근해야 자신의 생명과 세계의 평화를 지킬 수 있음에도 리하이의 마음은 (실은 오선지)엑스트라에게 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런 우연에 의해서만 리하이의 사랑이 증명된다. 세계의 운명따위는 엿바꿔 먹으라고 하고 스스로가 원하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리하이는 오선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했을 것이다. 목숨 때문에 한 여성의 마음을 이용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리하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스스로의 생명마저도 포기함으로써, 운명을 저버림으로써 도리어 그의 운명과 진정성을 증명하는데 성공한다.

 둘의 사랑은 잘 되었다치자. 그렇더라도 의문은 남는다. 둘의 사랑이 결국 운명이 정해준 것이고, 스스로의 마음을 증명해내기 위해 운명의 장난으로 우연과 우연이 겹쳐 힘든 과정을 통해야 했다고 하자. 하지만 그저 운명이 모든 것을 정해놓았다면 인간의 선택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작중인물인 C.발 렌타인의 입을 빌어 제기되는 이 문제는 또 다른 신 로우위와의 결착을 통해 해결된다.

 아닌게 아니라 로우위는 그 자체로는 위협적이지 않지만 그를 보위하는 회원 슈톨렌의 능력은 절대적이다. 슈톨렌에게는 자신과 로우위에게 유리한 운명만이 남아있으며 그가 능력을 얻은 그 순간부터 이미 그의 승리는 결정된 일방통행일 뿐이다. 실제로 리하이를 따르는 회원들이 로우위를 공격하려 했지만 말도 안되는 우연으로 습격은 실패한다. 그러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언제나 최상의 결과만을 알려주는 선지자를 둔 로우위는 리하이에게 패배하고 만다. 우유여신 오선지의 리하이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모든 것을 꿈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로우위가 얻은 최상의 결과라는 것은 그저 꿈 속의 이야기로 전락해버렸다. 그렇다. 인간은 운명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운명을 만드는 것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자질구레한 조건들이 아무 상관도 없게 느껴질 때. 모든 조건들을 저버리고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칠 때 증명된다. 이 선택은 그 어떤 타율도 아닌 자율로만 가능하다. 자율이라고 하지만 이를 이기적인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그 사람을 중심으로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감싸안는 새로운 법을 정립하는 것, 그것만이 사랑이다. 이런 점에서 로우위의(슈톨렌의) 능력은 미래를, 운명을 선택한다지만 실상 전혀 선택이라고 볼 수 없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그냥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그런 상황이 되면 그럴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자유로운 일은 아니다. 당연한 일을 하는 것,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을 선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선택이 아니므로 자유도 아니다. 사랑은 당연히 당연이 아니다.

 사랑은 얼핏 모순으로 보인다.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만이 선택이라면, 상대방을 위한 윤리에 복종하는 것만이 자유로운 일이다. 이 복종은 자유에 복종하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자유로우라는 명령을 따르는 것은 자유다. 사랑은 선택 가능한 단 하나의 것이다. 유일하지만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바치지만 모든 것을 다 얻는다. 복종하지만 자유롭다. 다시 정리해보자. 유일하기에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바치기에 모든 것을 다 얻는다. 복종하기에 자유롭다. 최상이 아닌 최선의 길을 걷기에 최상의 결과를 얻을 자격을 가진다. 최강이다. 사랑은 모순이 아니다.

 운명의 연인이라는 것은 운명이 정해준, 운명이 점찍어준 연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 모든 운명을 결정 짓는 그 연인이 바로 운명의 연인이다. 당신은 우주에서 최고인 사람을 찾아냈기에 그 사람을 연인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을 연인으로 선택하였기에 그 사람이 우주에서 최고라는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우주의 중심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당신이 그 사람을 사랑할 때 당신의 우주는 그 사람을 중심으로 새로이 태어나니까.

 [커피우유신화]에서 '너는 나의 여신이야'라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유치한 말이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진리를 적확하게 논리적으로 구성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 외의 모든 것은 거짓이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사랑은 행복의 방법이 아닌 조건이다. 최저의 전제이자 최상의 목표이다. 사랑하는 이를 여신이라고 숭배하는 것은 어린애 생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건 진리에 대한 너무나 당연한 서술일 뿐이다. 여신의 존재 아닌 전제 하에, 그 절대적 가치를 향해 매진하는 것 외에 어떤 윤리적 존재론적 선택지도 불가하다. 이제 김꽃비는 여신이라는 나의 주장은 털끝만한 논리적 결함도 없이 완벽하게 명증하다는 것을, 김꽃비를 향한 나의 사랑이 날카롭고도 냉철함으로 가득 찬 이성과 논리의 결과물임을, 김꽃비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는 과학적 검증을 모두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만장하신 여러분. 김꽃비가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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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 [초특가판]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 씨네코리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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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다룰 주제는 '나쁜 남자'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할만한 점은 저번 주제의 힙스터에 이어 연애 역시 나에겐 생소한 영역인데다 검색이나 책을 찾아봐도 그럴듯한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연애는 몰라도 연애를 못하는 남자는 매우 잘 알고 있다. 매우 잘 알고 있다. 이번에 다룰 이야기도 여기에 중점을 맞출 생각이다. 그러니 이 글의 주제는 정확히 말해 '나쁜 남자'가 아니라 '나쁜 남자라는 가상의 존재를 꾸며내는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하는 남자'라고 할 수 있겠다.

 저번 글의 힙스터라는 주제에서는 분석 텍스트로 [2 broke girls]를 꼽았다. 이번에도 분석 텍스트와 병행해 주제를 풀어나갈 생각이다. 그 텍스트는 바로 [Mr. & Mrs. Smith]다. 한글로 번역하면 [갑남을녀] 쯤 될 제목의 영화. 단 착각하면 안될 것이, 이 글에서 다룰 작품은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가 나오는 첩보액션섹시코미디 [Mr. & Mrs. Smith]가 아닌 알프레드 히치콕의 1941년작 부부싸움이야기인 [Mr. & Mrs. Smith]이다. 아무리 나의 수많은 꿈 중 하나가 브란젤리나에게 입양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덕 리만 판 [Mr. & Mrs. Smith]는 착한 남자/나쁜 남자 이야기와는 무관하니까.

 1941년 판 [Mr. & Mrs. Smith]가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이라고 해서 그 내용을 스릴러나 서스펜스라고 짐작해서는 안된다. 히치콕이 잔인한 내용만 영화로 찍었다는 것은 편견이다. 이 영화는 히치콕 식의 로맨스코미디로 피가 흐르는 장면이야 코피가 나오는 정도밖에 없다. 그 분위기만 본다면 알프레드 히치콕이 아닌 빌리 와일더의 영화라고 착각해도 무리가 없을만큼 달달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반복되는 작품이다.


 스미스 부부는 정답다. 숨기는 것 없이 거짓말 하는 것 없이 지내자고 다짐하는 신혼 3년차. 그러나 어느날 업무행정상의 실수로 이 둘의 결혼은 법적으로 무효라는 것이 뒤늦게 밝혀진다. 큰일은 아니다. 다시 신고만 하면 되니까. 남편 데이빗은 부인 애니가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을 모르고 별말 없이 지내고, 이에 대한 애니의 불만이 폭발한다. 이 참에 자신을 버리고 떠날 셈 아니냐며 데이빗을 추궁하다 둘 사이는 완전히 틀어지고 애니를 예전부터 흠모하던 남편의 친구 제프가 그 사이에 끼어들며 상황은 복잡해진다.

 똑같은 [Mr. & Mrs. Smith]이더라도 데이빗과 애니가 문제를 푸는 방법은 브래드피트와 졸리의 해법과는 정반대다. 브란젤리나는 서로에게 숨겨온 첩보원의 삶을 밝히고 그제껏 품어온 불평과 불만을 터뜨려 일종의 카타르시스와 함께 갈등을 해소하여 제니퍼 애니스톤은 지붕만 쳐다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는)화끈한 정사씬을 연상케 하는 총기난사씬으로 무장한 2005년의 [Mr. & Mrs. Smith]와 달리 1941년의 [Mr. & Mrs. Smith]은 보다 교묘하고 앙큼한 두뇌싸움을 표방한다.

 히치콕의 [Mr. & Mrs. Smith]는 어떤 거짓과 숨김없이 완벽히 하나가 된 커플을 다루지 않는다. 연애와 사랑이라는 게임에서 기만과 속임수는 상대방에게 바치는 찬사이자 전장에 임하는 기사의 덕목임을 밝히는 것이 바로 1941년의 [Mr. & Mrs. Smith]인 것이다. 갈등의 발단은 데이빗이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자신과 결혼할 것이냐는 애니의 질문에 '아니'라고 솔직하게 대답한 것이었으며 그 봉합은 질투심 유발 작전에 동정심 유발 연극 등 능구렁이 같은 구라였다. 마지막에 이르러 데이빗은 주정뱅이를 연기하고 애니는 도망칠 수 있는 상황에서 도망치려는 연기를 하지만 이 모두 상호 이해와 합의 하의 게임이었으며 이로써 사랑은 다시 결실을 맺는다.

 여기에서 데이빗에 반대되는 인물, 그러니까 애니를 흠모하던 데이빗의 친구 제프와의 비교가 중요하다. 제프는 '착한 남자'의 대명사라고 해도 좋을 인격자로, 가능한 모든 것을 애니에게 맞추며 헌신한다. 비가 오면 코트를 벗어주고 자신이 감기에 걸렸으니 작별의 키스를 해줄 수 없다는 배려와 애니가 데이빗에게 마음이 기우는 모습을 보아도 자신이 바라는 것은 애니의 행복일 뿐이라며 기꺼이 이별을 받아들이겠다는 대인배적 풍모를 풍긴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배역의 인물은 로맨스코미디에서는 주인공의 관계를 응원해주는 멋진 친구, 이상 이하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만 증명하고 사라진다.


 [Mr. & Mrs. Smith]가 시사하는 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한다는 것이 과연 애정의 문제에 있어 진실하냐는 질문이다. 애정의 문제는 수학답안지가 아니다. 옳고 그름, 정답과 오답을 결정해서 보여주는 것은 회사 보고서에서나 요구하는 영역이다. 애정의 문제는 자신이 상대방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를 증명하는 문제이고, 여기서 정직하게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증명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애정은 객관식이 아닌 주관식 문제다. 척하니 답만 적어낼 것이 아니라 그 답을 증명해내는 실천과 풀이과정을 요구로 하는 것이다. 목적이 아닌 과정이 목적이다.

 예를 들어보자. 외계인의 침략으로 지구가 무한히 증식하는 버섯에 둘러싸여 인류 존폐의 위기에 처한 상황을 가정하고, 이 미증유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당신이 당신의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외계인이 조건을 제시했다고 해보자. 이 황당한 시츄에이션에서 인류는 당신이 연인에게 프로포즈를 하길 강요할 것이고 당신 역시 도덕적 책임감에 의해 세레나데를 준비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런 상황에서 당신이 당신의 연인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하면, 당신의 연인은 그 고백에서 당신의 진정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의심없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진실은 언제나 실수에서 발견된다. 아니, 솔직한 고백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연인에게 당당히 사랑을 고백해서 즐거이 연애하는 커플 많이 봤다. 실패했다고 해서 그 마음이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언제나 사람의 마음은 어떤 우연에서, 어떤 계획되지 않은 사건에서 크게 흔들리기 마련이라 말하고 싶을 뿐이다. 즉 사랑에 대한 가장 진실한 고백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기만과 의심 속에서 (정확히는 그 실패 끝에서) 발견되는 흔적에서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Mr. & Mrs. Smith]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거짓말이야말로 어떤 밀어보다도 완벽하게 스스로의 애정을 증명하지 않던가.

 시사하는 점 두번째는 바로 착한 남자가 과연 착한 남자냐는 질문이다. [Mr. & Mrs. Smith]에서 제프는 흠잡을 곳 없는 인격자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그는 언제나 애니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착한 남자가 과연 착한 남자냐는 질문을 던졌다고 해서 제프라는 인물을 허풍섞인 선의로 가장한 위선적인 인물로 착각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제프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냥하고 진실되게 행동한다는 점만은 보증한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 두번째 질문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아주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여성을 숭배하고 그 모든 것을 따르는 것이 과연 대등한 관계일 수 있을까? 설마. 인간을 숭상하는 것은 인간을 처분하는 것만큼이나 타자화하는 것이다. 신으로 만드는 것이나 악마로 모는 것이나 인간 취급하지 않긴 매한가지다. 숭고한 존재로 이상화하면서 그 대상이 된 여성은 박제되어 어떤 욕망도 용납되지 못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렇게 상대방의 관심사는 관심도 없이 자신이 상대방을 숭상하고 있다는 사실에 도취되어 스스로를 착한 남자로 착각하는 경우다. 동시에 이렇게 희생하지 않는 자신과 다른 모든 남자들을 나쁜 남자로 몰고 가면서.

 물론 어떤 이미지로서의 '나쁜 남자'의 판타지야 존재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검은 가죽자켓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차도남을 연출하는 남자가 어디 100명 중 1명이라도 있나.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내가 이만큼 양보하고 위해줬으니 나는 당신을 사랑하며 나만이 진실하며 나머지는 나쁘다는 것은 그렇게 바른 일로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을 무조건 떠받드는 것은 상대방이 화내는 모습을 보기 싫고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두려워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피하는 셈이다. [Mr. & Mrs. Smith]이 가리키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사람은 살면서 거짓말도 하고 싸움도 한다. 이것은 인생의 일탈이나 왜곡이 아니라 필연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나는 히치콕과 브란젤리나 중 히치콕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물론 입양은 브란젤리나에게 갈 거지만.


 혹시나 싶어 덧붙이자면, 진짜 착한 남자들은 걱정하지 말라. 진짜 착하면 연애 잘한다. 대신 얼마나 착해야 하냐면 그냥 문 열어주고 의자 당겨주고 이런 착함이 아니라, 주변에서 보기에 '저 사람은 진짜 저렇게 살다가 손해만 보고 너무 남만 살펴서 짜증날 정도야'라고 여길 정도로 착하면 된다. 그리고 내가 위에 제시한 자신말고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나쁜 남자로 몰며 자신은 착한 남자로 착각하는 남자가 어디있냐고 따지지도 말아주길 바란다. 이거 다 내 얘기다. 내가 연애 못하는 이유 박사논문 700p로 쓰는 거 여기에 간단히 미리 개요만 잡아둔 거다. 그것도 이거 아직 1장이다. 8장까지 있는데 다 쓰면 너무 오래 걸려서 이쯤만 쓴 거다. 이 세상 많은 착한 남자들의 건승을 빈다. 비록 당신들이 진짜 착한 남자는 아니더라도 사랑과 행복은 또 별개의 문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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